20220628 주님 계신 곳을 향하여 (시편 84편 1-12절)

 

 

         모든 사람에게는 하루가 스물 네 시간 똑같이 주어집니다. 부자라고 해서 스물 다섯시간이 주어지는 것도 아니고, 가난한 자라고 해서 스물 두 시간이 주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모두가 다 똑같이 24시간 7일을 살아갑니다. 물론 똑같은 스물 네 시간이 주어졌다고 하더라도, 부자가 가난한 자보다는 시간적으로 더 많은 여유가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시간이 아무리 많이 주어졌다고 해서, 그가 반드시 행복한 인생을 사는 것은 아닙니다. 남들보다 많은 시간적 여유를 가졌으나 불행하게 사는 사람도 수두룩합니다. 반대로 남들보다 시간적 여유가 적고 늘 일에 치이며 살지만 그 가운데 행복을 발견하고 사는 사람도 많이 있습니다. 시간적 여유가 행복을 보장하지는 않습니다. 그렇다면 행복과 불행을 결정하는 요소는 어디에 있을까요? 한 사람의 인생의 질이 결정되는 것은 ‘그 시간을 어떻게 채우며 살아가느냐?’에 있습니다. 돈도 시간도 많은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많은 돈과 시간을 가지고 카지노에 가서 매일 도박하며 삽니다. 과연 그 사람이 정말 행복한 사람일까요? 반대로 돈도 시간도 부족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없는 시간을 쪼개고 없는 돈을 모아서 자신보다 더 힘들고 어려운 이웃들을 돕고 살아갑니다. 참 보람되고 복된 사람 아니겠습니까? 인생의 행복은 시간과 돈의 많고 적음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주어진 환경에서 그것을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과 돈을 에너지와 물질, 건강을 가지고 무엇을 위해서 살아야 할까요?

오늘 본문에 나오는 시인의 고백에서 그 실마리를 함께 찾아봅시다. 오늘 시편에 나오는 시인의 삶은 한 가지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을 붙들고 하나님을 의지하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유는 분명하게 알 수는 없지만 시인은 지금 육체적으로 물리적으로 하나님께서 계신 성전에 방문할 수 없는 상황에 놓여 있습니다. 전쟁 중이라 먼 곳에 파병 되어서인지, 아니면 연약한 육체로 인해 병상에 누워 있어서 갈 수 없는 것인지 왜 그가 성전을 방문할 수 없는지 우리가 그 이유는 알 수 없습니다만, 시인은 그 무엇보다 여호와 하나님의 궁정에 머물기를 사모하고 있습니다. 물론 하나님은 영이시기에 꼭 교회나 성전이 아니더라도, 내가 있는 그 어디에서라도 하나님을 만날 수 있고 하나님께 예배할 수 있습니다. 시인도 이러한 사실을 모르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시인은 하나님의 이름이 머물러 있고, 하나님께 제사드리는 제단이 놓여 있는 성전에 머물고 싶어하는 간절한 마음이 있었습니다.

우리들도 이러한 마음을 모르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병원에서도 예배 드릴 수 있습니다. 파견나간 타지에서도 얼마든지 예배 드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성전에 나와서 주님을 예배하는 것보다 더욱 우리 마음에 깊은 은혜와 평강을 주는 것과 어찌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 시인은 그 무엇보다 하나님의 집에 거하며 그곳에 계신 하나님을 바라보며 예배하기를 간절히 소원하고 있습니다.

이 시인의 삶의 방향성을 한 번 살펴보십시오. 10절 말씀을 보시면, 그는 악인의 장막에서 사는 것보다 차라리 하나님 집의 문지기로 사는 것이 더 좋다고 말했습니다. 하나님 없이 세상이 약속하는 부귀영화를 누리며 사는 것보다, 차라리 부귀영화 다 버리고 남들에게 무시 받는 가난하고 천한 삶을 살아도 하나님과 함께하는 삶을 살아가는 편이 더 좋다고 고백한 것입니다. 세상의 금은보화를 다 준다 하여도 하나님과 바꾸지 않겠다는 다짐이 우리에게 있습니까? 시인에게는 그런 마음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에 하나님보다 더 좋은 분은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함께하는 삶보다 더 행복한 삶은 없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시인이 발견한 신앙의 비밀이고 행복의 열쇠였습니다. 저는 우리 사랑하는 코너스톤장로교회 모든 성도님들이 이 비밀을 발견하기를 바랍니다.

“주님과 같이 내 마음 만지는 분은 없네! 오랜 세월 찾아 난 알았네, 내겐 주밖에 없네!” 시인은 하나님의 크심과 위대하심을 발견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분이신지 깨달았습니다. 그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그로 하여금 이 세상 그 무엇보다 하나님을 더욱 사모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렇다면 시인이 발견한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오늘 본문에 4번 반복되는 표현이 있습니다. 바로 ‘만군의 여호와’입니다. 1절, 3절, 8절, 12절에 반복됩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의 결말이 바로 12절 “만군의 여호와여 주께 의지하는 자는 복이 있나이다”입니다. 만군의 여호와라는 말에는 어떤 고백이 담겨 있을까요? 여기서 만군이란 ‘하늘의 수많은 천사들’을 의미합니다. 인간보다 뛰어난 영적 존재들이 천사들입니다. 성경을 보면 사람들은 천사들을 만났을 때 신비함과 두려움에 휩싸여 그들 앞에 엎드려 절했습니다. 천사 하나가 온 나라 군대를 이기고, 민족의 운명을 바꿀만큼 강합니다. 그런 천사들을 종으로 두시고 자기 수족처럼 다스리시는 분이 바로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얼마나 크고 위대하신 분이시겠습니까? 이 위대하신 하나님을 찬양하고 주님을 의지하는 자가 가장 행복한 삶을 살게 됩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 하나님이 주님을 찬양하는 자에게 복을 주시고, 그를 의지하는 자에게 힘이 되시며, 그에게 기도하는 자들의 부르짖음을 들어 주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말하는 ‘복’은 행복입니다.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찾는 행복이 누구에게 주어집니까? 만군의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가 복이 있습니다. 그러니 시인이 이 행복의 근원 되시는 하나님과 함께 살아가기를 간절히 사모하는 것은 당연한 것 아니겠습니까? 12절에서 시인이 “여호와를 의지하다”라고 했을 때 사용한 “의지하다”라는 말은 “의심하지 않는다”, “확신으로 가득 차 있다”는 뜻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우리를 도와주실 것을 의심하지 않는 사람, 여호와께서 우리와 함께하시면 이 모든 고통도 고난도 반드시 승리하게 하실 것이라고 확신으로 가득 차 있는 사람. 그와 같이 여호와 한 분 만을 붙들고 의지하며 살아가는 자가 복된 사람, 행복한 사람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행복한 삶을 살아가는 비결은 무엇입니까? 만군의 여호와께서 우리 삶을 가장 좋은 길로 이끄시고, 고난 중에도 도와주시고, 우리의 필요를 풍성하게 채워 주실 것을 의심하지 않고, 믿음으로 확신하며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이와 같이 주님을 향한 믿음이 날마다 굳건하여 짐으로 말미암아 점입가경, 살아갈수록 행복이 더하여 지는 복된 삶을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