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112 영과 진리 안에서 예배할 때 (요한복음 4장 15-26절)


유다와 사마리아 지방 사이에는 오랫동안 뿌리 깊은 반목이 형성되어 있었습니다. 그런 관계로 유대인들은 통상 사마리아를 거치지 않고 우회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의도적으로 사마리아 땅에 들리셨습니다. 사마리아 성(城) 우물가에서 예수님은 사마리아 여인을 만나셨습니다. 그 여인은 다섯 번이나 이혼하고 여섯 번째 남자와 동거하고 있는 기구한 삶을 살아온 사람이었습니다. 그녀는 동네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무더운 정오에 우물에서 물을 뜨기 위해 찾아왔습니다. 이 여인이 살아온 지난 과거로 미루어 보아 그녀는 동네 사람들에게 손가락질 받고 살았을 것입니다. 마을 공동체로부터 철저하게 소외당하고 살아온 이 여인을 만나기 위하여 예수님은 사마리아 성을 찾아오셨습니다.
우물가에 앉아서 쉬고 있던 예수님은 물을 길러 온 사마리아 여인을 보고서 물을 좀 달라고 하셨습니다. 여인은 오늘 처음 본 낯선 유대인인 예수님의 요구에 경계심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사마리아 여인은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인 나에게 물을 달라하나이까?”(9절)하고 예수님께 여쭈었습니다. 여인의 물음을 받으신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았으면 그런 질문을 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생수를 구했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으로부터 의외의 답변을 들은 여인은 곧장 예수님을 시험했습니다. 그녀는 질문을 통하여 야곱과 예수를 비교했습니다. “당신이 우리 조상 야곱보다 위대합니까?” 예수님께서는 야곱이 파 놓은 우물에서 나오는 물은 다시 목마르지만, 자신이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한 번 마시면 다시 목마르지 아니하는 생명의 물! 정말 그런 물이 있다면 얼마나 사모할 만합니까? 게다가 이 여인은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 무더운 정오에 남몰래 정체를 숨겨가며 우물에서 물을 퍼 나르는 삶에 싫증나 있었을 것입니다. 사마리아 여인은 예수님께 자신에게도 그 특별할 물을 좀 달라고 부탁하였습니다. 그녀는 예수님께서 이 특별한 물을 주셔서 그녀가 다시는 우물가에 물 길으러 오지 않게 해달라고 요청하였습니다. 사마리아 여인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생수’의 진정한 의미를 깨닫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이 때 예수님은 이 여인의 진정한 목마름을 나타내기 위하여 그녀의 남편을 불러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여인이 대답합니다. “저는 남편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오늘 이 사마리아 여인을 처음 만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미 이 여인의 지난 날 모든 행적을 이미 다 알고 계셨습니다. “네가 남편이 없다고 한 말이 맞다. 실은 전에 네게 남편이 다섯이나 있었고 지금 함께 사는 남자도 네 남편이 아니니 네가 지금 한 말이 맞구나.” 여인은 지금까지 다섯 남편을 거쳐 왔습니다. 지금 같이 사는 남자도 남편이 아닙니다. 그러니 남편을 데려올 수가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사실을 다 아시면서도 이 여인에게 “남편을 데리고 오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왜 예수님은 여섯 번째 남자와 동거하고 있는 사마리아 여인에게 ‘남편’을 데리고 오라고 말씀하셨을까요? 먼저 그녀의 모든 과거를 다 알고 계심을 통하여 예수님께서 메시아 되심을 나타내고 계십니다. 둘째로 그녀가 평생 감추고 살아가려고 하는 숨은 고통과 문제를 드러내심으로써 마음의 수면 아래 감춰진 문제의 핵심을 밖으로 드러내어 그녀의 구원하시려는 의도였습니다. 사마리아 여인에게 있어서 자신이 생각할 때 가장 큰 문제는 남자 문제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녀에게 가장 먼저 회복되어야 하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이라는 것을 가르쳐 주고 계십니다. 하나님과의 진정한 관계 회복이 있기 전에는 인생의 목마름의 문제들을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을 주님은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4장의 사마리아 여인 이야기가 쉬운 것 같으면서도 막상 읽어보면 글의 흐름이 중간중간 끊어지는 듯한 인상을 받습니다. 왜냐하면 사실 이 사마리아 여인이 대화의 주제를 자꾸 바꾸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지금까지 사미라아 여인과 ‘남편’ 이야기를 하고 계셨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사마리아 여인이 주제를 ‘남편’에서 ‘예배’로 바꾸어 버립니다. 우리는 그녀가 화제를 성전과 예배로 순식간에 바꾸어 버리는 것을 통하여 사마리아 여인이 남편 이야기를 하는 것을 거리끼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 부분은 이 여인이 말하고 싶지 않은, 감추고 싶은 수치였습니다. 또 다른 가능성은 이 여인이 자신의 과거를 다 알아 맞춘 예수님이 평범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 이후, 평상시 궁금했 왔던 (그러나 아무도 해결해주지 못했던) 예배에 대한 질문에 대하여 문맥과 상관 없이 이야기했을 것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사마리아 여인은 예수님께 예배 드리는 ‘장소’에 관한 질문을 물어보았습니다. 당시에 유대인들과 사마리아 사람들 사이에서는 예배의 장소를 놓고 격전이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에서 예배를 드려야 한다고 주장했고, 사마리아 사람들은 그리심 산에서 예배를 드려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사마리아 여인은 이 둘 중 누구 말이 맞는 것인지, 유대인의 말들처럼 예루살렘 성전에서 예배를 드려야 하는 것인지, 아니면 사마리아 사람들의 주장대로 다른 곳에서 예배를 드려야 하는 것인지 예수님께 여쭈어 보았습니다. 이에 대하여 예수님은 예배의 중요 요소를 장소가 아닌 예배의 대상으로 옮겨 놓으십니다. 사람들은 예배를 예루살렘에서 드리느냐 아니면 그리심 산에서 드리느냐가 쟁점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영’이심을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영이시기에 어느 곳에든지 계십니다. 영이신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참되게 예배하는 자를 찾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사람이 어느 곳에서 예배를 드리든지, 영이신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는 ‘영’과 ‘진리’로 드려진 예배여야 한다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여기서 ‘영’은 성령을 의미하고 ‘진리’는 말씀을 의미합니다. 예배는 우리가 성령 안에서 진리이신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함으로써, 하나님의 성품이 드러나는 것 즉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참 예배입니다.
사마리아의 한 여인에게 예수는 영생수와 참 예배에 대한 교훈을 베푸셨습니다. 그 여인은 다섯 남편을 거친 만큼 평판이 좋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예수의 가르침을 받고서 곧바로 동네로 뛰어들어가 예수의 그리스도 되심을 증거했습니다. 그녀는 메시야의 소망을 믿었으며 유대인들보다 더 영적인 깊이를 갖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의인을 부르러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온 것입니다. 우리는 사마리아 여인처럼 예수를 만난 기쁨을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 기쁨으로 증거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수가 성 여인의 문제가 무엇인지 정확히 알고 계셨습니다. 그녀의 결혼 생활(16-18절)의 실패, 그로 인한 상실감을 정확하게 꿰뚫어 보셨습니다. 예수께서는 세속적 욕망으로 채워질 수 없었던 여인의 내면을 훤히 들여다보고 계셨습니다(15절). 이렇듯 여인의 사정을 총체적으로 인식, 이해하고 계셨기에 예수께서는 그녀에게 ‘생수’ 곧 성령으로 말미암은 구원을 주실 수 있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여인이 먼저 자신의 영적 목마름과 죄를 고백한 것이 아니고 예수께서 먼저 그것을 지적하셨다는 사실입니다. 이는 구원이 인간에게서 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를 찾아오심으로써만 가능함을 시사해 줍니다. 이와 비슷한 맥락에서 요한일서 4:10은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께서는 우리의 필요와 소욕을 다 알고 계십니다. 특히 성도의 영적인 갈등을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사마리아 여인처럼 진솔한 태도로 주님 앞에 설 때 성도는 이 세상에서의 만족은 물론이거니와 영혼의 충만한 희락과 자족을 만끽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