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111 예수님이 주시는 생수 (요한복음 4장1-14절)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들을 혐오했고, 그들과 상종도 안 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사마리아 사람들을 노골적으로 무시하고 부정하게 여겼고, 사마리아 사람들을 매우 싫어 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사마리아 사람들을 혐오했기에 남쪽 유대 지방에서 북쪽 갈릴리 지방으로 갈 때 가장 가까운 직선 거리인 사마리아를 통과하기 보다는 요단강 동쪽 지역으로 우회하여 돌아갔던 것입니다.
이런 배경을 가지고 오늘 본문을 보면 예수님의 행적은 아주 독특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본문 요한복음 4장 3-4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요 4:3) 유대를 떠나사 다시 갈릴리로 가실새 (요 4:4) 사마리아로 통행하여야 하겠는지라” 예수님은 유대인이십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당시 대부분의 유대인들이 가려고 하지 않았던 그 길을 걸어가셨습니다. 예수님은 갈릴리로 가는 중 사마리아로 들어가셨습니다. 우리는 대수롭지 않게 요한복음 4장 4절을 읽지만, 여기에서 저자는 예수님의 행적이 매우 특별하다는 것을 독자들에게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아무도 가지 않으려 했던 도시 사마리아, 아무도 상종하려고 하지 않았던 사마리아 사람들… 예수님은 바로 그 도시 그 사람들을 만나러 가고 계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마리아에 있는 ‘수가’라 이름하는 한 동네에 들어가셨습니다. 이 동네에는 우물이 하나 있었고, 이 우물은 이삭의 아들이었던 야곱이 소유했던 유서 깊은 우물이었습니다. 먼 여정을 가시던 예수님은 피곤함을 느끼셨고, 그대로 우물 곁에 앉으셨습니다.
6절 후반절을 보시면 예수님께서 우물 곁에 앉으신 때의 시간이 여섯 시 즈음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성경의 시간을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시간으로 환산하기 위해서는 성경에 기록된 시간에 6을 더하면 됩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우물 곁에 앉으신 시간은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24시간 개념으로 볼 때 낮 12시입니다. 즉 하루 중 해가 가장 높이 떠 있는 뜨거운 정오에 예수님께서 우물 곁에 앉아 계십니다.
이스라엘은 중동 지역으로 매우 더운 나라입니다. 해가 중천에 떠 있을 때는 말 그대로 살인적인 더위로 인해 건물 밖 길 거리에서 돌아다니는 사람들의 숫자가 급격히 줄어듭니다. 아직 뜨거운 태양이 다 뜨지 않은 이른 새벽이야 말로 물을 뜨기 가장 이상적인 시간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루 종일 사용할 물을 뜨기 위해 이른 아침 시간을 사용했습니다. 만일 새벽잠이 많은 사람이라면 어느 정도 해가 저물고, 땅거미 지고 나면 머리에 물항아리 짊어지고 밖을 나갈 것입니다. 어느 경우라 해도, 살인적으로 뜨거운 정오에 물을 뜨러 가진 않을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 낮 12시에 우물 곁에 앉으셨을 때 그곳에는 아무도 찾아오는 이가 없었습니다. 해가 가장 뜨거운 정오에 찾는 이 하나 없는, 한산한 우물가의 모습은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풍경이었습니다.
7절 말씀을 보니, 흥미롭게도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정오의 우물가, 그곳에서 잠시 쉬고 계신 예수님을 향해, 어느 한 사마리아 여인이 걸어오고 있었습니다. 본문을 기록한 요한은 아무도 오지 않는 정오의 시간에 물을 떠오는 이 여인의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이 여인에게 무언가 말 못할 사정이 있다는 것을 암시해 주고 있습니다. 이 여인은 사람들의 눈을 피하여, 인적이 뜸한 시간에 물을 뜨러 온 것이죠. 무슨 사연이 있길래 이 뜨거운 태양이 열기를 온 몸으로 맞아가며 이 시간에 물을 뜨러 왔을까요?
얼핏 보면 우물가에 물을 뜨러 온 평범한 여인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이 여인이 하루 중 가장 더운 시간에 물을 길으러 나왔다는 사실은 무언가 이 여인은 말 못할 사정이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써야 할 물이 다 떨어지고 급하게 물이 필요해서 나온 것이라면 어쩔 수 없겠지만, 아무도 안 나오는 시간에 이 여인이 우물가에 나온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이 여인은 다른 사람들을 만나고 싶지 않았습니다. 사람들하고 눈 마주치는 것도 싫고, 사람들이 있는 곳에 가는 것도 싫었습니다. 우물에 물 뜨러 가다가 동네 여자들 마주치는 것이 너무나도 불편했어요. 무슨 사정이 있길래 이 여인은 이렇게 사람들을 피하고 있는 것일까요? 후에 예수님과의 대화에서 보면 알 수 있지만, 예수님께서 이 여인에게 남편을 불러오라고 하시자 이 여인은 자신에게 남편이 없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러나 실상 이 여자는 이미 다섯 남자와 살림을 차린 경험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 모두 이 여자의 남편은 아니었습니다. 지금도 여섯 번째 남자와 함께 동거하고 있지만 그 역시 엄밀한 의미로 그녀의 남편은 아니었습니다.
오늘 날 우리가 사는 사회야 동네에서 이상한 소문이 나면 이사가면 그만입니다. 그러나 이 당시에는 농경 사회라 쉽게 주거지를 옮길 수 있는 여건이 결코 아닙니다. 그렇다면 한 동네에서 동거하는 남자가 여섯 번 바뀐 여자입니다. 동네에서 이 여자에 대한 소문이 좋게 났을까요? 안 좋게 났을까요? 이 여인에게는 남들이 우물가에 오지 않는 시간에 물을 길으러 올 수밖에 없는 숨은 사정이 있는 것이죠. 사람들을 피하고 싶었어요. 남모를 사연이 있는 사람이었어요.
평상시 같으면 아무도 우물가에 없는 시간인데 웬 처음 보는 낯선 남자가, 그것도 우리 동네 사람도 아닌 유대인이 우물 곁에 앉아 있는 것을 보고 이 사마리아 여인은 적잖게 당황해 했을 것입니다. “누구지? 뭐하는 사람인데 이 시간에 여기에 있는 거지?” 그러나 물은 떠가야 하기에 조금은 경계하는 태도로 여인은 우물가를 향해 걸어 왔습니다. 바로 그 때 예수님은 이 여인을 보시고 말씀 하셨습니다. “내게 마실 물 좀 주시오” 예수님의 제자들은 음식을 사기 위해 가까운 동네에 들어갔기 때문에 본문에서 제자들은 없고 지금 예수님은 이 여인과 단 둘이 대화하고 계셨습니다.
사마리아 여인은 깜짝 놀랐습니다. 그리고 말했습니다. “당신은 유대 남자고, 나는 사마리아 여자인데, 어떻게 나에게 마실 것을 달라고 할 수 있습니까?” 우리나라도 옛 말에 남녀 칠세 부동석이란 말이 있죠? 2천년 전 이스라엘 문화도 남자와 여자는 따로 앉아 지냈고, 말도 잘 섞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예수님은 단순히 남자일뿐만 아니라, 유대인 남자 입니다. 사마리아 사람들을 경멸하고 무시하고 혐오하는 유대인 출신의 그것도 남자가 오늘 처음 본 낯선 사마리아 여자에게 물을 달라 하니 이 여인은 황당해 하고 있는 것이죠. “내가 보니 당신은 유대인인 것 같은데 내가 사마리아 사람이란 것을 모르고 나에게 물을 달라고 하는 것입니까?” 본래 유대인과 사마리아는 서로 상대도 하지 않았기에 사마리아 여인은 자신에게 말을 걸어온 이 낯선 유대인 청년을 이상한 눈초리로 보며, 경계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죠. “이 사람 뭐지? 뭔데 나한태 물을 달라고 하는 거지?” 어쩌면 이 여자는 다소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당신이 뭔데 나한태 물을 달라 하는 거요?”하고 말했는지도 모르겠어요.
그러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10절 입니다. “(요 4:10)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 줄 알았더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 예수님의 이 말을 쉽게 바꾸어 보면 이와 같습니다. “네가 만일 지금 너에게 ‘물을 달라’ 요청하는 이 사람이 누구인지 알았더라면, 도리어 너가 나에게 물을 달라고 요청했을 것이고, 나는 너에게 생수를 주었을 것이다.” 우리는 흔히 우물하면 두레박이 연결되어 있는 우물을 생각합니다만 중동에서는 두레박도 자기가 가지고 와야 합니다. 그러니 사마리아 여인이 예수님을 볼 때, 우물에서 물을 떠올릴 두레박도 안 가지고 계신 분이 자기에게 생수를 준다고 한 말은 크게 신빙성 있게 다가오지 않았습니다.
11-12절 말씀을 읽겠습니다. “(요 4:11) 여자가 가로되 주여 물 길을 그릇도 없고 이 우물은 깊은데 어디서 이 생수를 얻겠삽나이까 (요 4:12) 우리 조상 야곱이 이 우물을 우리에게 주었고 또 여기서 자기와 자기 아들들과 짐승이 다 먹었으니 당신이 야곱보다 더 크니이까” 여자가 다시 한 번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예수님께 말했습니다. “선생님, 당신에게는 물 길을 두레박도 없고 이 우물은 깊은데 선생님께서는 어디에서 생수를 구한단 말입니까? 선생님이 우리 조상 야곱보다 더 크신 분이십니까? 야곱은 우리에게 이 우물을 주었고 그와 그의 아들들과 가축들도 다 여기에서 물을 마시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이 보다 더 좋은 물이 또 어디 있습니까?”
이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 13-14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요 4:13)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이 물을 먹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요 4:14)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사마리아 여인은 육체의 목마름을 해결하기 위하여 우물에 물을 뜨기 위해 찾아왔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육체적 목마름뿐 아니라 우리의 영적 갈증까지도 해결하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생수는 ‘예수님을 믿는 자들이 받을 성령’을 의미합니다. 성령을 받는 자는 하나님과 함께함으로 그의 삶에 ‘공허’와 ‘허무’가 사라지고 풍성한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세상이 주는 다른 물로는 인간의 갈증을 해갈할 수 없습니다. 세상이 제공하는 물은 바닷물과 같아서 마시면 마실수록 더욱 목마름이 심해질 뿐입니다. 오직 예수께서 주시는 생수 즉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자만이 진정한 해갈의 은혜를 누릴 수 있게 됩니다. 유일한 생수의 근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과 영생을 받고, 그로 인하여 풍성한 삶을 살아갈 수 있는 저와 여러분 되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