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1217 하나님 없이 혼란스러운 세상 (사사기 21장 13-25절)


베냐민 지파와 이스라엘 나머지 지파들 사이의 내전으로 인해 수만명의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베냐민 지파 사람들은 남자 육백명만 남기고 모두 학살을 당하게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내전으로 인하여 열 두 지파 중 하나인 베냐민 지파가 거의 사라질 이기에 처했음을 뒤늦게 깨닫게 됩니다. 하지만 이미 전쟁에 앞서 이스라엘 지파들은 자신들의 딸들을 베냐민 지파에게 주지 않겠노라고 하나님께 맹세를 했습니다. 따라서 베냐민 지파 남자 600명이 있으나 가족을 이어갈 수 없는 상황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렇다고 하나님의 율법을 어기고 이방 여인들을 아내로 삼게 할 수도 없습니다. 자신들의 성급한 맹세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 가운데 빠져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성급하게 하나님께 맹세하는 것을 주의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마음은 쉽게 변화할 수 있고, 인생의 상황들은 아무도 예측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오직 ‘예’라고 해야 할 것에는 ‘예’라고 대답하고, 반대로 ‘아니오’라고 대답해야 할 것에는 ‘아니오’라고 대답하면 될 뿐, 맹세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얼마나 성급했는지 그들은 베냐민 지파 사람들에게는 딸을 주지 않겠다고 맹세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어리석음을 잘 아시기에 만일 맹세가 성급한 마음에서 실수로 한 것이라면 속죄제를 드리고 돌이키는 방법이 있었습니다. 따라서, 이스라엘 백성들도 동족 베냐민 지파 사람에게 딸을 주지 않기로 한 약속이 어리석은 결정임을 인정하며 하나님께 속죄제를 드림으로써 이 서약을 파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동족이 진멸할 수 있는 위기 앞에서도 인애의 정신을 버리고 신앙의 자존심을 지키려고 했던 것 같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맹세가 어리석고 성급했음을 인정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자신들이 하나님께 맹세한 일로부터 저주받지 않기 위한 길을 모색합니다.
이런 가운데 이스라엘 지파들은 자신들이 전쟁에 앞서 미스바 총회에서 결의한 내용을 떠올렸습니다. 누구든지 이스라엘 총회에 참여하지 아니한 자는 반드시 죽이기로 결정한 맹세입니다. 이에 누가 총회에 참석하지 않았는가 조사해보니 ‘길르앗 야베스’ 주민들이 참여하지 않았습니다. 마침 베냐민 지파의 아내 될 사람들을 찾아야 했음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야베스 길르앗 사람들 주민들을 찾아가 주민들을 대부분 다 죽였습니다. 그리고 그 중 야베스 길르앗 처녀 400명은 지파가 끊어질 위기에 처해있는 베냐민 지파에게 주었습니다. 이처럼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의 어리석고 성급한 맹세를 지키기 위하여 동족 길르앗 사람들을 진멸해 버렸습니다. 베냐민 지파 사람들에게 딸을 주지 않겠다고 했던 맹세를 지켜야 한다는 신념과 명분을 위하여 무고한 사람들이 피를 흘리고 목숨을 잃어버렸습니다.
부모가 우리 아이에게 성탄절 선물로 자전거를 사주겠다고 약속을 했습니다. 그런데 연말이 되니까 돈 나갈 일이 많아서 자전거 사줄 여력이 없습니다. 그래서 그 부모가 옆 동네에서 사는 자기 자식 또래 만한 아이에게서 몰래 자전거를 훔쳐왔습니다. 이런 경우 약속을 지켰으니까 잘 한 것입니까? 아닙니다. 약속을 지키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싫어하시는 죄를 지어야 한다면, 약속을 지키지 않는 편이 훨씬 더 잘하는 것이겠죠. 거짓말을 하고 죄를 지으면서 까지 약속을 지켜야 한다면, 그 약속은 깨트려 버리는 것이 훨씬 더 지혜롭습니다.
베냐민 지파를 살려야 한다는 명목으로 야베스 길르앗의 생명을 빼앗고 짓밟는 모순입니다. 베냐민 남자들에게 아내를 주기 위한 목적으로 야베스 길르앗의 어린이와 부녀도 다 죽였습니다. 이스라엘은 자신들이 세워 놓은 신념과 명분을 지키기 위하여 또 다른 생명을 희생시키는 모순적인 죄를 지었습니다. 정의를 세워야 한다는 명분은 있었으나 인애는 하나도 없는 불의의 방법을 취하였습니다. 결국 이스라엘 백성들은 야베스 길르앗에서 잡아온 400명의 여인을 베냐민 지파의 아내로 주었습니다. 그러나 아직 2백명의 여인이 부족한 상황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어떠한 아이디어를 떠올립니까? 매년 여호와의 절기를 지키기 위하여 이스라엘 처녀들이 실로에 올라옵니다. 그 때 몰래 기다렸다가 베냐민 지파 사람들이 마음에 드는 아가씨를 납치해 가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되면 자신들이 자의적으로 딸을 준 것이 아니라 강제적으로 베냐민 지파 사람들이 여인을 택하여 데리고 간 것이 되기 때문에 딸을 그들에게 주지 않기로 하나님께 약속했던 자신들의 양심을 지킬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택한 방식이 얼마나 어리석고 미련하며, 하나님께서 싫어하실 만한 방법입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은 베냐민 지파의 대를 잇기 위하여 아무런 잘못이 없는 처녀 2백명을 납치해 가도록 허락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베냐민 지파는 무고한 여인들을 납치해 갔습니다. 그런 다음 어떻게 합니까? 24절을 보십시오. 이들 모두 아무런 일도 없었던 것처럼 각기 자기의 지파, 자기의 가족에게로 돌아갔습니다. 왜 이처럼 이스라엘 지파가 일을 처리하는 모습이 하나님께서 싫어할 만한 모습으로 가득한 것일까요? 25절에 그 해답이 있습니다. “(21:25)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각 그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 사사 시대의 잔혹한 모습은 모두 다 사람들이 왕 되신 하나님의 뜻을 다르지 아니하고 각자 자신이 옳다고 생각한대로 행동한 결과였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위해 모임을 열었다. 그러나 그들이 선택하는 일들은 하나님께서 싫어하실 만한 요소들로 가득 넘쳤다. 우리 역시 이스라엘 백성들의 어리석음에 빠질 수 있음을 주의해야 한다. 그리스도인들 역시 마음에 하나님을 왕으로 모시고 살아가지 아니하면, 결국 자신의 마음이 원하는 길로 기울 수밖에 없다. 유치원 어린 아이가 엄마를 기쁘게 해주고 싶었다. 없는 솜씨지만 엄마를 위해서 크레파스로 새로 이사간 집 벽에 큼직하게 아빠 엄마를 그렸다. 과연 엄마가 좋아할까? 결코 아닐 것이다. 내 마음에 볼 때 좋은 것이 옳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 보실 때 기쁘신 것이 옳은 것이다.
인간이 하나님의 뜻을 버리고 자신의 뜻과 생각에 옳은 대로 행동한다면 그것은 결국 다툼과 전쟁 그리고 도덕적 타락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인류의 역사는 언제나 그와 같은 모습으로 기록되어 왔습니다. 인간의 탐욕을 채우기 위한 전쟁은 끝이 없었고, 남을 위한 태도보다 자신의 욕심을 이루고자 하는 이기심 때문에 분열과 다툼은 끝이 없었습니다. 이스라엘이 결국 한 동족끼리 내전으로 이어지게 된 것도 바로 왕이신 하나님을 버리고 각자 그들의 탐심을 따라 살았기 때문에 일어난 결과였습니다.
사사기 19-21장에서 희생된 사람들은 모두 다 사회적 약자인 여성이었습니다. 레위 사람의 첩은 기브아 불량배들에게는 성폭행을 당했습니다. 그녀는 죽은 이후에도 남편 레위인에게 그 주검이 조각났습니다. 이스라엘 지파와 베냐민 지파와의 전쟁으로 인해 벌어진 일을 수습하기 위해서 야베스 길르앗 여인들은 베냐민 지파 남자들과 강제 결혼을 해야 했고, 실로에 올라가 여호와의 명절을 축하하던 여자들도 베냐민 사람들에게 납치당해 강제로 붙잡혀 갔습니다. 이처럼 세상이 하나님의 뜻을 버리고 각자 자신이 같은 옳은 생각과 뜻대로 살아가려고 하면, 결국 세상에는 힘과 지위가 없는 약자들이 가장 큰 고통과 피해를 보게 됩니다. 강자들이 자신의 탐심을 위해 약자들을 괴롭힘으로 말미암아 힘없고 연약한 이들이 고통 하며 신음하는 세상은 하나님께서 싫어하시는 불의하고 불공정한 세상입니다. 사사 시대가 바로 그러한 시대였습니다.
그러나 반대로 하나님께서 다스리시는 나라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고아와 과부, 나그네와 이방인과 같은 사회적인 약자들이 공동체의 섬김과 돌봄을 받으며 살아가는 세상입니다. 자신의 삶만 챙기는 것이 아니라 주변 이웃들을 돌아보는 사랑과 나눔이 있는 삶이야말로 그리스도인들이 지향해야 할 모습입니다. 그리고 이와 같은 이웃을 향한 사랑의 원동력은 바로 나를 사랑하신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에서부터 오는 것입니다.
사사 시대는 결국 하나님을 왕의 자리에서 몰아낸 사람들이 얼마나 비극적인 삶을 살았는가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 책입니다. 자신의 탐심과 탐욕을 위해 살아가는 것은 결국 인간관계를 파괴시키며 분열과 다툼만을 일으킵니다. 그러나 우리가 서로 하나님을 우리 삶 가운데 왕의 자리에 모셔 두고, 주님만을 위해 살아갈 때, 우리는 나 자신만을 위한 삶이 아니라 이웃들과 함께 사랑을 나누며 함께 살아가는 주님의 아름다운 공동체를 이곳에 이룰 수 있게 될 것입니다.
터키에 사는 꿀을 생산하는 한 양봉업자(이브라임 세데프)가 있습니다. 그는 지난 수 년간 곰들이 그가 생산한 꿀을 훔쳐 먹기 위해 오는 것을 막기 위해 많은 시간과 힘을 드려야 했습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그는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곰들은 항상 최고급, 최고가의 꿀을 즐긴다는 것입니다. 곰들을 유혹하기 위해서 사과도 사용해보고 다른 유인용 과일들도 사용해 봤습니다. 그런데도 곰은 항상 최고급 꿀을 향해서 직진해 옵니다. 그래서 ‘이게 진짜 곰이 최고급 꿀인 것을 알고 오는 건가?’ 하고 궁금해서 하루는 시험을 해봤습니다. 그릇을 네 개를 준비하고, 각각 품질이 다른 꿀을 세 종류 넣었습니다. 그리고 나머지 한 그릇에는 체리로 만든 잼을 담아 두었습니다. 그 중 최고급 꿀은 가장 비싼 꿀이라고 불려지는 Anzer 꿀인데, 터키의 Anzer 고원에서 자라나는 90 종류의 꽃에서 벌들이 모아온 꿀입니다. 그런데 신기하게 곰이 다른 꿀 쪽으로는 안 가고 바로 이 최고급 Anzer 꿀이 담긴 그릇으로 직진해 갑니다. 곰은 가장 최고급 꿀을 먹기까지 그를 유혹하기 위해 양봉업자가 설치해 둔 유인용 간식들은 먹지도 않았습니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이 이 세상에서 가장 좋은 분임을 진심으로 깨닫는다면, 세상의 달콤한 유혹들을 모두 뿌리치고 하나님께로만 직진으로 달려 갈 것입니다. 하나님을 찾지 않는 이 세상 사람들은 달콤함을 약속하는 수없이 많은 죄악으로 자신의 삶을 채우느라 지금도 혼란스럽습니다. 우리는 무엇을 향해 달려가고 있습니까? 우리를 위하여 자신의 목숨을 내어 주신 예수 그리스도, 그와 같은 분을 우리 왕으로 모시고 살아가는 것보다 더 큰 영광이 어디 있겠습니까? 지금도 수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탐욕을 위해 살아가는 또 하나의 영적 사사 시대입니다. 그러나 우리들만은 세상의 주류를 벗어나 오직 왕 되신 하나님을 위해 살아갈 수 있는 거룩한 그리스도인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