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1210 하나님 없이 참혹한 세상 (사사기 19장 22-30절)

 

베들레헴에 있는 장인의 집을 떠난 레위인과 그의 일행은 ‘여부스’라는 이름의 도시 맞은편에 도착하게 됩니다. 여부스는 예루살렘의 옛 이름입니다. 다윗이 이 성을 정복하기 전 가나안 사람들이 살 때 이름이 ‘여부스’였습니다. 레위인이 여부스에 도착할 즈음에 날이 저물려고 하였습니다. 이에 레위인의 종이 그에게 더 늦기 전에 여부스에 들어가서 머물자고 제안했습니다. 그러나 레위인은 이방인의 성읍에서 머물 수 없다고 말하며 이스라엘 백성들이 사는 기브아까지 가기로 결정합니다. 기브아는 베냐민 자손의 땅입니다. 이방인의 성읍에서는 나그네로서 대접받기가 어렵고, 게다가 잘못하면 해를 당할지도 모르기 때문에 여부스가 아니라 기브아에 머물기로 결정한 것이죠. 해가 저물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레위인의 일행은 힘든 여정을 강행하여 기브아로 발길을 돌리게 됩니다. 기브아에 도착한 레위인 일행은 넓은 거리에 앉아 있었습니다.

실망스럽게도 기브아 사람들 가운데는 나그네인 레위인을 자기 집으로 데리고 가려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습니다. 앞서 레위인은 이런 냉대를 당할 것이 싫어서 이방인의 성읍인 여부스를 피해 피곤한 발걸음을 옮겨 왔습니다만, 안타깝게도 동족 이스라엘 사람들이 살고 있는 기브아 성읍에서는 그 누구도 그를 환대해 주지 않았습니다. 레위인 일행은 지금 ‘성읍 넓은 거리’에 앉아 있었습니다. 이곳은 성문 근처 광장으로 기브아 주민들의 사회적, 경제적, 종교적 활동이 일어나는 활기찬 장소입니다. 사람들이 가장 많이 들락거리는 장소이죠. 해가 지고 있는 시간이기 때문에 분명 일을 마치고 돌아오는 주민들 혹은 다른 볼일을 끝내고 이 거리를 지나치는 사람들이 상당히 많았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어느 누구도 이 낯선 레위인을 자기 집으로 데려가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긴 여정으로 몸과 마음이 지친 레위인은 몹시도 실망하였을 것입니다. 기브아 사람들이 이처럼 나그네를 무시하고 냉대하는 것은 율법의 가르침과 정면으로 위배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나그네에게 식사와 숙소를 제공하는 풍습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기브아 사람들이 나그네에 대한 환대를 거부한 것은 그들이 얼마나 하나님 말씀과 상관없이 이기적으로 살아갔는지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바로 이 때 한 노인이 저녁이 되어 밭에서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고 있었습니다. 노인은 성읍 넓은 거리에 앉아 있는 레위인 무리를 발견하고는 그를 자기 집으로 데리고 가려고 했습니다. 기브아 주민 모두가 레위인에게 냉대를 베풀 때, 오직 이 노인 한 사람만큼은 레위인에게 환대를 베풀어 주었습니다. 나이가 많음에도 불구하고 노인이 해가 질 때까지 밖에서 일을 하다가 돌아오는 길에 레위인을 만난 것으로 미루어 보아 아마도 노인도 사정이 넉넉한 형편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나그네를 환대하는 일에 그는 최선을 다했습니다. 노인은 레위인의 일행이 하룻밤 머물며 사용하는 모든 것을 담당했습니다.

예로부터 우리 하나님의 백성은 나그네를 대접하고 형제를 사랑하는 일에 최선을 다해왔습니다. 성읍 넓은 거리에 앉아 있는 레위인을 무시하고 냉대했던 기브아 사람들처럼 지금도 이웃의 어려움을 거들떠보지도 않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세상은 차갑고 사랑이 없는 시대입니다. 그러나 우리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은 다르게 살아야 합니다. 어려운 이웃들을 대접하고 사랑하고 극진한 사랑을 베풀고 살아가야 합니다. 냉대의 시대 속에서도 사랑의 환대를 통하여 하나님의 사랑을 이웃들과 나누며 살아가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야 합니다.

이렇게 되어 기브아에 도착한 레위인은 이름 모를 한 노인의 환대로 인하여 그의 집에서 하룻밤을 머물게 됩니다. 피곤한 몸을 씻고 맛있는 식사를 하며 기분 좋은 대화가 무르 익어 가는 도중 갑자기 기브아 성읍의 불량배들이 찾아왔습니다. 벌써 노인의 집을 에워싼 불량배들은 격렬하게 문을 두드렸습니다. 한창 좋았던 분위기가 불량배들의 등장으로 느닷없이 파국으로 치닫게 됩니다. 성읍의 불량배들은 노인에게 그의 집에 들어온 남자를 끌어내라고 요구했습니다. 22절을 보면 그들이 이렇게 말합니다. “네 집에 들어온 사람을 끌어내라 우리가 그와 상관하리라” 개역개정 성경을 보면 ‘상관’이란 단어가 ‘관계’라는 단어로 변경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그들이 노인의 집에 묵고 있는 레위인 남자와 성관계를 하겠다는 뜻입니다. 오늘 사사기 본문은 가나안 땅에 정착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얼마나 영적으로 타락했는지 명확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오늘 장면과 아주 유사한 사건이 창세기 19장에 나옵니다. 창세기 19장을 보면 아브라함의 조카 롯에 대한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소돔과 고모라 성에 살고 있던 그에게 천사가 나그네의 모습으로 찾아옵니다. 롯은 그가 천사인줄도 모르고 나그네를 영접하였고, 천사들을 위하여 음식을 차려주었습니다. 그 밤에 소돔 백성들이 롯의 집에 찾아와 나그네로 변장한 천사들을 욕보이려고 했습니다. 그 때도 소돔 동네 사람들은 롯에게 나그네를 끌어내라고 협박했습니다. 그러자 롯은 아직 결혼하지 아니한 자신의 두 딸을 줄 터이니 제발 이 나그네들은 건들지 말아달라고 간청합니다. 롯의 요청에도 불구하고 소돔 사람들은 다짜고짜 롯의 집에 쳐들어오려고 했고, 이에 나그네로 변장한 천사들은 소돔 사람들의 두 눈을 어둡게 만들어 버렸습니다. 이처럼 죄악으로 물들어 버린 소돔과 고모라는 하나님의 심판으로 인해 하늘에서 비처럼 내린 유황과 불로 인하여 도시 전체가 멸망하게 됩니다.

오늘 본문 속 베냐민 지파의 도시인 기브아의 모습은 창세기 19장에 나오는 소돔과 고모라의 모습과 거의 유사합니다. 동네 건달들은 레위인을 성폭행하기 위하여 그를 끌고 나오라고 했습니다. 이 하나의 장면 안에 동성애, 집단 성폭행, 강간 등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든 음란함이 축약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가장 싫어하시는 죄악을 기브아 사람들은 거리낌 없이 행하려 하고 있습니다.

레위인은 이 날 해가 저물 때 이방인 사람들의 성읍인 여부스에 도착했습니다. 이방인의 성읍에 들어가면 미움을 당하거나 해를 당할지 몰라 염려하여 무리하여 동족 이스라엘 사람들이 거주하는 기브아까지 왔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따뜻한 환대는커녕 이러한 참담한 일을 겪게 되었습니다. 사사 시대가 얼마나 악했는지 하나님께서 창세기 19장에서 멸하셨던 소돔과 고모라의 모습과 똑같았습니다. 기브아는 그들 앞에서 쫓겨난 가나안 사람들과 다를 바 없이 악했습니다.

레위인을 달라 요구하는 동네 불량배들에게 노인은 자기 처녀 딸과 레위인의 첩을 그들에게 넘겨주겠다고 말하며 레위인만은 건들지 말아달라고 요구합니다. 이 노인의 말 속에서 우리는 이 당시 이스라엘 사회가 여성들을 하나의 동등한 인격체가 아니라 남자의 재산이나 거래하는 소유물로 생각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역시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인간을 존대하지 못하는 사사 시대의 낮은 영적 수준을 보여줍니다. 또한 비록 당시 여성이 남성의 소유물로 여겨지는 시대였으나 위기를 모면하기 위하여 아버지가 자기 딸을 내어주겠다고 제안하며 24절에 “너희가 그들을 욕보이든지 너희 눈에 좋은 대로 행하라”고 말하는 것은 참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성경학자들은 이 장면을 통해 나그네를 환대할 줄 알았던 이 의로운 노인도 결국 기브아 사람들과 같이 낮은 도덕적 기준, 온전하지 못한 사고 방식을 갖고 있음이 밝혀지는 장면이라고도 해석합니다.

사사 시대는 하나님을 버린 이스라엘에 나타난 변화의 흐름을 두 가지로 보여줍니다. 하나는 그들의 폭력성이고, 다른 하나는 그들의 성적 타락입니다. 인간이 그들의 삶에서 하나님을 버리게 될 때 결국 인간은 자신의 탐욕과 육체적 정욕을 위해서 살아가게 됩니다. 인간이 탐욕을 위해 사용하는 것이 폭력이고, 육체적 정욕을 위해 사용하는 것이 성적 타락입니다.

지금 이 시대 이 세상 문화는 영화나 드라마에 너무나도 잘 나타나 있습니다. 칼로 찌르고, 총에 맞아 피가 낭자합니다. 외도, 동성애, 간음 등 노골적인 성적 묘사가 갈수록 자극적으로 묘사되어 나타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상의 주류 문화를 무분별하게 받아들여서는 안 됩니다. 세상의 폭력과 성적 타락을 보십시오. 이 시대는 사람을 칼로 찌르고, 성적이고 자극적인 노출 장면들로 가득한 드라마나 영화를 즐겨 보는 것을 엔터테이먼트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만일 하나님께서 우리가 그와 같은 것들을 즐겨 보는 것을 보시고 과연 엔터테이먼트라고 보실까요? 세상은 폭력과 음란을 당연하게 받아들입니다. 이는 세상이 이러한 행위들에 대해서 사람들이 죄가 아니라고 인식하기 위해 만들어 낸 자기 합리화입니다. 그리스도인들도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이 시대의 낮아지는 도덕적 기준에 영향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마음의 경계를 잘 지켜야 합니다.

결국 폭력적으로 다가오며 소리치는 기브아의 폭력배들에게 레위은은 자신의 첩을 그들에게 내어주게 됩니다. 그리고 25절 말씀을 보면 정말 말로 담기 어려운 죄를 이 악인들이 저지르게 됩니다. 밤새도록 여인을 욕보이고 새벽 미명에 놓은 것이죠. 그리고 결국 이 여성은 죽게 됩니다. 얼마나 가슴 아픈 일입니까? 우리 사회 혹은 우리 교회 혹은 우리 가족 중에 일어난 일이라고 생각하고 말씀을 읽으니 화가 머리 끝까지 났습니다. 정말 기브아 사람들 가만 둘 수 없는 나쁜 사람들입니다.

더 기가 막힌 장면은 다음 날 아침 레위인의 모습입니다. 27절을 봅시다. “(19:27) 그의 주인이 일찍이 일어나 집 문을 열고 떠나고자 하더니 그 여인이 집 문에 엎드러지고 그 두 손이 문지방에 있는 것을 보고” 레위인은 아침 일찍 기브아 성을 몰래 떠나려고 도망치려고 하고 있습니다. 밤새 자신의 첩이 어떻게 되었는지 걱정도 안 되었나 봅니다. 길을 떠나고자 문을 열었다가 그제서야 자신의 첩이 문 앞에 누워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 때 이 레위인의 말을 들어보십시오. 28절입니다. “일어나라. 우리가 떠나가자.” 밤새 불량배들에게 시달리다가 왔을 것이 뻔한 상화에서 하는 말이, “일어나라. 우리가 떠나가자”입니다. 이 얼마나 기가 막힌 상황입니까? 우리는 여기서 레위인이 자신의 첩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그 역시 육체적 욕망을 위해서 첩을 데리고 있었다는 사실을 한 번 더 확실하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레위인은 첩이 죽은 것을 확인하고는 그녀의 시체를 데리고 와서, 칼로 그 시체를 열 두 덩이로 찍어 이스라엘 전국에 보냈습니다. 이미 죽은 시체이지만, 레위인은 죽은 시체를 토막내는 잔인한 일을 행했습니다.

레위인이 첩을 둔 것도, 레위인의 첩이 행음하여 도망친 것도, 기브아 사람들이 환대를 베풀지 않고 도리어 냉대와 무시로 반응한 것도, 성읍 불량배들이 동성 집단 강간을 시도한 것도, 첩을 밤새도록 욕보인 것도, 레위인이 첩의 시체를 토막 낸 것도… 이 모든 것이 결국 사사 시대의 영적 타락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기가 막힌 사실은 바로 이런 모습이 오늘날 이 시대에 그대로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21세기가 이 본문보다 더 잔인하고 더 음란하면 더했지 결코 덜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누가복음 18장 8절에 말세를 향하여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갈수록 참 믿음, 참 그리스도인들을 만나보기가 힘든 세상입니다. 세상은 지금도 기브아와 같이 폭력적이고 음란합니다. 자신의 탐욕을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세상입니다. 사람을 죽이고, 가정을 파괴하고, 사람을 소유물처럼 짓밟는 세상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나무가 베임 당해도 그루터기는 남아 있기 마련입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죄악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진노로 베임 당해도, 여기 있는 우리들이 이 땅의 거룩한 그루터기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세상의 죄악의 유혹에 넘어지지 아니하고 거룩하게 이 땅을 살아가는 하나님의 백성 되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