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1203 기회를 주시는 하나님 (사사기 16장 15-22절)

‘삼손’이라는 이름은 ‘작은 태양’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삼손을 유혹한 여인의 이름 ‘들리라’는 ‘밤’과 관련이 있습니다. 삼손이 블레셋의 기생 들릴라의 집에 들어가 유혹을 받는 장면은 ‘작은 태양’이 ‘밤의 여인’에게 사로잡힘으로 말미암아 그 환한 빛을 잃어가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이 세상에 힘으로 삼손을 제압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들리라는 ‘유혹’이란 또다른 강력한 무기로 삼손을 제압했습니다. 들릴라는 삼손이 가진 힘의 비밀을 캐내기 위하여 세번이나 그에게 말해줄 것을 간청했습니다. 그때마다 삼손은 거짓말로 둘러댔습니다. 삼손의 말이 거짓말임이 밝혀질 때마다 들릴라는 삼손이 그녀를 사랑하지 않는다며 날마다 삼손의 마음을 재촉하고 그를 못살게 굴었습니다. 제3자의 입장에서 보면 참 마음씨가 못된 여자인데 이상하게도 삼손은 그녀에게 흠뻑 빠져서 헤어나오질 못하고 있습니다. 들릴라의 유혹은 집요했습니다. 본래 삼손은 태어날 때부터 나실인이었습니다. 즉 그는 한 평생 하나님만을 온전히 사랑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거짓 사랑놀이에 빠져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신 특별한 은총의 빛을 잃어가고 있었습니다.

구주 예수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삼손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특별한 은총을 받았습니다. 바로 우리 안에 함께 계시는 성령 하나님이야말로 우리가 받은 최고의 은총입니다.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성령님과 함께 살아가며 오직 하나님께만 예배하며 주님을 더욱 섬기고 사랑하며 살아가야할 사명이 있습니다. 그러나 삼손 곁에는 그를 멸망의 길로 인도한 들릴라가 있었듯이, 오늘날에도 그리스도인들을 유혹하여 잘못된 길로 빠지게 만드는 세상의 유혹이 얼마나 많은 지 모릅니다. 아무리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이라 하더라도 세상의 즐거움에 눈이 멀면, 하나님과 멀어지게 되기 마련입니다. 하나님과 멀어지면 거룩한 능력을 잃어버리게 되고, 탐욕으로 인해 삶은 죄악의 구렁텅이에 빠져 더욱 비참한 방향으로 흘러가게 됩니다.

아마도 삼손은 자신이 들릴라를 만나서는 안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태어날 때부터 나실인으로서 자랐기 때문에 나실인이 반드시 지켜야 하는 것들을 교육 받았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규례와 법도를 무시하고 하나도 지키지 않았습니다. 그는 비록 나실인이었으나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살아가지 아니하고, 자기 눈에 좋아 보이는 길을 따라 살아갔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선택이 삼손의 인생을 비극으로 몰아넣고 말았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분명 하나님과 함께 풍성한 삶을 살아가도록 넘치는 복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만일 우리들이 들릴라의 유혹에 빠진 삼손과 같이 세상이 제공하는 죄악의 유혹에 빠져 하나님의 뜻을 저버린다면, 아무리 하나님의 크신 은총 받은 그리스도인이라 할지라도 그의 삶 역시 비참한 비극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성경에는 그러한 예들이 많이 나옵니다. 아담의 맏아들 가인, 이스라엘의 초대 왕 사울, 예수님의 제자 가룟 유다 등 이들은 분명 하나님의 은총을 받은 사람들이었으나, 하나님의 뜻이 아닌 자기 자신의 뜻대로 살아감으로써 하나님께 버림 받은 것과 같은 인생의 마지막을 겪게 되었습니다.

삼손은 나실인으로서 독주를 금하고, 머리에 삭도를 대서는 안 되고, 시체를 가까이 해서도 안 됩니다. 그러나 나실인 삼손은 술과 향락을 가까이 했고, 죽은 사자 시체에 있는 꿀도 먹었습니다. 즉 그는 하나님이 나실인에게 명령하신 규례를 무시했고 이미 다 어겼습니다. 그리고 결국에는 들릴라의 유혹에 빠져 그에게 있는 마지막 규례 즉 머리에 삭도를 대지 아니하여야 할 규례까지 어기게 된 것입니다. 20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16:20) 들릴라가 가로되 삼손이여 블레셋 사람이 당신에게 미쳤느니라 하니 삼손이 잠을 깨며 이르기를 내가 전과 같이 나가서 몸을 떨치리라 하여도 여호와께서 이미 자기를 떠나신 줄을 깨닫지 못하였더라” 많은 사람들이 삼손의 신비한 힘의 원천은 그의 머리카락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머리카락은 상징일 뿐입니다. 삼손이 가진 초인적인 힘은 그의 머리카락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삼손을 모태에서부터 나실인으로 부르신 하나님의 능력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삼손이 나실인의 규례를 어기며 하나님을 떠나가자, 하나님께서도 그를 떠나셨습니다. 삼손인 나실인이 지켜야 할 것을 무시하고 하나님을 버리자, 하나님께서도 그를 버리셨습니다. 더욱 안타까운 사실은 삼손은 이와 같이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를 떠났다는 사실도 전혀 깨닫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오늘 이 말씀은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큰 경고를 전해주고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나를 떠나셨음에도 불구하고 혹시 여전히 그 사실을 깨닫지 못한 채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하는 경고입니다. 겉에서 보면 여전히 교회는 다닙니다. 예배는 드립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임재가 없습니다. 하나님과 깊은 관계나 친밀한 교제가 없습니다. 하나님 없는 명목상의 크리스천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 그것은 우리가 매우 경계해야 하는 영적 상태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들의 영적 침체이며 그 원인이 무엇이든지 오래도록 머물러 있어서는 안되며, 반드시 벗어나야 합니다.

사회 용어 중에 ‘쇼윈도 부부’라는 말이 있습니다. 실제로는 행복한 결혼생활을 하고 있지 못하지만, 주변의 시선을 의식하여 공식 석상에서만 잉꼬부부처럼 행동하는 부부를 두고 ‘쇼윈도 부부’라고 부릅니다. 일본에서는 이러한 현상을 ‘가정 내 이혼’이란 말로 표현하기도 합니다. 사회적 지위와 체면을 중시하는 경우, 쇼윈도 부부처럼 사는 경우가 드물지 않습니다. 부부가 한 집에서 살면서 자녀 양육문제, 경제적 이유, 체면 등 갖가지 이유로 한 지붕 아래서 살고 있지만 부부 간 개인적인 대화나 서로에 대한 존중이나 애정이 없이 생활하고 있습니다. 한 집에서 부부가 함께 살아가지만 사실상 별거 관계나 다를 바가 없습니다.

이 세상에는 쇼윈도 부부만 있는 것이 아니라, ‘쇼윈도 신앙’도 있습니다. 죄악에 무너졌고, 유혹에 넘어가 그만 하나님과의 관계는 멀어졌습니다. 하나님과의 대화인 기도도 끊어졌고, 더 이상 말씀도 마음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다닙니다. 왜냐하면 주변 시선을 의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공식 석상에서는 신앙생활을 유지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 하나님과 남과 다를 바 없이 살아갑니다. 하나님에 대한 존중이나 애정 없이 생활하고 있습니다. 교회는 오지만, 사실상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것이나 다를 바가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쇼윈도 신앙입니다. 쇼윈도 부부로 살아가는 것이 불행한 것처럼 쇼윈도 신앙 역시 불행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의 마음에는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기쁨도 평안도 없습니다.

쇼윈도 부부의 가장 큰 문제는 갈등을 회피한다는 데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 회피는 갈등을 전혀 해소해주지 못합니다. 숨기기보다 갈등을 직시할 때 문제 해결에 더 가까워질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들은 하나님과 나 사이에 있는 갈등을 먼저 인정해야 합니다. 우리는 명목상의 그리스도인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신앙생활은 남들에게 잘 보이기 위한 것이 결코 아닙니다. 진실한 신앙 생활을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멀게만 느껴지면 일단 그것을 인정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바로 거기에서부터 치유가 시작됩니다.

아쉽게도 삼손은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그와 같은 치유의 순간을 만들지 못했습니다. 삼손의 생애를 보면, 그가 단한번도 하나님을 예배하거나 찬양한 적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물어본 적도 없고, 이방 사람들과 다를 바 없이 살아갔습니다. 딱 한 번 적군과 싸운 후 목이 말라 죽을 지경에 이르렀을 때 하나님의 이름을 불렀습니다만, 그것마저도 자신이 곤경에 처하여 어쩔 수 없이 하나님을 향해 부르짖은 것이지, 결코 하나님을 사랑하거나 존경하는 마음으로 주님을 부른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는 자기가 힘들 때만 하나님을 찾는 명목상의 이스라엘 백성이요, 유명무실한 사사였을 뿐, 실상은 이방인과 전혀 다를 바 없는 삶을 살아갔습니다.

‘작은 태양’ 삼손이 ‘밤의 여인’ 들릴라에게 사로 잡혀 머리가 밀렸습니다. 그 결과 삼손은 신비한 힘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이후 삼손은 블레셋 사람들에게 붙잡혀 두 눈이 뽑히게 됩니다. 쇠사슬에 꽁꽁 묶인 채 감옥에 갇혀 맷돌을 돌리며 살아가게 됩니다. 삼손은 나실인으로서 영광스런 삶을 살아갈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육체의 정욕을 따라감으로 말미암아 감옥에 갇힌 채 흑암 중에서 짐승 같은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우리는 삼손처럼 자신의 탐욕을 채우기 위하여 하나님의 규례를 무시하고 하나님을 버린 삶이 얼마나 비극적으로 치닫게 되는지 깨닫게 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살펴보면 바로 그 흑암 속에서 다시 소망이 솟아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바로 원수들이 자른 삼손의 머리카락이 다시 자라고 있었습니다. 22절 말씀을 봅시다. “(16:22) 그의 머리털이 밀리운 후에 다시 자라기 시작하니라” 이 말씀은 삼손에게 신비한 힘을 가져다 준 그의 머리카락이 다시 자라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비록 삼손은 하나님을 버림으로 말미암아 인생의 가장 밑바닥에 있었으나,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그를 포기하지 않으셨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삼손의 머리털이 다시 자라난 것은, 하나님께서 그에게 다시 한번 기회를 주셨음을 의미합니다.

사실 사사기를 보면 삼손은 하나님께 실망만 안겨드렸습니다. 그의 삶은 실수의 연속이었고, 방탕한 나실인으로서 그가 쌓은 죄악은 동산을 쌓을 만큼 가득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호와 하나님은 삼손을 놓지 않으셨습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절대로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아버지가 싫다고 집 나간 막내아들 탕자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리던 아버지의 마음처럼 주님은 지금도 우리 삶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고 계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언제라도 주님과 함께 다시 시작할 수 있도록 기회를 주십니다. 이것이 복음이고 은혜입니다. 하나님이 멀게만 느껴지십니까? 지금도 늦지 않았습니다. 신앙생활은 지금이라도 다시 시작하면 됩니다. 죄악을 끊어내고, 주님의 품 안으로 돌아오면 하나님은 우리를 다시 한번 맞아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와 능력을 가지고 우리들은 어떠한 모습으로 이 세상을 살아가고 있습니까? 나의 탐심과 안위만을 위해 살아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하나님을 위해 주님의 능력과 복을 사용하며 살아가십시오. 또한 이 세상의 타락한 문화에 미혹되어 거룩함을 잃어버리지 않도록 경계하십시오. 거룩함을 가지고 하나님과 깊은 교제 안에서 주님을 위해 살아가는 복된 삶을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