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8/30] (전체예배영상) 요나서 시리즈 (3) 다시 기회를 주시는 하나님 (요나서 3장 1-10절)

서론. 핀란드의 ‘실패의 날’ 행사

유럽의 핀란드에서는 매년 10월 13일이 되면 ‘실패의 날’(Day of Failure)이라는 아주 흥미로운 이름의 행사가 열립니다. 지난 2010년부터 시작하여 올해 벌써 11년 째를 맞이한 이 행사는 전국적인 규모를 자랑합니다. 전국에서 모여든 평범한 핀란드의 학생들로부터, 교수들, 창업자들. 기업인들, 연예인들. 정치인들까지 한 자리에 모여서 자신의 실패 경험을 다른 사람들에게 이야기하고, 각자의 실패 사례들을 공유하고, 실패의 이유를 분석하고, 참석자들의 조언을 듣고, 서로의 실패를 축하해 주는 아주 이색적인 행사 입니다. 이 행사는 무려 핀란드 국민의 1/4 정도가 지켜보는 국가적인 행사 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함께 모여 서로의 실패 경험을 공유하면서 실패로부터 성공의 지혜를 배우는 날입니다. 이 ‘실패의 날’에 중요한 모토가 바로 ‘실패를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입니다. 이들은 실패를 다음과 같이 정의합니다. ‘실패란, 성공할 수 있는 기회이다.’
이 ‘실패의 날’ 행사가 핀란드 사람들만의 행사가 아닌, 국제적인 행사로 자리잡게 된 계기가 있었는데요. 바로 핀란드의 대표적인 기업이며, 세계적인 핸드폰 기업이었던 노키아의 CEO가 2011년도에 자신들의 실패를 솔직하게 소개하면서 세계적인 주목을 끌게 된 것이죠. 핀란드가 자랑하던 세계적인 핸드폰 회사 노키아의 실패는 핀란드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그런데 그 실패를 공개적으로 나눈 것은 더 큰 충격이었습니다. 이전까지만 해도 실패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던 핀란드 사람들에게 ‘실패의 날’ 행사는 실패의 긍정적 의미를 되새기는 기회를 제공했다는 점에서 긍정적 평가를 받았습니다. 이것을 계기로 ‘실패의 날’ 행사는 점점 더 성장하게 된 것이죠. 현재 30여개의 국가가 참여하는 국제 행사로 발전했습니다.
핀란드는 ‘실패의 날’ 행사를 통해 세계에서 가장 활발히 창업에 도전하는 나라로 변화하게 되었습니다. 실패의 경험도 하나의 큰 자산이라는 생각이 사회에 깊이 뿌리내리게 된 것이죠. 실패라는 것은 이 세상을 살아가는 모든 인간이 공유하는 경험이요 아픔입니다. 실패의 쓴 잔을 성공의 기회로 만들 수 있다면 그 내가 자신 실패의 쓴 잔은 몸에 좋은 보약과도 같은 역할을 한 셈 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실패를 성공의 도구로 보는 것은 탁월한 관점 입니다.

우리들도 살아가면서 참 많은 실패를 경험해오지 않았습니까? 사업에 실패하기도 합니다. 결혼생활에 실패하기도 하고요, 취직에 실패한 사람들도 있습니다. 대학 진학에 실패한 사람들도 있고, 자녀 양육에 실패한 사람들도 있습니다. 대인관계에서 실패한 사람도 있고, 건강에서 실패한 사람들도 있습니다. 개인이 세워놓은 계획을 실행하는데 실패하기도 합니다. 어떤 분들은 단지 숨기기 어려운 실패를 했기에, 그들의 실패가 남들보다 좀 더 잘 보이게 드러날 뿐이지 사실 우리들은 모두 크고 작은 실패들을 경험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핀란드 사람들처럼 이 실패를 밑거름 삼아 성공하는 자양분으로 삼을 줄 알아야 한다는 것 입니다.

1. 두 번째 기회를 베푸시는 하나님
(1) 요나를 다시 찾아오심
우리들은 어떤 실패를 경험했고, 또 지금 경험하고 있습니까? 인생에서 피할 수 없는 실패의 경험들을 어떻게 대하고 있습니까? 지금 우리가 함께 보고 있는 요나서는 하나님의 선지자로서 완전히 실패한 요나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는 자신의 사명을 무시하고 등 뒤로 던져버렸고, 하나님을 피해 멀리 다시스로 도망쳤습니다. 결국 그 대가로 깊은 물에 빠졌고, 물고기에게 먹혀 사흘 낮밤을 물고기 뱃속에서 지내야 했습니다. 요나 스스로도 자신의 삶은 이제 끝이다 생각했으며, 지난날 자신이 저지른 실수와 실패를 몹시도 후회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실패자 요나의 이야기는 거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사랑과 자비가 풍성하신 우리 하나님은 물고기 뱃속에 있는 요나를 찾아오셨습니다. 하나님은 큰 물고기에게 명령하셔서, 요나를 뭍으로 뱉어내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또 다시 요나를 찾아오셨습니다. 하나님은 이전과 같이 다시 한 번 말씀으로 요나에게 임하셨습니다. 요나서 3장 1절 말씀을 함께 보겠습니다. “(욘 3:1) 여호와의 말씀이 두 번째 요나에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1절 말씀을 보면 ‘두 번째’라는 표현이 등장합니다. 하나님은 요나에게 두 번째 기회를 주고 계십니다. 우리는 이것을 “두 번째 기회의 축복”이라 부릅니다. (The blessing of a second chance) 하나님은 실패한 인생을 찾아오셔서 또 다시 기회를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 옛 어르신들이 하는 말 중에 “머리 검은 짐승은 거두는게 아니다”라고 했습니다. 사람은 신뢰의 대상이 아니라는 거에요. 짐승도 은혜를 입으면 반드시 보답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사람은 어떻습니까? 배은망덕 할 수 있어요. (Bite the hand that feeds you.) 사람은 달면 삼키고 쓰면 뱉습니다. 심지어 자신을 도와준 사람을 배신하고 해를 끼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나라 옛 속담에 “물에 빠진 사람 건져 주었더니 보따리 내놓으라고 한다”라는 말도 있잖아요. 전쟁 중에 두 부모 다 잃고 길바닥에서 굶주린 배를 움켜 쥐고 울고 있는 불쌍한 아이를 우리 집에 데려다가 밥 먹여주고, 재워주고, 입혀주고, 없는 돈 쥐어주며 학교 보내주고 다 가르쳤더니, 나중에 그 은공은 모른 채 하고 재산 내놓으라고 양부모에게 칼부림 한 패륜아 사건도 있었어요. 말 그래도 ‘은혜를 원수로 갚은’ 셈이죠. 그래서 우리들도요 한 번 배신한 사람은 잘 쓰지 않습니다. 이미 신뢰를 잃어버린 사람은 잘 쓰지 않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이 놀라운 거에요. 하나님은 이 머리 검은 짐승을 거두어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이제 배신 안 할 줄 믿고 받아주시는 것도 아니에요. 심지어 우리가 또 다시 주를 배신하고 하나님 마음 아프게 할 것을 다 알면서도 받아 주셨어요. 세상에 자기 등에 칼 꽂은 사람을 누가 다시 받아 주겠습니까? 그런데 우리 하나님은 우리를 다시 받아 주십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사랑 입니까? 그래서 예레미야 선지자는 찬양하기를 “주의 인자는 끝이 없고, 주의 자비는 무궁하며 아침마다 새롭고 늘 새로우니 주의 성실이 큼이라 성실하신 주님” 했던 거에요. 비록 이스라엘 백성들이 죄를 짓고, 짓고, 또 지어 이제는 하나님 바라볼 면목도 없고, 부끄러워서 다시 주께 돌아갈 엄두도 감히 못 내겠으나, 그 런 구제불능한 죄인들도 다시 주님께 돌아가기만 하면 하나님께서 또 받아주신다는 거에요. 이 얼마나 큰 사랑이고 은혜 입니까?
우리 스스로 내 인생을 포기하는 순간이 있다할지라도, 하나님은 절대로 한 순간도 우리들을 포기하시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물고기 뱃속에 있는 요나를 다시 뭍으로 꺼내 주셨습니다. 요나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임했다’는 본문의 표현은 하나님께서 요나를 다시 찾아오셨다는 말 입니다. 주님은 실패자 요나를 찾아오셨고, 그에게 다시 주님의 목소리를 들려주셨습니다. 오늘 하나님께서 요나에게 ‘두 번째’로 찾아오시고 말씀해 주시는 이 장면이야말로 실패의 쓴 잔을 마신 우리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위로 입니다. 아무리 큰 죄를 자도 회개하고 돌아오면, 하나님은 그를 맞아 주십니다. 또 다시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다.
어느 한 세계적인 교육자가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은 교육이 아니고 사랑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저는 이 말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우리가 단순히 성경 지식을 배우고 머리에 쌓는다고 해서 사람이 바뀌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가슴으로 느끼면 그 때 그 사람의 삶이 송두리채 변화하기 시작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이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자들 입니다. 지금이라도 다시 주님께 돌아가면 하나님은 우리를 맞아 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다시 한 번 가까이 찾아오시고, 우리에게 또 한 번 주님의 음성을 들려주십니다. 이 귀한 “the blessing of second chance” 두 번째 기회의 축복이 저와 여러분에게 있기를 축복합니다.

(2) 요나에게 다시 사명을 맡겨주심
요나서 3장 2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욘 3:2)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내가 네게 명한 바를 그들에게 선포하라 하신지라” 한 아버지가 아들을 보고 “이 자식, 난 너가 또 사고 칠 줄 알았다!”하고 말하거나, 어머니는 딸을 보고 “너는 도대체 누굴 닮아서 그 모양이니?”하고 말하며 자녀에 대한 불신을 나타낸다면 부모도 자녀도 얼마나 참 불행합니까? 그러나 반대로 아버지가 “아들, 괜찮아 이번에는 실수했지만, 아빠는 우리 아들이 분명 잘 할 거라 믿어!”하고 말하고, 어머니가 딸을 보고 “딸, 이번에는 일이 잘 안 풀렸지만. 엄마는 우리 딸이 반드시 잘 될 거라 믿어.”하고 말할 수 있다면 얼마나 사랑이 넘치고 복된 가정 입니까?
하나님은 요나에게 이전에 실패했던 사명을 다시 한 번 맡겨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요나를 믿어주시는 거에요. 성경을 자세히 보시면 ‘요나서 3장 2절’은 ‘요나서 1장 2절’과 거의 똑같습니다. 즉 하나님은 이전에 ‘니느웨 사명’을 완전히 실패했던 요나에게 또 다시 두번째 기회를 주시며 다시 한 번 그를 믿어 주고 계신 것이죠. 세상에 누군가 나를 믿어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얼마나 큰 축복 입니까? 그래서 스위스 철학자 카를 힐티라는 사람은 이렇게 말했어요.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날은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을 발견하는 날이다.” 내가 이 세상을 왜 살아가야 하는지 아는 사람이 가장 행복한 사람 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위해 살아가고 계십니까?

대한민국이 낳은 세계적인 여자 골프선수인 박세리 선수가 현역시절에 슬럼프가 찾아 온 시절이 있었어요. 2004년 즈음 슬펌프가 시작되었는데, 첫 라운드에서 스윙을 하는데 감이 좋지 않은 거에요. 둘째 라운드도 자기가 생각하는대로 공이 안 쳐지는 거에요. “내가 몸이 피곤해서 그런가보다” 했는데, 대회가 끝나고 일주일 즈음 쉬고 또 다음 대회 나갔는데도 똑 같은 거에요. 스윙을 하는데, 내 몸이 내 자신이 아닌 것처럼 느껴지는 거에요. 처음에는 그게 슬럼프가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왜냐하면 자기도 운동선수니까 슬럼프가 올 것을 알고 그것마져도 대비할 정도로 완벽주의자처럼 생활을 했거든요. 슬럼프를 방어하기 위해서 사소한 것까지도 신경을 써서 관리하며 살았어요. 골프 하나를 위해서 낭비 없이 살아왔어요. 그런데 그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는 것을 깨닫게 된 거죠.
슬럼프가 찾아오니까 모든 게 싫어집니다. 골프채 잡기도 싫고, 티박스에 서 있는데, ‘내가 왜 여기에 있어야 하지?’하는 마음이 드는 거에요. 그냥 쉬고 싶고, 첫 홀부터 모든 게 힘들고 다 싫은 거에요. 사람들 만나기도 싫고, 그냥 나를 조용히 좀 놔뒀으면 싶은 거에요. 슬럼프가 오니까 사람이 끝도 없이 바닥으로 내려가는 거죠. 성적도 부진하니까 언론도 기사도 안좋은 이야기만 계속 나옵니다. ‘이제 골프를 그만 둬야하나’ 하는 생각까지 들었어요. 나중에는 대회장에서 골프채를 잡고 있는 자신이 싫을 정도까지 갔어요.
박세리 선수에게 기자가 물어봤습니다. 그 때 어떻게 슬럼프를 극복했습니까? 그 때 박세리 선수가 한 대답이 너무 의외였어요. “모두 다 내려놓는 거였습니다.” 슬럼프가 한참 이어지던 어느 날 누가 커피 한 잔 하러 가자고 해서 항상 같이 지내던 사람들하고 커피 마시러 갔는데 갑자기 “아 이 사람들은 내가 골프를 잘 치던지 못 치던지 항상 내 곁에 있는 사람들이구나?” 하는 깨달음이 오더래요. 여태까지 내 인생의 모든 게 골프에 담긴 것처럼 살아 왔는데, 곰곰이 생각해 보니까 골프가 내 인생의 전부는 아니었다는 거에요. 다 내려놓았어요. 그렇게 자기 마음 속 골프를 다 내려놓으니까 그 때부터 샷이 달라지는 거에요. 그리고 바로 2006년도 맥도널스 LPGA 챔피언쉽에서 호주의 케리 웹을 꺾고 다시 트로피를 안았습니다. 박세리 선수의 고백은 슬럼프가 그녀에게 준 선물은 ‘골프가 인생의 전부가 되면 안된다’는 깨달음이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요, 이 세상에 돈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은 사람들 입니다. 컴컴한 시골에 가보면 길을 밝히 비추고 있는 가로등의 빛을 향해 수많은 벌레 떼들이 날아듭니다. 그 가로등에서 뿜어져 나오는 고열이 자신을 태워 죽이는지도 모르고 달려드는 거죠. 그와 마찬가지로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벌레 떼처럼 오로지 부와 성공을 위해 미친듯이 살아갑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그것이 삶의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은 사람들이에요. 마치 슬럼프에 빠진 박세리 선수가 “아, 골프가 내 인생의 전부가 아니구나?”하고 깨달은 것처럼, 우리들도 이 코로나19라는 인생의 슬럼프 가운데 “아, 돈이 내 인생의 전부가 아니구나?”, “아, 난 이렇게 세상의 헛된 부귀영화를 위해서 살아갈 인생이 아니었구나?”하는 것을 깨달을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하나님은 주의 백성들이 올바른 목적을 위해 이 세상을 살아가기를 원하세요. 하나님은 요나가 주님의 사명을 위해 살아가기를 원하셨어요. 그래서 그에게 또 다시 사명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에게 사명을 허락하셨습니다. 이따금씩 한 번 자기 스스로에게 물어보세요. “나는 무엇을 위해 살아가고 있는가?”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인생의 사명을 발견하고 그 사명을 위해 살아가는 사람은 정말 행복한 사람 입니다.

2. 순종을 통해 역사하시는 하나님
그런데 사실 오늘 요나가 감당한 사명이라는 것이 뭐 어떻게 보면 참 대단한 것처럼 보이지만, 또 어떻게 보면 참 단순하고 간단한 사명 입니다. 무슨 모세처럼 60만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광야를 건너가야 했던 사명도 아니고, 노아처럼 120년 동안 방주를 만들어야 하는 사명도 아니었습니다. 이에 비하면 요나가 감당한 사명은 그리 대수로운 것은 아니었습니다. 니느웨에 가서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 전파하고 오면 됩니다. 3-4절 말씀을 봅시다. “(욘 3:3) 요나가 여호와의 말씀대로 일어나서 니느웨로 가니라 니느웨는 극히 큰 성읍이므로 삼 일 길이라 (욘 3:4) 요나가 그 성에 들어가며 곧 하룻길을 행하며 외쳐 가로되 사십 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 하였더니” 니느웨에 가서 “여러분이 죄를 회개하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40일 뒤에 이 도시를 멸하실 것입니다!”하고 외친 것이 전부 입니다. 니느웨 성은 가로 질러 걸어가도 족히 3일은 걸릴만큼 큰 성읍이었습니다. 그 성읍에서 대략 하루 정도 요나가 하나님의 메시지를 선포한 것이죠.
어쩌면 정말 단순하고 평범한 사명입니다. 그러나 요나가 하나님께서 그에게 맡겨주신 사명에 순종하자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던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니느웨에 대회개 운동이 벌어진 것입니다. 5-6절을 봅시다. “(욘 3:5) 니느웨 백성이 하나님을 믿고 금식을 선포하고 무론 대소하고 굵은 베를 입은지라 (욘 3:6) 그 소문이 니느웨 왕에게 들리매 왕이 보좌에서 일어나 조복을 벗고 굵은 베를 입고 재에 앉으니라” 요나가 니느웨에 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자, 니느웨 도시 전체에 회개의 불씨가 퍼졌습니다. 온 도시의 사람들이 금식을 선포하고, 회개를 상징하는 굵은 베옷을 입었습니다. 심지어 수도 니느웨에 살고 있는 앗수르의 왕까지도 왕좌에서 내려와 왕복을 벗고 굵은 베를 입고 회개 운동에 동참 했습니다. 사실 요나가 한 것은 별 것 없습니다. 그저 하나님께서 주신 메시지를 선포했을 뿐입니다. 그러나 요나가 순종하자 하나님의 크신 역사는 시작 되었습니다.
제가 국민학생 시절 살던 아파트 단지에는 일주일에 두 번씩 늦은 오후가 되면 종소리가 땡떙 들려왔습니다. 두부와 콩나물을 파는 아주머니가 치는 종소리입니다. 그럼 이따금씩 어머니께서 그 소리를 들으시고, 천원짜리 몇 장을 제 손에 쥐어 주시며 “영목아, 나가서 순두부 좀 사와라.”하고 심부름을 시키셨습니다. 그럼 엘리베이터 타고 내려가서 순두부 사옵니다. 아주 간단한 일 입니다. 그리고 나면 그 날 저녁 식탁에 매콤하고 맛있는 순두부찌개가 끓여 나옵니다. 어머니께서 “나가서 콩나물 사와라”하고 심부름 시키셔서 또 나갔다 오면, 그 날 저녁에는 시원하고 맑은 콩나물국이 저녁 식탁에 나옵니다. 저는 요리를 할 줄 모릅니다. 요즘 표현으로 말하면 요리는 일도 모릅니다. 그런데 제가 어머니 말씀에 순종하여 심부름 갖다 오면, 요리는 어머니의 솜씨 좋은 시력으로 만들어 집니다. 이게 순종의 축복 입니다. 순종은 우리가 합니다. 그러나 역사는 하나님께서 일으키십니다. 요나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사실 요나가 감당한 일이 큰 것은 아니었어요. 단순히 니느웨 가서 하나님 말씀 전한 것 뿐이었어요. 그러나 하나님께서 요나의 순종을 통해서 니느웨 도시 전체를 회개시키는 놀라운 부흥의 역사를 일으켜 주셨습니다. 순종하는 자들의 삶 가운데는 하나님의 놀라운 기적과 역사가 나타납니다. 순종하지 않는 사람들은 이러한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를 체험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순종으로 감당하십시오. 하나님께서 우리의 순종을 통해 우리 삶에 반드시 주님의 크고 놀라운 역사를 일으키실 것입니다.

3. 죄인의 회개를 받아주시는 하나님
오늘 본문에 나타나는 니느웨의 회개는 정말 예상치 못한 전개였습니다. 요나의 입장에서 보면 ‘니느웨’는 하나님하고 아무런 상관없어 보이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니느웨는 도무지 회개할 것 같지 않은 사람들, 복음을 받아들일 것 같지 않은 사람들, 천국에서는 도무지 못 볼 것 같은 사람들을 상징 합니다. 그런데 바로 이러한 니느웨에 회개의 역사가 일어난 것이죠. 심지어 요나가 사역하던 북이스라엘에서도 이와 같은 회개의 운동은 일어난 적이 없습니다.
[나는 가수다]란 MBC 프로그램을 통해서 잘 알려진 가수 ‘소향’은 사실 기독교 음악을 하는 CCM 가수 입니다. 그녀가 부른 노래 중에 ‘너무 늦은 건가요?’라는 찬양이 있습니다. “너무 멀리 왔나요 / 주님께 돌아가기엔 / 사랑의 주님 그품을 떠나 / 내 영혼 잃어 버린 지금… 너무 늦은건가요 / 내 영혼 회복하기엔 / 수많은 죄악속에 갖혀서 / 주님을 잃어버린 지금… 하지만 내 영혼 주님 기다려요 / 변함없는 주님의 사랑을 / 내 모습 이대로 주께 돌아가요 / 나의 손을 잡아 주소서… 다시 주님의 얼굴 / 내 영혼 볼 수 있도록 / 나를 구원 하소서 / 다시 주의 임재 가운데 / 내 영혼 설 수 있도록” 가수 소향씨가 부른 ‘너무 늦은 건가요?’란 제목의 찬양이 주는 메시지는 반대로 “절대 늦지 않았다”는 거에요. 영어표현 중에 “It is never too late to do the right thing!”이란 표현이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것도 마찬가지 입니다. 절대로 늦지 않았습니다. 지금이라도 내 모든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가면 주님은 우리를 받아 주십니다.
혹시 지금 하나님 앞에서 잠수 타고 계신 분 없습니까? 하나님이 돌아오라고 계속해서 손짓하고 내 이름을 부르시고 계심을 알고도 하나님을 무시하고 있지는 않은가요? 상대방에게 중요한 일로 카톡 메시지를 보냈어요. 분명 상대방이 읽었습니다. 그런데 답장 안주면 기분이 나쁘지 않습니까? “이 사람이 나를 무시하나?” 하나님도 우리의 응답을 기다리고 계세요. 빨리 하나님께 답장 보내세요. 빨리 하나님께 돌아가세요.
자, 그럼 도무지 회개하지 않을 것 같았던 니느웨 사람들의 회개에 하나님은 어떻게 반응하십니까? 10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욘 3:10) 하나님이 그들의 행한 것 곧 그 악한 길에서 돌이켜 떠난 것을 감찰하시고 뜻을 돌이키사 그들에게 내리리라 말씀하신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니라” 하나님은 니느웨 사람들이 진심으로 그들의 악한 길에서 돌이키고 회개한 것을 보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 성읍을 40일 뒤에 멸하시려고 하셨던 계획을 취소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회개를 받아주시고 그들의 죄를 용서해 주신 것이죠.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과 아무런 상관도 없이 살아갔던 니느웨 사람들이 용서 받았다는 것은 이 세상에 용서받지 못할 죄인은 없다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찬송가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워” 잘 아시죠? 이 찬양의 영어 제목이 “Amazing Grace” 입니다. 찬양 가사를 보면 “Amazing grace, How sweet the sound That saved a wretch like me.” 이렇게 갑니다. 저는 이 영어 찬양 처음 불렀을 때 ‘a wretch like me’라는 부분이 해석이 안 되었어요. ‘a wretch’가 무슨 의일까? A miserable person (비참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 person who is in great misfortune (매우 불행한 사람), despicable or vile person (성질 나쁜 사람, 비열한 사람, 야비한 사람, 극도로 불쾌한 사람, 절대로 용납할 수 없는 사람)이란 뜻 입니다. 이 뜻을 알고 보니까, 그 때부터 이 찬양이 정말 제 찬양이 되더라고요. 제가 바로 그런 사람이거든요. “Amazing grace how sweat the sound that saved a wretch like me.” 나같이 비열하고, 야비하고, 성질 나쁘고, 불쾌하고, 절대로 용납할 수 없는 죄인을 구원하신 하나님의 은혜가 너무 감사한 거에요. 그래서 이 찬양을 부를 때마다 두 눈에서 눈물이 빗물처럼 뚝뚝 떨어졌어요. 하나님이 니느웨 사람들의 회개를 받아주시고, 그들의 죄를 용서해 주신 이 장면은, 우리들에게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용서하지 못할 사람은 없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야기하나 하고 마치겠습니다. 한국 지하철은 하루에도 평균 약 750만명이나 되는 엄청난 숫자가 이용합니다. 사람들이 제일 많이 몰리는 강남역, 홍대입구역, 잠실 역은 매일 최소 11만명 이상의 사람들이 역을 사용합니다. 지하철을 이용하는 승객들이 졸다가 가방을 놓고 내리는 사람도 있고요, 비오는 날 깜빡 잊고 우산을 놓고 내리는 사람도 있습니다. 스마트폰 보다가 물건 놓고 내리는 사람도 있습니다. 지하철 유실물 센터에 잃어버린 물건을 찾기 위해 하루에 걸려오는 전화만 수백통 입니다. 서울이 큰 도시지만 지하철 유실물 센터는 시청역, 충무로역, 왕십리역, 태릉입구역 이렇게 4곳 밖에 없어요. 각 센터마다 3-4명의 직원이 소수정예로 근무합니다. 이 열댓명의 센터 직원들이 서울지하철 전체의 분실물을 관리하는 거에요. 지난 2019년도 지하철 유실물 숫자가 약 14만 개가 되었습니다. 이것을 하루 평균으로 내 보니까 하루에 약 400개 정도 유실물이 들어오는 거에요. 가장 많이 잃어버리는 것은 지갑, 휴대폰 및 귀중품, 가방 순 입니다.
그 중 한 지하철 유실물 센터에서 일하는 직원하고 인터뷰한 기사를 봤습니다. 사소하게 보이는 물건에도 누군가의 사연이 담긴만큼 이를 찾아주는 것은 보람된 일이라고 했습니다. 지난 해 가을 왕십리 유실물센터로 한 할머니가 다급한 목소리로 전화를 걸어왔습니다. 평생 소중히 간직했던 반지와 목걸이를 넣은 가방을 깜빡 졸다 지하철에 두고 내린 것이죠. 10명이 넘는 직원이 3-4시간에 걸쳐 비슷한 시간대에 운행한 열차를 모두 수색해 찾아냈습니다. “당시 할머니께서 몇 번이고 고맙다는 전화를 하셨고, 직접 유실물센터로 찾아와 인사해 주셔서 큰 보람을 느꼈습니다”라고 말 했습니다. 그리고 “물건을 잃어버리면 포기하지 말라.”고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직원은 “생각보다 많은 고객이 ‘이런 물건은 유실물로 취급 안하지 않냐?’고 문의 하시는데 그렇지 않다.”고 말했습니다. 이어서 “누군가에게 별 볼 일 없는 물건이라고 해도 저희에게는 모두 같은 유실물입니다. 세상엔 소중하지 않은 물건은 없으니까요.”하고 대답했습니다.
저는 이 기사를 보고 한참 동안 멍하니 모니터를 바라보았습니다. “누군가에게는 별 볼 일 없는 물건이라고 해도 모두 같은 유실물 입니다. 세상엔 소중하지 않은 물건은 없으니까요.” 누군가에게는 별 볼 일 없는 인생이라고 해도 하나님 보실 때는 모두 같은 잃어버린 영혼 입니다. 세상엔 소중하지 않은 사람은 없기 때문 입니다. 하나님은 그 누구라도 회개하고 돌아오면 그 사람의 죄를 용서해 주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다시 그를 받아 주십니다. 그리고 요나에게 그러하셨던 것처럼 하나님은 회개한 그 사람을 다시 찾아와 주시고, 그에게 말씀하시며 그와 교제해 주십니다. 그리고 이제 하나님을 위해 살아가게 하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인생의 실패는 누구나 경험합니다. 그러나 이 실패의 쓴 잔을 성공의 발판으로 삶을 수 있다면 그 쓴 잔은 우리 삶을 일으키는 보약 한 사발과 같습니다. 아직 늦지 않았습니다. 다시 하나님께 돌아가시기 바랍니다. 다시 하나님을 붙잡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실패로 가득 찬 우리의 삶일지라도 반드시 다시 일으켜 주시고 승리의 빛을 보게 하실 줄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