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1107 사도행전 강해 (25) 제1차 선교여행 ‘루스드라’ (사도행전 14장 8-10절)

지난 2020년도에 개봉한 영화 [미나리]는 [센댄스 영화제]에서 심사위원 대상, 관객상을 수상하고, [골든 글로브] 시상식에서는 외국어 영화상을 수상했습니다. [아카데미상 시상식]에서는 작품상, 감독상, 각본상, 여우주연상 등 총 6개 부문 후보에 올랐습니다. 많은 영화 평론가들이 이 영화를 2020년 최고의 영화라고 평가했습니다.

영화는 1983년 미국 아칸소 주로 이주한 어느 한인 가정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1980년대 아메리칸 드림을 꿈꾸며 미국으로 이민 온 한국 이민자 가족이 아칸소 주에서 농장을 가꾸며 겪는 갈등과 위기 그리고 그것을 극복하는 과정을 보여줍니다. 배우 윤여정씨는 이 영화에서. 평생 한국에서 살다가 손주들을 돌보기 위해 미국에 온 ‘순자’라는 이름의 할머니 역할을 연기했습니다. 영화의 한 장면을 보면 할머니 순자가 몸이 아픈 손자 데이빗과 함께 숲 속 냇가 둔덕에 심어 둔 미나리를 뜯으러 가는 장면이 나옵니다. 순자 할머니가 손자 데이비드에게 말합니다. “미나리가 얼마나 좋은데, 반찬도 해먹고, 김치도 해먹고, 약으로도 쓰고, 아무데서나 잘 자라니까 누구든지 다 먹을 수 있어.” 할머니가 이렇게 미나리를 예찬하자, 손주가 “미나리는 원더풀”이라고 맞장구를 칩니다. 할머니는 손주의 호응에 기특해하며 “그래 그래. 미나리 미나리. 원더플 미나리.”하고 가락을 넣어 노래를 부릅니다. 영화 제목인 [미나리]는 낯설고 척박한 미국 환경에서도, 여러가지 어려움 가운데도 포기하지 않고 삶의 뿌리를 내리고 정착하는 이민자들을 상징합니다. 실제로 미나리는 햇빛이 잘 들어오지 않는 습하고 그늘진 곳에서도 특유의 강한 생명력과 적응력으로 자라는 식물입니다.

믿음으로 이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야말로 생명력이 넘치는 원더플 크리스천입니다. 우리 삶에도 얼마나 많은 갈등과 위기가 있습니까? 아마 지금 예배를 함께 드리고 계신 우리 성도님들 가운데도 삶의 무게와 어려움으로 좌절하거나 낙심하며 살아가고 있는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에는 구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지금도 희망의 빛이 끊임없이 비추고 있습니다. 세상의 환난과 풍파가 닥쳐와도 미나리 같이 끈질긴 믿음이 우리로 하여금 은혜의 뿌리를 내리고 생명의 줄기를 뻗게 만들어줍니다. 오늘 저와 함께 말씀을 통하여 우리 삶에 찾아온 어려운 갈등과 위기를 극복하는 하나님의 은혜를 나누기를 소망합니다.

 

  1. 문제를 해결하시는 전능하신 하나님

제1차 선교여행을 떠난 사도 바울과 바나바는 ‘루스드라’라는 도시에 도착하게 됩니다. ‘루스드라’는 디모데의 고향입니다. 오늘날로 따지면 ‘터키’라는 나라에 속한 지역입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이곳에서 한 앉은뱅이를 만나게 됩니다. 오늘 말씀이 이 사람을 어떻게 소개하고 있는지 한 번 살펴봅시다. 사도행전 14장 8절 말씀입니다. “(행 14:8) 루스드라에 발을 쓰지 못하는 한 사람이 있어 앉았는데 나면서 앉은뱅이 되어 걸어본 적이 없는 자라” 여기 바울과 바나바가 만난 앉은뱅이에 대해서 3가지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첫째로, 그는 발을 쓰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둘째로, 나면서부터 앉은뱅이 된 사람입니다. 셋째로, 걸어본 적이 없는 사람입니다. 어떻게 보면 똑 같은 의미를 가진 말들을 무려 3번이나 반복해서 기록한 것이죠. 왜 이렇게 기록했을까요? 사도행전을 기록한 저자 누가이 직업은 ‘의사’입니다. 누가는 의사로서 자신의 소견을 말씀에 자세하게 기록했습니다. 의사인 자신이 봐도 이 사람은 절대로 걸을 수 없는 선천적 장애인이라는 것입니다. 치료가 불가능하다는 의사 누가의 소견을 볼 수 있습니다.

저는 성경을 볼 때마다 한 가지 특이한 점을 발견합니다. 그것은 성경에는 인간이 손써볼 방도가 없는 위기와 불행을 당하는 사람들이 자주 등장한다는 것입니다. 열 두 해 동안 혈루증을 앓은 여인, 날 때부터 소경이 된 사람, 딸이 죽은 회당장 야이로 등 그들이 겪고 있는 아픔과 문제들은 인간이 도저히 해결할 수가 없는 것들입니다. 이를 통해 성경은 한 사람의 인생에서 그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상황들과 이 세상 그 누구도 그 무엇도 도움이 될 수 없는 문제들이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오늘 본문도 마찬가지입니다. 본문이 이 앉은뱅이의 나이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지는 않기 때문에 이 사람이 몇 살인지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만일 성인이라면 적어도 20년 혹은 30년 이상 한 평생 앉은뱅이로 살아왔겠죠. 그 어떤 의사도, 그 어떤 약으로도 병을 치료할 수가 없습니다.

사람이 가장 낙심하고 좌절하는 순간은 언제 입니까? ‘희망이 사라질 때’입니다. 시간이 지나면 문제가 해결되거나, 상황이 나아지고 좋아질 것이란 희망이 사라질 때 인간은 낙심하고 좌절합니다. 러시아의 문호 [도스토예프스키]는 “희망이 조금도 없는 사람은 살수가 없다.”고 말했습니다. “희망 없이 사는 것은 살기를 중지한 것과 같다”고도 말했습니다. 단테가 쓴 소설 신곡에 등장하는 지옥을 들어가는 문 입구에는 다음과 같은 문구가 써 있었습니다. “여기에 들어가는 자는 모든 희망을 다 버린 자이다”

앞서 말씀드린 대로, 실제로 사람은 “시간이 지나면 상황이 나아지겠지”, 또는 “조금만 버티면 문제가 해결되겠지.”와 같은 희망을 볼 수 없을 때 크게 낙심하고 좌절하게 됩니다. 이 때부터 내 인생은 비극이며 불행으로 가득하다는 부정적인 감정들이 끊임없는 밀물처럼 흘러 들어옵니다. 실제로 이렇게 살아가면, 살아도 사는게 아닙니다. 암울한 현실은 죽지 못해 사는 생지옥… 마치 빠져나올 수 없는 지하감옥으로 변화합니다.

혹시 오늘 이 자리에 자신의 삶이 해결할 수 없는 불가능한 문제나 상황을 맞닥뜨려 마음이 낙심 된 분들은 없습니까? 치명적인 육체적인 연약함이나 큰 병으로 신음하는 분들도 계십니다. 시간이 지나도 몸이 호전되거나, 병이 사라지지 않고 낫지 않을 때 우리 마음은 낙심하고 좌절할 수밖에 없습니다. 개인의 어떤 문제나 가족의 문제 또는 사람들과의 관계의 문제, 회사의 문제나 비즈니스의 어려움으로 인해 찾아온 경제적인 부담은 우리로 하여금 한 숨 짓게 만듭니다. 또한 이런 해결할 수 없는 문제들은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의 인생은 불운하며 불행하다고 느끼게 만듭니다.

오늘 본문 속 등장하는 앉은뱅이의 삶이 그러합니다. 두 발을 쓰지 못한다는 것은 얼마나 큰 불행입니까? 태어나서 한 번도 걸어본 적이 없다는 것은 얼마나 큰 슬픔입니까? 이 당시 앉은뱅이들의 유일한 생계수단은 구걸이었습니다. 사람들이 많이 지나다니는 시장 입구 같은 거리에서 동냥을 구하는 것이 목구멍에 풀칠하는 유일한 수단입니다. 그러니 이 앉은뱅이가 날마다 자신을 지나치는 수많은 사람들을 보고 살지 않았겠어요? 다들 문제없이 걸어 다니고, 뛰어다닙니다. 그때마다 “왜 나는 이렇게 불행하지? 왜 나는 이렇게 불운하지?”하는 생각을 어찌 한 번이라도 하지 않았겠습니까? 적어도 수백 번은 했을 것입니다. 남들의 도움이 없으면 화장실도 가지 못하고, 한 사회의 소속된 구성원으로써 제대로 인간 구실도 못하는 자신의 처지에 밤마다 얼마나 많은 눈물도 흘렸겠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이와 같은 비극적인 현실에 처한 사람들의 이야기로 가득합니다. 또한 이들의 삶에 찾아온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보여주며 눈에 보이는 현실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이 세상을 다스리시는 살아 계신 창조주 하나님이 계십니다. 그 분이 바로 우리의 소망되심을 보여줍니다. 말씀을 함께 더 읽겠습니다. 9-10절입니다. “(행 14:9) 바울의 말하는 것을 듣거늘 바울이 주목하여 구원받을 만한 믿음이 그에게 있는 것을 보고 (행 14:10) 큰 소리로 가로되 네 발로 바로 일어서라 하니 그 사람이 뛰어 걷는지라” 하나님께서는 말씀을 듣고 믿은 앉은뱅이를 고치셨습니다. 10절 말씀을 보면 이 사람이 일어나서 뛰고 걸었다고 했습니다. 기적이 일어난 것이죠. 사람이 해결할 수 없는 육체적인 질병이란 어려운 상황과 문제를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주님의 능력으로 해결해주시고 친히 고쳐 주셨습니다.

사도행전에는 앉은뱅이를 고친 사건이 두 번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는 사도행전 3장에 나오는 예루살렘 성전 미문에 있던 앉은뱅이 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고 말하며 손을 잡아 일으킨 사건입니다. 또 하나는 오늘 본문 사도행전 14장에 나오는 루스드라의 앉은뱅이가 사도 바울의 일어나라는 외침에 일어나는 사건입니다. 성경이 이와 같이 비슷한 이야기를 반복하여 기록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성경에서 하나님의 능력으로 인한 기적이 일회적으로 끝나지 않고 복음이 선포되는 곳에서 계속해서 반복되고 되풀이되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님 시대에만 기적과 치유가 나타난 것이 아니라, 사도들의 시대에도 동일하게 나타났으며, 한 번, 한 차례가 아니라 여러 번 반복해서 불가능한 상황과 문제들을 해결하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났습니다. 성경은 이를 통해 오늘날 우리 시대에도 살아 계신 하나님의 능력이 계속해서 나타날 수 있음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성경 속 기적을 일으키시고 병자들을 치유하신 하나님께서 지금도 우리 시대에 동일하게 살아 계심을 믿으십니까? 그렇다면 오늘 본문에서 선천적으로 두 다리를 쓸 수 없게 태어난 이 앉은뱅이의 병을 치료하신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이 우리 삶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나고 적용될 수 있다는 사실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주님의 말씀인 성경을 통하여 바로 이와 같은 소망과 위로를 우리에게 주고 싶어하십니다. 하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분이십니다. 따라서 지금으로부터 2천년 전 루스드라에서 앉은뱅이를 일으키신 전능하신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동일하신 그 능력으로 우리들의 삶에 찾아온 불가능해 보이는 문제들을 해결해주실 수 있으십니다.

 

  1. 문제를 해결하는 믿음

다시 한번 정리하고 넘어갑시다.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주님은 우리 삶의 모든 불행과 모든 아픔을 고치시고 치료하실 수 있는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갖고 있는 문제 중에 하나님께서 해결하지 못할 문제는 없습니다. 자, 그럼 다음 단계로 넘어 가십시다. 그렇다면 무엇이 수많은 병자들 가운데 루스드라의 앉은뱅이의 삶에 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게 한 것일까요? 그것은 바로 그의 ‘믿음’이었습니다. “(행 14:9) 바울의 말하는 것을 듣거늘 바울이 주목하여 구원 받을 만한 믿음이 그에게 있는 것을 보고” 성경은 앉은뱅이가 일어날 수 없는 불가능한 상황 속에서도 기적적으로 일어날 수 있었던 사건에 대해서 그 원인을 한 가지로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전능하신 하나님에 대한 그의 ‘믿음’이었습니다. 바울이 기적을 행하기 전 그 사람에게서 본 것이 바로 이 믿음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떤 사람의 삶 속에서 기적을 나타내시고 능력을 베푸시기 이전에 먼저 그의 믿음을 보기를 원하십니다.

복음서를 보면 예수님께서 사람들을 고쳐 주실 때 그들의 ‘믿음’이 그들을 고치거나 어려운 난관과 위기의 문제에서 구원해 주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를 들면, 자신이 예수님의 온자락만 만져도 병이 나을 것이라고 믿었던 열 두 해 동안 혈루증을 앓던 여인의 경우, 예수님은 그녀에게 그의 믿음이 그를 구원하였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마가복음 5장 34절 말씀입니다. “(막 5:34) 예수께서 가라사대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지어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보기 위해 주님을 둘러 쌌습니까? 주님의 능력은 예수께서 능히 고치실 것이란 믿음을 갖고 그의 옷자락을 만진 이 여인에게 나타났습니다. 여리고 성에 살던 소경 바디매오도 예수님만이 자신의 눈을 고쳐 주실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눈을 고쳐 주신 후 그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마가복음 5장 52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막 10:52)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니 저가 곧 보게 되어 예수를 길에서 좇으니라” 이번에도 믿음이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내었습니다. 저주받은 병이라 여겨지던 문둥병에 걸린 열 사람이 멀리 서서 예수님을 향해 큰 소리로 그들을 고쳐 달라고 간구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을 주셨습니다. 나병이 나은 열 사람 중 한 사람인 사마리아 사람이 예수님께 나아와 엎드려 감사를 드렸습니다. 그 때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눅 17:19) 그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더라” 이번에도 예수님은 그의 믿음이 그를 구원하였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바울이 앉은뱅이의 믿음을 보고 그에게 일어나라 말한 것처럼, 예수님께서 병든 사람들을 고치신 후 그들의 믿음이 그들을 구원하였다고 말씀하신 것에서 알 수 있듯이 하나님의 역사가 우리 삶에 나타나는데 믿음은 필수적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이 남성은 평생 하반신 마비환자로 살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그가 가진 믿음을 통하여 불가능해 보이는 문제를 능히 해결하셨습니다. 이 세상에는 사람의 손에 달린 문제가 있고, 하나님의 손에 달린 문제가 있습니다. 우리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상황이나 문제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십시다. 나는 안 되지만, 나는 못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능히 고치시고, 치료하시고, 회복시키시고, 해결하실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주님 앞에 나아가십시오. 겨자씨 만한 믿음만 있어도 기적은 일어날 것이라고 주님은 약속하셨습니다.

  1. M. 바운즈 목사님께서 쓰신 『기도의 심장』이라는 책에서 나온 인용 구절을 함께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믿음은 불가능한 것을 이룬다. 왜냐하면 믿음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대신해 일하시도록 하는 것이고, 그분은 전능하시기 때문이다. 믿음의 능력에는 한계와 제한이 없다. 우리의 마음에서 의심을 몰아내고 불신앙을 추방한다면 우리가 하나님께 구하는 것이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말씀하신 모든 것을 믿음이 있는 자에게 허락하신다.” 지금 우리가 읽은 이 글 그대로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말씀하신 모든 약속을 믿음이 있는 자에게 성취하십니다. 믿음은 불가능한 것을 이룹니다.

미군이 베트남 전쟁에 참전했을 때 일입니다. 진군을 하던 미군은 갑자기 순식간에 나타난 적군의 습격에 큰 피해를 입게 되었습니다. 총알이 사방에서 날아옵니다. 바로 옆에서 포탄이 고막이 찢어질 듯한 큰 소리로 뻥뻥 터집니다. 많은 미군 병사들이 총에 맞아 죽었습니다. 한편 저 앞에서 미국 병사가 몸에 총상을 입고 피를 흘리며 자리에 쓰러져 있습니다. 게릴라전을 치르던 베트콩이 한 발자국 한 발자국 다가옵니다. 얼른 저 병사를 데리고 와야 합니다. 이대로 두면 적군에게 죽을 것은 불 보듯 뻔합니다. 그러나 끊임없는 적군의 총격에 어찌할 수가 없습니다. 이 때 한 미군 병사가 자기 시계를 힐끗 처다 봅니다. 그리고는 엎드려 숨어 있던 곳에서 뛰어나와 부상당한 다른 병사가 있는 곳으로 낮은 자세로 달려갔습니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에 미군들은 본능적으로 사격을 하며 그를 엄호했습니다. 부상당한 전우를 부축하여 소대가 있는 곳으로 돌아왔습니다. 모두 목숨을 걸고 전우를 구해온 그를 보며 대단하다고 칭찬하며, 동시에 그가 총알이 빗물처럼 쏟아지는 곳을 달려나갔다고 미쳤다고 했습니다. 미군 중사가 그를 보고 물어봅니다. 자네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었나? 그 때 이 병사가 말했습니다. “네. 제가 고향을 떠나기 전에 저희 어머니께서 저를 위해 매일 기도해 주시겠다고 약속해 주셨습니다. 제가 시계를 보니 어머니께서 저를 위해 기도하겠다고 약속하셨던 그 시간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저희 어머니의 기도를 믿고 달려나갈 수 있었습니다.” 믿음은 무엇입니까? 눈에 보이지 않아도, 내 삶에 하나님께서 함께하심을 믿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믿음장이라고 불리는 히브리서 11장 1절은 다음과 같이 시작합니다. 쉬운성경 번역번으로 함께 읽겠습니다. “쉬운성경 (히브리서 11장 1절) “믿음은 우리가 바라는 것들에 대해서 확신하는 것입니다. 또한 보이지는 않지만 그것이 사실임을 아는 것입니다.” 믿음은 지금 당장은 눈에 보이지 않아도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말씀들이 반드시 우리 삶 속에서 이루어질 것을 확신하는 것입니다.

  1. 믿음을 자라게 하는 하나님의 말씀

그렇다면 루스드라의 앉은뱅이는 어디서 이와 같은 놀라운 믿음이 생겨났을까요? 그가 가진 믿음은 바울이 전파한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가운데 주어졌습니다. 오늘 말씀 9절을 다시 봅시다. “(행 14:9) 바울의 말하는 것을 듣거늘 바울이 주목하여 구원 받을 만한 믿음이 그에게 있는 것을 보고” 여기 9절에 “바울의 말하는 것을 듣거늘”이란 말은 헬라어 원어를 보면 그가 경청하여 처음부터 끝까지 바울의 말하는 것을 계속해서 듣고 있다는 리앙스를 담고 있습니다. 루스드라의 앉은뱅이가 바울이 전파한 하나님의 말씀, 곧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들을 때 그의 마음에서는 믿음이 자라났습니다. 로마서 10장 17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롬 10:17)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놀라운 사실은 그에게 하나님의 놀라운 기적이 나타날 만한 믿음이 생기기까지 오랜 세월이 걸리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하루도 지나기 전 불과 몇 시간 밖에 안 되었을 터인데 그 짧은 시간 들은 말씀이 이 사람 마음 가운데 믿음의 불을 일으켰습니다. 이것이 살아 있고 운동력 있는 하나님의 말씀의 힘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생명력이 넘치는 믿음을 더하여 줍니다.

사람의 마음은 무엇을 보고 듣느냐에 따라 그의 심령의 상태가 달라집니다. 세상이 들려주는 음성에 귀를 기울여 보십시오. 뉴스를 볼 때마다 이 세상에서 하루가 멀다 하고 끊임없이 일어나는 사건사고 소식들은 우리 마음을 낙심케 만듭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들려주시는 음성은 다릅니다. 주님의 음성은 언제나 우리에게 기쁨과 평안함을 가져줍니다. 하나님의 음성은 우리를 치료하고 우리에게 참 자유를 줍니다. 그래서 주님의 음성을 들을 때마다 우리의 영혼은 살아나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를 새롭게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에게 속한 양은 주님의 음성을 듣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요 10:27)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저희를 알며 저희는 나를 따르느니라 (요 10:28)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날마다 주님의 말씀을 듣고 살아갈 때, 우리 안에서 믿음이 자라납니다. 그리고 믿음은 우리 마음에 새로운 소망을 부어주고, 믿음은 우리 삶에 주님의 놀라운 은혜를 나타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어려운 상황과 문제만 바라보고 있으면 마음에 낙심과 절망이 찾아옵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하나님을 바라보면 우리 마음에 새로운 희망이 찾아옵니다. 주께서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마음을 강하고 담대하게 가지십시오. 말씀 속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약속을 믿음으로 붙잡고 살아가십시오. 어디에서나 강한 생명력으로 자라나는 원더풀 미나리처럼, 고난과 역경 속에서도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가지고 생명력 넘치는 ‘wonderful’한 크리스천으로 살아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