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1003 사도행전 강해 (21) 열심으로 주님을 섬기는 교회 (사도행전 13장 2-3절)

 

         대지 1. 주를 섬기는 교회

교회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교회에는 예배를 드리려는 목적을 갖고 오는 사람들도 있습니다만, 개인적인 목적을 위하여 교회에 오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단순히 재미를 위해서 오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민사회에서 한국 사람을 만나기 위해서 오는 사람도 있고, 성도들을 자신의 비즈니스 손님으로 만들기 위해 오는 사람도 있습니다. 물건을 팔기 위해 오는 사람도 있고, 남 모를 속사정을 가진 사람, 꿍꿍이를 가지고 오는 사람 등등 수많은 사람들이 다양한 목적을 가지고 교회 문을 열고 들어옵니다.

교회 안에 이처럼 다양한 목적을 가지고 신앙생활 하는 사람들이 교회의 주류를 이룬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 교회는 결국 서로 다투고 분열할 수밖에 없습니다.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서로 지향하는 목적이 다르고, 서로 원하는 교회의 모습이 다른데 왜 안 싸우겠습니까? 교회가 주님을 섬기는 본래의 목적을 잃어버릴 때 비극은 시작됩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우리가 잘못된 동기를 가지고 교회에 들어오는 사람들을 막을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의 마음이란 것이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누가 사람의 속마음을 알 수 있습니까? 교회는 계속해서 다양한 사람들이 들어올 것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막을 수 없고, 사실 막아서도 안 됩니다. 우리는 오히려 이 위기 속에서 기회를 발견해야 합니다. 비록 처음에는 잘못된 동기와 잘못된 마음으로 교회에 들어왔는지 몰라도, 점차 코너스톤 교회에서 우리와 함께 시간을 보내며, 그의 마음이 변화될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합니다. 주를 섬기고자 하는 열정이 들어가도록 이끌어 주어야 합니다. 우리들도 다 우리보다 앞선 믿음의 선배들의 섬김과 헌신으로 마음의 변화를 이룬 경험을 갖고 있지 않습니까?

사도행전 13장에 등장하는 안디옥 교회는 다양한 사람들이 함께 모여 있는 공동체였습니다. 성도들은 피부색도 다르고, 태어나고 자란 출신 지역도 달랐습니다. 성도들 간 사회적 신분도, 계급도 달랐습니다. 어떤 이들은 노예로 보이고, 또 어떤 이들은 왕족 혹은 귀족으로 추정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어떤 이는 기회가 없어 배우지 못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당대 최고의 학파에서 공부한 사람도 있었습니다. 이처럼 안디옥 교회는 전혀 다른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었으나, 하나의 공동체로서 서로 함께 신앙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과연 무엇이 이처럼 서로 다른 사람들을 하나로 묶어 주었을까요? 우리는 이 질문에 대한 단서를 2절 말씀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2절 말씀은 안디옥 교회를 묘사하며 이렇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주님을 섬겼다”. 안디옥 교회는 주님을 섬기는 교회였습니다. 그것이 안디옥 교회를 하나 되게 하였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는 오늘 이 아침에 이 자리에 계신 여러분께 한 가지 질문을 드리고 싶습니다. 여러분은 누구를 섬기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아버지 여호와 하나님만을 섬기며 살아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우리가 함께 예수 그리스도를 섬기는 삶을 살아갈 때, 비로소 코너스톤 교회는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예화/예시/예증 (1)

교회는 마치 하나의 오케스트라와 같습니다. 오케스트라 단원은 적게는 70명에서 많게는 120명으로 구성이 됩니다. 단원들 전부 다 다른 소리를 내는 악기를 가지고 있습니다. 크게 나누면 현악기, 목관악기, 금관악기, 타악기로 볼 수 있습니다. 바이올린, 클라리넷, 호른, 심벌즈, 튜바, 트럼본, 바순, 비올라, 첼로, 팀파니 등 다양한 악기가 있습니다. 공연이 한참 클라이막스에 도달할 때 즈음 바이올린을 연주가가 지휘자를 보지 않고 갑자기 자기 마음대로 고음과 저음을 왔다 갔다 하며 연주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플루트 연주가가 자기 마음대로 플루트를 아무 때나 불렀다가 멈추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심벌 연주자가 임의대로 큰 소리라는 심벌즈를 쾅쾅 치고, 리듬을 담당하는 팀파니 연주자가 자기 마음대로 박자를 3/4박자, 4/4박자 왔다 갔다 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음악이 듣기 싫은 소음으로 변질됩니다. 자기 마음대로 악기를 연주하는 단원들이 모인 오케스트라의 음악은 듣는 이들에게 불쾌함을 줄 수밖에 없습니다. 그들의 음악을 듣는 관객은 인상을 찌푸릴 것입니다. 또 결국 연주하는 오케스트라 단원들도 불협화음에 짜증을 느끼거나, 자신이 하는 일에 보람은 커녕 싫증을 느끼며 자리를 박차고 나갈 것입니다.

다양한 악기와 많은 단원을 가진 오케스트라일수록 하나 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처럼 각기 다른 악기를 가진 120명이나 되는 연주가들이 앙상블을 이루며 기쁨과 감동을 주는 아름다운 음악을 연주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는 역할을 가진 사람이 바로 지휘자입니다. 오케스트라 단원들은 공연 내내 지휘자만을 바라보며 연주합니다. 지휘자가 연주하라고 손짓을 주면 연주하고 멈추라고 신호를 주면 멈춥니다. 지휘자가 있기에 그 수많은 악기들의 소리가 하나로 아우러져서 아름다운 음악을 만들어냅니다. 교회의 지휘자가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교회는 지휘자 되시는 예수님만을 바라보고, 예수님만을 섬기며 그분의 명령을 따라 살아갈 때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그 때 비로소 교회에는 음악이 주는 큰 기쁨과 깊은 감동처럼 아름다운 사랑의 교제가 머무는 공동체가 됩니다.

 

         적용 및 정리 (1)

안디옥 교회가 바로 그러한 교회였습니다. 안디옥 교회에는 정말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 모두가 주님을 섬길 때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일들을 이 교회는 감당했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수많은 교회들이 이 교회를 롤모델로 삼고 있습니다. 교회의 사명은 모든 사람이 주님을 섬길 수 있도록 하는데 있습니다. 코너스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자리에 앉아 있는 우리 모두가 하나님 아버지를 섬기며 구주 예수를 위하여 살아가는 사람들이 될 수 있도록 변화시키는데 우리 교회의 존재 목적이 있습니다. 우리는 단순히 웃고 즐기며 좋은 시간을 보내기 위해 이 자리에 있는 것은 아닙니다. 교회는 그 이상의 것을 추구합니다. “주님을 섬기는 것” 입니다. 다시 한번 여쭈어 봅니다. 마음 속으로 대답하십시오. 여러분은 누구를 섬기기 위해서 교회를 찾아오셨습니까? 자신의 탐욕입니까? 아니면 예수 그리스도입니까? 우리 모두가 예수를 섬기며 살아가 수 있게 되기를 축복합니다. 안디옥 교회는 첫째로 예수님을 섬기는 교회였습니다.

         대지 2. 열심을 다하여 주님을 섬긴 교회

안디옥 교회는 둘째로, 열심을 다하여 주님을 섬긴 교회였습니다. 2절 말씀을 다시 보십시오. 주를 섬겨 금식할 때에 성령이 가라사대…” 안디옥 교회 성도들은 금식을 했습니다. 금식은 무엇입니까? 일정 기간 동안 음식을 먹지 않는 것입니다. 혹시 신앙생활 하면서 금식해보신 적 있습니까? 그렇다면 어떤 이유로 금식하셨습니까? 금식의 목적은 크게 네 가지로 볼 수 있습니다. 회개, 간구, 헌신, 슬픔의 표현입니다. 먼저 회개를 위한 금식이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자신의 죄를 하나님께 회개하기 위해서 금식합니다. 하나님께 자신의 죄를 회개하며 “하나님 제가 여호와께 범죄하였나이다”하고 고백하며, 자신의 악함을 뼈저리게 느끼는 한 영혼이 하나님 앞에서 회개의 의미로 금식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대속죄일에 하나님 앞에 모여 자신들의 죄를 회개하며 하루 종일 금식했습니다.

두 번째는 간구를 위한 금식입니다. 인생에서 내 힘으로는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어떤 큰 문제나 복잡한 상황을 맞닥뜨렸을 때 하는 금식입니다. 성경에는 건강과 질병의 치료를 위해서 금식한 경우들이 여러 번 나옵니다. 또한 에스더는 “죽으면 죽으리라”는 각오 아래 하나님의 보호를 간구하며 금식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의 일생에 큰 전환점을 앞두고, 중대한 선택의 기로에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간구하며 금식했습니다. 이처럼 금식은 간절한 기도의 응답을 위해서 하기도 합니다.

세 번째는 헌신을 위한 금식입니다. 특별히 어떤 악한 죄를 짓거나, 당장 해결해야 하는 급한 문제가 특별히 없다 하더라도, 자신의 영혼을 하나님 앞에서 정결하게 하여 주님께 자신의 삶을 거룩하게 드리려는 목적으로 하는 금식도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경우 특별한 일이 없어도 하나님을 향한 더 깊은 사랑과 헌신을 드리기 위하여 금식하곤 했습니다.

네 번째는 슬픔의 표현으로써 금식입니다. 예를 들면, 사울 왕과 요나단이 죽자 다윗은 슬퍼하며 금식했습니다. 느헤미야는 예루살렘 성벽이 무너지고 성문들은 다 불에 탔다는 소식을 듣고 슬퍼하며 금식했습니다. 사람이 정말 슬프면 밥이 안 넘어갑니다. 장례식장에 가보십시오. 사랑하는 가족을 잃어버린 이는 식사하기를 거절합니다. 이스라엘은 국가적인 재난을 당했을 때도 온 민족이 함께 슬퍼하며 금식했습니다.

이처럼 성도들이 금식하는 데는 여러가지 목적과 이유가 있습니다. 자, 그렇다면 오늘 본문에서 안디옥 교회 성도들의 금식은 이 중에 어떤 목적과 가장 부합할까요? ‘회개’, ‘간구’, ‘슬픔의 표현’ 보다는 ‘헌신’을 위한 금식에 가장 가까워 보입니다. 안디옥 교회 성도들은 주님을 섬기는 일에 진지했습니다. 금식하며 예배하는 이들의 모습은, 주님을 섬기는 일이 안디옥 교회 성도들에게 얼마나 중요했는가를 잘 보여줍니다. 참 이와 같이 온 맘 다하여 주님을 섬기는 사람들과 함께 신앙생활 하는 안디옥 교회 성도들이 부럽지 않습니까?

그러나 제 눈에는 우리 코너스톤 교회 안에서도 이와 같은 분들이 보입니다. 목회자인 저를 부끄럽게 만들 정도로 주를 향한 뜨거운 마음을 가지고 주를 섬기며 살아가는 분들이 제게는 보입니다. “내가 저 분보다 주님을 더 사랑한다고 감히 말할 수 있을까? 내가 저 분보다 주님을 더 잘 섬긴다고 과연 말할 수 있을까?” 제가 이렇게 생각이 들게끔 하는 성도님들이 우리 코너스톤 교회에도 계십니다. 그래서 저는 그 분들만 생각하면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고 제 마음이 즐겁습니다. 왜냐하면 그 분들이 제가 가장 자랑하는 저의 동역자들이요, 저와 함께 영적 전쟁을 감당하며, 저와 함께 하나님 나라 최전선에서 싸우는 가장 귀한 전우들이기 때문입니다.

단순히 죽어서 천당에 들어가기 위한 신앙생활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으로 말미암아 이미 시작된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기 위하여 자신의 삶을 하나의 밀알처럼 헌신하며 교회와 성도들을 섬기며 살아가는 귀한 코너스톤 교회 성도님들이 제 눈에는 지금도 보입니다. 이 헌신된 분들이 저희 교회의 겨자씨들입니다. 지금은 이 분들의 섬김이 매우 작고 하찮게 보일지 몰라도, 시간이 지나면 반드시 아름다운 열매로 돌아오게 될 것입니다. 교회의 헌신된 일꾼은 언제나 소수였습니다. 그러나 이 열심 있는 소수의 섬김으로 교회는 더욱 성숙해져 가고 성장해 갈 것입니다. 코너스톤 교회도 그와 같이 아름답게 열매 맺으며 성장해 갈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렇다면 ‘지금 여러분은 어디에 서 있는가?’하는 질문입니다. 우리는 열정을 가지고 주님을 섬기고 있습니까? 하나님을 떠나면 벌받을 것 같고, 그렇다고 제대로 신앙생활 하자니 헌신이 부담스러워서 다람쥐 쳇바퀴 굴러가듯 이도 저도 아닌 상태로 신앙생활 하고 계시진 않습니까? 예수님께서 교회를 보시며 가장 안타까워 하시는 모습 중 하나가 바로 미지근하게 신앙생활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으려면 제대로 믿어야 하는데, 한 발은 교회에, 다른 한 발은 세상에 두고 살아가는 이중적인 태도를 가진 성도들은 예수님의 마음을 아프게 만듭니다. 주님은 자신의 목숨을 바쳐 우리를 구원하셨기에, 그 귀한 핏값으로 사신 새 생명을 가지고 죄와 타협하며 살아가는 이들을 보실 때 주님은 아파하십니다. 이도 저도 아닌 이중적인 모습으로 명목상의 신앙만 유지하며 그저 그런 상태로 미지근하게 신앙생활 하는 라오디게아 교회의 성도들을 향하여 예수님은 요한계시록에서 강력하게 책망하셨습니다. 요한계시록 3장 15-16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새번역성경] “(계 3:15) 나는 네 행위를 안다. 너는 차지도 않고, 뜨겁지도 않다.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면 좋겠다. (계 3:16) 네가 이렇게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않고 차지도 않으니, 나는 너를 내 입에서 뱉어 버리겠다.” 이처럼 이도 저도 아닌 어중간한 자세로 주님을 섬기는 육적인 그리스도인들에 대하여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주님의 입에서 토해버리겠다는 표현을 사용하시며 강력하게 책망하셨습니다. 열정 없이 주님을 섬기는 삶은 그리스도인의 표준이 아닙니다. 한국 사랑의 교회 원로 목사님이신 고 옥한흠 목사님께서 살아 생전에 하신 설교 중 [표준을 낮게 잡으면 망한다]는 제목의 설교가 있습니다. 들을 때마다 제 가슴을 울립니다. 우리 주님을 섬기는 데 있어, 주일날 예배 드리고 교회 문을 나가며 그리스도인으로서 나의 모든 의무가 다 끝났다고 생각하는 태도가 우리의 표준이 되어서는 결코 안 됩니다. 그 표준은 망하는 표준입니다. 또한 옆에 있는 성도와 비교하는 것도 우리의 표준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내가 그래도 저 아무게 집사님 보다는 믿음이 좋지. 내가 그래도 저 사람보다는 괜찮은 그리스도인이야” 이런 표준 역시 망하는 표준입니다. 그럼 주님을 섬기는 우리의 표준을 어디에 두어야 할까요? 바울의 표준을 봅시다. 고린도전서 11장 절입니다. “(고전 11:1)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 되라” 바울의 표준은 예수님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열정적으로 하나님을 위해 사셨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 그 분의 전부였습니다. 바로 그 본을 보여주신 예수님처럼 살아가는 삶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표준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표준입니다.

예수님은 안디옥 교회 성도들처럼 진지하게 열심을 다하고 주님께 충성을 다하여 주님을 섬기는 이들에게는 생명의 면류관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요한계시록 2장 11절 말씀입니다.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 안디옥 교회 성도들은 예수님을 유별나게 섬겼습니다. 얼마나 열심을 가지고 섬겼는지, 세상 사람들은 안디옥 교회 성도들이 살아가는 삶의 스타일을 호칭하기 위해서 새로운 용어까지 만들어야 했습니다. 안디옥 교회 성도들처럼 열심을 가지고 주님을 섬기는 사람을 뭐라고 불렀을까요? 사도행전 1장 25-26절입니다. “(행 11:25) 바나바가 사울을 찾으러 다소에 가서 (행 11:26) 만나매 안디옥에 데리고 와서 둘이 교회에 일 년간 모여 있어 큰 무리를 가르쳤고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컫음을 받게 되었더라” 바울과 바나바 그리고 안디옥 교회 성도들이 열정을 가지고 주님을 섬기자, 세상 사람들이 그들을 뭐라고 불렀습니까? “Christian!” “그리스도인!” 우리나라 말로 바꾸면 “아, 저 예수쟁이들!”입니다. 얼마나 정확한 표현입니까? 예수가 삶의 중심이고, 예수가 삶의 모든 것인 사람들! 그래서 “예수쟁이”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입니다. 안디옥 교회 성도들은 누가 봐도 예수쟁이들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열심을 갖고 주님을 섬겼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열정적으로 주님을 섬긴 안디옥 교회 성도들 덕분에 우리가 지금도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립니다. 이 이름이 얼마나 좋습니까? 우리 신앙의 정체성을 이보다 더 잘 보여주는 표현이 어디 있습니까? “Christian!”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섬기며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예화/예시/예증 (2)

오케스트라 단원들은 공연 시작에 앞서 무대에서 워밍업을 합니다. 이 때 각 악기를 체크하는 시간을 갖는데 빼놓지 않고 하는 거이 바로 조율 즉 ‘튜닝’입니다. 바이올린을 든 악장이 자리에서 일어서서 머리를 끄덕입니다. 그럼 오보에’ 수석주자가 A음(계이름 ‘라’)을 길게 냅니다. 이 소리에 맞춰 악기들이 튜닝을 합니다. 그리고 긴 침묵이 흐르고 난 후에 지휘자가 관객들의 뜨거운 박수 갈채와 함께 등장합니다. 교회가 오케스트라면, 지휘자는 예수님이라고 했죠? 주님께서 우리 삶을 지휘하시기 전, 먼저 우리 마음이 잘 튜닝 되어 있는지 다시 한번 점검해 봅시다. 열심을 가지고 주님을 섬길 마음을 준비가 되어 계십니까? 지휘자 되시는 주님의 인도하심에 내 삶을 온전히 맡겨 드리며 어디로 인도하시든지 열심을 다해 따라갈 준비가 되어 계십니까?

 

적용 및 정리 (2)

18세기 영국에서 [존 웨슬리]와 함께 감리교 운동을 시작했던 설교자 [조지 휫필드]. 그는 얼마나 주님을 위해서 열심히 살았는지 사람들이 그에게 “불꽃처럼 타오른 설교자”라고 별명을 붙여주었습니다. 하루는 사람들이 와서 조지 휫필드에게 “좀 쉬면서 하십시오”하고 말했습니다. 그 말에 휫필드는 다음과 같은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녹슬어서 없어지느니, 차라리 닳아서 없어지는 것이 더 낫습니다. 저는 닳아서 없어지는 망치가 되지, 녹슨 망치가 되고 싶지 않습니다.” 조지 휫필드는 그의 고백처럼, 56년이란 짧은 인생을 그가 사랑하는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섬기며 온전히 불태우며 살았습니다.

 

결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인생은 속히 지나갑니다. 한 번 뿐인 우리의 인생, 무엇에, 어디에 열정을 불태우며 살아가시겠습니까? 안디옥 교회 성도들처럼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하여, 열정적으로 주님을 사랑하고 섬기며 우리 남은 삶을 살아갑시다. 주를 향한 열심 있는 헌신을 통하여, 하나님께는 영광을 돌리는 삶, 세상에는 커다란 사랑과 섬김의 발자국을 남기는 복된 삶이 되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