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806 모든 사람에게 열린 복음 (이사야 56장 1-8절)

이사야서는 총 66장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를 내용에 따라 총 3부분으로 구성지어 나눌 수 있습니다. 첫째 부분인, 1-39장까지는 멸망 직전의 상황에 놓인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회개하고 의를 행할 것을 촉구하는 내용입니다. 둘째 부분인 이사야 40-55장까지는 멀지 않음 미래, 바벨론에 의해 멸망하여 타지에서 포로생활을 하게 될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하여 그들을 바벨론의 손에서 구원하고 황무지가 된 땅을 회복시켜주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담고 있습니다. 마지막 셋째 부분은 56-66장입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이사야 56장이 바로 이사야서의 3부의 시작점입니다. 이사야서의 셋째 부분은 이스라엘이 미래에 원수 바벨론로부터 구원받아 포로의 신분을 벗어버린 후, 다시 약속의 땅으로 돌아온 이후 시대를 배경으로 주어진 예언의 말씀입니다.

페르시아 왕 고레스가 바벨론을 정복하게 됩니다. 이후 페르시아 왕 고레스는 바벨론 땅에서 노예로 살고 있던 피지배국 백성들에게 다시 그들의 고국으로 돌아가서 살 수 있는 이주 자유 정책을 선포합니다. 이에 따라 바벨론 땅으로 강제 이주 당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약속의 땅과 예루살렘으로 돌아갈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사야 40-55장을 통해서 약속하신 내용이 역사를 통해서 성취되는 장면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에서 보낸 연수가 약 70년이나 됩니다. 두 세대나 지났으니, 어느 정도 바벨론에서 정착하고 처음보다는 비교적 안정된 삶을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고국으로 돌아가서 삶을 새롭게 시작한다는 것은 특히 농경 중심의 사회에서 쉬운 결정이 아니었습니다. 부모 입장에서는 이스라엘 갔다가 먹고 살 길이 없으면 당장 온 식구가 굶어 죽을 위기에 놓이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만명의 사람들이 바벨론을 떠나 하나님께서 그들의 조상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땅으로 돌아왔습니다. 고향에 돌아온 그들 앞에 펼쳐진 풍경은 절망적이었습니다. 바벨론에 의해 성벽과 성전은 불타 없어졌습니다. 집과 토지 역시 전소되어 황무지가 되어 버렸습니다. 도저히 사람이 살 수 없는 곳입니다.

요즘 서부에서 산불로 인해서 심각한 피해를 입고 있지 않습니까? 켈리포니아 뿐만 아니라, 오리건 주도 산불 피해가 심각합니다. 한 남성이 산불로 인해서 완전히 다 타버리고 폐허가 되어버린 자신의 집을 보며 두 눈에서 눈물을 흘립니다. “We’ve lost everything.” (우리는 모든 것을 다 잃어버렸습니다.) 불에 타 버린 마을은 한 마디로 쓰레기장이나 다름이 없었습니다. 어디서부터 복구를 시작해야 하는지, 어디서부터 손을 써야 하는지 속수무책인 상황입니다. 오늘 본문 속 이스라엘 땅으로 돌아온 백성들의 심정이 바로 이런 상황에 놓인 것과 흡사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바벨론의 손에서 구원해 주시고, 분명 이스라엘 땅을 회복시켜 주시겠다고 하셨는데… 현실은 전혀 달라 보였습니다. ‘하나님께서 과연 일하고 계신 것이 맞나? 하나님께서 그의 약속을 잊어버리신 것은 아닐까?’하고 의구심이 들 정도로 이스라엘 땅은 황폐한 상태였습니다. ‘그래도 이스라엘 땅 가면 막상 생각한 것보다는 괜찮겠지…’, ‘설마 하나님께서 회복시켜 주신다고 했는데 살 수는 있겠지…?’하고 자신에게 주문을 걸며 일말의 희망을 가지고 이주를 결심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크게 실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불에 타 재밖에 남은 것이 없는 성읍과 쓸모없는 황무지가 되어버린 논밭을 보며 사람들은 한숨밖에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보니 하나님에 대한 실망감, 배신감, 그리고 주님의 약속에 대한 불신과 의심이 이스라엘 백성들 마음에 점차 떠올라왔습니다. 오늘 본문은 바로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주신 회복의 약속에 대하여 흔들리는 믿음에 놓인 이스라엘을 향해 주어진 말씀입니다.

가장 먼저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구원과 회복이 가까이 왔음을 끝까지 신뢰하며 그들의 삶 속에서 공평하게 행동하고 정의를 행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1절입니다. “(사 56:1)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너희는 공평을 지키며 의를 행하라 나의 구원이 가까이 왔고 나의 의가 쉬 나타날 것임이라 하셨은즉” 하나님은 구원의 가까이 왔고, 주님의 정의가 이제 곧 나타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와 같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으며 이스라엘 백성들이 계속해서 포기하지 말고 공평과 정의를 지키라고 명령하셨습니다. 하나님의 구원과 정의의가 완성되는 날이야 말로 그의 백성이 공평하고 정의롭게 살아가도록 만드는 동인이 됩니다.

만일 여러분이 대기업 재무과에서 일하는 회사원이라고 한 번 상상해 봅시다. 대기업에 다니는 자부심이 상당히 큽니다. 회사 주식도 상당히 많이 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듣게 됩니다. 회사 3년 안에 부도가 날 가능성이 100%나 됩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일단 가지고 있는 주식 다 팔아야죠. 그리고 다른 직장으로 이직 준비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반대 장면을 한 번 생각해봅시다. 여러분이 신생 IT회사의 말단 직원으로 들어왔습니다. 월급도 쥐꼬리만큼만 줍니다. 평생 여기 있다가는 고생만 하다가 끝날 것 같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회사에서 세계적인 기술을 개발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 기술을 시장에 내놓으면 회사는 돈방석에 앉게 됩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세상적인 기준으로 판단해도 미래에 일어날 사건에 대한 정보를 가지고 현재 상황 속에서 선택을 판단을 내리는 것은 ‘신앙’이 아니라 ‘상식’입니다.  이 세상 마지막 날에 하나님의 구원과 심판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주님을 위해 살아가는 것은 더 이상 이해하기 힘든 신앙이 아니라 당연한 상식이 되어버립니다.

만일 인간이 죽고 난 후 먼지처럼 영영히 사라져 버리는 허무한 존재라면 정의롭게 살고, 남을 위해 희생하고 섬기는 이 모든 수고가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우리는 이 세상에 끝이 있고, 그 후에는 하나님의 구원과 심판이 있다는 것을 믿습니다. 우리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최후의 심판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다시 오심을 더 선명하게 믿을수록 우리들의 현재의 삶은 달라집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제 더 이상 신화나 꿈이 아니라, 현실이 되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날마다 주님의 나라가 가까이 오는 것을 보며 죄악으로부터 손과 발을 금하고 자신을 지키며 살아가는 자는 복을 받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약속의 땅에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회복을 약속하셨습니다. 비록 현실은 힘들고 어렵지만 주님의 약속을 신뢰하며 정의롭게 살아가라고 명령하십니다.

자,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는 이와 같은 하나님의 약속을 잘 받아들이지 못하던 부류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바로 ‘이방인들’과 신체적 결함을 가진 ‘고자들’이었습니다. 3절을 보면 먼저 이방인들은 말했습니다. “여호와께서 우리를 그의 백성들과 차별하실거야…” 왜 이렇게 이방인들이 말했을까요? 실제로 이스라엘은 혈통적 집단입니다. 아브라함의 혈통적 자손이 이스라엘입니다. 야곱의 열 두 아들로 구성된 열 두 지파에 속한 자손이어야 이스라엘입니다. 이방인들은 남이나 다름없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믿고자 이스라엘과 함께 살아가지만, 그 안에는 자신들은 결국에는 이스라엘 민족이 아닌 외국인들이기에 하나님이 주신 축복의 약속에서는 제외될 것이라는 낮은 자존감이 그들 마음 구석에 있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이방인들은 성전에 들어가지 못했고, 이스라엘 민족이 아니면 하나님께 제사드릴 수도 없었습니다. 따라서 이방인들은 하나님의 구원과 회복의 약속을 듣고도 아브라함의 혈통적 자손이 아닌 자신들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축복이라고 생각하며 아쉬워하고 있었습니다.

또한 신체적 결함을 가진 고자들도 같은 이유로 하나님의 축복의 대상에서 자신들이 제외되었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신명기 23장 1절 말씀을 보면 “(신 23:1) 신낭이 상한 자나 신을 베인 자는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하리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생식기에 상처 입은 자나 결함을 가진 자는 여호와의 총회 멤버가 될 수 없습니다. 모든 제사 참석 못합니다. 모든 종교적 예식 및 명절도 참석 못합니다. 이 사람들 얼마나 불쌍합니까? 물론 이 중에는 이방종교의 예식을 지키기 위해서 혹은 독재 군주를 섬겨야 하는 정치적 이유로 신체적 결함을 고의로 발생시킨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태어날 때부터 혹은 불의의 사고로 신체적 결함을 갖게 된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이 사람들 입장에서 보면 자기의 실수나 잘못도 없이 단지 태어날 때부터 혹은 불의의 사고로 여호와의 총회 멤버가 될 수 없었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억울하겠습니까? 같은 이스라엘 민족인데, 하나님께 버림받은 느낌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3절을 보면 고자들이 말하기를 “나는 마른 나무라”고 했습니다. 즉 그의 삶에는 아무런 소망도 없고, 그의 이름과 기업을 이어줄 이가 아무도 없다는 것입니다.

자, 이처럼 이방인들과 신체적 결함을 가진 자들은 각각의 이유로 하나님의 회복과 구원의 약속을 믿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이에 대해서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주었던 민족적, 혈통적, 신체적 특권들을 다 허물어 버리십니다. 그리고 누구든지 여호와 하나님의 언약을 붙들고 그 말씀대로 지키며 살아가는 자에게 복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먼저 신체적 결함을 가진 자들에 대한 말씀이 4-5절입니다. “(사 56:4)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나의 안식일을 지키며 나를 기뻐하는 일을 선택하며 나의 언약을 굳게 잡는 고자들에게는 (사 56:5) 내가 내 집에서, 내 성안에서 자녀보다 나은 기념물과 이름을 주며 영영한 이름을 주어 끊치지 않게 할 것이며” 고자가 된 자는 자신이 지닌 신체적 결함 때문에 자식을 낳지 못합니다. 또한 고대사회에서 자녀가 없이 죽는다는 것은 신께 은총을 받지 못한 것으로 여겨졌습니다. 본래 부모가 죽으면 그의 이름을 아들과 딸이 이어받아 살아갑니다. 그러나 고자는 자신의 이름을 이어줄 자식이 없어, 그의 대에서 이름이 끊어집니다. 그러나 오늘 하나님께서는 아무리 신체적 결함을 가진 자라고 할지라도 그가 하나님의 언약을 굳게 붙들고 살아간다면 아들과 딸보다 더 좋은 기념물과 이름을 주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즉 여호와께서 그의 이름을 기념비에 새겨서 영원히 잊지 않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또한 5절을 보면 하나님은 신체적 결함이 있는 자의 이름이 ‘내 집’, ‘내 성안’에서 끊어지지 않게 하시겠다고 하심으로써 그가 예루살렘에서 공동체의 일원으로써 제사를 드리는 권리를 갖고, 예루살렘 공동체의 완전한 일원으로 살아갈 수 있는 자격을 부여하셨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신체적 결함을 가진 자들이 가장 가지고 싶어했던 언약 백성으로서의 특권이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신체적 결함이 결코 하나님의 언약백성이 되는 걸림돌 되지 않도록 차별의 벽을 허물어 버리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6절부터는 이방인들에 대한 차별, 민족적-혈통적 차별의 벽까지 허무십니다. 6-7절입니다. “(사 56:6) 또 나 여호와에게 연합하여 섬기며 나 여호와의 이름을 사랑하며 나의 종이 되며 안식일을 지켜 더럽히지 아니하며 나의 언약을 굳게 지키는 이방인마다 (사 56:7) 내가 그를 나의 성산으로 인도하여 기도하는 내 집에서 그들을 기쁘게 할 것이며 그들의 번제와 희생은 나의 단에서 기꺼이 받게 되리니 이는 내 집은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이 될 것임이라” 본래 이방인은 성전에 들어갈 수도 없고, 제사를 드릴 수도 없습니다. 사도행전 21장을 보면 사도 바울이 예루살렘 성전에 나오면서 사람들에게 잡힌 이유는 사람들이 바울이 이방인을 데리고 성전에 들어갔다가 나옴으로 성전을 모독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행 21:28) 외치되 이스라엘 사람들아 도우라 이 사람은 각처에서 우리 백성과 율법과 이곳을 훼방하여 모든 사람을 가르치는 그 자인데 또 헬라인을 데리고 성전에 들어가서 이 거룩한 곳을 더럽게 하였다 하니 (행 21:29) 이는 저희가 전에 에베소 사람 드로비모가 바울과 함께 성내에 있음을 보고 바울이 저를 성전에 데리고 들어간 줄로 생각함일러라” 이처럼 이방인에게 성전은 굳게 닫혀 있었습니다. 그러나 실상 하나님께서는 이미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서 이방인일지라도 하나님의 언약을 굳게 지키는 자는 주님께서 그의 성전이 있는 거룩한 산으로 인도하게 하시고, 주님의 집 곧 성전에서 그들을 기쁘게 하시고, 그들의 번제와 희생제물을 받으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7절 미자믹을 보면, 아주 유명한 말씀이 나옵니다. 내 집은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이 될 것임이라” 하나님의 집은 이제 더 이상 민족적, 혈통적, 종교적, 신체적 특권을 가진 이스라엘에게만 열려 있지 않습니다. 신체적 결함을 가진 자, 혈통적으로 아브라함과 전혀 상관없는 외국인이라도 상관없습니다. 그 어느 누구라도 여호와의 언약을 굳게 붙들고 지키는 자는 주님의 집에 들어와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릴 수 있습니다. 또한 그러한 삶을 통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신 구원과 회복의 약속이 그들의 삶 가운데서도 동일하게 성취됩니다.

하나님은 단순히 혈통적 이스라엘만 구원하고자 하시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민족, 모든 나라, 모든 열방을 구원하시기 원하십니다. 그 내용이 8절에 있습니다. “(사 56:8) 이스라엘의 쫓겨난 자를 모으는 주 여호와가 말하노니 내가 이미 모은 본 백성 외에 또 모아 그에게 속하게 하리라 하셨느니라” 하나님께서는 흩어진 이스라엘 백성들만 모으시는 것이 아니라, 사방 곳곳에서 사람들을 부르시고 구원하십니다. 하나님은 그 가운데 여러분과 저를 부르셨습니다. 혈통적으로는 주님의 백성이 될 수 없는 우리들을 주님의 자녀 삼아 주셨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백성이라 불린 자격이 없는 죄인인 우리들을 하나님은 주의 백성으로 불러 주셨습니다.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대는 새로운 은혜의 시대입니다.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구원을 받는 새로운 언약 공동체의 일원입니다. 하나님의 집은 모든 사람에게 열려 있습니다. 천하 만민 그 누구나 와서 기도할 수 있는 집입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로 자녀 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제 우리 모두가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을 찬양하며, 우리를 자녀 삼아 주신 은혜에 감사하며 살아가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