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618 마음 제어 (잠언 25장 15-28절)

1. 온유
이솝이야기 중에 [해와 바람]이라는 유명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날 해와 바람은 둘 중 누가 더 힘이 센지 겨루기로 합니다. 마침 외투를 입은 한 여행자가 외투를 입은 한 여행자가 길을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해와 바람은 먼저 여행자의 외투를 벗겨내는 자가 힘이 더 센 것으로 결정했습니다. 먼저 바람은 으르렁거리며 차갑고 센 바람을 뱉어냈습니다. 여행자는 외투자락이 바람에 휘날리며 마구 춤을 줍니다. 바람은 더욱 더 세게 불었습니다. 그러나 바람이 더욱 더 세게 불수록 여행자는 바람이 참 세군”하고 말하며 외투를 꽉 움켜쥐고 몸에 둘러 감았습니다. 결국 바람은 여행자의 외투를 벗기는 데 실패하고 맙니다. 이번에는 해가 나설 차례가 되었습니다. 해는 부드러운 햇살을 비추었습니다. 따뜻한 햇살이 비추자 추위가 점점 사라져갔습니다. 이에 좀 전까지 외투를 꽁꽁 싸매고 있던 여행자는 외투의 단추를 풀었습니다. 날씨가 더욱 따뜻해지자 여행자는 결국 외투를 벗었습니다. 결국 해와 바람의 승부는 해의 승리로 끝이 났습니다.
어린 시절 참 많이 듣던 유명한 이야기입니다. 부드러움이 강함을 이길 수 있다는 교훈을 줍니다. 이와 유사하게 15절 말씀을 보면 “부드러운 혀가 단단한 뼈를 꺾는 힘이 있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사람의 마음을 여는 방법에 있어서도 부드럽고 온유한 태도가 더 효과적이라는 사실을 가르쳐줍니다. 특별히 15절은 ‘관원’의 마음을 여는 방법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관원’이란, 통치자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높은 지위와 권력을 가지고 있는 통치자를 설득하고 그의 마음을 변화시키는 일은 무척이나 어려운 일입니다. 내 자신이 원하는 것만을 강하게 주장하며 상대방을 배려하지 않고 무시하며 설득하려는 태도는 나보다 낮은 위치의 사람과의 관계에서는 통하겠습니다만, 통치자에게는 그와 같이 무례하게 행동했다가는 오히려 더 큰 화를 불러올 수 있습니다. 잠언은 우리가 통치자의 마음을 얻게 위해서는 오래 참으면서 부드럽게 대화해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즉 우리 자신의 감정을 절제하고 인내하면서 말 한 마디 한 마디를 신중하고 온유한 태도로 하는 것이 완고한 마음을 여는 비결이라고 가르칩니다.
그런데 이것은 비단 인간 관계에서만 통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온 세상의 통치자 되시는 하나님과 관계를 맺을 때도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이 간구하는 것을 들어주지 않으신다는 이유로, 하나님께 기도함에 있어서 마치 하나님을 가르치듯이 기도하는 분들을 종종 보게 됩니다. 더 심하면 하나님을 마치 어린아이 혼내 듯이 화를 내며 기도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태도로 기도하는 것은 하나님을 무시하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가 이 도시의 시장 혹은 일리노이의 주지사 혹은 미국의 대통령을 만나서 무언가 중요한 부탁을 해야 한다고 한 번 상상해 봅시다. 막 화를 내면서 안 들어주면 들어눕겠다는 식으로 이야기한다면 누가 우리의 이야기를 들어주겠습니까? 우리가 요구하는 것이 정당하다면, 당당하지만 예의를 갖추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온유한 태도로 우리의 요구사항을 전달하지 않을까요? 하물며 천지를 지으시고 다스리시는 통치자 되시는 하나님께 기도하는데, 마치 3살짜리 어린아이가 투정 부리듯이 “하나님, 나 이거 안 해주면 하나님 안 믿습니다. 이 기도제목 안 들어 주시면 나 더 이상 교회 안 다닙니다.” 이런 식으로 하나님을 협박하며 기도하는 것은 매우 잘못된 태도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간절하게 기도하겠습니다만, 모든 결정권은 주인 되시는 하나님께 있음을 겸손하게 인정하는 태도로 기도해야 합니다. 다니엘의 세친구들의 입에서 나온 ‘그리 아니하실지라도’라는 고백처럼, 하나님께서 우리가 기도하는 것을 들어주지 아니하실지라도, 내 인생이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흘러가지 가지 않는다 할지라도, 어떤 일의 결과가 내가 하나님께 간구했던 모습으로 나오지 않는다 하러다도…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하나님의 주인 되신 권리를 인정해 드리며, 하나님 앞에서 인내하며 온유하게 살아가는 것이 참 된 지혜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무례한 그리스도인들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지금도 온 우주 만물을 다스리고 계시는 가장 높은 통치자, 온 세상 권력의 주인이신 하나님이신데 어찌 주님을 가르치려 들고 주님을 내 마음대로 조종하려고 하는 것이 옳겠습니까?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부드러운 혀를 가지고 나아가야 합니다. “하나님 제가 이런 이런 것을 구합니다. 그러나 이것이 제 뜻대로 되지 않아도 저는 여전히 제 삶 가운데 신실하게 역사하고 계신 하나님을 믿고 섬기겠습니다”와 같은 온유한 태도가 필요합니다.
혹시 우리 중에 최근에 하나님을 향하여 화가 난 분은 혹시 없으십니까? 하나님께서 다른 사람들의 기도는 다 들어 주시는 것 같고, 내 주변에 있는 사람들은 다 잘 도와 주시는 것 같은데 유독 나에게만 혹독하신 것처럼 느끼고 계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기도 응답이 더디어 하나님께 실망하고, 내가 소원하는 대로 인생이 펼쳐지지 않아 조급하고 마음 속에 화가 끓어오르는 분들도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성경은 우리 안에 있는 이와 같은 부정적인 분노의 감정들을 제어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잠언을 읽어보면 화를 다스리는 것에 대해서 자주 반복해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온유란, 마음 속에서 보글보글 끓어오르는 화를 억제하고 다스릴 수 있는 성품을 가리킵니다. 세상에 화가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그 불을 컨트롤 하여 다스리지만, 어떤 사람들은 타오르는 분노의 불에 의해 다스림을 받습니다. 성경은 욱하고 튀어나오는 분노의 감정에 휘둘러서 말하고 행동하는 사람을 가리켜 미련한 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감정을 감추거나 속일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서는 진솔하게 기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나 여전히 하나님께 기도할 때 최선의 예의를 지키십시오. 하나님을 동네 친구 대하듯이, 내 밑 사람 대하듯이 하는 것은 하나님을 무시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태도로 하나님을 대하는 것은 큰 실수요, 하나님께 무례히 행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도 온유한 태도로 나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온유한 말과 행동은 상대방의 분노를 잠재우고, 화를 누그러뜨릴 수 있습니다. 따라서 지혜로운 사람은 조급하고 거칠게 대답하지 아니하고, 끝까지 상대방을 향한 예의를 지키고 바르게 말합니다. 성숙한 사람은 감정을 절제하기 힘들 정도로 화가 나는 상황 속에서도, 숙련된 기술자가 뜨거운 불을 제어하듯이 자신 안에 있는 분노의 감정을 제어합니다. 우리들도 이처럼 자신의 마음을 다스릴 수 있어야 합니다.

2. 절제
자, 이제 두 번째 주제인 ‘절제’에 대해서 함께 나누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디모데전서 4장 4절 말씀에 따르면 하나님께서 세상에 지으신 모든 것은 선합니다. 그러나 죄로 인해 왜곡된 인간의 탐심이 들어가면 세상의 선한 것들이 악한 것으로 변질됩니다. 잠언 25장 16절에 이에 대해 아주 좋은 예를 하나 들어주고 있습니다. 16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잠 25:16) 너는 꿀을 만나거든 족하리만큼 먹으라 과식하므로 토할까 두려우니라” 꿀은 ‘신이 내린 음식’이란 별명을 가지고 있을만큼 완전식품입니다. 세상에 꿀이 해롭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아무리 이 좋은 꿀이라고 해도 적당히 먹어야지, 너무 많이 먹으면 우리 몸에 해롭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삶에는 꿀 뿐만 아니라 유익한 것, 좋은 것, 우리 마음을 기쁘게 해주는 것 등 다양한 것들을 허락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하나님께서 축복으로 주신 것도 마음 속 탐욕을 채우기 위해 절제하지 못하고 과도하게 사용하면 우리 영혼을 망가트리게 됩니다. 음식을 먹는 것은 우리에게 기쁨과 즐거움을 가져다주지만, 너무 많이 먹으면 소화불량에 걸리고 비만에 이르게 되는 것과 같습니다. 잠이라는 것은 우리 삶에 없어서는 안되는 중요한 요소입니다만, 절제하지 않고 과도하게 누리면 게으름이 됩니다. 스포츠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큰 기쁨이고 즐거움입니다만, 너무 빠지면 스포츠가 우리의 우상이 됩니다. 음악도, 미술도, 공부도 다 마찬가지입니다. 자동차를 타고 다니는 것은 편리하고 좋은 것이지만, 운전하는 사람이 속도를 절제하지 않으면 사람의 나 자신과 다른 이들의 목숨을 빼앗아가는 무서운 무기가 됩니다. 아무리 좋은 것도 값진 것도 절제하지 않으면 오랫동안 누릴 수 없습니다.
17절에서는 이와 관련하여 또 다른 예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잠 25:17) 너는 이웃집에 자주 다니지 말라 그가 너를 싫어하며 미워할까 두려우니라” 아무리 친한 친구 집이라고 할지라도 내 집처럼 너무 자주 드나들면 소중한 우정도 깨질 수 있습니다. 아무리 가까운 사이라 할지라도 상대방도 개인적인 삶이 있는데, 그 집을 너무 자주 방문한다면 두 사람의 좋은 관계가 깨지지 않겠습니까? 과유불급입니다. 무엇이든지 지나치면 덕이 되지 못합니다. 탐욕을 내려놓고 절제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혹시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에 축복으로 주셨으나, 절제하지 못해서 죄악으로 변질된 것은 없습니까? 건강한 몸을 가지고 땀을 흘리며 열심히 일해서 돈을 벌고 돈을 쓰는 것도 하나의 축복입니다. 그러나 돈에 집착하며 절제하는 마음 없이 조금이라도 돈을 더 벌고 더 쓰려고 하는 데서 기쁨과 만족을 찾으려고 한다면 어느 새 돈이 우리들의 우상이 되어 버립니다. 성경은 우리가 자기 마음을 탐욕으로부터 지키고 절제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을 마치 적들로부터 마을을 지키기 위하여 성벽을 세워놓는 것과 같다고 비유합니다. 28절 말씀을 봅시다. “(잠 25:28) 자기의 마음을 제어하지 아니하는 자는 성읍이 무너지고 성벽이 없는 것 같으니라” 자신의 마음을 절제하지 못하는 것은 마치 성벽이 없는 도시에 살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고대 사회에서 성벽이 없다는 것은 적의 공격에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음을 의미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마음에 절제라는 성벽이 없으면 사탄의 유혹과 공격에 무너질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만일 우리가 우리 삶을 단단하게 지키고자 한다면 절제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아무리 좋은 것이라 할지라도 절제하지 않고 욕심을 내면 그것이 우리 삶을 망가트리게 됩니다. 물질에 대한 소유욕이든지, 일에 대한 성취욕이든지, 사람들에게 자신의 가치를 알리고 싶은 명예욕이든지 마음의 욕구를 통제하지 못하고 절제하지 못하면 우리 삶의 기초부터 다 흔들리게 됩니다.
사람이 자신의 마음을 다스리고 절제할 줄 알 때 비로소 이웃을 사랑하고 정의도 실현할 수 있습니다. 21-22절 말씀을 봅시다. “(잠 25:21) 네 원수가 배고파하거든 식물을 먹이고 목말라하거든 물을 마시우라 (잠 25:22) 그리하는 것은 핀 숯으로 그의 머리에 놓는 것과 일반이요 여호와께서는 네게 상을 주시리라” 자신의 마음을 잘 다스리는 사람은 심지어 자신의 원수에게도 호의를 베풀 수 있습니다. 비록 불편한 관계에 있는 사람일지라도 마음을 다스리고 선으로 대하는 것이죠. 이와 같이 우리가 마음을 제어하고 원수를 끝까지 대하는 것은 그들이 회개할 수 있는 기회를 얻도록 도와줍니다.
그러나 반대로 마음을 통제하지 못하면 우리의 가정도, 교회도, 사회 공동체도 사랑과 정의가 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마음을 다스리고 절제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가기 위해 반드시 배워야 하는 성숙함 입니다. 혹시 최근에 나와 다투고 있는 사람은 없습니까? 어떠한 태도와 자세로 다투고 계십니까? 온유한 말로 상대방을 대하십시오. 부드러운 행동으로 화평을 추구하십시오. 절대로 분노가 여러분을 다스리도록 하지 마시고, 여러분이 분노를 제어하고 다스리십시오. 온유한 말과 행동으로 화평케 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사명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