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611 마음 경영 (잠언 21장 1-3절)


왕은 인간 사회에서 권력의 최상위에 놓여 있습니다. 특히 고대사회에서 왕은 사람의 목숨까지도 자기 마음대로 부릴 수 있는 막강한 권력을 소유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왕이라 할지라도 여호와 하나님 앞에 서면 평범한 인간이 되고 맙니다. 왕도 여호와 하나님의 뜻에 따라 움직이는 피조물에 불과합니다. 오늘 1절 말씀에 “왕의 마음이 여호와의 손에 있음이 마치 보의 물과 같다”고 했습니다. 봇물은 물이 흘러가는 길을 의미합니다. 물은 언제나 물길을 따라 흘러갑니다. 마찬가지로 막강한 권력을 가진 왕이라 할지라도, 그는 철저하게 여호와 하나님의 계획 안에서 움직이며 살아가게 됩니다. 수로가 물의 방향을 결정하는 것과 같이 왕의 인생도 하나님의 통치 아래 있습니다.
솔로몬이 이와 같이 인간 사회의 최고권력에 서 있는 왕을 예로 든 것은, 왕을 포함한 다른 모든 인간들의 삶도 여호와의 손에 있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한 것입니다. 우리들의 인생은 하나님의 손 안에 붙들려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얼마나 큰 위로가 됩니까? 사실 사람들은 대부분 과거에 대한 후회와 미래에 대한 불안감을 동시에 가지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뒤를 돌아보며 과거 자신이 지나온 시간들 속에서 저지른 실수들에 대해서 후회하며, 동시에 앞으로 살아가야 하는 삶 속에서 똑 같은 실수들을 저지르지는 않을지 아니면 더 큰 잘못된 선택들을 하게 되는 것은 아닐까 불안해합니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갖고 살아가는 감정이 후회와 불안감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 우리의 인생이 하나님의 손 안에 붙들려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면, 이와 같은 후회와 불안감을 모두 이겨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우리를 보호해주시고, 우리의 삶을 인도해 가고 계십니다. 비록 자신이 과거에 저지른 큰 실수들과 잘못들로 인해 씻을 수 없는 죄악으로 얼룩진 인생이라 생각할지라도 언제든지 다시 시작할 수 있습니다. 우리를 새롭게 하실 수 있는 하나님의 손에 우리 삶이 붙들려 있기 때문입니다. 비록 내일에 대한 불안함과 미래에 대한 염려가 가득하다 할지라도 그와 같은 불안과 염려 가운데서도 내일에 소망을 가질 수 있습니다. 우리의 인생을 친히 돌보시고 인도해 가시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주의 손으로 우리의 삶을 붙들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1절 말씀 후반절을 보면 “그가 임의로 인도하시느니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임의’라는 단어는 ‘하나님 마음대로’라는 뜻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변덕쟁이도 아니시고, 우리를 괴롭히는 심술쟁이 하나님도 아니십니다. 주님은 부족한 우리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지금도 크신 사랑과 자비를 변함없이 우리에게 베풀어 주시는 좋으신 하나님이십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을 ‘임의로’ 인도하신다고 했을 때, 주님은 우리의 삶을 좋은 길로 인도해 가고 계심을 알 수 있습니다. 혹 지난 과거에 잊지 못할 어떤 실수나 잘못으로 인해 현재 자신의 상황을 탓하며 살아가고 계시지는 않습니까? 우리의 삶이 여전히 하나님의 손에 붙들려 있음을 기억하십시오. 우리는 언제든지 하나님 안에서 다시 시작할 수 있습니다. 혹 미래에 대한 불안과 염려로 살아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의 삶을 가장 좋은 방향으로 인도하고 계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2절 말씀을 함께 보겠습니다. “(잠 21:2) 사람의 행위가 자기 보기에는 모두 정직하여도 여호와는 심령을 감찰하시느니라” 겉만 번지르하고 속은 썩어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겉으로는 사람 좋은 미소를 띠고 친절하게 행동하지만, 속으로는 사람에 대한 시기, 미움, 증오를 가진 사람들도 있습니다. 우리가 가식이나 위선으로 사람을 속일 수 있을지 모르나,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내면까지도 훤히 들여다보고 계십니다. 그래서 우리들도 겉으로만 선한 삶을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우리 내면도 하나님 보실 때 부끄러운 것이 없도록 정직하게 살아가야 합니다.
2절 말씀에 “사람의 행위가 자기 보기에는 모두 정직하여도”라고 했습니다. 사람들은 각각 자기 주장이 다 옳다 생각하며, 자신은 선의 위치에 서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한번 정치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 어느 쪽도 자신이 선과 대의를 위해서 일하고 있지, 악을 위해서 싸우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다른 사람들의 시각에는 한 쪽은 옳고 다른 한 쪽은 틀릴 수 있습니다. 인간이 ‘자기중심성’이란 죄로 물들어 있는 죄인이기 때문에 발생하는 불가피한 현실입니다. 인간은 자신의 행위가 옳고 그른 지 자기 스스로 완벽하게 파악할 수 없습니다. 모든 행위의 옳고 그름의 기준은 우리에게 있지 않고, 하나님께 있습니다. 우리가 볼 때는 자신이 정당한 일을 했고, 옳은 길을 갔다고 스스로 평가할 수 있겠습니다만, 최종 판단은 하나님께서 하십니다. 하나님은 그 누구보다 우리의 마음을 가장 정확하게 알고 계십니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 행위와 마음이 하나님의 뜻과 가르침과 부합한지 자기 스스로를 살펴볼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형식과 껍데기만 남은 종교생활을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삶 속에서 진심으로 하나님의 뜻인 공의와 정의를 행하며 살아가는 것을 기쁘게 보십니다. 3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잠 21:3) 의와 공평을 행하는 것은 제사 드리는 것보다 여호와께서 기쁘게 여기시느니라” 제사는 인간이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가장 거룩한 활동이라고 여겨져 왔습니다. 그러나 거룩한 삶이 빠진 형식만 남은 제사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자주 빠지는 함정 중 하나가 일요일 하루 예배 드리면 기독교인의 의무를 다한 것이며, 형식을 갖춘 예배만 잘 드리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것이란 태도입니다. 그러나 만일 일요일 하루 예배 드리는 그 시간 잠깐 동안만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고, 나머지 시간에는 내 자신의 탐욕을 위해서 살아간다면 그의 신앙생활은 껍데기와 형식만 남은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만일 우리 삶이 교회 다닌다는 사실 하나 말고는 일상생활에서 교회 안 다니는 내 직장 동료나 친구들과 다른 것이 없다면 큰 문제입니다. 구약 시대의 희생제사나 오늘날 교회 건물 안에서 드리는 공예배는 하나님을 경배하는 하나의 수단과 방법일 뿐 그 자체가 목적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진정으로 원하시는 제사는 우리가 삶 속에서 하나님의 공의와 정의를 실현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초대 왕 사울은 하나님의 뜻을 수행하는 것은 관심이 없었고, 하나님 자신의 뜻을 이루는 수단으로 사용하려고 했습니다. 그 결과 그는 여러 번 제사를 드렸으나 하나님은 그의 제사를 받아 주시지 않았고, 그가 기도해도 응답해 주시지 않았습니다. 사울의 삶을 겉으로 보면, 그도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고 심지어 위급 상황에는 하나님께 기도하고 하나님의 뜻도 물어봤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사울에게 아무런 응답도 주시지 않았던 이유는 무엇입니까? 사울은 껍데기 신앙생활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데 관심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실상은 자기 자신이 왕이 되고 싶어 했습니다. 사무엘 선지자가 사울 왕을 책망했던 사무엘상 15장 22-23절 말씀을 새번역성경으로 함께 읽겠습니다. “(삼상 15:22) 사무엘이 나무랐다. “주님께서 어느 것을 더 좋아하시겠습니까?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겠습니까? 아니면, 번제나 화목제를 드리는 것이겠습니까? 잘 들으십시오.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말씀을 따르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낫습니다. (삼상 15:23) 거역하는 것은 점을 치는 죄와 같고, 고집을 부리는 것은 우상을 섬기는 죄와 같습니다. 임금님이 주님의 말씀을 버리셨기 때문에, 주님께서도 임금님을 버려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그 유명한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가 껍데기와 형식만 남은 종교생활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교회에서 드리는 예배 뿐만 아니라, 교회 밖에서 삶으로 드리는 예배도 병행 되어야 합니다. 가정, 직장, 가게와 같은 우리 일상생활 속에서 하나님의 공의를 행하며 이웃을 사랑하며 살아가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실제 삶으로는 자기 마음대로 죄를 지으며 하나님의 말씀을 버렸으면서도, 신앙의 명맥은 유지하기 위해서 껍데기와 형식만 남은 제사를 드렸습니다. 이에 하나님은 호세아 6장 6절에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호 6:6)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형식만 남은 종교활동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진실한 마음을 원하십니다. 진실로 하나님을 사랑하며, 자신의 삶을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고자 하는 충성된 마음을 주님은 원하십니다.
신약시대에 예수님께 가장 많은 책망을 받았던 집단이 바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입니다. 이들은 겉으로는 가장 거룩한 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일주일에 두 번 금식하고, 하루에 세 번씩 시간을 정해 놓고 기도했습니다. 요즘에도 이만한 열정으로 믿음생활 하는 사람들 찾기가 얼마나 힘듭니까? 그러나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을 향하여 “회칠한 무덤”이라고 부르셨습니다. 무덤은 어떻습니까? 속이 시체로 인해 부패하고 썩어 있습니다. 그런데 무덤 밖에 회를 칠한다는 것은 오늘날로 말하면 보기 좋게 하얀색으로 페인트칠한다는 뜻입니다. 즉 바리새인들이 겉으로는 경건한 모습들을 보여주며 기도, 예배, 말씀, 금식 등 종교활동에는 힘썼을지 모르나, 그들의 내면에는 하나님의 뜻을 따르기 보다 자신의 탐심을 이루고자 하는 마음으로 영혼이 썩어가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 가장 싫어하시는 것 중 하나가 위선적인 예배입니다. 하나님은 껍데기와 형식만 남은 예배를 가증하게 여기십니다. 이사야 1장에 기록된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형식적인 종교활동으로 전락해버린 제사를 얼마나 싫어하시는지 한 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사 1:11) 여호와께서 말씀하신다. “나는 너희가 바친 이 모든 제물을 바라지 않는다. 이제는 너희의 숫양 번제물과 살진 짐승의 기름이 지겹다. 수송아지와 양과 염소의 피도 반갑지 않다. (사 1:12) 너희는 나를 만나러 오지만, 누가 너희더러 이렇게 들락날락하며 내 마당만 밟으라고 했느냐? (사 1:13) 다시는 헛된 제물을 가져오지 마라. 너희가 태우는 향이 역겹다. 너희가 초하루 축제일과 안식일과 특별 절기에 모이는 것도 참을 수 없고, 거룩한 모임에 모여서 악한 짓을 하는 것도 견딜 수 없다. (사 1:14) 정말로 나는 너희의 초하루 축제일과 특별 절기들이 역겹다. 그것들은 오히려 내게 무거운 짐이 될 뿐이다. 나는 그것들을 짊어지기에는, 너무 지쳤다. (사 1:15) 너희가 팔을 벌려 내게 기도해도 나는 눈을 감고 너희를 쳐다보지 않겠다. 아무리 기도를 많이 해도 들어 주지 않겠다. 왜냐하면 너희 손이 피로 가득하기 때문이다. (사 1:16) 너희는 몸을 씻어 깨끗이 하여라. 내가 보는 앞에서 하던 악한 짓을 멈추어라. 못된 짓을 그만두어라. (사 1:17) 옳은 일을 배우고 정의를 찾아라. 억눌림받는 사람을 구해 주고, 재판에서 고아들을 지켜 주며, 과부들의 억울한 사정을 들어 주어라.” 이처럼 진실한 마음은 온데 간데없고 껍데기와 형식만 남은 제사와 예배는 하나님께서 가증이 여기십니다. 하나님은 그런 제사는 아예 폐해버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우리가 드리는 예배도 혹 껍데기만 남은 예배는 아닌지 반드시 점검해야 합니다. 지금도 수많은 사람들이 껍데기와 형식만 남은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고 있지는 않지만 예배의 자리에는 나와서 종교적 명맥만 유지하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는 그리스도인이지만, 교회 밖에서는 비그리스도인과 전혀 다를 바 없는 삶을 살아갑니다. 그러나 여호와 하나님은 우리들의 내면을 감찰하십니다. 우리가 진심으로 주님을 따라가며 살아가고 있는지 그렇지 않으면 겉으로만 그런 척하며 살고 있는지 주님은 다 알고 계십니다. 이렇게 교회가 함께 정한 시간에 나와 예배 드리는 것도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우리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공의와 정의를 행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 시간 다음 몇 가지 질문들을 스스로에게 물어보며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보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마음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경영되고 있습니까? 우리는 교회 밖에서도 거룩한 삶을 추구하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주일예배는 빠지지 않고 드리고 있지만, 나머지 다른 요일들은 교회 밖에서 자신의 탐심을 채우기 위해 살아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하나님은 우리 마음을 정확하게 들여다보고 계십니다. 만일 우리의 삶이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주님의 인도하심을 받으며 살아가고 있지 못하다면, 우리 삶은 방황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루 하루를 기도 없이, 말씀 없이 살아가고 있다면 그 사람은 분명히 하나님의 공의와 정의를 행하는 것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결혼해서 함께 사는 배우자가 몸은 나와 함께 있지만, 마음 속으로는 다른 남자 혹 다른 여자를 사랑하며 살아가고 있다면 그것은 나에게 얼마나 큰 수치이며 큰 아픔이겠습니까? 그런 결혼 생활에 기쁨이 있을 리 없습니다. 예를 들어, 아내가 항상 식사도 맛있게 차려주고, 조금이라도 섬겨주려고 배려해주는 멋진 아내인데 마음으로는 내가 아닌 다른 남자를 사랑하고 있다면 남편 입장에서 기쁠리가 없죠. 아무리 가정 속에서 자신이 맡은 역할을 충실하게 해내고 있다 한들 배우자를 놔두고 다른 사람과 바람 피는 남편이나 아내를 보고 화를 내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우리 하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생활은 다른 말로 하면 예수님과 함께 결혼 생활하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 신랑 되시는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주님만을 사랑하기를 원하십니다. 세상에 빠져 죄악으로 살아가는 것은 하나님께 큰 죄를 짓는 것이 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주일 예배 시간만 하나님과 사는 것이 아니라, 1년 365일, 일주일 7일, 하루 24시간 주님과 함께 살아가는 주님의 신부들이 되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의 중심을 보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을 원하십니다. 공동체가 함께하는 예배를 드리기 전, 우리 삶 속에서 드리는 예배가 하나님 보시기에 기뻐 받으실 만한 지 돌아보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예배를 회복하고 공의와 정의를 실천하며 살아가는 주님의 백성들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