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207 베드로전서 강해 (5) 거룩한 삶을 위한 권면 4 (배드로전서 1장 22절)

오늘 본문 22절에서 이야기하는 ‘진리’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으심, 부활하심 승천 등 그의 생애와 사역 그리고 가르침을 모두 포함한 ‘복음’을 가리킵니다. 또한 22절에서 이야기하는 ‘순종함’이란, 상대방 앞에 무릎을 꿇고 그에게 전적으로 복종함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22절 말씀에서 ‘너희가 진리에 순종함으로’라는 말의 뜻은 성도들이 참 진리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그들의 영혼의 구원자요, 삶의 주인으로 영접하였음을 의미합니다. 22절 말씀을 보니, 사도 베드로는 이와 같은 일이 벌어질 때 우리 영혼이 깨끗하게 된다고 말했습니다. 여기서 사용된 ‘깨끗하다’라는 말은 ‘죄로부터 깨끗하게 됨’을 의미합니다. 진리 되시는 예수의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은 예수의 보배로운 피로 죄가 씻어져서 그의 영혼이 깨끗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영적인 변화를 ‘거듭남’이라고 합니다.
이와 같이 거듭난 사람의 영혼에는 놀라운 변화가 일어납니다. 그 동안 자신의 인생에서 일어난 모든 불행의 궁극적인 원인이 바로 내 인생의 주인이 나라는 자기중심적으로 살아간 죄에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그러한 죄의 문제로부터 우리를 구원하시 위해 하나님 아버지께서 무조건적인 사랑, 즉 아가페 사랑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베풀어 주셨음을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의 아가페 사랑을 받은 자는, 자기중심성이란 죄의 본성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그 결과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신 그 무조건적인 아가페 사랑을 본받아 자신 역시 무조건적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고 다른 인간 형제들을 사랑하게 됩니다. 이러한 거듭난 존재 안에 새롭게 태어나는 종류의 사랑을 우리는 ‘까리타스’(Caritas)의 사랑이라고 부릅니다.
밤하늘에 떠 있는 달은 본래 자기 스스로 빛을 낼 수 없습니다. 우리가 보는 달빛은 본래 태양에서 나온 빛을 달의 표면이 반사시키는 것을 볼 뿐입니다. 까리타스의 사랑도 이와 같습니다. 본래 우리 인간은 타인을 무조건적으로 사랑할 수 없는 이기적인 존재입니다. 그러나 우리 안에 하나님 아버지의 무조건적인 사랑인 아가페 사랑에 전인격적으로 반응하게 됨으로써, 우리 안에 타인을 향한 이타적인 사랑인 까리타스 사랑이 생겨나게 됩니다.
평생 세상의 중심이 자신이라고 생각하며, 자신의 탐욕을 이루기 위해 살아가던 인생이었는데,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거듭남으로 인해 나 자신을 위해 살아가던 삶의 걸음들을 멈추고, 이제는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기 위한 삶으로 전향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거듭난 그리스도인들의 삶 속에 나타나는 변화입니다. 그래서 사도 베드로는 22절 말씀에 이와 같이 거듭난 사람은 그 사람 안에 있는 까리타스의 사랑으로 인하여 ‘거짓 없이 형제를 사랑하기에 이르렀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거듭난 하나님의 백성은 자기중심적 삶을 끊어내고, 이제 다른 사람들을 거짓 없이 진실하게 사랑할 수 있는 존재로 변화된 것입니다.
서로 한 남자와 한 여자가 만나 함께 결혼예식을 드리는 것이 결혼생활의 최종 목적은 아닙니다. 결혼예식을 드린 이후에는 서로 진실하게 사랑하며 살아가는 것이 최종 목적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거듭남이 우리 신앙의 최종 목표지는 아닙니다. 거듭난 삶을 통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바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추구해야할 삶의 목표점입니다.
많은 분들이 요한복음 3장 16절을 잘 알고 있습니다. “(요 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요한복음 3장 16절의 핵심메시지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거듭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이야기의 끝이 아닙니다. 요한복음 3장 16절과 쌍둥이를 이루는 구절이 바로 요한일서 3장 16절입니다. 거듭난 사람이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를 가르쳐주는 말씀입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요일 3:16)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자신의 목숨을 바치신 아가페의 사랑을 깨닫고 그 사랑을 경험한 사람은, 이제 자신도 그와 같은 사랑으로 형제들을 위한 무조건적인 사랑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들이 마땅히 살아가야 할 삶의 모습입니다.
오늘 본문 22절 말씀을 자세히 보시면 ‘형제를 사랑하기’란 표현이 말씀 중간에 나옵니다. 사실 이 주제는 신앙생활에서 얼마나 중요한지 우리들은 이 ‘형제 사랑’이란 단어의 헬라어도 이미 다 알고 있습니다. ‘형제 사랑’을 헬라어로 뭐라고 할까요? 바로 ‘필라델피아’입니다. 들어보셨죠? 너무 유명한 단어 아닙니까? 필레델피아란 단어는 ‘사랑’이란 뜻을 가진 ‘필레오’와 ‘형제’란 뜻을 가진 ‘아델포스’의 합성어입니다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빌라델비아’ 교회의 이름일 바로 이 ‘필라델피아’입니다. 우리나라말로 교회 이름을 바꾸면 ‘형제 사랑 교회’ 즈음으로 해석할 수 있겠습니다. ‘필라델피아’, ‘형제 사랑’이 바로 오늘 본문의 주제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사도 베드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인해 거듭난 우리들은 이제 거짓 없이 형제를 사랑할 수 있는 존재로 변화되었다고 소개하며, 우리가 마땅히 형제를 사랑해야 하는 모습에 대해서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22절 후반절 말씀에 나오는 “마음으로 뜨겁게 피차 사랑하라”입니다. 여기서 베드로는 세가지 이야기를 했습니다. 마음으로 사랑하라. 뜨겁게 사랑하라. 피차 사랑하라. 이 세 가지 형제 사랑에 대한 권면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본론1. 진심으로 사랑하라
첫째, 베드로는 우리에게 형제들을 ‘진심으로 사랑하라’고 이야기했습니다. 헬라어 성경을 보면, 우리가 읽은 한글 성경에는 번역되지 않은 단어가 하나 있습니다. 바로 헬라어 ‘카다라스’라는 단어입니다. ‘깨끗한’, ‘순결한’이란 뜻을 가진 단어입니다. 그렇다면 왜 우리나라 한글성경에는 이 단어가 빠졌을까요? 그것은 권위 있는 성경 사본에는 이 단어가 빠져 있으나, 후대에 기록된 성경 사본에만 이 단어가 추가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경학자들은 후대에 사본을 기록한 사람들이 본문을 더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이 ‘카다라스’라는 단어를 사본에 추가했다고 추정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나라 개역 성경에는 단순하게 ‘마음으로’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만, 우리말성경이나 쉬운성경 번역번을 보면 ‘청결한 마음’ 혹은 ‘온 마음’이라고 번역되어 있습니다. 영어 성경에도 이런 차이는 존재합니다. NASB나 NIV 버전을 보면 단순하게 ‘heart’로 기록되어 있지만, 다른 영어 번역본 성경인 ESV, KJV 영어 성경을 보면 이 단어가 ‘a pure heart’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정리하지만, 우리가 가진 개역 성경은 더 권위 있는 성경 사본의 기록을 따라 ‘순결한’, ‘깨끗한’이란 뜻을 가진 ‘카라다스’라는 단어를 번역하지 않은 것이죠. 하지만 오늘 본문을 더 이해하기 위하여 후대 성경 사본가들의 기록을 참고하자면, 여기서 말하는 마음이란 바로 ‘순결한 마음’, ‘청결한 마음’ 즉 ‘진실된 사랑’ 의미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베드로는 우리가 형제를 진실한 마음으로 사랑하라고 권면합니다.
‘진실한 사랑’은 22절에 앞서 언급한 ‘거짓 사랑’과 대조됩니다. 거짓 사랑이란 손익을 계산하여 행동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나에게 유익이 될 때는 상대편에게 사랑을 베풉니다. ‘다른 사람들이 나의 행동을 어떻게 생각할까?’하고 의식하며 행동하는 것도 거짓 사랑입니다. 22절에서 사용된 ‘거짓 사랑’이란 말의 본래 의미는 배우처럼 연기하듯 사랑하는 것을 말합니다. 오늘날 우리식으로 바꾸어 말하면 Hollywood의 배우가 연기하듯이 남에게 보여주기 위한 사랑을 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사도 베드로가 우리에게 권면하는 사랑은 진심 어린 사랑입니다. 진심으로 상대방이 잘 되었으면 하는 마음 속 바램에서 흘러나오는 사랑입니다. 나 자신의 손익을 계산하여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진심으로 상대방의 유익을 위해서 내가 손해를 보고서라도 그를 위해 행동하는 것이 진실한 사랑입니다. 지금 사도 베드로가 언급하는 사랑은 가정 내의 사랑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신앙생활하고 있는 교회 안에서 형제 간의 사랑을 강조하고 있음을 주의하십시오.
우리는 진심 어린 마음으로 코너스톤 교회 성도들을 사랑하고 있습니까? 나와 함께 한 교회에서 신앙생활 하고 있는 형제, 자매, 우리 코너스톤 교회 성도님들이 잘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행동하는 것. 그것이 바로 진심 어린 사랑입니다. 코로나로 인해 사람 보기 힘든 세상입니다. 서로 만나지 못하다 보니 사람 사랑하기도 힘든 세상입니다. 그러나 모든 사랑이 그러하듯이, 진심 어린 사랑은 작은 관심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서로 어떻게 지내는지 전화로 안부도 묻고, 카톡으로 메시지도 주고, 위로의 말을 건네고, 기도 제목을 물어보고 그리고 그 사람을 위해서 계속 기도해주십시오. 진심으로 상대방이 잘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사랑하십시오.
많은 사람들이 ‘거룩한 삶’하면 기도하고 말씀보는 모습만 떠올리기 쉽습니다만, 사실 가장 거룩한 삶은 진심으로 이웃을 사랑하는 삶입니다. 형제를 위해 내 자신을 내어주는 것. 그것이 바로 우리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성숙한 거룩한 삶의 모습입니다. 우리 안에 있는 사랑이 거짓된 사랑이 아니도록, 손익을 계산하는 사랑이나, 위선적인 사랑이 아니기를 바랍니다. 거듭난 백성이 되었다면 이제는 거짓 사랑을 멈출 수 있습니다.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사랑, 진심으로 형제를 사랑할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본론2. 뜨겁게 사랑하라
사도 베드로가 권면한 두 번째 형제 사랑의 모습은 ‘뜨겁게 사랑하라’ 입니다. 여기 사용된 ‘뜨겁게 사랑하다’란 말에서 ‘뜨겁다’를 뜻하는 헬라어 단어 ‘엑테노스’는 단순히 ‘따뜻하게’ 사랑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상대방을 향하여 ‘최선을 다하여’ 또는 ‘전력을 다하여’ 사랑하라는 의미입니다. 바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사랑이 바로 ‘엑테노스’한 사랑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전력으로 사랑하시기 위해 자신의 전부를 십자가에서 쏟으셨습니다.
‘엑테노스의 사랑’, ‘뜨거운 사랑’의 반대말은 ‘형식적인 사랑’, ‘말로만 하는 사랑’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아들임으로 인해 거듭난 하나님의 백성들은 이제 그리스도께서 베풀어 주신 그 사랑을 형제들에게도 나눌 수 있는 존재가 되었고, 또 마땅히 그와 같은 사랑을 베풀며 살아야 한다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죄로 인해서 멸망할 수밖에 없었던 우리에게 사랑과 용서를 보여주신 하나님의 뜻은, 우리들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의 피값을 주고 산 다른 형제들을 하나님께 받은 그 사랑으로 사랑하는 데 있습니다. 요한일서 3장 14-18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요일 3:14) 우리는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머물러 있느니라 (요일 3:15)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 (요일 3:16)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요일 3:17) 누가 이 세상의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 줄 마음을 닫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하겠느냐 (요일 3:18)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성경은 우리가 예수님의 뜨거운 사랑, 모든 것을 쏟아 주신 사랑을 받은 자로서 우리들도 형제들을 향하여 그리스도와 같은 사랑을 베풀며 살 것을 가르칩니다. 생각과 머리 속에서만 머무는 것은 참 사랑이 아닙니다. 예를 들면, 우리가 아무리 속으로 상대방에 대해서 걱정하고 100번 생각한다 해도 상대방은 전혀 그 사실을 알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그 사람을 사랑하는지 전혀 느끼지도 못합니다. 그래서 생각과 머리 속에서만 하는 사랑은 배고픈 사람에게 꿈 속에서 밥 차려주는 것과 똑같습니다. 꿈 속에서 아무리 그 사람이 배불리 먹여 주어도, 꿈에서 깨면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머리 속에서 그 사람을 백 번 천 번 생각한다 해도, 구체적인 사랑의 섬김과 희생이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사랑은 구체적인 행동을 통하여 서로의 필요를 채워주는 것입니다.
더 놀라운 사실은 예수님께서 우리가 이와 같이 구체적으로 형제들을 사랑하는 것을 마치 예수님 사랑하는 것처럼 간주하신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우리가 굶주린 형제를 불러 밥을 대접하면, 그것은 예수님께 식사 대접한 것과 같습니다. 우리가 시간을 내어 병원에 입원한 형제를 보러 가면, 그것은 예수님께 병문안 간 것과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간주하신다는 것입니다. 말씀을 함께 보겠습니다. 마태복음 25장 35-40절 말씀입니다. 대화체의 느낌을 살리고자 ‘우리말성경’ 해석으로 함께 읽겠습니다. “(마 25:35) 너희는 내가 배고플 때 먹을 것을 주었고 내가 목마를 때 마실 것을 주었으며 내가 나그네 됐을 때 나를 맞아들였다. (마 25:36) 내가 헐벗었을 때 옷을 입혀 주었고 내가 병들었을 때 돌봐 주었으며 내가 감옥에 갇혔을 때 나를 찾아 주었다.’ (마 25:37) 그때 의인들이 대답할 것이다. ‘주여, 언제 주께서 배고프신 것을 보고 우리가 먹을 것을 드렸으며 언제 주께서 목마르신 것을 보고 우리가 마실 것을 드렸습니까? (마 25:38) 언제 주께서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우리가 맞아들였으며 언제 주께서 헐벗으신 것을 보고 우리가 입을 것을 드렸습니까? (마 25:39) 언제 주께서 병드시거나 감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우리가 찾아갔습니까?’ (마 25:40) 왕이 대답할 것이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무엇이든 너희가 여기 있는 내 형제들 중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다.’” 우리가 형제를 뜨겁게 사랑하는 것은 곧 예수 그리스도를 뜨겁게 사랑하는 것입니다. 내가 한 알의 밀알이 되어 자신의 희생하여 형제와 이웃을 사랑한다면, 그것이야말로 예수 그리스도를 가장 많이 사랑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더 이상 말로만 하나님 사랑한다고 하지 말고, 우리 곁에 있는 형제, 자매들을 구체적인 섬김과 희생으로 사랑하여 하나님 아버지를 사랑하기를 바랍니다.
오늘 본문에서 베드로가 뜨겁게 사랑하라고 했을 때 사용한 ‘엑테노스’란 단어는 신약성경에서 오늘 본문을 포함하여 딱 2번 등장합니다. 공교롭게도 다른 본문 역시 베드로와 연관이 있습니다. 사도행전 12장을 보면, 헤롯 왕이 요한의 형제 야고보를 칼로 죽이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가 이 일을 했을 때 유대인들이 기뻐하는 것을 보고 베드로도 잡아 죽이기 위해 그를 감옥에 가두었습니다. 이 때 예루살렘교회 성도들은 한 자리에 모여, 베드로를 구해달라고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사도행전 12장 5절을 봅시다. “(행 12:5) 이에 베드로는 옥에 갇혔고 교회는 그를 위하여 간절히 하나님께 빌더라” 예루살렘 교회 성도들은 자신들의 기도에 베드로 사도의 목숨이 달려있다는 생각으로 간절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그를 살려달라고 빌었습니다. 바로 이 본문에서 사용된 ‘간절히’라는 단어가 바로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베드로전서 1장 22절에서 사용된 ‘뜨겁게’라는 단어와 동일합니다. 그러니까 오늘 말씀에서 ‘뜨겁게 사랑하라’는 사도 베드로의 권면은 우리가 상대방을 사랑하는 일이 그의 목숨과 생명을 살리는 것과 연결되어 있는 듯한 자세와 태도로 전심전력을 다하여 사랑하라고 권면한 것입니다.
영어를 보면 ‘good’이란 단어를 더 강조하기 위해서 ‘better’라는 단어로 변하죠? 이와 마찬가지로 오늘 본문에서 사용된 ‘뜨겁다’라는 헬라어를 더 강조하기 위해서 변형된 단어가 신약성경에서 사용된 예가 하나 더 있습니다. 즉 우리가 상대방을 전심전력해서 사랑하는 것보다 우리들을 더 뜨겁게 사랑하신 분이 계십니다. 바로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시는 장면에서 그 단어가 사용되었습니다. “(눅 22:44)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 같이 되더라” 여기서 사용된 ‘더욱 간절히’라는 단어가 바로 오늘 본문에서 사용된 ‘뜨겁게’라는 단어의 강조형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볼 수 있는 대목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사랑하는 일에 자신을 아끼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전부를 십자가 위에 쏟아 부으셨습니다. 이 일을 하시기 위해 예수님은 ‘더욱 간절히’, ‘뜨겁게’, 헬라어로 ‘엑테노스’하게 우리를 위해 기도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주님은 우리들이 형제들을 향하여 ‘엑테노스’하게 사랑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형제를 뜨겁게 사랑하는 일에서 만큼은 남들에게 뒤지지 마십시오. 형제를 사랑하는 일에 열정을 쏟으십시오. ‘minimum Christian’이 아니라 ‘maximum Christian’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본론3. 서로 사랑하라
사도 베드로가 형제 사랑과 관련하여 준 세 번째 권면은 바로 ‘서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남들로부터 사랑을 받기만 하는 존재가 되지 마십시오. 우리들도 남에게 사랑을 베풀어 주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사랑을 자꾸 받기만 하다 보면, 나도 모르게 받는 것에 익숙해집니다. 그러나 베풀어 주는 사랑을 하십시오. 예수님께서 십자가 지기 전 마지막 날 밤, 제자들과 함께 일명 최후의 만찬을 나누시며 주신 명령이 다름 아닌 ‘서로 사랑하라’였습니다. 형제를 서로 사랑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말씀이면, 예수님께서 죽음을 두시고 유언처럼 이 말씀을 하셨을까요? 요한복음 13장 34-35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요 13:34)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요 13:35)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이 말씀에서 예수님은 우리가 서로 사랑하되 ‘주님이 우리를 사랑한 것 같이’ 서로 사랑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십자가 지시기 전 날 밤, 예수님은 제자 가룟 유다의 배신으로 인해 병사들에게 잡혀 끌려 가셨습니다. 예수님은 그가 가장 사랑하고 아끼던 제자 베드로에게도 버림받고 자신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말하는 버림받음을 당하셨습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예수님은 또다시 베드로를 찾아가셨습니다. 그리고 밤새도록 고기를 잡느라 배가 고픈 베드로에게 아침밥을 차려 주기 위해서 해변에서 숯불을 준비하고 계셨습니다. 자신을 버리고, 모른다고 세 번이나 부인한 이 제자를 또 다시 용서해 주시고, 끝까지 용납해 주신 우리 주님의 사랑은 얼마나 놀랍습니까? 바로 우리가 이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자들입니다. 그러하기에 이제 주님은 우리가 서로에게 이 사랑을 베풀며 살아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서로 사랑하십시오. 사랑하되 주께서 끝까지 우리들을 용서하시고 용납하신 것과 같이 사랑하시기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고 따름으로 구원받은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제 우리는 거짓이 없이 형제를 사랑할 수 있는 거듭난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함으로 우리는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러하기에 진심으로 형제들을 사랑하십시오. 전심전력으로 사랑하십시오. 예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과 같이 끝까지 용서하고 용납함으로 서로 사랑하십시오. 이와 같은 ‘필라델피아’ 형제 사랑이 풍성한 코너스톤 교회 성도님들의 삶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