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122 다시 하나님 사랑 앞으로 (2) (말라기 1장 6절 ~ 2장 16절)

(설교노트) 20210122 다시 하나님 사랑 앞으로 (2) (말라기 1장 6절 ~ 2장 16절)

서로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들이 각각 자기의 주장을 말로 논하고 다투는 것을 논쟁이라고 합니다. 말라기서는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의 논쟁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말라기서에는 총 6개의 논쟁이 등장합니다. 우리는 이미 지난 주에 첫번째 논쟁을 살펴보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사랑하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렇지 않는다고 반박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비록 야곱이 에서의 동생이지만, 하나님께서는 장자 에서가 아닌 야곱을 언약의 계승자로 택하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결과 바벨론에게 멸망 당한 에돔 민족은 하나님께서 계속해서 심판하시지만, 바벨론에서 포로로 귀환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회복하셨음을 보여주셨습니다.

2) 하나님에 대한 멸시 (1장 6절-2장 9절)
오늘은 말라기서에 기록된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의 두 번째 논쟁부터 함께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6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말 1:6) 내 이름을 멸시하는 제사장들아 나 만군의 여호와가 너희에게 이르기를 아들은 그 아비를, 종은 그 주인을 공경하나니 내가 아비일진대 나를 공경함이 어디 있느냐 내가 주인일진대 나를 두려워함이 어디 있느냐 하나 너희는 이르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이름을 멸시하였나이까 하는도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나를 멸시했다! 왜 나를 멸시하느냐? 아들은 아버지를 공경하고, 종은 그 주인을 공경하는데… 내가 너희의 아버지인데 나를 공경함이 어디 있고, 내가 너희의 주인인데 나를 두려워함이 어디 있느냐?” 이에 대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말합니다. “하나님 우리가 언제 어떻게 우리가 하나님을 멸시했습니까?”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멸시한 증거들을 하나 둘 보여주셨습니다. 먼저 하나님은 하나님의 제단에 더러운 떡을 제물로 바친 사건을 언급하셨습니다. 또 제사로 드릴 제물을 선택할 때 눈이 멀거나 상처 난 것, 병들거나 흠이 있는 것으로 바치는 것도 하나님을 멸시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현재 그들을 다스리고 있는 페르시아 총독에게 선물을 주어도 이렇게 병들고 아픈 것을 주지는 않을 것이라 말씀하시며, 만일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런 질 나쁜 가축을 총독에게 가져다 주었으면 받지 않고 오히려 기분이 상했을 것이라 말씀하셨습니다. 7-8절 말씀입니다. “(말 1:7) 너희가 더러운 떡을 나의 단에 드리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를 더럽게 하였나이까 하는도다 이는 너희가 주의 상은 경멸히 여길 것이라 말함을 인함이니라 (말 1:8)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눈 먼 희생으로 드리는 것이 어찌 악하지 아니하며 저는 것, 병든 것으로 드리는 것이 어찌 악하지 아니하냐 이제 그것을 너희 총독에게 드려보라 그가 너를 기뻐하겠느냐 너를 가납하겠느냐”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처럼 더러운 빵을 제단에 드리고, 병들고 눈이 먼 짐승을 제물로 바침으로써 하나님을 멸시하였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렇게 마음으로는 하나님을 멸시하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하나님으로부터 복 받기 원해서 “하나님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십시오!”하고 으레 하는 일이 너무 역겨우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차라리 이런 말도 안 되고 헛된 거짓 제사를 멈추게 하기 위해서 누군가가 성전 문을 닫아버렸으면 좋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이처럼 자신을 무시하는 마음으로 드리는 제물과 제사는 결코 받지 않으시겠다고 단호하게 말씀하셨습니다. 9-10절입니다. “(말 1:9)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는 나 하나님께 은혜를 구하기를 우리를 긍휼히 여기소서 하여 보라 너희가 이같이 행하였으니 내가 너희 중 하나인들 받겠느냐 (말 1:10)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내 단 위에 헛되이 불 사르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너희 중에 성전 문을 닫을 자가 있었으면 좋겠도다 내가 너희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너희 손으로 드리는 것을 받지도 아니하리라” 이뿐만이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제사를 드리면서 말하기를 “아, 제사 드리는 거 너무 귀찮아. 이거 정말 싫증나는 일이다.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야 해?”하고 짜증내며 퉁명스러워 했습니다. 절뚝거리는 짐승, 병든 짐승을 제물이라고 가지고 왔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남에게 훔친 것들을 가지고 하나님께 제물로 바쳤습니다. 이 정도 상황이면 하나님께서 화날 만하지 않습니까? 우리도 하나님 마음이 이해되죠? 또 말라기 1장 14절 말씀을 보면, 어떤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기 짐승 때 가운데 가장 좋은 수컷이 있어서 그것을 바치기로 하나님께 맹세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차츰 바칠 때가 되니까 너무 아까운 거에요. 그래서 제일 좋은 수컷 대신에 흠 있는 것으로 바꾸어 하나님을 속여 바쳤습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무시해도 이렇게까지 무시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께서 진노하실만한 상황이죠?
자, 잠깐 여기서 멈춰서 한 가지를 저와 같이 생각해 봅시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이라면, 이렇게 자기의 창조주를 무시하는 이스라엘 백성들 어떻게 처리하겠습니까? 저라면 정신을 차리게 따끔한 맛을 보도록 혼 줄을 내줄 것입니다. 사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속이고 계속해서 하나님을 무시하고 멸시했으니, 창조주 하나님 입장에서 보면 이스라엘에게 하늘로부터 불을 내려서 심판하시고 다 죽여도 될만큼 기분 나쁜 상황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또 이스라엘 백성들과 말라기서를 통해 논쟁하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들이 자기들의 죄를 회개하고 다시 하나님께로 돌아오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용서해 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참 하나님의 사랑은 위대하지 않습니까? 저라면 이스라엘 백성 진작 아웃입니다. 벌이란 벌을 다 주고 기분 나쁘고 마음에 안 들어서 버렸을 것 같아요. 그러나 하나님은 끝까지 이스라엘 백성들을 품어 주셨습니다. 그래서 말라기서의 또 다른 별명이 있습니다. 저를 따라해 보시겠습니까? “하나님의 변하지 않는 사랑” 사실 엄밀히 따지고 보면 하나님께서 이렇게 이스라엘하고 논쟁할만큼 낮은 분이 아니십니다. 군대로 따지면 갓 군대에 들어온 훈련병이 참모총장한태 군대 잘못되었다고 반박하고 논쟁하는 거죠. 영창에 들어갈 감입니다. 그러나 우리 인자하신 하나님의 모습을 보세요. 그의 사랑하는 백성 이스라엘이 죄를 회개하고 돌아오도록 말라기 선지자를 보내셔서 또 그들에게 기회를 주시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진실로 하나님의 사랑은 변하지 않는 사랑입니다.
자, 다시 말라기서로 돌아갑시다. 사실 이스라엘 백성들도 문제지만, 더 큰 문제는 종교지도자들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옳게 지도해야 하는 제사장들의 문제에요. 그런데 이 사람들도 백성들이 병들고, 눈 멀고, 흠 있는 제물 가지고 와도 그대로 용인해 주었습니다. 죄를 죄라고 가르치지 않은 것이죠. 왜냐하면 이 당시에 제사장들도 하나님을 멸시하고 있었거든요. 이러한 형식적인 제사, 형식적인 예배, 잘못된 예배가 하나님을 멸시하는 것입니다. 원래 민수기를 보면 제사장이 백성들을 축복하면 하나님께서 백성들을 축복하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말라기서를 보면 하나님께서 그를 무시하고 주님의 말씀을 멸시한 제사장들의 복을 저주로 바꾸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심지어 말라기서 2장 3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제사장들의 얼굴에 똥칠을 하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뿐만이 아니라 제사장들을 아예 똥통에 던져 버리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제사장들을 향한 하나님의 분노가 느껴지십니까? 제사장이야말로 이스라엘 영적 생활의 최후의 보루 아닙니까? 이들이야말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옳은 길로 인도해야할 책임이 있는 사람들인데 앞장서서 하나님을 무시하고, 제사를 신경쓰지 않으니까 하나님께서 화가 머리 끝까지 나신 것이죠. 하나님께서 제사장들을 향해 책망하시는 모습을 한 번 볼까요? 2장 1-3절 말씀입니다. “(말 2:1) 너의 제사장들아 이제 너희에게 이같이 명령하노라 (말 2:2)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만일 듣지 아니하며 마음에 두지 아니하여 내 이름을 영화롭게 하지 아니하면 내가 너희에게 저주를 내려 너희의 복을 저주하리라 내가 이미 저주하였나니 이는 너희가 그것을 마음에 두지 아니하였음이니라 (말 2:3) 보라 내가 너희의 종자를 견책할 것이요 똥 곧 너희 절기의 희생의 똥을 너희 얼굴에 바를 것이라 너희가 그것과 함께 제하여 버림을 당하리라” 이스라엘 백성들의 잘못되고 부패한 제사를 용인하고 동참한 제사장들… 형식적인 예배로 하나님을 멸시한 제사장들… 하나님의 말씀도 백성들에게 게으르게 가르치고, 율법도 자기가 지키고 싶은 것만 편파적으로 골라서 지키는 제사장… 하나님께서 가장 싫어하시는 부류입니다.
우리들도 하나님 앞에 예배 드리러 올 때 우리 마음을 늘 점검해야 합니다. 혹시 우리가 형식적으로 예배 드리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이 사람들 문제는 제사를 안 드린 것이 아니라, 드리긴 하는데 너무 성의 없게 제사를 드렸다는 것에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처럼 제사를 등한시하는 태도야말로 하나님 자신을 무시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예배 드리는 마음을 늘 점검하십시오. 하나님께서 우리가 예배 드리는 모습을 유심히 지켜보고 계십니다. 사람은 마음 속을 보지 못하지만, 하나님은 불꽃 같은 두 눈으로 다 꿰뚫어보고 계십니다. 바꾸어 말하면, 우리가 정성을 다해 드리는 예배를 사람들이 몰라줄 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누구는 알고 계십니까? 하나님은 다 알고 계십니다. 우리가 예배를 드리는 태도를 통해서 하나님은 기쁨과 영광을 받으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흠 있는 예배, 대충 드리는 예배, 마지못해 드리는 예배가 되지 않도록 주의하십시오. 예배는 하나님을 만나는 시간입니다. 하나님의 두 눈이 그 어느 때보다도 우리를 집중적으로 바라보고 계신 시간이 예배입니다. 똑 같은 예배를 드리는데 어떤 사람은 하나님의 분노를 사고, 어떤 사람은 하나님의 복을 받는다는 사실을 기억합시다. 예배라고 해서 다 같은 예배가 아닙니다.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존경의 마음을 다해 드리는 예배가 되기를 바랍니다.

3) 이방여인과의 결혼과 이혼 (2장 10-16절)
자, 이제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의 3번째 논쟁을 함께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가 가져오는 제물을 받지 않겠다. 더 이상 가지고 오지 말아라.” 이스라엘이 묻습니다. “왜요 하나님? 이렇게 말씀하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대답하십니다. “너희가 젊은 날에 만나서 결혼한 너히의 아내를 배신하였기 때문이다. 내 아내는 너의 동반자 아니냐? 네가 성실하게 같이 살겠다고 내 앞에서 언약을 맺고 맞아들인 아내 아니냐? 그런데 너희가 어찌 네 아내를 배신하느냐?” 도대체 이스라엘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요? 3번째 논쟁은 이스라엘 남성들에 대한 문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방신을 섬기는 이방여인들과 결혼하는 것을 금하셨습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그 지혜롭다고 소문난 솔로몬 왕도 결국에는 이것 때문에 노년에 하나님을 버리고 떠나게 되었습니다. 지금 이 사람들은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귀환자들의 후손입니다. 즉 자기 조상들이 왜 멸망했는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남성들은 계속해서 이 때까지도 이방 여인들과 아무런 거리낌 없이 결혼했습니다. 느헤미야 13장을 보면 이방 여인과 결혼한 이스라엘 남자들이 자기 장막에 우상을 세워 둔 것을 볼 수 있스빈다. 정말 심각한 일입니다.
사태가 얼마나 심각했는지 말라기 선지자 뿐만 아니라 에스라, 느헤미야 선지자 세 사람 모두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여호와 하나님을 모르고 이방신을 섬기는 이방여인들하고 결혼하지 말라고 계속해서 주의를 주고, 경고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11-12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말 2:11) 유다는 궤사를 행하였고 이스라엘과 예루살렘 중에서는 가증한 일을 행하였으며 유다는 여호와의 사랑하시는 그 성결을 욕되게 하여 이방 신의 딸과 결혼하였으니 (말 2:12) 이 일을 행하는 사람에게 속한 자는 깨는 자나 응답하는 자는 물론이요 만군의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는 자도 여호와께서 야곱의 장막 가운데서 끊어 버리시리라” 하나님께서는 이방 신을 섬기는 이방여인과 결혼한 이스라엘 남자들을 아예 영적 족보에서 끊어 버리시겠다고 단호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이방 여인이 이방신 즉 우상을 섬기는 것을 알고도 그 여인과 결혼한 것 자체가 이미 하나님을 멸시한 행위입니다. 이에 하나님은 엄중한 경고로 이 일을 금하셨습니다.
그런데 더 심각한 일도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남자들 중에는 이미 오래 전에 유대인 아내를 만나 장가간 사람도 있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이 사람들이 이방 여인들과 새 장가를 가기 위해서 자신의 아내들과 이혼했습니다. 기가 막히죠? 본래 율법으로 보면 아내가 성적 범죄를 지은 경우, 즉 아내가 바람을 피거나 간음을 한 경우에는 성경적으로 이혼이 가능합니다. 그러나 지금 이스라엘에서 일어나는 일은 다릅니다. 남편이 아내가 마음에 안 들어서 이혼하는 거에요. 이방신을 섬기는 이방여인들이 예쁘니까 좋아 보여서 그들 하고 재혼하려고 이혼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심지어 아내를 학대하고 때리는 남편들도 있었습니다. 그것도 모자라서 이웃사람들이 볼까봐 티 안나는 곳, 옷으로 가려지는 곳만 때렸습니다. 얼마나 잔인한 사람들입니까? 16절 말씀 보시겠어요? “(말 2:16)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가 이르노니 나는 이혼하는 것과 학대로 옷을 가리우는 자를 미워하노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그러므로 너희 심령을 삼가 지켜 궤사를 행치 말지니라” 16절에 ‘옷으로 학대를 가리는 자’는 남편의 가정폭력을 보여줍니다. 어려서 맞이한 아내와 부당하게 이혼하는 과정에서 남편의 폭력이 들어간 것이죠. 남들 모르게 때리고 멍들고 상처 입은 곳을 옷으로 가렸습니다. 남편이 아내를 때리는 것도 큰 죄인데, 아내를 학대하면서도 자기 체면은 챙기겠다고 멍들거나 상처나도 사람들의 눈에 잘 안 보이는 곳 때리고 옷으로 가려버렸다는 거에요. 참 문제 많은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말라기서를 보기 전에는, “하나님께서 왜 이 백성들에게 약속하신대로 복을 안 주실까? 이들이 그토록 열심히 성전을 지었는데 그 말씀하신 것처럼 복을 주셔야 하는 것 아닌가?”하고 이스라엘 백성들 편에 서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말씀을 읽을수록 하나님께서 성전을 지은 이후에도 이들에게 복을 주시지 않은 이유가 너무나도 지당하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어찌 이렇게 이방신을 섬기는 이방여인과 결혼하기 위해서 자기의 아내를 학대하고 때리고, 심지어 아내를 버리는 이처럼 악한 자들에게 하나님께서 복을 주실 수 있겠습니까? 말라기서를 통해 우리는 이스라엘 사회에 만연하고 있었던 죄의 실상을 적나라하게 보게 됩니다. 이 당시 사람들은 이혼하는 것이 괜찮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결코 아니라고 그것은 죄라고 단호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여기 16절에 사용된 ‘이혼하는 것’이란 히브리어 단어가 ‘솰라흐’입니다. 이것은 남편이 아내를 내보내는 행위를 가리키기 위해 사용된 거인데요. 이게 히브리어 어감이 어떻게 되냐하면, 남편이 아내를 쓰레기 버리듯이 이제 더 이상 자신에게는 가치 없는 존재로 여겨 부당하게 집에서 내쫓았다는 것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아내가 도덕적으로 결혼 언약에 위배되는 흠이 될만한 점을 발견한 경우, 즉 아내가 다른 남자와 바람을 피거나 성적 간음을 저지른 경우, 남편이 이혼 증서를 써주고 이혼하는 것은 우리가 얼마든지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는 신명기 24장 1-4절에도 나와있는 내용입니다. 그러나 말라기서에 등장하는 이스라엘 남편들은 아내에게 아무런 잘못도 없는데도 부당하게 그들의 아내를 미워하여 강제로 이혼했습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이혼을 미워하신다고 선언하신 것이죠.
오늘날 이 말씀을 적용할 때, 하나님께서 국제결혼을 금지하신 것은 아닙니다. 외국인하고 결혼하는 것을 막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여전히 성경은 다른 신을 섬기는 이교도, 불신자들과 결혼하는 것은 강력하게 제재합니다. 고린도후서 6장 14절 말씀입니다. “(고후 6:14)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 하지 말라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 하며 빛과 어두움이 어찌 사귀며 (고후 6:15)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조화되며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어찌 상관하며 (고후 6:16)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 우리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라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가라사대 내가 저희 가운데 거하며 두루 행하여 나는 저희 하나님이 되고 저희는 나의 백성이 되리라 하셨느니라” 하나님께서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 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실제로 이스라엘 남자들이 이방 여인과 결혼했을 때 그 여인들은 자신들이 섬기는 신을 소개하였고, 이스라엘 남자들은 그들의 아내가 섬기는 신을 따라갔습니다. 그처럼 하나님의 백성이 주님을 버리고 가는 모습이 우리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너무나도 아프게 한 것입니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오늘 본문은 예배와 삶에 대한 말씀을 담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제사 드리는 것을 귀찮아 했습니다. 제사를 별로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더러운 떡과 흠 있는 제물을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하나님은 그것이 하나님을 멸시하는 것과 같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만일 우리들이 예배를 귀찮아 하고, 예배를 등한시 한다면 우리들도 그러한 태도를 통해 하나님을 멸시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예배를 통해 우리에게 찾아오시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의 탐심과 욕심을 채우기 위해 젊은 날 하나님 앞에서 언약한 아내를 버리고, 이방신을 섬기는 이방여인들과 결혼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크신 진노를 샀습니다. 혹시 우리 가운데도 우리 마음과 삶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 하나님의 뜻을 버리고 인간으로서의 도리를 버리는 어리석음을 범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 자신의 탐심을 버리고 우리 주인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살아가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참된 주님의 백성들의 모습입니다. 바른 예배와 바른 삶을 통해 하나님을 올바르게 섬길 수 있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