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117 베드로전서 강해 (2) 고난 중에도 피어나는 찬양, 기쁨, 사랑 (배드로전서 1장 3-12절)

서론. 요즘 우리의 마음 상태는 어떠합니까?
어느 가족이 주일이 되어 아침에 각자 나이에 따라 나누어져 영상으로 주일예배를 드렸습니다. 예배 후 온 가족이 점심식사를 하기 위해 식탁에 빙 둘러 앉아 있습니다. 주일학교 어린이예배를 마치고 식탁에 앉은 딸아이가 아빠에게 묻습니다. “아빠, 아빠는 코로나 시대에 뭐가 감사해요?” 갑작스런 딸의 질문에 아빠는 적잖게 당황했습니다. 코로나 기간 동안 특별히 하나님께 감사한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주일학교 우리 아이가, 어른인 나보다 낫구나…’하는 생각이 듭니다.
만일 오늘 예배 후 점심을 먹으며 누군가 우리에게 동일한 질문을 물어본다면 우리들은 어떻게 대답할까요? ‘코로나 시대에 감사한 것이 있습니까?’ 사실 요즘 같이 힘든 때에 감사할 만한 일들이 뭐 그리 있겠습니까? 힘들고 어려운 일들이 더 많습니다. 그러나 또 가만히 우리의 삶을 들여다보면 참 감사할 것이 많이 있습니다. 미국 전체에서 확진자 숫자가 2천 3백만 명입니다. 사망자는 38만명입니다. 일리노이주의 경우 코로나 확진자가 백만명이 넘었습니다. 사망자는 2만명에 육박합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미국 전역에서 코로나 때문에 병원에 입원해 있는 사람이 약 12만 7천명 정도 됩니다. 이중에 상태가 심각해서 ICU에 들어가 있는 사람은 약 2만 3천 명, 숨을 쉴 수 없어 호흡기를 끼고 있는 사람은 약 7천 7백명입니다.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코로나로 인해 사경을 헤매고 있거나, 지금 이 순간에도 죽어가고 있습니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 우리를 본다면, 지금 이 순간 이렇게 교회에서 혹 가정에서 건강한 모습으로 예배를 드리고 있다는 이 사실 하나만으로도 하나님께 참으로 감사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요즘 우리 마음은 어떤 상태에 있습니까? 지금 내 영혼의 상태를 묘사하기에 가장 적절한 단어를 하나 뽑아 보시겠습니까? 감사입니까? 아니면 불만입니까? 사도 베드로는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으로서 흩여져 살아가고 있는 나그네와 같은 성도들을 향해 고난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백성들이 간직해야 할 세 가지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찬양’, ‘기쁨’, ‘사랑’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올 한 해 우리가 어떤 상황 속에서도, 어떤 고난 가운데도 하나님을 향한 찬양, 기쁨, 사랑을 간직하며 살아갈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1. 고난 가운데 있는 성도들의 찬양
첫째로, 사도 베드로는 고난 가운데 살아가고 있는 성도들을 향하여 하나님께 찬양을 드리자고 합니다. 3절을 보시겠습니까? 여기 보면 ‘찬송하리로다!’라고 시작합니다. 새번역성경은 이 부분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아버지께 찬양을 드립시다!” 하고 해석했습니다. 찬송은 오직 성도만이 진정 부를 수 있고,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특권입니다. 자, 그렇다면 고난 가운데서도 성도들이 이처럼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는 마음의 동기가 어디에서부터 나올까요? 이에 대해서 베드로는 말씀에서 총 3가지를 언급합니다. 하나는 과거의 사건, 또 하나는 현재진행중인 사건, 마지막은 하나는 미래에 나타날 사건입니다. 3절을 봅시다. “(벧전 1:3) 찬송하리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이 그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먼저 베드로는 우리가 하나님을 찬양해야 할 근거로 과거에 일어난 사건을 언급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죄로 멸망할 우리를 거듭나게 하셨습니다. 우리가 영원토록 하나님을 찬양하기에 합당한 사건입니다.
다음으로 베드로는 현재 우리에게 일어나고 있는 사건을 언급합니다. 5절입니다. “(벧전 1:5) 너희가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하신 구원을 얻기 위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입었나니” 베드로는 우리가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 그 날까지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입고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여기서 사용된 ‘보호하심’이란 단어는 본래 군사용어입니다. 적의 공격으로부터 시민을 보호하기 위해서 만든 ‘요새’를 가리킵니다. 우리들을 넘어뜨리기 위해 달려오는 세상과 원수 사탄의 공격으로부터 하나님이 능력으로 우리를 보호해 주십니다. 철이나 무쇠로 만든 보호막은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보호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온 몸과 마음으로 느낄 수 있습니다. 창세기 15장을 보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셔서 “아브람아, 너 두려워하지 말아라. 내가 너의 방패다!” (Do not be afraid Abram, for I will protect you. I am your shield) 하고 말씀하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방패가 되어 주시니까 그 어떤 적군도, 원수들도 아브라함을 건들지도 못하고 이길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택하신 백성들의 ‘방패’가 되어 주십니다. 파도를 막아주는 방파제처럼, 주님은 세상의 모진 풍파로부터 우리들을 완벽하게 지켜 주시는 방패가 되십니다. 우리는 주님 안에서 완전한 보호를 받게 됩니다. 이러한 믿음은 우리의 삶이 고난 가운데 있어도, 여전히 하나님을 찬양할 이유가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찬양할 미래의 사건은 바로 우리가 하나님 나라를 기업으로 상속받게 되기 때문입니다. 4절을 봅시다. “(벧전 1:4)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기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유산은 썩지 않습니다. 더럽혀지지 않습니다. 쇠하지 않는다는 것은 낡아 없어지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시는 그 날, 하늘에 간직되어 있는 이 엄청난 유산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실 것입니다. 아직 일어나지는 않았습니다만, 곧 일어날 사건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성도들에게 이와 같은 산 소망이 있기에 비록 현재 고난 가운데 살아간다 할지라도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이처럼 베드로전서 1장 3-5절은 고난 가운데 있는 성도들이 찬양할 수 있는 근거를 과거, 현재, 미래의 관점에서 하나씩 정리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거듭났습니다. 지금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받고 살아갑니다. 미래에 하나님 나라를 유산으로 상속받을 것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고난에 처한 성도들에게 이와 같이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받은 축복을 기억하며 주님께 찬양하며 살아갈 것을 권면합니다.
물론 우리가 하나님을 찬양하는 이유가 이 세가지만 있는 것은 아니죠? 우리 일상 속에서도 하나님을 찬양할 이유가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식탁에 음식이 있고, 추운 겨울에도 우리 두 어깨와 등을 덮어줄 옷이 있고, 따뜻한 집에서 살아가는 일상 자체가 하나님을 향해 찬양을 부르게 합니다. 고난 가운데서도 하나님을 향한 찬양을 올려드리는 주님의 사람들 되시길 바랍니다.

2. 고난 가운데 있는 성도들의 기쁨
둘째로, 사도 베드로는 성도들이 고난 가운데서도 기뻐할 수 있음을 알려줍니다. 6절입니다. “(벧전 1:6) 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을 인하여 잠간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었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도다” 베드로는 성도들도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여러가지 시험을 만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합니다. 예수님 믿는 우리들에게도 때로는 몸이 아프고, 경제적인 어려움도 찾아오고, 가정의 문제, 개인적인 신변의 문제들도 찾아옵니다. 그로 인해 근심하게 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주를 믿는 우리들에게 찾아온 근심은 영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고난 가운데서도 기뻐하게 만들어 주십니다.
여기서 베드로는 한 가지 삶을 바라보는 관점을 우리에게 가르쳐줍니다. 그것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삶에 일어나는 일련의 시련들은 아무 의미 없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의 믿음을 단련하여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시는 그 날, 하나님으로부터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는 목적을 갖고 계십니다. 7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벧전 1:7) 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 함이라” 지금 우리가 당하는 고난은 잠간 있다가 지나가는 것이며, 그 후에는 우리를 위해 영원한 영광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면 고난 가운데서도 기뻐할 수 있습니다. 한국 태릉선수촌에 모인 국가대표 선수들은 하루 종일 고되게 훈련합니다. 때로는 온몸이 끊어질 것처럼 격렬하게 운동을 하고 땀을 흘립니다. 만일 평생 훈련만 해야 한다고 하면 얼마나 끔찍합니까? 그러나 4년 뒤에 있을 올림픽을 바라보며 지금 흘린 땀 한 방울 한 방울이 우승과 승리의 기쁨을 주는 밑거름이 될 것을 믿으며 자원하여 훈련에 임하는 것이죠.
이처럼 우리들이 당하는 시련과 고난은 우리들의 믿음을 단련시켜줍니다. 더욱 하나님만 바라보게 만들어주고, 더욱 하나님만 붙들고 의지하며 살아가도록 우리를 변화시켜 줍니다. 그래서 마침내 하나님 앞에 서게 되는 그 날,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 받은 자들에게 존귀와 칭찬과 영광의 관을 씌어 주십니다.
그러나 국가대표 선수들도 훈련이 힘들고 고되게 느껴지는 것처럼,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고난 당하는 것 자체를 기뻐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고난 당하기 때문에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그 고난이 다 지나간 이후에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할 미래의 영광스러운 소망이 있기 때문에 기뻐하는 것입니다. 우리 남자 성도님들 긴 군대생활이 아무리 힘들어도 포기하지 않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조금만 참으면 휴가가 있거든요. 또 좀 더 참으면 전역을 하거든요. 평생 군생활만 하라고 하면 못합니다. 힘들어도 참고 또 인내하면 보고 픈 가족들, 그리운 친구들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전역하면 국방의 의무를 잘 지킨 충성스럽고 듬직한 국민이 됩니다.
우리 어머니 성도님들 아이를 임신하여 출산하는 과정이 얼마나 힘이 듭니까? 품 안의 생명으로 인해 산모들이 9개월 반 동안 얼마나 많은 불편을 겪고 고생합니까? 이 세상에서 출산의 고통과 견 줄만큼 힘든 것이 또 무엇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아무리 힘들어도 조금만 참으면 ‘응애!’하고 울며 이 세상에 태어날 고귀한 새 생명, 내 생명보다도 더 귀한 자녀를 만나는 기쁨이 있기 때문에 산모는 그 모든 고통을 감내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사도 베드로는 이 세상에서 성도들이 당하는 고난은 우리들의 믿음을 더욱 정결하고 단단하게 연단한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다 이해할 수는 없을지라도, 지금 우리 삶에 일어나는 모든 사건들이 하나님의 크신 계획 안에서 의미가 있는 것이죠.
지금 한편에서는 수많은 의료진들이 병원에서 코로나에 걸린 사람들을 살리기 위해서 밤낮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코로나에 걸린 이가 건강하게 다시 돌아오기를 간절히 기도하는 가족들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그러나 다른 한편에서는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미국에서는 하루에 약 130명 정도 자살합니다. 미국에서 사람들이 죽는 이유를 조사해보니까 자살이 10위를 차지했습니다. 지난 2017년 기준 미국에서만 한 해 동안 총으로 자신을 쏴 죽은 사람, 목매달아 죽은 사람, 독극물을 먹고 죽은 사람 등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람들 뿐만 아니라, 스스로 자해하여 Emergency를 방문한 사람들의 숫자를 다 합치면 47만 9천명이나 됩니다. 엄청난 숫자 아닙니까?
사람들은 왜 자살할까요? 인간의 가장 근본적인 본능이 살고자 하는 욕구인데, 어떻게 이 사람들은 그와 같은 극단적인 선택까지 나가야만 했을까요? 표면적으로 보면 여러가지 이유가 있습니다만, 하나로 결론을 내자면 더 이상 이 세상에서 살아갈 가치와 의미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인간이 자신의 존재 목적과 ‘오늘’이라는 하루를 살아가는 일상의 의미를 깨닫지 못하면 허무주의에 빠지게 됩니다. ‘내가 살아간다는 의미가 무엇일까?’ ‘내가 겪고 있는 이 고난은 나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가?’ 이런 질문들이 해결되지 않으면 아무런 희망도 발견하지 못한 채, 더 이상 고난을 견디지 못하고 극단적 선택으로 뛰어드는 것이죠.
그리스 로마 신화를 보면 ‘시지프스’라는 사람이 나옵니다. 신화 속에서 시지프스는 매우 지혜로운 사람으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이 사람은 얼마나 똑똑한 사람인지 마음만 먹으면 신들도 기만할 정도였습니다. 결국 신들의 노여움을 산 시지프스는 벌을 받게 됩니다. 그가 받은 벌은 ‘의미 없는 노동’이란 벌이었습니다. 시지프스는 커다란 바위를 산 정상으로 굴려야 했습니다. 시지프스가 낑낑대며 힘겹게 산 정상에 돌을 올려다가 놓습니다. 그런데 그 산의 정상은 평지가 아니라, 돌을 올려놓기 무섭게 다시 저 산 아래로 굴러갑니다. 그러면 시지피스는 다시 산 아래서부터 그 돌을 다시 굴려야 했습니다. 이것이 무한 반복되는 것이 시지프스가 받은 벌이었습니다. ‘의미 없는 노동’은 인간에게 줄 수 있는 가장 끔찍한 형벌입니다. 러시아의 대문호 도스토에프스키는 그의 책에서 말하기를, “만일 누군가를 완전히 파괴하고 짓밟아 버리고 싶다면, 그 사람에게 끔찍한 벌을 주고 싶다면, 몸을 벌벌 떨게 할 정도로 벌을 주고 싶다면, 완전히 전적으로 무의하고 쓸모 없는 노동을 시키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썼습니다.
‘라비 제커라이어스’라는 세계적인 기독교 변증가가 하루는 자기 집 앞 공원을 걷고 있었습니다. 그는 공원에서 주인과 놀고 있는 강아지 보게 되었습니다. 주인이 원반(Frisbee)을 던지면 개가 신나서 달려갑니다. 입에 물고 주인에게 돌아옵니다. 그럼 주인이 또 던집니다. 계속해서 반복합니다. “저게 그렇게 재미있나? 저게 무슨 의미가 있는가?’ 그 모습을 바라보던 라비 제커라이어스는 속으로 생각했습니다. “저렇게 주인이 던져준 원반을 계속해서 물어 오는 저 강아지와, 매일 아침이 되면 9시까지 차 타고 회사로 출근해서 5시가 되면 차 타고 집에 돌아오는 생활을 반복하는 인간과 무슨 차이가 있을까?” 지금 이 사람이 무슨 질문을 하는 거에요? ‘What’s the meaning of life?’ 입니다. 사람은 자기 자신의 인생의 목적과 의미를 발견하지 못하면 허무한 인생을 살 수밖에 없습니다. 삶의 의미를 발견하지 못해서 호텔 방에서 홀로 수면약을 과다 복용하고 쓸쓸하게 죽어가는 미국인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내가 이 세상에 존재하는 이유, 내가 오늘 하루를 살아가는 이유, 저 원반을 잡기 위해 달려가는 강아지와, 아침 차를 타고 회사로 출근하는 인간이라는 실존이 살아가는 목적과 의미가 무엇이 다른 지 답을 내릴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삶은 의미 없는 인생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삶에 의미를 부여해 주십니다. 하루하루 하나님과 눈을 마주치고 주님과 교제하며 살아가게 하시고, 이 세상에서 주님의 나라를 세우며 살아가게 하십니다! 그리고 마침내 죽음 이후에는 이 세상을 떠나 그토록 사랑하는 하나님과의 교제의 완전함 안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이것이야말로 인생이 가진 진정한 존재의 목적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그리스도인에게는 심지어 그에게 찾아온 고난도 의미가 있고 목적이 있다고 말해주었습니다. 그 의미와 목적이 무엇입니까? 고난과 시련이 우리 성도들의 믿음을 연단하여 예수 그리스도 나타나시는 그 날 존귀와 영광과 칭찬을 얻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깨달은 성도는 고난 중에서도 기뻐할 수 있는 것입니다.
3. 고난 가운데 있는 성도들의 사랑
셋째로, 베드로는 고난 가운데 있는 성도들이 여전히 사랑할 수 있음을 가르칩니다. 8-9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벧전 1:8)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벧전 1:9)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 지금 베드로의 편지를 받은 그리스도인들 중에는 예수님을 실제로 본 사람은 별로 없었습니다. 우리들과 같이 한 번도 예수님과 악수해 본적도 없고, 실제로 만나서 인사를 나눈 적도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예수님이 지금도 살아 계시고, 우리와 함께하고 계심을 믿을 수 있습니다. 그 결과 예수님을 본적 없으나 주님을 사랑하고 있으며, 주님을 믿고 즐거워합니다.
장거리 연애하는 분들을 혹시 보신 적이 있습니까? 한국에서도 매주 서울에서 버스 타고 사랑하는 이를 보기 위해서 먼 지방으로 내려가는 청년들이 있습니다. 그래도 요즘에는 스마트폰이 있으니까 차에서 할 일이라도 있죠. 예전에 그 먼 길을 가는 서너 시간 동안 얼마나 따분하고 심심했을까요? 때로는 배도 고픕니다. 화장실도 마음대로 못 가서 불편합니다. 그래도 멀어도 상관없습니다. 그 긴 기다림 끝에 가면 버스 정류장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을 그 사람 얼굴 볼 생각하면 충분합니다.
우리 성도들의 신앙생활이 마치 장거리 연애하는 사람들과 같습니다. 아직 예수님을 눈으로 볼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 인생의 마지막 정류장에 가면 예수님께서 우리를 향하여 두 팔을 벌리고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 주님을 만나 볼 소망이 있는 성도는 그래서 불편함도 고통도 사랑으로 감내합니다. 고난 가운데서도 성도는 여전히 주님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결론. 고난 중에도 찬양, 기쁨, 사랑이 풍성한 삶을 살아가라.
혹시 성인이 된 후, 어린 시절 다니던 초등학교를 찾아가 본 적이 있으십니까? 아니면 혹시 성인이 된 후, 어린 시절 살던 동네를 방문해 본 적이 있으십니까? 어른이 되고 난 후에 어린 시절 다니던 초등학교를 가보면 깜짝 놀랍니다. ‘내가 친구들과 뛰놀던 운동장이 이렇게 작았나?’ ‘우리 집 골목이 이렇게 좁았었나? 그 때는 엄청 넓어 보였는데…’ 학교 운동장이 작아진 것이 아니죠. 동네 골목길이 좁아진 것도 아닙니다. 뭐가 달라졌어요? 우리가 그만큼 크고 성장한 것이죠.
삶의 고난을 바라보는 시선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찬양과 기쁨과 사랑이 자랄수록, 고난은 작게 느껴집니다. 물론 신앙이 성장한다고 해서 삶이 전혀 안 힘들어진다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고난은 여전히 고난입니다. 힘든 것은 힘든 것이죠. 그러나 하나님을 향한 찬양과 기쁨과 사랑은 고난을 의미 있게 만들어주고, 그 고난을 감내할 수 있는 힘을 우리에게 실어줍니다. 그리고 고난이 지나가고 다 끝난 후에는 더 큰 존귀와 영광과 칭찬을 받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진 축복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고난 가운데 살아가는 성도 여러분, 비록 힘들고 어려운 광야 같은 이 세상이지만, 이 가운데서도 하나님을 향한 찬양과 기쁨 사랑이 날마다 자라 가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예수 그리스도 나타나시는 그 날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존귀와 영광과 칭찬받는 모든 성도님들 되시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