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8/23] (전체예배영상) 요나서 시리즈 (2) 물고기 뱃속에서 만난 하나님 (요나 2장 1-10절)

서론. 물고기 뱃속에 들어가야 비로소 보이는 것들
하나님은 선지자 요나에게 니느웨로 가서 그 성읍의 멸망을 선포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요나는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하고, 하나님의 낯을 피해 다시스로 향하는 배를 타고 바다로 도망쳤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바다 위에 큰 폭풍을 일으키어 도망자 요나를 끝까지 찾아오셨습니다. 배에 탄 선원들은 이 폭풍이 누구의 죄 때문에 일어났는가 알아보기 위하여 제비 뽑기를 하기로 결정했고, 결국 요나가 여호와 하나님을 피해 도망치는 중이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이어 요나는 성난 바다를 잔잔하게 하는 방법은 자신을 바다에 던지는 수 밖에는 없다고 말했습니다. 한참 동안 망설이던 선원들은 큰 폭풍으로 인해 바다 폭풍이 점점 더 거세지는 것을 보고 두려워하며 결국 요나를 들어 깊은 바다 속으로 던졌습니다. 그러자 조금 전까지만 해도 배를 삼킬 것 같았던 사나운 바다가 거짓말처럼 금새 잠잠해졌습니다. 배에 탄 선원들은 요나가 섬기는 여호와 하나님을 크게 두려워하며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럼 물에 빠진 요나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요나서 1장 17절 말씀을 봅시다. “(욘 1:17) 여호와께서 이미 큰 물고기를 예비하사 요나를 삼키게 하셨으므로 요나가 삼 일 삼 야를 물고기 배에 있으니라” 배에 탄 선원들이 자신을 들어 깊은 바다에 던질 때만해도, 요나는 이제 곧 자신이 죽을 것이라 생각했을 것입니다. 니느웨에 가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한 시간들이 주마 듯 스쳐가며 후회가 되었을 것입니다. 깊은 바닷물에 빠져 익사할 것을 직감하고 있었던 요나, 그러나 그가 전혀 상상하지 못한 일이 벌어진 거죠. 하나님은 이미 바닷속 큰 물고기를 예비해 놓으셨고, 요나가 물에 빠지자 물고기로 요나를 삼키게 하셨습니다. 이에 요나는 무려 삼일 동안 물고기 뱃속에서 지내게 되는 참으로 놀랍고 신비한 경험을 하게 되었습니다.

1. 고난 중의 기도에 응답하시는 하나님

(1) 물고기 뱃속에 들어가야 알게 되는 하나님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본문은 요나가 바로 이 물고기 뱃속에서 하나님께 드린 기도 입니다. 1절 말씀을 봅시다 “(욘 2:1)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서 그 하나님 여호와께 기도하여” 우리가 “화장실에서 기도했다”, “군대 훈련소에서 기도했다”, “장례식장에서 기도했다” 등등 다양한 기도의 장소를 들어 보았겠습니다만, 물고기 뱃속에서 기도한 사람은 요나가 유일할 것입니다. 사실 물고기 뱃속에 들어가 요나가 할 수 있는 일이 기도 밖에 또 무엇이 있었겠습니까? 말이 좋아 물고기 뱃속이지 얼마나 컴컴하고 두려웠겠습니까? 지난 주에 말씀드린 것과 같이 하나님은 우리가 기도하지 않으면, 기도할 수 밖에 없는 상황으로 내모십니다. 물고기 뱃속에 들어간 요나가 할 수 있는 일은 오직 기도 밖에 없었습니다.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서 기도했다는 것은 그가 지금 그곳에서도 하나님께서 자신과 함께 하고 계심을 깨달았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의 낯을 피해 배를 타고 멀리 도망치던 요나는 물고기 뱃속에 들어가서야 비로서 자신은 한번도 하나님으로부터 도망치는 일에 성공한 적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이죠. 눈에 보이지 않았을 뿐 하나님은 언제나 그를 지켜보고 계셨고, 요나의 모든 순간에 하나님은 그의 곁에 계셨습니다.
요나처럼 물고기 뱃속에 들어가야지만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 있습니다. 즉우리 인생에는 어떤 상황이나 환경에 처하게 될 때에야 비로소 깨닫게 되는 삶의 진리가 있는 것이죠. 남자 분들은 군대를 갔다와봐야 보이는 사회의 모습이 있습니다. 여자 분들은 자기 배로 9개월 동안 아기를 품고 살아가다가 신음과 진통 속에서 자녀를 낳아봐야 이해할 수 있는 어머니의 마음이 있겠죠. 공들여 준비한 일에 실패하거나, 사업에 어려움이 찾아오거나 부도가 나봐야 깨닫는 인생의 모습이 있습니다. 건강을 잃고 암에 걸려봐야 새롭게 깨닫는 인생의 의미가 있습니다. 시한부 선고 받은 사람이 보는 세상은 이전과 전혀 다른 세상 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 삶에는 고난의 경험을 통해서만 깨달을 수 있는 진리의 단편들이 있습니다. 요나는 물고기 뱃속에 들어가서야 비로소 하나님을 더욱 알게 되었습니다. (The things you can see only when you are inside of a fish.) “아, 나는 하나님을 떠나서 살 수 없구나?” 요나는 이 사실을 깨닫고 비로소 하나님께 기도하기 시작 했습니다.
요나가 들어간 물고기 뱃속과 같이, 우리 삶 속에 허락된 고난 역시 하나님께서 주의 뜻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고 보여주시기 위해 허용된 상황인 경우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 우리가 처한 고난과 역경 가운데 “혹시 하나님께서 내게 어떤 중요한 가르침을 주시기 위해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물고기 뱃속’은 아닐까?”하고 기도하며 하나님께 그 의미를 물어보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사실 인생의 고난 가운데 하나님을 새롭게 발견한 사람들이 정말 많습니다. “아, 여태까지는 내 힘으로 살아가는 줄 알았는데. 내가 교만 했구나? 하나님이 안 도와주시면, 하나님이 안 붙잡아 주시면 난 단 하루도 살 수 없구나?”하고 인생의 고난의 터널을 통과하며 겸손하게 주님을 인정하고 하나님께 돌아온 사람들이 많습니다. 어떤 분들에게는 하나님께서 코로나19를 ‘물고기 뱃속’처럼 사용하실 것입니다. 이 기간을 통해 삶을 돌아보게 하시고, 자신의 죄를 깨닫게 하시기도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가 주님을 새롭게 알게 하시고, 하나님을 더 간절하게 찾도록 만드십니다. 만일 지금 내가 처한 암울한 상황과 커다란 문제 속에서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 기도라면, 그곳이 ‘물고기 뱃속’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하나님께 기도로 나아가십시오. 요나는 태어나서 한 번도 상상해 본 적 없으나, 그는 물고기 뱃속에서 그 어느 때보다 하나님을 가깝게, 그리고 새롭게 만나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삶에 찾아온 고난이 이와 같이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고, 주님을 새롭게 알아가는 축복으로 변화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2) 물고기 뱃속에서의 기도조차 들으시는 하나님
자, 이제 물고기 뱃속에서 요나가 했던 기도의 내용을 봅시다. 2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욘 2:2) 가로되 내가 받는 고난을 인하여 여호와께 불러 아뢰었삽더니 주께서 내게 대답하셨고 내가 스올의 뱃속에서 부르짖었삽더니 주께서 나의 음성을 들으셨나이다” 먼저 요나는 하나님께서 고난 가운데 있는 자신의 기도를 들어 주셨음을 고백 했습니다. 말씀을 보니 요나는 자신이 ‘스올의 뱃속’에서 하나님께 부르짖었다고 고백했습니다. ‘스올’이란 단어는 히브리어로 ‘지옥’, ‘무덤’, ‘음부’, ‘죽은 자들의 세계’를 의미합니다. 즉 그는 자신이 현재 물고기 뱃속 즉 너무나도 절망스럽고 지옥 같은 죽음의 고통 속에서 기도했을 때에도, 자신의 기도가 하늘에 계신 하나님에게까지 상달 되었음을 고백했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 하나님은 죽음의 처소와 같은 가장 절망스러운 상황과 상태에서 부르짖는 기도일지라도 다 들어 주십니다. 사람들은 절망스러운 고통에 빠지게 되면 흔히 “하나님께서 내 기도는 듣지 않으시는 것 같다”, “내 기도는 아무 응답이 없다” 이렇게 반응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이 세상에서 나 혼자 밖에 없다고 느껴지는 바로 그 순간, 바로 그 장소, 하나님이 내 기도를 절대로 안 들으실 것 같아 보이는 그 상황 속에서도 여전히 주님은 우리의 기도를 다 듣고 계십니다.
2절 말씀을 다시 한 번 주목해서 보십시오. “여호와께 불러 아뢰었삽더니 주께서 내게 대답하셨고… 부르짖었삽더니 주께서 나의 음성을 들으셨나이다.” 요나는 여기서 “내게 대답하셨고, 나의 음성을 들으셨나이다” 이렇게 2번씩이나 하나님께서 자신의 기도를 들어 주셨다고 고백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저 깊은 바다 속에서 헤엄치고 있던 컴컴한 물고기 뱃속에서 올려진 요나의 기도도 들으실 수 있으시다면,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서 듣지 못하시는 기도가 어디 있겠습니까? 하나님은 죽음의 처소와 같은 가장 절망스러운 상태에서 부르짖는 기도일지라도 다 듣고 계십니다.
(최근에 주일예배 실시간 영상 예배를 준비하기 위해서 인터넷 케이블 공사를 했습니다. 인터넷 케이블을 연결하기 위해서 교회 집사님 두 분 하고, 교회 건물 벽을 뚫었습니다. 왜냐하면 아무리 기술이 발달해도 WIFI 시그널이 두꺼운 콘크리트 벽을 뚫지를 못하는 거에요. 아무리 발달한 통신기술로도 신호가 뚫지 못하는 장벽이 있는 셈이죠. 그러나 기도는 뚫지 못하는 벽이 없습니다. 아무리 두꺼운 콘크리트 벽으로 만들어진 방이라 하더라도 기도는 그 어떤 크고 두꺼운 장벽이라도 다 뚫고 하늘로 올라 갈 수 있습니다. 기도는 WIFI처럼 신호가 약한 곳이 없습니다. 언제 어디서나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늘어 주십니다.)
2절 다시 한 번 보세요. 2절 첫 번째 단어가 뭐죠? ‘가로되’ 입니다. 영어 성경에 보면 ‘He said’라고 되어 있습니다. ‘He thought to himself’가 아니라 ‘he said’ 입니다. 요나가 마음 속으로 생각한 것이 아니라 입 밖으로 소리 내어 기도한 것입니다. 지금 요나는 컴컴한 물고기 뱃속에 있습니다. 지금 눈 앞에 듣는 이 하나 없었으나 그는 소리내어 기도한 것이죠. 왜냐하면 그에게는 “하나님께서 물고기 뱃속에서도 나와 함께하고 계신다”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 입니다. 4절도 한 번 눈을 보세요 “내가 말하기를…” 여기서도 물고기 뱃속에 있던 요나는 하나님께 소리내어 기도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이 깊은 바다 물고기 뱃속에 있는 자신의 기도까지도 다 듣고 계심을 믿었습니다.
2절을 또 한 번 보십시오. 2절 마지막에 “주께서 나의 음성을 들으셨나이다”하고 요나가 말했을 때, 여기서 “들으셨나이다”라는 단어가 바로 히브리어 ‘샤마으’입니다. 야곱의 첫째 아내 레아가 둘째 아들을 낳으면서 “”여호와께서 내가 내 남편에게 사랑받지 못하는 것을 들으시고 이 아이를 내게 주셨구나” 하면서 그 이름을 ‘시므온’이라고 지었습니다. 이 이름이 바로 오늘 본문 “들으셨나이다” (샤마으)에서 파생된 이름입니다. 또 한나가 간절한 기도로 아들을 낳았을 때 “하나님께서 내 기도를 들어주셨다!”하고 고백하며 지은 아들의 이름이 ‘사무엘’입니다. 이 이름도 “들어주셨다”란 의미를 가진 ‘샤마으’란 단어에서 나온 이름이죠. 히브리어 ‘샤마으’는 아주 독특한 의미가 있습니다. 이는 단순히 ‘듣는다’란 뜻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일단 ‘샤마으’는 상대방이 나의 이야기를 들을 때 ‘귀를 기울여 자세히 경청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또한 더 나아가 상대방이 내 이야기를 들을 뿐 아니라, 들은 바에 대하여 실제적인 조치나 행동을 실행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소 귀에 경읽기” 식으로 귓등으로 듣고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마이동풍” 식으로 남의 말을 귀담아 듣지 않고 흘려 버리는 태도가 아닙니다. 상대방의 말을 온 마음을 다해 진중하게 듣고, 그의 말에 진중하게 반응하는 것까지가 바로 ‘샤마으’란 단어가 가진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오늘 2절 말씀에서 요나가 “주께서 나의 음성을 들으셨나이다”하고 말했을 때 그는 “하나님께서 물고기 뱃속에서 드리는 나의 기도에 귀 기울여 경청해 주셨다. 그리고 내 기도에 응답해 주셨다.”하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은요, 이와 같이 물고기 뱃속에서 드리는 기도조차 들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듣지 못하실 기도가 어디 있겠습니까?
7절 말씀을 한 번 봅시다. “(욘 2:7) 내 영혼이 내 속에서 피곤할 때에 내가 여호와를 생각하였삽더니 내 기도가 주께 이르렀사오며 주의 성전에 미쳤나이다” 여기서 ‘내 영혼이 내 속에서 피곤할 때에’라는 말씀을 다른 번역본에서는 “내 목숨이 꺼져갈 즈음”이라고 해석 했습니다. 그러니까 다시 해석하면 “내가 죽어갈 때 즈음”, “’이제 모든 것이 다 끝이다’하고 생각하고 있을 그 때 즈음”이란 뜻 입니다. 그 때에 요나가 기도하니까 하나님이 그를 구원해 주셨다는 고백 입니다. 혹시 지금 설교를 듣고 계신 분들 중에 자기 스스로를 바라보며 “난 이제 끝이다”, “난 이제 망했다”, “이젠 너무 늦었다”하고 생각하고 포기하며 좌절하시는 분이 계십니까? 다음 문장을 귀 기울여 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을 기대하기 가장 힘든 곳에서도, 여전히 하나님을 가장 가깝게 만날 수 있다” 모세는 광야라는 아주 척박한 환경, 도망자라는 신세, 80세라는 늦은 나이에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다니엘은 사자굴이라는 아주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그의 세 친구들은 풀무불이라는 죽음의 장소에서 하나님을 경험했습니다. 요셉은 지하감옥에서 꿈을 해석하는 능력을 주시는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여러분의 인생은 지금 어디에 계십니까? 광야 입니까? 사자굴 입니까? 풀무불 속입니까? 지하감옥 입니까? 하나님은요, 하나님이 가장 계시지 않는 것처럼 보이고 느껴지는 현장에서도 여전히 함께하고 계십니다.
이 세상 어떤 나라를 찾아가보아도, 대체적으로 사람들은 신을 모시는 건축물을 세울 때 본능적으로 높은 산에다가 세우곤 합니다. 사람들이 신은 하늘과 가깝다는 사실과 연관시켜서 높은 지대를 터로 삼아 신을 모시는 건축물을 지은 거죠. 그래서 구약성경을 보면 가나안 사람들도 우상을 섬기는 제단을 다 산에 지었어요. 그래서 이름도 ‘산당’ 입니다. 대한민국의 공기 좋고 물 좋은 산들을 가보십시오. 다 하나 같이 높은 곳에 불상을 안치해 둔 ‘법당’이 있습니다. 사실 한국의 유명한 기도원들도 대부분 산에 있습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은 대체적으로 높은 지대에서 신을 찾아야 더 신과 가깝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속 요나는 지금 어디에서 기도하고 있습니까? 깊은 음부 입니다. 깊고 컴컴한 바다 입니다. 그것도 물고기 뱃속입니다. 그러나 그곳에서 드려지는 기도를 하나님께서 들으셨습니다. 내가 어느 곳, 어느 장소, 어떤 상황 속에서 드리는 기도도, 심지어 가장 절망적이고, 외롭고, 쓸쓸하고, 지치고. 힘든 그 고난 속에서 드리는 기도도 하나님께서 여전히 들어주신다는 것, 그냥 들어주시는 것도 아니고 ‘샤마으’ 귀 기울여 듣고 계시다는 사실을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요나처럼 하나님께 마음을 쏟아가며 기도하십시오. 하나님께 도와달라고, 살려달라고, 구원해달라고 기도하십시오. 하나님께서 반드시 크신 은혜 주실 줄 믿습니다. 저를 한 번 따라해 주시겠습니까? “하늘이 무너져도 기도할 시간은 있다” “하늘이 무너져도 기도의 역사는 일어난다” 하나님께서 기도하는 자들을 도와주실 줄 믿습니다.

2. 쫓겨난 자를 다시 감싸 주시는 하나님
(1) 주의 목전에서 쫓겨난 자도 다시 돌아갈 수 있다.
4절 말씀을 함께 보겠습니다. “(욘 2:4) 내가 말하기를 내가 주의 목전에서 쫓겨났을지라도 다시 주의 성전을 바라보겠다 하였나이다” 요나는 지금 자신이 깊은 바다에 빠진 것도, 물고기 뱃속에 갇혀 있는 것도 다 하나님을 피해 도망친 자신의 잘못 때문인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지은 불순종의 죄로 인해 주님의 목전, 즉 하나님 앞에서 쫓겨났다고 인정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비하신 하나님을 끝까지 의지하며 다시 주님 앞에 나아갈 것을 결심합니다. 4절에 “다시 주의 성전을 바라보겠다”는 것은 비록 요나 자신이 죄를 지어 하나님께 징벌을 당하는 중이나, 또 다시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를 구하겠다는 의지적 표현 입니다.
저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정말 축복받은 사람들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의 모든 허물을 덮어 주시고 죄를 용서해 주셨기 때문 입니다. 아무리 지은 죄가 많다 하더라도 언제라도 또 다시 주님께 돌아가면 새하얀 눈처럼, 양털처럼 우리 죄를 모두다 씻어 주시고 하나도 남김없이 용서해 주시겠다고 하나님은 약속해 주셨습니다. 이사야서 44장 22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사 44:22) 내가 네 허물을 빽빽한 구름의 사라짐 같이, 네 죄를 안개의 사라짐 같이 도말하였으니 너는 내게로 돌아오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음이니라”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주의 자녀들의 죄를 용서하시기를 기뻐하십니다. 그래서 이제라도 우리가 죄를 깨닫고 회개하며 하나님께 돌아가면 주님은 진노 중에라도 긍휼을 베풀어 주십니다.
저는 찬송가 중에 “어서 돌아오오!”라는 찬송을 정말 좋아합니다. 1절만 한 번 불러볼까요? “어서 돌아오오. 어서 돌아만 오오! 지은 죄가 아무리 무겁고 크기로. 주 어찌 못 담당하고 못 받으시리요. 우리 주의 가슴은 하늘 보다 넓고 넓어.” 인생의 죄로 한참 동안 방황하며, 나 같은 죄인이 어찌 구원 받으리요? 나는 용서 받지 못할 죄인이다 하고 생각하며 나 자신을 스스로 정죄하고 있을 때 이 찬양이 얼마나 큰 위로가 되었는지 몰라요. “아 그래 우리 주님이 감당하지 못할 죄가 없구나? 내가 생각할 때는 아무리 큰 죄라도 주님은 다 받아주실 만큼 주의 사랑은 크고도 크구나?” 이것을 깨달으니까요. 찬송을 부를 때마다 두 눈에서 주룩주룩 눈물이 흐르는 거에요. 하나님의 은혜가 너무 감사한 거에요.
요나는 비록 자신이 주님의 목전에서 쫓겨났으나, 다시 주의 성전을 바라보겠다고 고백했습니다. 비록 자신이 죄를 지어 하나님의 진노를 당하고 있으나, 다시 주님의 은혜와 자비를 구하겠다는 고백 입니다. 하나님은 요나가 이와 같이 진심으로 그의 죄를 회개하자 또 다시 그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시고 그를 구원해 주셨습니다.

(2) 고난의 목적은 우리를 성숙케 하시기 위함
요나를 바다에 던진 선원들은 그가 죽은 줄로만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요나가 바다에 빠져 죽도록 내버려두시지 않으셨습니다. 큰 폭풍을 보내셨던 하나님의 목적은 불순종한 요나를 죽이는 것이 아니라, 그로 하여금 철저하게 회개하여 하나님의 뜻과 마음을 깨닫고 다시 니느웨로 가서 주님이 주신 사명을 감당하는 것이었습니다.
자식에게 매를 드는 부모 중에 정말 자기 아들, 딸을 때리고 싶어서 때리는 부모가 이 세상에 어디 있겠습니까? 다 자식 잘되라고 눈물로 때리는 것이죠. 그래서 어떤 어머니들은 자식 앞에서는 호되게 매질하고 방에 가서는 혼자 눈물 닦으시는 분들도 계세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내 아들, 내 딸을 내 손으로 때렸으니 어머니 마음이 더 아프신 거죠.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이 그러합니다. 하나님은 우리 아프라고, 우리 망하라고 우리 삶에 고난을 허락하시는 것 아닙니다. 다 우리 영혼이 잘 되라고 주시는 고난이고 시험 입니다.
그래서 물고기 뱃속에 있던 요나가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뉘우치며 하나님께 은혜를 구하자 그제서야 하나님은 “이제 됐다”하시며 그를 물고기 뱃속에서 구출해 주셨습니다. 10절을 보십시오. “(욘 2:10) 여호와께서 물고기에게 명하시매 요나를 육지에 토하니라” 영어 성경으로 오늘 본문을 보면 1절이 영어 단어 ‘Then’ 으로 시작하고 마지막절인 10절도 ‘Then’으로 끝납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을 해석해보면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 들어가자 (그러자) 기도했고, 요나가 기도하자 (그러자) 하나님이 그를 물고기 뱃속에서 구원해 주셨다.” 입니다. 이것은 성경에서 계속해서 반복되는 패턴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주를 떠나 죄 가운데 살아가면 (그러면) 하나님은 고통과 고난을 주십니다. 그러나 그 백성이 고난 중에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오면 (그러면) 하나님께서 용서해 주시고 구원해 주십니다.
하나님은 절대로 우리를 망하게 하시려고 시련을 주시거나 고난을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위기’의 또 다른 이름은 ‘위험한 기회’ 입니다. 어떤 기회 입니까? 하나님을 새롭게 만날 수 있는 기회 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새롭게 체험할 수 있는 기회입니다. 인생의 위기 속에서 우리의 믿음은 새롭게 탄생할 수 있습니다. 하루 전만 해도 배를 타고 하나님을 피해 도망치던 요나가, 자신이 물고기 뱃속에서 하나님을 만나리라고 상상이나 했겠습니까?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 입니다. 얼마 전만 해도 하나님을 무시하고 살아가던 우리가, 코로나19로 인한 인생의 위기를 통해 하나님을 새롭게 만나리라고 그 누가 상상이나 할 수 있었겠습니까? 하나님은 그와 같이 우리 삶의 고난을 통해서도 역사하십니다.
하루는 군대 전역을 앞두고 이제 사회 나가서 어떻게 살아야 할까 진중하게 고민하고 있는데 제 옆에 후임 한 명이 다가왔습니다. “김영목 병장님 뭘 그리 심각한 표정으로 계십니까?” 그러더니 저한태 노래를 하나 불러주는 거에요. “기도할 수 있는데 왜 걱정하십니까?” 제가 웃으면서 “야, 내가 평생 교회 다녔는데 그런 찬송은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다. 너가 방금 지은 거지?” 그러니까 아니라고 정말 있는 찬양이라고 나중에 시간 나면 꼭 찾아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찾아보니까 정말 있는 찬양이더라고요. 제목이 “기도할 수 있는데” 입니다. 한 번 불러볼까요? “기도할 수 있는데 왜 걱정하십니까? / 기도하면서 왜 걱정하십니까? / 주님 앞에 무릎 꿇고 간구해 보세요 / 마음을 정결하게 뜻을 다하여 / 기도할 수 있는데 왜 걱정하십시까? / 기도하면서 왜 염려하십니까?”
오늘 이 시간 설교를 듣고 계시는 분들 가운데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 있는 것처럼, 정말 인생의 최대 위기, 가장 힘든 시간을 보내고 계신 분들도 계실지 모르겠어요. 이 찬양을 꼭 추천해 드리고 싶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저를 한 번만 더 따라해 주십시오. “걱정하지 말고 기도하자.”, “걱정할 시간에 기도하자”, “하늘이 무너져도 기도할 시간은 있다.” 걱정하는 것은 우리 삶에 아무런 변화도 일으키지 못합니다. 그러나 기도는 역사하는 힘이 큽니다. 요나가 기도하자 하나님께서는 큰 물고기를 명하여 요나를 구원해 주셨습니다. 우리가 기도하면 하나님께서도 큰 산과 같은 문제를 옮겨 주실 줄 믿습니다.

결론. 물고기 뱃속 같은 세상에서 만날 하나님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이 지금도 우리 곁에 함께하십니다. 지금도 주님은우리의 오른손을 붙잡고 계십니다. 물고기 뱃속에 있는 것 같이 힘들고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주님은 우리의 기도에 귀 기울여 듣고 계십니다. 그리고 기도한 자에게 하나님은 구원의 손길, 은혜의 손길, 도움의 손길을 내밀어 주실 것입니다. 새로운 한 주 물고기 뱃속 같은 힘든 이 세상이지만, 기도로 살아감으로 주님께서 주시는 크신 은혜, 크신 도움, 크신 깨달음 받고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