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629 주의 땅에 영광이 머물게 하소서 (시편 85편 1-13절)

         아기들이 아장아장 걷는 모습을 보신 적이 있으실 겁니다. 기어 다니던 아기들이 걷기 위해서 약 3천번 이상 넘어져야 한다고 합니다. 계산해보면 아기가 걷기 위해서는 하루에 평균 20번 정도 넘어지는 꼴입니다. 이처럼 인간은 태어나면서 넘어지고 넘어지고 또 넘어지며 걷는 법을 배워갑니다.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처음부터 실수나 실패없이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도 없습니다. 처음에는 자신이 신앙생활을 잘 하고 있다고 느끼는 사람도, 시간이 지나고 성숙하고 나서 뒤를 돌아보면 ‘그 때 내가 말하고 행동하는 것이 여러모로 미숙했구나?’하고 깨닫는 순간이 오기도 합니다. 이 세상에 넘어지지 않고 걷는 법을 배우는 아기가 없듯이, 신앙의 영역에서도 실패하지 않고 실수하지 않는 사람은 아마 거의 없을 것입니다. 문제는 신앙생활에 있어서 실패가 다름 아닌 죄로 말미암은 경우입니다. 불교나 힌두교에서는 죄를 지으면 그에 대한 대가를 지불해야 합니다. 백만원 은행에 빚을 지은 사람이 백만원을 땀 흘려 벌어서 빚을 갚아야 하는 것처럼 자신이 지은 죄나 잘못에 대해서 선행이나 봉사 공로를 통해서 죄의 빚을 갚는다는 것이 타종교의 가르침입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다릅니다. 성경은 우리가 하나님께 지은 빚은 백만원이 아니라 평생 단 한 순간도 쉬지 않고 일해도 갚을 수 없을 만큼 커다란 빚을 진 사람들이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아무리 내 평생 이제부터 착하게 살고, 평생 봉사와 선행만 한다고 해도 죄의 빚은 갚을 수 없습니다. 이에 대해서 성경은 오직 하나님만이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실 수 있다고 가르치고 있고, 하나님께서는 이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을 통해서 우리의 죄값을 대신 짊어지셨다고 선포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 앞에서 죄를 지은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은 하나님께 진심으로 죄에 대하여 뉘우치며 회개하며 주님께 돌아가는 것 밖에는 없습니다.

오늘 본문의 시인이 바로 그와 같은 회개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본문 속 상황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큰 환난을 겪고 있습니다. 시인은 이스라엘에게 닥친 어려움이 그들의 죄로 말미암은 것임을 직감하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죄를 용서해 주실 것과 다시 한 번 이스라엘을 회복해주실 것을 간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기도하는 시인의 모습을 함께 살펴봅시다. 먼저 1-3절을 보면 시인은 과거에 하나님께서 이미 이스라엘의 죄를 용서하셨던 사건을 회상하며 주님께 기도하고 있습니다. “여호와여, 주께서 이 땅에 은혜를 베푸시고, 포로 되었던 야곱의 자손들을 돌아오게 하사 다시 번영케 하셨습니다. 주의 백성들의 죄를 용서해 주시고 잘못을 다 덮어 주셨습니다. 주께서 분노를 거두시고, 노여움을 푸셨습니다.” 이처럼 시인은 이전에 이스라엘의 죄와 잘못에 대해서 용서하셨던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언급하며, 이제 또 다시 한 번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죄를 용서해 주실 것을 간구하고 있습니다. 4절을 봅시다. “우리의 구원자, 하나님이여, 이제 우리를 다시 회복시켜 주소서. 우리를 향한 주의 노여움을 거두어 주소서.” 시인의 현실 인식은 어떻습니까? 지금 이스라엘에게 찾아온 환난과 어려움의 원인이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떠난 죄로 말미암은 것이란 해석입니다. 70년간의 바벨론 포로의 생활을 마치고 돌아와 보니 이스라엘 땅은 기근과 가뭄으로 황무지가 되어 있었습니다. 살아가기가 막막하고 어려운 상황입니다. 혹시 우리들이 현재 당하고 있는 환난과 어려움이 있습니까? 그것이 혹시 죄 때문은 아닌지 우리들도 점검해 봐야 합니다. 그리고 만일 성령께서 혹은 우리의 양심이 그러하다는 것을 깨닫게 한다면 우리들도 오늘 시인의 모습처럼 하나님 앞에 나아가 진심으로 용서를 구하고 회개하는 시간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시인은 하나님의 자비하심에 근거하여 기도하고 있습니다. 비록 이스라엘이 죄를 지어 하나님께 벌을 받고 있습니다만, 시인은 하나님은 영원토록 분을 내고 진노하시는 분이 아니라, 반드시 자비를 베푸시고 인자하심을 보여주사 주의 백성을 구원하실 분이심을 신뢰하고 있습니다. 바로 이러한 하나님의 자비로운 성품에 호소하며 시인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용서하시고 다시 회복해주실 것을 간구하고 있습니다. 여기 시인이 가진 기도의 지혜를 배웁시다. 내가 착하게 살아서, 내가 용서 받을 만한 선행을 해서 용서해달라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용서 받을 자격이 사실 없지만, 하나님께서 자비로우시기 때문에 용서해 주실 것을 간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인은 7절에 “여호와의 주의 인자하심을 우리에게 보이시며”라고 말한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지은 것이 죄 밖에 없습니다. 용서 받을 만큼 의로운 백성이 아닙니다. 버림 받아 마땅합니다. 그러나 시인은 하나님의 자비로우신 성품에 의지하여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비록 지금 당장은 이스라엘이 머물고 있는 땅이 기근과 가뭄으로 황폐하지만, 시인은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회복될 이스라엘을 소망하고 기다리고 있습니다. 10절을 봅시다. “인애와 진리가 만나고 의와 화평이 서로 입맞추었으며” 여기서 말하는 인애, 진리, 의, 화평 모두 하나님의 성품을 반영한 나라입니다. 주님께서 다스리시는 나라에서 나타나게 될 특징들입니다. 이스라엘이 주님의 인자하심으로 하나님께서 하늘에서 이스라엘을 굽어보시고 이 황무지가 된 땅을 회복하실 것입니다. 그 결과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12절을 봅시다. “여호와께서 좋은 것을 주시리니 우리 땅이 그 산물을 내리로다” 여기서 산물이란 풍성한 곡식, 꽉 찬 열매를 의미합니다. 지금은 기근과 가뭄으로 인해 땅이 갈라지고 말라버린 황무지이지만, 인자하신 여호와께서 이 땅에 참 좋은 것을 주시니 이 땅에서 풍성한 곡식을 거두게 될 것이라는 소망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님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보이는 이 세상은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다스리심 아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벌을 내리시면 아무리 젖과 꿀이 흐르던 좋은 땅도 황무지가 되어 버립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복을 내리시면 기근과 가뭄이 머물던 황폐한 땅도 풍성한 곡식과 열매를 맺는 복된 땅으로 변화할 수 있습니다. 이는 단순히 땅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 인생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하나님과 어떠한 관계를 맺고 살아가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하나님의 인자하신 성품에 기대어 주님 앞에 나아가십시다. 주님은 우리의 부족함을 책망하시는 분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 주님 앞에 우리의 연약함을 겸손하게 고백하며, 우리의 죄악을 진실하게 뉘우치고, 오직 하나님의 자비로우신 그 손길이 우리의 삶을 붙드사 우리를 치료하시고, 회복하시고, 복 주실 것을 구하며 나아가십니다. 그리할 때 하나님은 우리 인생에 좋은 곳을 주시고, 우리 인생에 풍성한 열매를 맺도록 복 주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