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612 [역사하시는 성령님] 시리즈 (2) 성령으로 거듭남 (요한복음 3장 1-17절)

[아브라함 해럴드 매슬로우]라는 이름의 미국의 철학자이자 심리학자가 있습니다. 매슬로우는 지난 1943년 인간의 욕구에는 단계별 위계가 있다는 [욕구 5단계설]을 주장한 것으로 유명합니다. 인간에게 가장 기본이 되는 욕구는 ‘생리적 욕구’입니다. 배고픔과 허기를 채우려는 욕구, 먹고 잠을 자는 것과 같이 생명을 유지하려는 가장 기본적인 욕구입니다. 이 생리적 욕구가 충족되면 그 다음에 나타나는 것이 바로 ‘안전의 욕구’입니다. 살인과 폭력과 같은 위험, 살해 위협이나 강도에 의한 박탈에서 자신을 보호하고 불안을 회피하려는 욕구입니다. 이 욕구가 충족되고나서 나타나는 욕구가 ‘애정과 소속의 욕구’입니다. 사람은 자신보다 더 큰 조직이나 공동체에 소속되어 교제를 나누고 싶어하는 욕구를 가지고 있습니다. 가족, 친구, 친척, 동아리, 학교, 직장, 봉사단체 등 인간은 집단에 귀속되고 싶어하는 욕구가 있습니다. 이는 공동체에 속하여 사람들에게 사랑받고 소속감을 느끼고 싶어하는 욕구입니다. ‘애정과 소속’의 욕구가 충족된 사람은 사람들과 친하게 지내고 싶어 합니다. 이것이 바로 ‘존중의 욕구’입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이 존중 받기를 원하며, 더 나아가 존경 받기를 원하는 욕구입니다. 남들이 나의 가치를 알아주고, 나의 헌신과 노력을 통해 칭찬과 인정을 받는 보람을 누리고 싶은 욕구입니다. 매슬로우가 주장한 마지막 다섯 번째 욕구는 바로 ‘자아실현의 욕구’입니다. 나라는 사람이 가진 가능성과 잠재력을 최대한 발휘하려는 욕구입니다. ‘자아실현의 욕구’는 ‘성장 욕구’라고도 부릅니다. 그런데 이 마지막 욕구는 다른 욕구들과 달리 충족될수록 더욱 증대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후에 매슬로는 욕구 5단계 중 마지막 단계인 ‘자아실현의 욕구’를 초월하는 또 다른 메타 욕구들이 있다고 덧붙였습니다. 매슬로우의 관점을 빌어서 생각해 보면 인간은 이처럼 끊임없이 자신의 내면에서 솟아나는 여러 욕구를 채우기 위해서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왜 인간은 자신 안에 있는 욕구들을 채우기 위해서 살아갈까요? 그 욕구가 채워져야 행복하다고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중에 불행해지기 위해 사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불행해하기 위해 사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만나 본 적이 없습니다. 인간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죽을 때까지 행복하기 위해서 살아갑니다. 문제는 이 세상 그 누구도 자신 안에서 끊임없이 용솟음치는 욕구를 채울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의식주 문제만 해결되면 행복할 것 같았는데, 막상 의식주가 해결되니까, 이제는 사람들에게 사랑받고 싶습니다. 혼자서 지낸다면 가족에 소속되고 싶어 합니다. 가족이 있다면 사회 조직이나 종교 기관과 같은 기쁨을 줄 것 같은 공동체에 소속되고 싶습니다. 사람들에게 칭찬과 인정받는 삶을 살고 싶고, 나라는 사람이 땀 흘려 최선을 다해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사람들이 알아주기를 바랍니다. 부모에게 자랑스런 자식이 되고 싶고, 자녀들에게는 존경 받는 부모가 되고 싶습니다. 남은 삶을 인류를 조금이라도 이롭게 하는 일에 쓰이고 싶어합니다. 이처럼 인간은 한 평생 자신 안에 있는 다양한 욕구를 채우기 위해서 살아갑니다. 사람마다 충족시키는 욕구의 정도에는 어느 정도 차이가 있겠습니다만, 밑 빠진 독을 물로 채우려는 시도 같아서 끊임없이 붓고 부어도 욕구는 사라지지 않는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평생 채워지지 않는 내면의 욕구로 인해 남과 나를 비교하고 스스로를 바라보며 “나는 참 불행한 사람이다”하고 생각하며 살아가야 하는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불평과 불만으로 살아가는 것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성경은 이 문제에 대해서 우리에게 어떻게 이야기하고 있는지 함께 살펴봅시다.

오늘 본문에는 [니고데모]라는 사람이 등장합니다. 니고데모는 유대 공의회 의원 중 한 사람이었습니다. 한국으로 말하면 국회의원이고, 미국으로 말하면 상원의원에 해당하는 사람입니다. 한국 국회의원들 얼마나 잘 삽니까? 또 미국 상원의원들은 얼마나 큰 부자들입니까? 유대 공의회 의원인 니고데모 역시 남 부럽지 않을 정도의 재력을 소유했을 것입니다. 나중에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고 장사 지낼 때 니고데모 혼자서 ‘몰약과 침향 섞은 것을 약 백 근’ 즈음 가지고 왔습니다. ‘몰약’은 방부제 역할을 하여 시체를 염할 때에 부패를 막기 위해 사용되었습니다. 이 당시 몰약은 왕의 장례식에서나 사용될 정도로 매우 값비싼 물품이었습니다. ‘침향’은 백합에서 채취한 것으로 건조제와 방취제 역할을 합니다. 이 역시 시신이 부패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 사용된 값비싼 물품이었습니다. 니고데모가 예수님의 장례를 위해 가지고 온 몰약과 침향 섞은 물품의 무게는 대략 34kg이나 되는 엄청난 양이었습니다. 이를 통해 니고데모가 상당한 부자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니고데모는 ‘바리새인’입니다. 오늘날에는 ‘바리새인’이란 말을 ‘종교적 위선자’를 지칭하는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합니다만, 신약시대 당시 바리새인들은 유대인 사회에서 존경하는 부류의 사람들이었습니다. 니고데모가 길거리를 지나가면 사람들이 머리와 허리를 숙여 인사합니다. 다른 집에 초대받으면 상석을 그에게 내어줍니다. 또한 니고데모는 공의회 의원입니다. 유대 민족을 대표하는 70명 중 한 사람입니다. 그는 나라와 민족의 운명을 가르는 중요한 결정을 내릴 수 있는 권세를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또 그는 수하에 많은 사람을 두는 위치에 있습니다. 이처럼 많은 부와 재물, 명예와 존경, 권력과 권세… 이 모든 것을 다 가진 사람이 바로 니고데모입니다. [매슬로우의 욕구 5단계]를 놓고 봐도 상당히 많은 욕구를 충족시킨 사람입니다. 그러나 니고데모에게는 결코 채워지지 않는 목마름이 있었습니다. 많은 것을 가져도 가슴 한구석이 뻥 뚫린 것처럼 무언가 설명할 수 없는 허전함이 있었습니다. 더 많이 가져봐도 채워지지 아니할 허전함이요, 더 높이 올라가도 사라지지 않을 공허함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니고데모는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듣게 되었습니다. 각색 병든 자들을 능히 다 고치신 예수님, 귀신들린 자들에게서 귀신을 쫓아내시고, 파도와 풍파를 말씀으로 잠잠케 하시고, 물이 변하여 포도주가 되게 하신 예수님. 니고데모는 예수님에 대한 강한 호기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 분을 한 번 만나 보고 싶었습니다. 예수님과의 만남을 통해 자신의 내면에 있는 채워지지 않는 영적인 목마름을 해갈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동료들인 바리새인과 공의회 의원들은 공공연히 예수님을 비난하고 적대시하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니고데모가 예수님을 만나게 된다면 그에게 비난의 화살이 돌아올 것은 불 보듯 뻔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이대로 앉아 가만히 앉아 있기에는 진리를 향한 그의 목마름이 너무나도 컸습니다. 그의 내면 안에 있는 삶에 대한 무수히 많은 질문들과 채워지지 않는 목마름을 채우는 길은 오직 예수님을 만나는 것 밖에는 없어 보였습니다. 결국 니고데모는 아무도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는 어두컴컴한 밤, 사람들의 눈을 피해 은밀하게 예수님이 계신 곳을 찾아갔습니다.

 

  1. 성령의 거듭나게 하시는 사역

1) 성령으로 태어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참된 진리를 찾기 위해 한 밤 중에 예수님이 계신 집 문을 두드린 니고데모. 드디어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가 질문을 하기도 전에 예수님은 그의 텅 빈 마음을 이미 꿰뚫어 보고 계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니고데모에게 두 가지 진리를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니고데모에게 가르치신 두 가지 진리를 살펴봅시다.

첫째, 사람이 성령으로 태어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사람이 다시 태어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은 한 번 어머니 뱃속에서 나오면 다시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사람이 다시 태어날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거듭 태어난다’는 말씀은 사람의 몸이 다시 태어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거듭남이란 사람의 영혼의 상태가 완전히 변화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사람의 영혼을 변화시키는 일을 역사를 일으키는 분이 바로 성령님 이십니다.

 

2) 예수님을 믿어야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습니다.

그렇다면 성령으로 말미암아 거듭난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어떤 변화를 의미할까요? 그것이 예수님께서 니고데모에게 가르치신 두 번째 진리입니다. 사람은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보내신 그의 외아들 예수님을 믿어야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보내신 그의 외아들 예수님을 나의 구원자로 믿는 마음의 변화가 바로 거듭 태어나는 것입니다. 사람은 예수님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의 영적 상태가 완전히 변화합니다. 요한복음 3장 16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요 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사랑하셔서 그들이 죄악 가운데 멸망하는 것을 보기 원치 않으셨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죄인들을 그들의 죄로부터 건지시기 위하여 택하신 방법이 바로 그의 아들 예수님을 이 땅에 인간의 모습으로 보낸 것이었습니다. 이를 통해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죄 가운데 멸망하지 아니하고 영원한 생명을 선물로 얻게 됩니다. 이토록 좋은 생명의 길이 은혜로, 선물로 주어졌음에도 불구하고 모든 사람이 예수를 다 믿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이토록 완벽한 구원의 길을 열어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예수님을 믿지 않고 부인하는 사람들이 여전히 수두룩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달린 자신을 바라봄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는 일을, 모세 시대 때 있었던 놋뱀 사건과 비교하여 설명하셨습니다. 출애굽 이후 광야에서 살아가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불편하고 고통스런 나날들이 계속되자 그들을 애굽에서 건져 주신 하나님을 원망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에 하나님께서는 크게 노하사 이스라엘 진영에 불뱀을 보내셨습니다. 불뱀에 물린 백성들은 고열에 시달리며 큰 고통 속에 죽어갔습니다. 자비로우신 하나님은 모세에게 놋으로 뱀모양을 만들어 막대기에 매달아 그것을 진영 가운데 설치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누구든지 불뱀에 물려 죽어가는 이가 그 놋뱀을 바라보기만 하면 고열이 내려가고 살아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불뱀에 물린 사람들 가운데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막대기에 달린 놋뱀을 바라본 자들은 고침을 받고 살아남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고 고집 부리며 끝까지 놋뱀 보기를 거부한 사람들은 고열에 시달리며 비참하게 죽어갔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과거 모세 시대의 이 유명한 사건을 언급하시며, 모세가 광야에서 불뱀에 물린 자들의 열병을 고치기 위해서 놋뱀을 제작하여 막대기에 매단 것처럼, 광야 같은 이 세상에서 죄로 인하여 고통과 저주 그리고 사망을 당해야 하는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예수님께서 친히 십자가에 매달리셔야 함을 친히 말씀해 주셨습니다.

요한복음 3장 17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요 3:17)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이 세상에 보내신 이유는, 모세가 놋뱀을 장대에 매단 이유와 같습니다. 누구든지 십자가에 매달려 죽으신 예수가 나의 죄값을 대신하여 죽은 구원자 되심을 믿음으로 고백하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않고 구원을 받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 곧 예수님을 보내신 이유는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그 아들을 토해 세상을 구원하시려는 목적을 갖고 계셨습니다. 오직 예수님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죄인인 인간이 죄의 형벌인 고통과 사망과 영원한 형벌인 지옥을 피하고 영원한 생명과 구원을 받게 됩니다.

사람이 성령으로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것.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보내신 그의 외아들 예수님을 믿어야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을 수 있다는 것. 이것이 예수님께서 니고데모에게 들려주신 2가지 진리입니다. 왜 예수님은 니고데모에게 이러한 진리를 가르쳐 주셨을까요? 이보다 더 현실적인 이야기, 니고데모에게 더 필요한 이야기가 있지 않았을까요? “니고데모야, 너 앞으로 이렇게 살아라. 니고데모야. 이것 이것은 하지 말고 피하렴.” 이런 식으로 구체적이고 일상적인 조언이나 충고를 해주는 것이 더 실용적이고 실제적인 도움이 되지 않았을까요? 세상 사람들은 예수님을 믿는 일이 뜬구름 잡는 것처럼 말합니다. 복음은 우리 현실에 아무런 유익이 없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는 일보다 우리 현실에 큰 변화를 일으키는 사건도 없습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그 사람의 모든 것이 변화합니다. 니고데모가 찾고 있던 인생의 질문들이 바로 예수님이 누구이신지를 바로 깨닫고 거듭남을 통해 해결될 수 있음을 예수님은 잘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니고데모가 찾고 있는 모든 질문들의 답을 포함한 ‘진리’의 말씀을 그에게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이 누구인지 깨닫게 될 때,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거듭나게 될 때 우리의 삶은 놀랍게 변화합니다.

이전에 군대에서 대령으로 복무하시는 분이 별을 달기 위해서 부단히 노력하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대령과 준장은 불과 한 계급 차이입니다만, 대령이 준장이 되면 그 대우는 실로 하늘과 땅 차이가 난다고 합니다. “소령에서 중령이 되면 백 가지가 바뀌고, 중령에서 대령이 되면 천 가지가 바뀌고, 영관이 장성이 되면 만 가지가 바뀐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입니다. 준장 즉 장군이 되면 옷이 모자, 벨트, 군화까지도 장군용으로 다 바뀝니다. 장군이 되면 대통령이 직접 임명장을 줍니다. 장군들에게만 주어지는 1m가 약간 안 되는 ‘삼정검’을 수여 받고, 병과를 초월하여 군을 통솔할 권한을 갖게 됩니다. 대령이 장군이 되는 것도 물론 큰 변화이겠죠.

그러나 한 사람의 인생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받게 될 때 나타나는 변화보다 더 큰 변화는 없습니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의 영혼은 죽음에서 생명으로 변화합니다. 그의 신분이 죄의 노예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변화합니다. 그의 영적 상태가 죄인에서 의인으로 변화합니다. 이런 변화가 있을 때 인간은 내면의 욕구를 모두 채워야만 만족과 기쁨을 얻을 수 있다는 잘못된 신화에서 벗어나, 예수 안에서 살아가는 자에게 주어지는 참된 기쁨과 만족을 발견하게 됩니다.

 

  1. 현대인의 실존적인 고민들

1) 이렇게 사는 것이 맞을까?

아직 예수님이 누구인지 깨닫지 못한 사람들, 혹은 예수님을 만났으나 일상속에서 예수님 안에서 살아가는 방법을 모르는 사람들이 마주하는 실존적인 고민들이 있습니다. 첫째로, ‘이렇게 사는 것이 맞을까?’하는 질문입니다. “지금 나는 올바른 길로 잘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하며 살아가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요? 대부분 생명력 없는 삶을 쳇바퀴 돌아가듯 살아가고 있습니다. 멈추고 싶어도 멈출 수 없는 브레이크 고장 난 트럭을 몰고 있는 운전수처럼 어쩔 수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아 보입니다. 이처럼 자신의 인생이 어디로 가는지도 모른 채 숨가쁘게 살아가는 현대인들을 가리켜 [좀비]처럼 산다고 표현한 글을 봤습니다. ‘좀비’는 살아있는 시체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요즘 드라마나 영화를 보면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것이 ‘좀비’입니다. 비호감을 넘어 불쾌감을 주는 좀비들이 이토록 대중적인 인기를 누리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심리학자들은 삶과 죽음의 특성이 뒤섞여 있고, 인간과 비인간적인 특징을 동시에 지니고 있는 좀비의 모습이 현대인과 비슷하다고 분석합니다. 자신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과 경쟁해야 하는 무한 경쟁사회 속에서 서로를 물고 뜯고 죽이는 좀비의 모습이 현대인의 모습과 비슷하다는 것이죠. 또한 ‘좀비에서 다시 인간이 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하는 고민이 현대인들이 자신들의 삶 속에서 느끼는 고민과 매우 흡사하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사는게 과연 살아 있는 것일까?”, “진정 산다는 것은 무엇일까?” 이런 고민이 현대인들의 마음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자기 나름대로 열심히 살아가지만, 영혼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이 너무나도 많습니다. 이전에 한국에서 어느 교회 목사님께서 설교하는 모습을 봤는데, 영혼 없이 설교하는 모습을 봤습니다. 정말 하기 싫은 일을 억지로 억지로 하는 듯한 모습을 봤습니다. 설교하는 목사님도 죽어가고, 설교를 듣는 성도님들도 다 죽어가는 듯한 인상을 지울 수가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이라 생각하고 섬기는 성직자도 이처럼 영혼 없이 일할 수 있다면, 다른 직업들은 오죽 하겠습니까? 우리 일상 주변에 보면 영혼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좀비, 몸은 살아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영혼은 죽어 있는 사람들입니다. 무엇을 위해 살아가는지 몰라 생명력이 사라진 삶, 목표도 열정도 사라지고, 헌신도, 보람도, 비전도 사라진 상태입니다. 돈이 있고, 시간이 있어도 무엇을 위해 살아가야 할지 모르면 계속 방황하는 인생 살다가 허무하게 끝을 맞이하게 됩니다.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영국 작가 조지 버나드 쇼의 묘비에는 이런 말이 쓰여 있습니다. “우물쭈물 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지.” 많은 사람들이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할지 몰라 방황하며 살아갑니다. 지금도 수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사는 것이 맞을까?”하는 질문을 가슴에 품고 또 쳇바퀴 같이 똑 같은 하루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2) 이게 다 무슨 소용인가?

두 번째 질문은 ‘이게 다 무슨 소용인가?’입니다. 그토록 원하던 부를 이루어도 ‘what’s next?’란 질문에 답을 내리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솔로몬 왕이 부, 명예, 권력, 쾌락 이 모든 것을 다 누려보고 내린 결론이 무엇이었습니까? “이거 결국 다 ‘후’하고 불면 날아가 버리고 사라질 것에 불과하구나…” “산다는 것은 허무한 것이구나…” 부와 재물만을 위해 살아가는 자는 인생의 어느 순간에 다다라서 “이게 다 무슨 소용인가?”하는 질문이 떠오를 수밖에 없습니다.

아무리 화려하고 멋있게 지어도 모래성을 돈 주고 사는 사람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조금 있으면 밀려오는 파도나 밤사이에 불어오는 강한 바람에 무너지고 사라져 버릴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재물을 위하여 살아가는 자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사람이 천하를 얻은 들 그 목숨을 잃으면 그에게 무슨 유익이 있겠는가?” 부, 명예, 권력, 쾌락을 계속 추구해도 결국 허무와 공허를 느끼며 생명력 없는 자신의 삶을 바라보며 “이게 다 무슨 소용인가?”하고 좌절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이 있습니다.

 

3) 어디 가야 정답을 찾을 수 있을까?

세 번째 질문은 “어디에 가야 정답을 찾을 수 있을까?” 입니다. 어린이들은 물어보는 것을 주저하지 않습니다. 사실 아이들은 이것저것 너무 많이 물어봐서 어른들을 피곤하게 만듭니다. 그런데 어른들은 반대로 누군가에게 잘 물어보지 않아서 문제입니다. 다 큰 어른이라 누구에게 물어보기 부끄럽거나 예민한 문제들도 의외로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누구에게 말도 못하고 나홀로 속으로 고민하며 힘들어 하며 살아가는 이 시대의 어른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전에 한국에서 한참 유행하던 [응답하라 1988]이라는 제목의 드라마에서 전국의 많은 아들 딸들을 울린 장면이 있었습니다. 둘째 딸이 서러움이 폭발해서 하염없이 울고 있습니다. 상황은 서울대 다니는 첫째 딸 언니 생일날인데, 자신의 생일까지 한 데 묶어 축하해 주는 아빠, 엄마의 모습에 둘째 딸이 그만 서러움이 폭발하고 말았습니다. 둘째라는 이유만으로 모든 것을 언니와 남동생에게 양보해야 했던 상황들과 내심 그렇게 살아가는 것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인 아빠 엄마에게 서운한 둘째 딸의 서러운 마음이 터진 것이죠. 아버지 역할을 한 배우 성동일씨가 서럽게 울고 있는 고등학생 딸에게 이런 말을 했습니다. “아빠가 미안하다. 잘 몰라서 그랬어. 아빠도 태어날 때부터 아빠가 아니잖아. 아빠도 아빠가 처음이라 그러는데 딸이 조금만 봐주라.” 부모님은 항상 자식이 힘들고 지칠 때 늘 곁에 있어주는 사람인 줄로만 알아 왔으나, 사실 나이든 부모도 어린 자식들과 마찬가지로 고충과 고민을 가진 또 하나의 연약한 사람이라는 것을 잘 보여준 장면입니다. 어른들도 저마다 해결하지 못하는 고민과 문제들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지금 내 삶이 올바른 길로 나아가는지 확신하지 못하고 살아가는 분들이 계십니까? 나름 열심히 살고 있지만 삶의 허무함과 공허함으로 인해 방황하는 분들은 없습니까? 생명력을 잃어버린 채 열정도, 헌신도, 보람도 없이 쳇바퀴 돌아가는 듯한 삶을을 살아가고 있는 분은 없습니까? 오늘 예수님께서 니고데모에게 말씀하신 성령으로 거듭난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그렇다면 성령으로 거듭난 삶은 어떤 모습입니까? 세 가지 질문으로 점검해 봅시다.

 

  1. 성령으로 거듭난 삶 확인하기

1) 성령으로 거듭났는가?

성령님께서 일하시는 모습은 바람과도 같습니다. 우리는 바람이 어디서 만들어지고, 또 어디에서 무슨 일을 하며, 또 어디서 사라지는지 잘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분명 바람이 불면 우리 눈에 바람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들판에 핀 꽃잎이 바람에 살랑거리고, 나뭇잎이 바람에 바스락거립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성령께서 한 사람의 마음 속에 언제부터 함께하셨는지, 어떤 일을 하셨는지 정확하게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성령께서 사람을 변화시키고 거듭나게 하시면 그 변화를 누리는 확실하게 볼 수 있습니다. 바람이 임의로 불듯이, 우리는 누가 성령의 역사를 통해 거듭나게 될지 알 수 없습니다. 성령의 역사를 우리 마음대로 임의로 조작할 수는 없습니다. 사람이 성령 하나님의 역사로 말미암아 그의 영혼이 변화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은 자신의 죄인 됨을 인정합니다. 거듭난 사람은 먼저 자신이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죄를 가지고 있는 죄인이기에 죄의 형벌인 죽음일 피할 수 없고, 죽어서도 영원한 형벌인 지옥에 들어갈 수밖에 없음을 깨달은 사람입니다. 거듭난 사람은 죄로 인한 깊은 절망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나의 영혼을 죄로부터 건져 내기 위해 이 세상에 오신 구원자 되심을 고백함으로 말미암아 자신의 모든 죄가 사하여졌고, 하나님께서 영원한 생명을 그에게 선물로 주셨음을 믿음으로 고백하는 사람입니다. 거듭난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를 내 인생의 주인이요 왕으로 모시고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또한 이 세상에 다시 오실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준비하며 그 날을 소망하며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2)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고 살아가고 있는가?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은 거듭나지 않은 사람과 살아가는 방법이 완전히 다릅니다.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은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고 살아갑니다. 어떻게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고 살아갑니까? 매순간 귀에서 성령의 음성이 들립니까? 아닙니다. 성령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진리인 성경 말씀을 통해서 우리의 삶을 인도해 가십니다. 말씀이 우리 안에서 살아 역사하여 우리가 갈 길을 가르쳐 주시고, 우리가 무엇을 옳은 길이고 그른 길인지 깨닫게 하십니다. 그와 같이 성령이 깨닫게 하시고 가르쳐 주시는 진리에 순종하여 살아가는 사람이 바로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고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이 시대는 절대적 진리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단편적인 예를 들면, 남자는 반드시 여자와 결혼해야 한다는 절대적 진리를 거부합니다. 남자가 남자와 결혼하는 것, 여자가 여자와 결혼하는 것, 그렇게 사는 것이 나에게 좋으면 그것이 진리가 되어 버리는 세상입니다. 이 시대는 선과 악, 옳고 그름의 기준이 되시는 왕이신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21세기 사사시대 입니다. 사람들은 더더욱 성경을 멀리합니다. 진리를 잃어버린 세상은 더욱 방황하고 표류하며 살아갑니다. 많은 기독교인들도 세상과 동화되어 진리를 멀리한 채 생명력을 잃어버리고 살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고 진리에 순종하여 살아갈 때 비로소 잃어버린 생명력이 우리 영혼에서 다시 불타오르게 될 것입니다.

 

3) 성령이 주시는 기쁨과 만족이 있는가?

마지막으로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에게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가는 참 기쁨과 만족이 있습니다. 분명 나는 거듭난 그리스도인인데 날마다 나는 불행하다고 느끼며 살아간다면 그 사람의 영혼에는 커다란 문제가 발생한 것입니다. 무엇이 여러분을 불행하다고 만듭니까? 무엇이 여러분을 불만족스러운 삶이라고 느끼게 만들고 있습니까? “나는 000이 없어서 불행하다”라고 말한다면 그 000이 여러분의 우상이 된 것은 아닌지 한 번 진중하게 점검해야 합니다.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에게도 아픔이 있고 눈물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마음 가운데는 하나님께 받은 구원으로 말미암음 빼앗기지 아니하는 기쁨이 머물러 있습니다. 세상 기준으로 보면 부족한 것이 많을 지라도, 하나님 한 분만으로 감사할 수 있는 참 만족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왕에 예수 믿는 것 우리 제대로 예수 믿읍시다. 어중간하게 믿으면 안 믿는 것보다 못합니다. 생명력 없이 교회 다니는 것보다 더 불행한 사람이 또 어디 있습니까?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계신데 왜 생명이 없이 살아갈까요? 참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인지 점검하십시오. 날마다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고 진리에 순종하며 살아가는지 점검하십시오. 성령이 주시는 기쁨과 만족이 우리 마음에 머물고 있는지 점검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