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403 [그리스도와 연결된 삶] 시리즈 (5) 박해의 삶 (요한복음 15장 18절 ~ 16장 4절)

십자가를 지기 전날 밤, 예수님은 제자들과 마지막 시간을 함께 보내고 계셨습니다. 예수님은 유월절 식사를 제자들과 가지셨고, 친히 제자들의 발을 일일이 씻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세상을 떠날 시간이 다가왔음을 아시고, 제자들에게 마지막으로 ‘주님 안에 거하여 살아가라’고 당부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제자들이 어떻게 하면 주님 안에 거하여 살아갈 수 있을까요? 예수님은 제자들이 주님의 계명에 순종할 때 예수님 안에 거하게 된다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주신 계명은 무엇이었나요?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들을 사랑하신 것과 같이 우리들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곧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명령하신 계명입니다.

세상에 사랑을 싫어하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우리가 사랑을 베푸는데 미워할 사람이 세상에 누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놀랍게도 예수님은 우리가 주님께서 걸어가신 그 사랑의 길을 따라 걸어가게 될 때, 세상이 우리를 미워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세상이 우리를 미워하는 그 때가 오면, 세상이 우리들보다 먼저 우리의 구주 되시는 예수님을 미워한 것을 잊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18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15:18)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예수님의 삶을 한 번 돌아봅시다. 주님은 태어나면서부터 이미 미움을 받으셨습니다. 헤롯 왕은 이제 막 태어나신 예수님을 죽이려고 혈안이 되어 있었습니다. 또한 큰 군중이 모여 빌라도에게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소리쳤습니다. 예수님은 죽으시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유대인들의 미움의 대상이었습니다.

여기 본문 18절에 “미워하다”라고 해석된 헬라어 단어는 ‘싫어하다’와 ‘혐오하다’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단순히 상대방을 미워하는 정도가 아니라, 깊은 반감과 적개심을 가지고 있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이 단어가 가지고 있는 리앙스를 이렇게 한 번 설명해 봅시다. 우리가 집 부엌에서 요리를 하고 있다고 한 번 상상해 봅시다. 아주 화창한 날씨에, 신선한 재료들을 가지고 기분 좋게 도마에서 칼로 재료들을 다듬고 있는데 갑자기 내 시야 구석에서 무언가 꿈틀대고 움직이는 것이 느껴졌습니다. ‘뭐지?’하고 고개를 돌리는 순간, 두 주먹 만한 갈색 쥐 한 마리가 긴 꼬리를 끌며 냉장고 뒤쪽으로 쏙 들어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순간 등골이 오싹해집니다. 얼음이 된 것처럼 가만히 서 있습니다. “뭐 어때? 쥐랑 살면 되지!”하고 대수롭게 넘기는 사람이 있을까요? 그 날 쥐를 없애지 않고서는 아마 다른 생활이 불가능할 것입니다. 쥐를 잡든지, 아니면 내가 이 집에서 나가든지 둘 중 하나입니다. 그게 오늘 본문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미워하다’입니다. 유대인 종교지도자들은 예수님을 부엌에서 만난 쥐 보듯 했습니다. 예수님을 죽이고자 하는 반감과 적개심이 그들에게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잡아 때리고 침 뱉고, 조롱하고, 모욕한 후, 십자가에 달려 죽였습니다.

상대방에게 미움 받기를 원하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가능하면 모두에게 다 사랑받고 싶은 것이 사람의 마음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세상이 자신을 미워했듯이, 세상이 예수님의 제자들도 미워할 것이라고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1세기를 살아간 예수님의 제자들에게만 해당하는 말씀이 아니라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실제로 전승에 의하면 예수님의 제자들은 사람들에게 붙잡혀 죽임을 당했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로마에서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처형되었습니다. 마태는 에디오피아에서 칼에 맞아 죽었고, 요한은 기름이 끓는 큰 가마솥에 처해져서 죽이려 했는데 기적적으로 살아남아 밧모섬에서 광물을 캐는 형벌을 받은 것으로 전해집니다. 나다니엘이라고 알려진 바돌로매는 아르메니아에서 설교하다가 살이 벗겨지도록 죽을 때까지 채찍에 맞았다고 알려져 있고, 안드레는 그리스에서 X자 모양의 십자가에 달려 처형되었습니다. 도마는 인도에서 창에 찔려 죽었고, 배신자 유다를 대신해서 선택된 맛디아는 돌에 맞고 참수되었고, 사도 바울은 로마에서 고문당하고 참수형 혹은 교수형을 당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성경을 읽어봐도 예수님의 제자들이 이처럼 비참하게 죽임을 당할만큼 잔인무도한 악행을 저지른 적이 없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하고, 병든 자들을 고치고, 귀신들린 자를 자유케 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전파하는 일 말고는 한 것이 없습니다. 제자들이 사회에 큰 해악을 끼치거나, 살인, 도둑질과 같은 범죄행위에 연관된 적도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은 제자들을 죄인 취급하며 처참하게 고문하고 죽였습니다.

왜 이렇게 세상은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을 싫어할까요? 19절 말씀을 함께 봅시다. “(요 15:19)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것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택하였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 예수님은 그를 따르는 제자들이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기 때문에, 세상이 그들을 미워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세상에 속한 자들의 특징은 무엇입니까? 자기중심적인 삶입니다. 내 자신이 내 삶의 주인이 되어 내가 행복하게 살아가는 것이 인생의 최고 목적입니다. 지금도 수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자기중심적 삶의 방식을 택하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 속한 자들의 삶의 방식은 전혀 다릅니다. 그들의 하나님 중심의 삶을 살아갑니다. 내 삶의 주인은 이제 더 이상 내 자신이 아니라, 구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래서 예수의 참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살아감으로써 하나님 아버지를 섬기는 삶 속에서 참된 기쁨과 만족을 발견합니다. 세상은 바로 이러한 전혀 다른 예수님 중심의 삶의 방식을 가르치고 전파하는 제자들을 미워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세상이 추구하는 자기중심적인 삶의 방식을 반대하고 오히려 책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필연적으로 그리스도인들이 가진 삶의 가치관은 예수님을 따르지 않는 사람들의 가치관과 상충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 세상은 예수님의 삶의 방식을 거부하기 때문에 만일 우리가 예수님과 그의 말씀을 따라 살아가려고 한다면 세상은 우리를 박해할 것입니다.

20-21절 말씀을 봅시다. “(요 15:20) 내가 너희에게 종이 주인보다 더 크지 못하다 한 말을 기억하라 사람들이 나를 박해하였은즉 너희도 박해할 것이요 내 말을 지켰은즉 너희 말도 지킬 것이라 (요 15:21) 그러나 사람들이 내 이름으로 말미암아 이 모든 일을 너희에게 하리니 이는 나를 보내신 이를 알지 못함이라” 이 말씀에 의하면 예수님을 보내신 분이 하나님이심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주님을 핍박했고, 그러한 사람들이 또한 예수님의 제자들을 핍박할 것입니다. 복음을 깨달은 사람들은 삶의 방식이 변화될 수밖에 없습니다. 성경의 가르침을 통해 이 세상을 만드신 창조주 하나님이 계시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자기 자신을 포함한 모든 인간이 하나님과의 맺은 언약을 불성실하게 이행함으로써 영원한 형벌을 받을 수밖에 없는 죄인임을 깨닫고, 그로 인해 하나님께서 죄로 말미암아 고통받고 죽을 수밖에 없던 우리들을 위해서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사 십자가에 달려 죽게 하셨으며, 누구든지 그를 영혼의 구원자와 삶의 주인님으로 믿기만 하면 죄사함과 영원한 생명을 선물로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사실을 깨닫고 발견하게 된 사람은 예수님을 따르는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성경이 가르치고 있는 복음을 발견한 사람들은 삶의 중심이 ‘나’에서 ‘예수’로 옮겨지게 됩니다. 그들에게는 예수님을 위해 살아가는 것이 매우 상식적인 선택이고, 이성적으로 옳은 삶의 양식입니다. 그러나 아직 예수님을 발견하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예수님을 위해 살아가는 삶의 방식이 당연히 비이성적으로 보일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 중심의 삶으로 초대하는 그리스도인들을 미워하고, 박해합니다.

예수님께서 그의 제자들이 박해 받을 것을 미리 말씀해 주신 것은 제자들로 하여금 마음을 단단히 준비하여, 박해의 때가 왔을 때 그들이 실족하지 않고, 믿음에서 떨어지지 않도록 하기 위함 입니다. 요한복음 16장 1-2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요 16:1)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실족하지 않게 하려 함이니 (요 16:2) 사람들이 너희를 출교할 뿐 아니라 때가 이르면 무릇 너희를 죽이는 자가 생각하기를 이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라 하리라” 1절에 사용된 ‘실족하다’란 말은 ‘넘어지다’란 뜻이며, ‘기독교 신앙을 포기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실제로 1세기에는 박해를 견디지 못하고 믿음을 포기한 사람이 많이 있었습니다. 요한복음이 기록되던 시기에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미 회당에서 제명당했습니다. 유대인들이 그리스도인들을 회당 공동체에서 출교하는 것은 매우 흔한 일이 되어버렸습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사회에서 격리시키고, 대놓고 마을에서 왕따 시키는 것입니다. 거기서 끝나지 않고, 2절 말씀대로 그리스도인들을 죽이기까지 했습니다. 순교자 스데반 집사의 죽음을 생각해 보십시오. 유대인들은 스데반 집사에게 돌을 던져 죽이면서, 예수를 믿고 따르는 자들을 죽이는 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라고 확신하였습니다. 로마 제국의 관리들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예수님을 부인할 기회를 주고, 만일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에 대한 신앙을 포기하지 않으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이거나, 사자들이 우글거리는 원형경기장에 넣어 찢어 죽이거나, 끓는 기름 가마에 던져 죽이거나, 나무에 묶은 뒤 불에 태워 죽였습니다. 그러니 초대 교회 그리스도인 가운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음 앞에서 두려움에 떨며 믿음을 포기했겠습니까? 안타깝게도 세상의 핍박으로 인해 실족한 사람들, 믿음을 져버린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한국의 기독교 역사 가운데도 이와 비슷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바로 일제강점기 시대 일어난 ‘신사 참배’입니다. 일본의 천황을 신격화한 일본인들은 한국인에게 신사참배와 신사신앙을 강요하였습니다. 1930년부터 1945년 광복이 되기까지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신앙수호를 외치며 항일운동을 펼쳤습니다. 1935년에 일본은 신사 참배하지 않는 한국의 학교는 모두 폐교처리 했습니다. 1937년에는 일반인들과 교회까지 신사참배를 강요하였고, 이에 순응하지 않는 자들은 일본 경찰이 잡아 감옥에 넣고 갖은 혹독한 고문을 행했습니다. 사람을 죽을 만큼 심하게 매질하고, 물고문도 서슴지 않았습니다. 이 때 일본 경찰의 악랄한 고문을 견뎌내지 못하고 수많은 목회자들과 성도님들이 안타깝게 목숨을 잃었습니다. 결국 한국 기독교계는 이러한 일제의 강압을 이겨내지 못하고 1938년도 9월 장로회총회는 신사참배를 받아들이는 결의를 하게 됩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리스도인들 모두가 신사참배에 굴복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일제 강점기에도 신사참배에 끝까지 무릎 끓지 않은 분들이 계십니다. 이들은 교단의 신사참배 결의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이를 거부하고 신앙의 절개를 지킨 믿음의 인물들이 한국 교계에도 많이 남아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들을 중심으로 전국적 규모의 신사참배 거부 운동이 일어나게 됩니다.

예수를 믿고 따르는 일에 기쁨과 즐거움만 주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때로는 사람들의 미움을 받기도 하고, 예수님의 말씀대로 박해도 받게 됩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세상의 박해 가운데도 믿음에서 떠나지 않고 끝까지 주님을 붙들고 믿음으로 살아가기를 원하십니다. 엘리야 선지자 시대 때 아합 왕과 그의 아내 이세벨은 바알 숭배자들로써 여호와를 섬기는 사람들은 모조리 없애 버리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엘리야 선지자는 모진 박해 속에서 사람들이 여호와 신앙을 버리고 바알을 숭배하는 것을 보며, 이제 여호와를 섬기는 자는 오직 자신 한 사람만이 남았다고 호소했습니다. 그러나 실상 그 땅에는 여호와를 향한 믿음을 끝까지 버리지 않은 수천명의 사람들이 남아 있었습니다. 로마서 11장 2-5절 말씀을 봅시다. “(롬 11:2) [쉬운성경] 하나님께서는 전에 택하신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여러분도 성경이 엘리야에 관해 한 말을 잘 알고 계실 것입니다. 엘리야는 이스라엘을 고소하며, 하나님께 이렇게 호소하지 않았습니까? (롬 11:3) “주님 그들이 주님의 예언자들을 죽이고, 주님의 제단들을 헐어 버렸습니다. 이제 저 혼자만 남아 있는데, 그들은 저마저 죽이려 하고 있습니다.” (롬 11:4) 그런데 하나님께서 엘리야에게 무엇이라고 대답하셨습니까? 하나님께서는 “내가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않은 사람 칠천 명을 나를 위해 남겨 두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롬 11:5)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도 하나님의 은혜로 택함을 받은 남은 자들이 있습니다.” 기독교 역사상 박해가 없었던 때는 없습니다. 세상은 마지막 날까지 하나님의 백성들을 미워하고 박해할 것입니다. 그러나 초대 교회가 로마 제국에 핍박을 받을 때나, 한국 교회가 일제 강점기 때에 박해를 받을 때도 끝까지 예수님을 향한 믿음을 지킨 그리스도인들이 있었듯이, 오늘날에도 그 어떤 어려움 속에도 포기하지 않고 믿음을 간직하며 살아가는 참된 성도들이 있습니다.

오늘날 미국에서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은 종교의 자유를 누리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더 이상 예수 믿는다는 이유로 북한이나 중동과 같은 나라처럼 생명의 위협을 느끼거나, 살인의 협박을 받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이야기하거나, 그 분의 가르침대로 살아가려고 할 때, 여전히 세상은 우리를 미워합니다. 우리가 가진 예수님에 대한 믿음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우리를 조롱하거나 미워해도 놀라지 마십시오. 세상이 우리를 미워한다면, 세상이 우리를 미워하기 전에 예수님을 미워했다는 것을 이해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 같은 사람을 보십시오. 그는 스데반 집사에게 돌을 던지는 현장에 있던 사람입니다. 사도 바울은 누구보다 열심으로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던 핍박자입니다. 그런 그도 예수님을 만나고 180도 변화하지 않았습니까? 오늘날 예수님을 증거하는 자들이 없다면 어떻게 이런 일들이 일어나겠습니까? 디모데전서 1장 13-14절을 봅시다. “(딤전 1:13) 내가 전에는 비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였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 (딤전 1:14) 우리 주의 은혜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과 함께 넘치도록 풍성하였도다” 한 때는 누구보다 앞장 서서 예수 믿는 자들을 욕하고, 핍박하고, 온갖 방법으로 믿는 자들을 괴롭혔던 바울. 그는 하나님께서 그의 마음 가운데 역사하시니, 이제 그의 마음에는 은혜와 함께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믿음과 사랑이 솟아나는 사람으로 변화하였습니다. 우리 하나님 아버지는 지금도 우리 주변에 영혼들에게 사도 바울과 같은 변화를 일으키고 계십니다. 만일 우리가 예수님을 따르며 살고, 그 분의 증인이 되고자 한다면 우리를 조롱하는 사람들, 우리를 미워하는 사람들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어떤 이들은 우리를 대놓고 무시할 것이고, 어떤 이들은 대놓고 우리를 미워할 것입니다. 그리고 심지어 우리를 핍박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 된 삶을 통해 주님을 믿고 하나님께 돌아와 구원을 받게 될 사람들도 분명 있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으로써 살아가는 삶을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믿는 사람들은 언제나 소수였습니다. 이 세상 많은 사람들이 복음의 진리를 거부할 것입니다. 그러나 복음을 통해 역사하시는 성령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아직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사실이며, 예수님이 지금도 살아 계심을 깨닫고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그리스도인이 되는 사람들이 지금도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와 세상이 충돌하는 마지막 때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지금은 예수를 따르는 자들이 조롱당하고 박해를 받지만, 결국에는 하나님 나라에 속한 자들이 최후 승리를 얻게 될 것입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연합군은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통해서 독일에 점령당했던 프랑스 서부 해안을 다시 찾아오게 됩니다. 여태까지 독일군이 승기를 잡고 있던 전쟁이었으나, 노르망디 상륙작전이 성공함으로써 전쟁의 기세는 연합군 쪽으로 대역전이 일어나게 됩니다. 지상최대 전쟁 작전으로 평가받고 있는 노르망디의 상륙 작전이 일어난 날을 가리켜 D-day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실제로 독일과 일본이 패전을 선언하여 전쟁에서 승리하게 된 V-day는 그로부터 1년이란 시간이 걸렸습니다. D-day에서 V-day까지 1년 동안 지속적인 전투가 이어진 것이죠.

우리 기독교인들은 바로 이 D-day와 V-day의 긴장 가운데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심으로 말미암아 사탄과 죄악의 진영은 무너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아직 최후 승리의 날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시는 그 날입니다. 그 때까지 여전히 남은 영적 전쟁을 우리는 감당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믿고 따른다는 이유로 때로는 아픔도 있겠고, 눈물도 있겠으나 포기하지 말고 끝까지 주님을 믿음으로 붙들고 나아가십시다. 우리를 위해서 생명의 면류관을 준비하고 계신 주님 앞에 서는 그 날까지 세상 앞에 무릎 꿇지 아니하고, 예수님을 향한 믿음으로 굳게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