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313 [그리스도와 연결된 삶] 시리즈 (2) 충성스러운 삶 (요한복음 13장 21-35절)

서론. PGA vs 슈퍼골프리그

최근 미국프로골프(PGA)에서 가장 뜨거운 이슈가 되고 있는 것이 바로 선수들의 ‘슈퍼골프리그’ 참여 문제입니다. [슈퍼골프리그](일명 SGL)는 사우디아라비아 정부의 후원을 받는 골프대회입니다. 미국프로골프와 경쟁하기 위하여 만든 슈퍼골프리그는 상금과 참가하는 선수들에게 지급되는 보너스가 PGA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큽니다. 또한 슈퍼골프리그에서는 유명 프로 골프 선수들에게 적게는 수천만 달러의 엄청난 계약금을 제시하며 리그에 합류할 것을 제안하고 있습니다. 이에 따라 이미 몇몇의 유명한 프로골퍼들은 PGA를 떠나 SGL에 참여할 의사를 표시하고 슈퍼 골프 리그에 서명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또한 더 많은 미국의 프로 골퍼들이 PGA보다 더 많은 상금과 보너스를 벌기 위해서 슈퍼골프리그에 참여할 것으로 예상되고 있습니다.

문제는 만약 프로 골퍼들이 슈퍼골프리그에 참여하게 되면, 일정상 미국에서 벌어지는 PGA 투어에 참여할 수 없게 된다는 점입니다. 따라서 슈퍼골프리그에 유명 프로 선수들이 참여하여 흥행하게 되면, 결국 미국프로골프가 상대적으로 크기가 축소될 수밖에 없는 것이죠. 이에 지난달 2월 20일 PGA는 결국 칼을 빼 들었습니다. 슈퍼골프리그에 나서면 PGA 투어 출전을 평생 금지하는 등 불이익과 징계를 줄 것을 검토하겠다고 선수들에게 전달하였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현재 미국 골프계를 뜨겁게 달구고 있는 핵심 키워드가 된 단어가 바로 [Loyalty]입니다. 한국말로 번역하면 ‘의리’, ‘충실’ 즈음으로 바꿀 수 있겠습니다. ‘과연 어떤 프로 골프 선수가 돈보다 PGA 투어와의 의리를 택할 것인가?’하는 이슈로 미국 골프계와 스포츠 매스컴이 시끌벅적 합니다. 여론은 “슈퍼골프리그에서 뛰려는 선수들은 돈에 굶주렸다. 돈 몇 푼을 더 벌자고 PGA를 버리고 슈퍼골프리그로 가는 것은 탐욕스러운 짓이다.”는 식으로 부정적으로 묘사합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볼 주제도 바로 ‘의리’입니다. ‘충실’입니다. 우리는 돈의 유혹에 눈이 멀어 자기 스승을 배반한 가룟 유다의 이야기를 함께 살펴볼 것입니다. 이 시간을 통해 혹시 우리들의 삶 속에도 하나님을 향한 불의와 불충실한 모습은 없는지 살펴보기를 원합니다. 또한 예수님을 향해 의리 있는 삶을 살아간다는 것이 어떤 모습인지, 그리고 주님께서 그의 삶을 통해 보여주신 일관된 충성된 모습을 함께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우리 삶 속에 숨은 배신을 찾으십시오. (가룟 유다의 배신)

먼저 다음과 같은 질문부터 한 번 해결해 봅시다. ‘왜 가룟 유다는 예수님을 배신했을까요?’ 예수님의 제자들은 전도 여행에 필요한 것을 각각 준비하는 담당자가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가룟 유다는 열 두 명의 제자 중 돈주머니를 맡아 관리했습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회계 업무를 담당한 것이죠. 요한복음 12장 6절을 보면, 그는 제자들 중 돈 가방을 관리하는 역할을 담당했음에도, 종종 아무도 모르게 돈주머니에서 돈을 제 마음대로 꺼내 쓰곤 하였습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함께 사용해야 할 공금을 자기 마음대로 횡령한 것이죠.

가룟 유다가 얼마나 물질적이 사람인지 보여주는 장면이 또 하나 있습니다. 나사로의 여동생 마리아는 예수님께 감사의 마음을 표하고자 값비싼 향유 옥합을 열어 예수님의 발에 부어드렸습니다. 주변 모든 사람들은 마리아가 예수님을 얼마나 귀한 분으로 여기고 있는지에 대해 집중하고 있는데, 이에 비해 가룟 유다는 마리아가 값지고 귀한 항유를 허비했다고 말하며 그녀에게 화를 냈습니다. 그리고는 왜 이 향유를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사용하지 않았느냐고 마리아에게 불만을 표시했습니다. 그러나 실상 가룟 유다가 화를 낸 이유는 가난한 자들을 생각했기 때문이 아니라, 돈이 아까웠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은 가룟 유다에 대한 성경 기록을 함께 읽어봅시다. 요한복음 12장 4-6절 말씀입니다. “(요 12:4) [우리말성경 번역] 그때 제자들 중 하나이며 나중에 예수를 배반할 가룟 유다가 말했습니다. (요 12:5) [우리말성경 번역] “왜 이 향유를 300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지 않고 낭비하는가?” (요 12:6) [우리말성경 번역] 그가 이렇게 말한 것은 가난한 사람들을 생각해서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돈주머니를 맡고 있으면서 거기에 있는 돈을 훔쳐가곤 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가룟 유다는 겉으로는 예수님을 따르고 있었으나, 속으로는 돈과 물질을 더욱 중요시하며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본래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따른 이유는, 예수님께서 그가 바라고 원하는 꿈을 이루어 주실 분이라고 기대하고 소망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지난 3년의 시간 동안 예수님과 함께 생활하며 유다는 예수님께서 향하시는 방향이 자신이 꿈꿔왔던 길과 다르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가룟 유다는 자신의 탐욕을 이루기 위해서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세상에 대한 탐욕을 버릴 것을 명령하셨습니다. 가룟 유다는 더 많이 가지려 했고 더 높은 자리에 오르려 했으나, 예수님은 더 많이 나눠주고, 너 낮은 곳으로 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자신이 추구하던 삶을 예수님께서 이루어 주지 않을 것이란 사실을 깨달은 가룟 유다는 결국 예수님을 배신하게 됩니다. 가룟 유다가 제사장들에게 예수님을 팔아 넘기는 장면을 한 번 봅시다. 마태복음 26장 14절입니다. “(마 26:14) [쉬운성경 번역] 그 때, 열두 제자 가운데 한 명인 가룟 출신의 유다가 대제사장들에게 갔습니다. (마 26:15) [쉬운성경 번역] 가룟 유다가 말했습니다. “내가 예수를 당신들에게 넘기면, 나에게 얼마를 주겠소?” 제사장들은 유다에게 은 삼십 개를 주었습니다.” 유다는 지난 3년 반 동안 함께 살아오며 동고동락해온 그의 스승이신 예수님을 은 30개 받고 제사장들에게 팔았습니다. 당시 은 30개는 이스라엘에서 성인 노예 한 사람의 값이었습니다. 유다는 예수님을 노예처럼 취급하며 팔아 넘긴 것입니다. 여기에 나오는 유다의 질문을 한 번 보십시오. “내가 예수를 당신들에게 넘기면, 나에게 얼마를 주겠소?” 이 질문은 가룟 유다가 얼마나 재물에 눈이 먼 탐욕스러운 사람인지 잘 보여줍니다. 만일 노동자의 하루 삯을 $100불로 계산한다면, 그가 예수님을 팔아 넘기고 받은 돈은 약 $12,000 정도 됩니다. 유다는 이 돈을 벌고자 예수님을 팔았습니다. 그는 끝까지 예수님보다 돈을 더 생각했던 사람이었고, 예수님을 이용해서 자신의 탐욕을 채우고자 했던 사람입니다. 왜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배신했습니까? 그에게 예수님은 더 이상 자신이 원하는 탐욕을 이루어 줄 메시아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예수님을 섬기는 삶보다 자신의 탐욕을 채우는 길을 선택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혹시 우리들에게도 가룟 유다와 같이 예수님을 따르는 삶보다 물질과 탐욕의 길을 선택한 적은 없을까요? 혹시 죄악이 주는 쾌락을 얻기 위해서 예수님을 따르는 삶을 포기한 적은 없습니까? 그렇다면 우리들도 예수님을 배반한 것입니다. 하나님 중심으로 살아가지 아니하고, 나 중심적으로 살아가려고 하는 삶의 모습이 결국 예수님을 배신하는 삶으로 우리들을 이끌어갑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일관된 충성(consistent loyalty)을 요구하십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되어 하나님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며 산다고 해서, 우리가 원하는 대로 우리의 소원이 다 이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 충성하며 살아간다는 것은 오히려 내가 원하지 않는 방향으로 삶이 흘러가더라도, 주님께서 원하시는 방향이라면 기꺼이 따르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때로는 원치 않은 포기도 해야 하고, 희생도 해야 합니다.

혹시 지금 내 삶의 모습이 내가 원하고 꿈꾸던 모습이 아니라는 이유 때문에 하나님을 원망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내가 현재 살아가고 있는 상황과 형편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해서 하나님께 불평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육체의 질병, 경제적 어려움, 더디게 응답되는 기도제목 등 오래도록 하나님을 섬겨 왔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삶을 이끌어 주지 않아 주시기에 낙심한 채, [신앙무용론]에 빠져서 살아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러나 가룟 유다처럼 하나님께서 내가 원하시는 길로 내 삶을 인도하지 않는다고 해서 하나님을 버리거나 믿음의 길을 떠나서는 안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일관된 충성스러운 삶을 한마디로 말하면, “그리 아니하실지라도…”의 삶입니다. 하나님께서 내 삶을 내가 계획하고 소원한 방향으로 인도해주지 않으신다 할지라도,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불평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주님께서 인도해 주신 지금 이곳, 지금 이 시간, 지금 내가 걸어가는 내 인생길이 나에게 가장 선하고 좋은 길임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며, 그 가운데서 날마다 주와 함께 살아가는 것이 곧 일관된 충성스러운 삶입니다.

지난 한 때 누구보다 열심으로 주님을 따랐으나, 믿음의 장애물 때문에 중간에 신앙을 포기하는 분들을 종종 보게 됩니다. 우리는 그분들을 보며 “시험 들었다”는 말로도 표현합니다. 실존적인 장애물을 만난 경우가 그러합니다. “아무리 열심히 기도했는데도 안 들어주더라… 내 병이 낫기는 커녕 악화되더라. 열심히 주님만 믿고 헌신했는데… 상황이 좋아지기는 커녕 더 어려워지더라…” 우리는 오늘날 우리 앞에 찾아온 삶의 고통과 고난 속에서 어떻게 반응하고 있습니까?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만일 하나님께서 우리를 환난 가운데서 구원해 주시지 않는다 할지라도, 우리가 소원하는 대로 우리의 삶을 이끌어 주지 않으신다 할지라도 여전히 하나님은 하나님이시며, 목숨을 잃어버리는 일이 있을지라도 우상에게 절하지 아니하고 하나님만을 따르고 섬기겠다는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갖고 살아가기를 축복합니다.

 

  1.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생활하십시오. (예수님의 충실함)

유다는 예수님의 경고를 듣고도 빛을 버리고, 어둠의 세력이 기다리는 밤의 세상을 향해 걸어 나갔습니다. 다른 제자들은 가룟 유다가 집 밖을 나서는 걸음이 배반의 걸음인 줄 전혀 몰랐고, 도리어 재정을 맡은 유다가 충성스럽게 주님께서 맡기신 임무를 수행하는 줄 알았습니다. 이처럼 주님께 가장 충성하는 듯 보이는 일을 통해서도 우리는 얼마든지 내 명예와 영광과 실속을 챙기고, 심지어 하나님 나라와는 상관없이 사탄의 하수인 노릇을 할 수 있음에 주의하여야 합니다.

가룟 유다는 자신의 탐욕을 위해 살고자 예수님과의 의리를 저버렸습니다. 그는 사랑보다는 이기심을 택하였고, 정의보다는 불의를 추구했으며, 거룩함보다는 세상의 쾌락을 추구하며 살아갔습니다. 그러나 우리 구주 예수님께서는 가룟 유다와 전혀 다른 삶을 우리에게 보여주셨습니다. 가룟 유다와 다르게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앞에서 충실 되이 살아가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탐욕을 위해 살아가지 않으시고,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가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려 죽기까지 하나님께 복종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요한복음 13장 31-32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요 13:31) 그가 나간 후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지금 인자가 영광을 받았고 하나님도 인자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셨도다 (요 13:32) 만일 하나님이 그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셨으면 하나님도 자기로 말미암아 그에게 영광을 주시리니 곧 주시리라” 32절 말씀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일이 곧 예수님 자신의 영광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비록 자신의 삶은 죄악과 사망의 저주를 짊어지기 위하여 고난과 죽음을 당해야 한다 할지라도, 자신의 십자가 죽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게 되신다면, 그것이 곧 예수님 자신의 영광이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의 영광을 위해서 살아가셨습니다. 이 세상에는 결국 두 가지의 인생만이 있습니다. 가룟 유다와 같이 내 자신이 내 삶의 주인이 되어 나의 영광을 위해 살아가는 삶이 있는가 하면, 예수님과 같이 하나님을 주인 삼아 주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가는 삶입니다.

 

  1. 사랑함으로써 하나님께 대한 충성심을 나타내십시오. (제자들에게 명령하신 사랑)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삶은 구체적으로 어떤 모습일까요?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아가는 것일까요? 우리가 이웃을 사랑하며 살아가는 삶이 바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입니다. 저를 한 번 따라해 주시겠습니까? 우리가 다른 사람을 사랑할 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요한복음 13장 34-35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요 13:34)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요 13:35)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저를 한 번 따라해 주시겠습니까? 우리가 다른 사람을 사랑할 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34절 말씀을 한 번 주목해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분명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은 사실 새로운 것이 아닙니다. 이미 구약성경에 이웃 사랑에 대한 명령이 분명하게 나와 있습니다. “(레 19:18)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나는 여호와이니라” 이처럼 이웃을 내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는 명령과 말씀은 오래전부터 있었던 계명입니다. 그렇다면 왜 예수님께서는 요한복음 13장 34절에서 제자들에게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라”하고 말씀하셨을까요?

요한복음 전체를 통틀어서 예수님께서 ‘새롭다'(new)는 말씀을 쓰신 것은 이 본문이 유일합니다. 그만큼 예수님 지금 이 계명이 ‘새로운 게명’임을 강조하고 계십니다. 무엇이 새로운 것입니까? 사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바로 이 부분이 새롭게 추가된 것입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예수님은 이와 같은 새로운 계명을 더하심으로써 우리가 이웃을 향한 사랑의 깊이와 동기를 바꾸셨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우리를 어떻게 사랑하셨습니까? 무조건적으로 사랑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사랑받을 자격이 있어서, 혹은 우리가 착하게 살아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를 향하신 예수님의 사랑은 ‘조건 없는 사랑’, 즉 [아가페 사랑]이었습니다. 우리의 이기적인 본성은 사랑 받을 자격이 있는 사람만 사랑하라고 가르칩니다. 이 세상은 자기 마음에 드는 사람만 사랑하고 살기도 바쁘다는 사상을 우리에게 심어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을 보십시오. 무려 4번이나 이혼하고 지금 다섯 번째 남자와 함께 살고 있는 사마리아의 우물가의 여인, 자신이 가진 권력을 이용하여 남의 돈을 도둑질한 삭개오, 예수님을 무려 세 번이나 모른다고 부인했던 베드로, 간음하다 현장에 붙잡혀 온 여인… 등 사랑하기 어려운 사람들, 사랑 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들의 이야기로 가득합니다. 그러나 사랑받을 만한 아무런 자격도 요건도 없는 이 모든 사람들을 예수님은 무조건적으로 용서해 주시고 주님의 넓은 품으로 품어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자격이 없는 자에게도 베풀어 주시는 무조건적인 사랑이었습니다.

또한 예수님의 사랑은 구체적인 희생으로 섬긴 사랑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하여 고통 당하시고 죽으셨습니다. 주님은 자신의 전부를 다하여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명령하신 사랑이란, 관념적인 사랑이 아닙니다. 허리를 수그리고, 손과 발을 움직이는 것, 내 돈주머니를 여는 사랑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와 같이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셨던 그 모습대로 무조건적으로 사랑하고, 구체적인 희생이 담긴 섬김으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다른 형제자매들을 사랑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살아간다는 것은, 예수님께 받은 사랑대로 형제 자매를 사랑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오늘 말씀에서 예수님께서 주신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과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은 제안이나 권면이 아닙니다. 그것은 직접적인 지시였으며 명령입니다. 그리스도의 제자라면 반드시 지켜야 할 주님의 명령입니다. 모든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들이 살아가야 할 삶의 방향이 바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사랑으로 형제자매들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의 이름으로 모인 우리끼리도 서로 사랑하지 못한다면, 어떻게 원수를 사랑하고, 핍박을 기쁘게 참고, 용서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세상으로 하여금 예수님의 사랑을 보게 하는 사랑의 통로의 역할을 하고 있습니까? 먼저 우리부터 마음 속 미움의 대상을 지우고 사랑하는 일에 나섭시다. 오늘 우리는 누구에게 사랑을 나눠줄 수 있습니까? 어떠한 모습으로 형제 자매들을 구체적으로 희생하고 섬기며 사랑하겠습니까? 그리스도와 연결된 삶은 [일괄된 충성](consistent loyalty)을 요구합니다. 어떤 상황 속에서도 형제자매를 사랑으로 섬김으로써 그리스도 예수께 언제나 충성스러운 삶을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 되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