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227 인생의 함정을 피하라 시리즈 (6) 죄책과 원망의 함정을 피하라 (창세기 50장 15-21절)

 

서론. 눈 침수 질식 사고

작년 12월 30일 제레미 파스칼이라는 미국 청년이 친구 2명과 함께 캘리포니아에 있는 [올림픽 벨리]에 스키를 타러 갔습니다. 이 세 사람은 모두 프로페셔널한 스키어들입니다. 일반적인 방법으로 스키를 타는 것이 아니라, 공중 묘기도 부리며 스키를 납니다. 이 때 제레미 파스칼은 높은 언덕에서 낮은 지형으로 점프하며 뒤로 2바뀌 회전하는 기술을 선보였습니다. 지면에 파스칼의 머리가 먼저 떨어지며 순식간에 파스칼의 온 몸이 눈 깊숙이 파묻히게 되었습니다. 스키 타로 가 보신 분들을 보신적이 있으실 겁니다. 큰 나무 주변에 ‘Snow Suffocation Hazard’라는 경고문이 붙어 있습니다. 멀리서 보면 눈이 단단하게 굳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무거운 물체를 던지면 깊은 물에 빠지는 것처럼 뭉쳐지지 않은 고운 눈 아래로 물체가 쏙 들어가는 깊은 공간입니다. 주로 큰 나무 주변에 있기 때문에 이런 공간을 ‘Tree well’(나무 우물)이라고도 부릅니다. ‘Tree well’이 얼마나 위험한가 연구 실험해 본 결과 성인 남성 10명 중 9명이 타인의 도움 없이 스스로 빠져나올 수가 없었습니다.

제레미 파스칼이란 청년이 바로 이 Tree well에 머리부터 빠지게 된 거죠. 몸이 Upside down인 상태로 눈 속에 파묻힌 파스칼은 자신이 꼼짝 못하고, 그 상태로 숨을 제대로 쉴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20초 정도 지나자 죽음에 이를 것 같은 패닉이 찾아오면서 그는 숨을 아껴서 쉬게 됩니다. 다행히도 파스칼이 ‘Tree well’에 빠진 것을 보게 된 나머지 2명의 친구가 허겁지겁 스키를 타고 달려와 거꾸로 눈 속에 파묻힌 그의 몸을 꺼내 주었습니다. 요즘 젊은이들은 운동할 때 헬멧에 ‘Gopro’ 같은 카메라를 달고 자신들의 모습을 촬영해서 인터넷이나 유튜브에 올리짆아요? 마침 파스칼과 함께 스키 타로 온 친구 ‘조쉬 골드’의 헬멧에 카메라가 달려 있었어요. 그래서 파스칼이 눈에 파묻히는 장면부터 그를 눈 속에 파묻힌 그를 꺼내 주는 모든 과정이 생생하게 화면에 담기게 되었습니다. 이 장면이 미국 Fox 뉴스, ABC 뉴스 등 미국 대부분의 뉴스에서 방영이 되었습니다. 이 기사들은 겨울 스포츠에서 많이 발생하는 일명 ‘SIS’(Snow Immersion Suffocation)’로 불리는 눈 침수 질식 사고의 위험성을 시청자들에게 알리고자 하는 목적이 있었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스키를 타러 가서 눈에 파묻힐 일은 거의 없겠습니다만은, 실제로 우리는 일상 속에서 눈에 파묻혀 꼼짝 못하여 숨쉬기가 어려워서 누군가가 꺼내 주지 않으면 홀로 빠져나올 수 없는 어려운 상황과 처지에 놓일 때가 분명 있습니다. 바로 상대방에게 내 실수와 잘못에 대해서 용서를 구해야 할 때입니다. 때로는 상대방이 나의 허물과 죄를 용서해주지 않고, 나를 다시 용납해 주지 않는 것은 깊은 눈 속에 계속해서 파묻혀 있는 것처럼 매우 고통스러운 일입니다.

 

  1. 죄책의 함정을 피하라

우리는 지난 주 주일 말씀을 통해 요셉이 그의 형들을 용서하는 장면을 함께 살펴보았습니다. 요셉은 형들을 용서했음에도 불구하고, 형들은 요셉이 그들을 용서했음을 신뢰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형들은 지난날 자신들이 요셉을 애굽의 노예로 팔아 넘긴 사건을 요셉이 잊지 못하고 비밀리에 자신들에게 보복할까 두려워했습니다. 아버지 야곱이 살아 계실 때는 차마 형들에게 복수하지 못했는데, 이제 아버지가 돌아 가시자, 형들의 두려움은 더욱 커졌습니다.

이에 요셉의 형들은 한 가지 꾀를 냈습니다. 그것은 돌아가신 아버지 야곱의 유언인 것처럼 아버지가 요셉에게 형들을 용서하라고 당부했다는 소식을 전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모습을 말씀 속에서 함께 읽어봅시다. 창세기 50장 15-17절 말씀을 [우리말성경 번역]으로 읽겠습니다. “(창 50:15) [우리말성경 번역] 요셉의 형제들이 아버지의 죽음을 보고 말했습니다. “혹시 요셉이 우리에게 원한을 품고 우리가 그에게 했던 모든 잘못에 대해 앙갚음을 하면 어떻게 하지?” (창 50:16) [우리말성경 번역] 그들이 요셉에게 전갈을 보냈습니다. “아우님의 아버지께서 돌아가시기 전에 이런 지시를 하셨습니다. (창 50:17) [우리말성경 번역] ‘정말 간절히 부탁한다. 비록 네 형제들이 네게 악을 행했어도 너는 네 형제들의 죄와 허물을 다 용서해 주어라’ 하고 말입니다. 그러니 아우님 아버지의 종들, 하나님의 종들이 지은 죄를 제발 용서해 주십시오.” 요셉은 이 말을 듣고 울었습니다.” 요셉의 형들 자신들이 돌아봐도, 당시 17살 밖에 안되었던 어린 요셉을 은 20개 받고 애굽의 노예로 팔아 넘긴 사건은 크나큰 잘못이었음에 분명합니다. 그래서 형들은 아버지의 가까 유언장을 만들어 요셉에게 보냈고, 그것 만으로도 부족할까 싶어 요셉 앞에 나와 무릎 꿇고 엎드려 지난 날의 과오를 용서해 달라고 간절히 사정하고 있습니다.

비록 요셉은 형들을 부둥켜안고 울며 입맞추고, 형들의 가족과 자녀들까지 다 자신이 책임지고 돌보겠다고 까지 말했습니다만, 여전히 형들은 요셉이 두려웠습니다. 그들은 요셉이 자신들의 과오를 용서했다는 말을 진심으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상대방에게 용서를 구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상대방으로부터 용서받았음을 신뢰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이처럼 상대방은 이미 과거의 잘못을 용서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상대방으로부터 용서받았음을 신뢰하지 못하여 죄책감을 버리지 못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러한 현상은 신앙생활 가운데서도 나타납니다. 분명 하나님께서는 죄를 회개하고, 십자가에 달려 죽은 예수 그리스도를 구원자와 주로 고백하며 믿고 따르는 모든 사람들의 죄를 용서하여 주실 것을 약속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하며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자신의 죄사함을 확신하지 못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의외로 많습니다. 그들은 죄를 회개하고 예수를 구주로 믿는 모든 자의 죄를 다 용서해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지난날 지은 죄들이 너무 악하고 무겁기 때문에 그래서 자신들은 하나님의 용서를 받기에 자격이 충분하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께 용서받기 위해서 추가적인 공로가 필요하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하나님께 용서 받기 위한 자격을 얻기 위해서 하나님께 더 잘 보여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이런 동기로 교회에서 봉사하는 분들도 계시고, 어떤 분들은 사회에 나가서 선행을 베풀기도 합니다. 이는 여러가지 선행을 통해 자신의 부족한 공로를 채워서 하나님께 용서 받을 자격을 얻겠다는 심상입니다.

죄송합니다만, 이러한 삶은 대단히 비-성경적입니다. 성경은 우리가 아무리 최선을 다하고 열심으로 노력해도 하나님께 용서 받을 자격을 얻을 수가 없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만큼 우리 죄는 심각합니다. 쉽게 말하면, 우리는 하나님께 평생 쉬지 않고 일해도 값을 수 없는 빚을 지고 있는 셈입니다. 한 번 체크해 보십시오. 혹시 여러분께서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자격이 없는 존재라고 생각하고 계십니까? 나는 하나님으로부터 용서 받을 만한 공로가 부족한 악한 죄인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사실 그것이 성경적으로 보면 올바르고 정확한 이해입니다. 그리고 그와 같이 아무리 노력해도 죄사함을 받을 수 없는 자신의 절망적인 영적 상태와 실상을 깨닫는 사람만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이 가져주는 구원의 참 기쁨을 알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복음은 하나님께서 구원 받을 아무런 자격 없는 자들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을 통하여 용서해 주시고 주님의 사랑받는 자녀로 삼아 주셨다고 가르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요셉은 아무런 대가도 없이 형들의 허물과 죄를 용서해 주었습니다. 여러분, 성경에 나오는 모든 스토리들은 다 신약에 나오는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미리 보여주는 그림자와 같은 역할을 하는 것 아시죠? 요셉이 아무런 대가도 없이 형들의 잘못과 실수를 용서해 준 모습은, 하나님과 원수 된 죄인들의 죄를 용서하고 구원하기 위하여 십자가에서 달려 돌아가신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용서하시며 그 어떤 대가를 요구하지 않으셨습니다. 실상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용서하기 필요한 모든 대가를 치루시기 위하여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것이죠. 죄를 저지른 자가 치루어야 하는 대가는 ‘죽음’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들의 죄를 용서하시기 위하여 자신이 직접 십자가에 달려 고통 당하며 죽으신 것입니다.

혹시 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예수 그리스도가 나의 죄를 위해 돌아가셨음을 고백하면서도, 여전히 마음 깊숙한 곳에서는 하나님께서 나의 죄를 용서하셨음을 확신하지 못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이와 같은 죄책감은 신앙적으로 볼 때 대단히 위험합니다. 왜냐하면 죄사함의 확신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은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받아들이는 자들의 죄를 용서하시고 영생을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불신의 증거가 되기 때문입니다. 복음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불신으로부터 비롯된 죄책감은 우리 마음속에서 구원의 기쁨을 빼앗아가고, 또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구원해 주신 하나님 아버지에 대한 감사와 찬양이 사라지게 만듭니다.

만일 자신이 여전히 죄의 문제에서 해결 받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하시는 분들이 계시다면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사항을 점검하십시오. 첫째, 자기 중심적으로 살아감으로써 하나님의 사랑과 용서를 받을 만한 아무런 자격이 없는 절망적인 자신의 영적상태를 인정하십시오. 먼저 자신이 용서 받기에 충분한 공로나 자격이 없는 죄인이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에게 복음은 아무런 희망도 줄 수 없습니다.

둘째, 죄를 회개하고 예수를 구주로 믿고 고백하며 살아가는 모든 자들의 죄를 용서하시고 구원하여 주겠다고 약속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붙드십시오. 지난 날의 죄로 인해 비롯된 실수와 잘못을 진심으로 회개하며 하나님께 용서를 구하셨습니까? 또한 내가 지은 그 죄들을 대신하여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음을 믿고 계십니까?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나의 죄를 사하여 주셨음을 말씀을 근거로 신뢰하십시오.

셋째, 하나님께서 한 번 하신 약속은 폐하지 아니하시고 반드시 지키시는 신실하신 분이심을 신뢰하십시오. 하나님은 한 번 말씀하신 약속은 변개치 않으십니다. 즉 하나님께서 죄를 회개하며 예수를 구주로 믿는 자들을 용서하겠다고 말씀하셨으면 반드시 그와 같이 하실 것입니다. 따라서 이제 죄를 회개하고 예수를 믿고 있다면 우리 죄가 용서받았으며, 우리 안에 영원한 생명이 있고, 구원을 보증하고 계심을 성령이 함께 하고 계심을 신뢰하십시오. 이러한 진리를 통해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주어진 죄사함의 은혜를 확신하며 우리 마음에 주님 주시는 죄사함의 감사와 기쁨이 넘치길 축복합니다.

  1. 원망의 함정을 피하라

다시 요셉의 이야기로 돌아와 봅시다. 사실 형들의 말 대로 요셉은 얼마든지 형들을 원망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가 당한 일을 생각해 보면, 요셉이 형들을 용서하지 못하고 평생 원망해도 그 누가 요셉을 탓하겠습니까? 그러나 요셉은 원망의 길을 선택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요셉은 그가 형들을 용서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나타냈습니다. 창세기 50장 19-21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창 50:19) [우리말성경 번역] 요셉이 형제들에게 말했습니다.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제가 하나님을 대신하겠습니까? (창 50:20) [우리말성경 번역] 형님들은 저를 해치려고 악을 꾀했지만 하나님은 지금 보시는 것처럼 그것을 선하게 바꾸셔서 오늘날 많은 사람들의 생명을 구하셨습니다. (창 50:21) [우리말성경 번역] 그러니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제가 형님들과 형님들의 자식들을 기르겠습니다.” 요셉은 형제들을 안심시키며 부드럽게 말했습니다.”   요셉은 이미 그가 형들을 용서했음을 확신하도록 여러 말로 위로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볼 때 성공한 삶을 살아가는 여자 집사님이 있습니다. 이 여자 집사님의 자녀들은 품행이 좋고 성숙합니다. 이 분이 하시는 비즈니스도 크게 성공해서 50 에이커의 커다란 땅을 가지고 있습니다. 남편 분도 아주 좋은 분입니다. 그러니까 남들이 볼 때는 남부러울 것 없는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이죠. 그런데 사실 이 여자 집사님은 어린 시절 아버지로부터 학대를 당하며 살았습니다. 이미 아버지를 떠나 고 아버지 얼굴을 마지막으로 본 지도 오랜 세월이 지났으나, 아버지가 남긴 과거의 상처들 때문에 아버지에 대한 미움이 사라지지 않은 채 마음 속에 크게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이 집사님은 나중에라도 아버지를 만나게 되면 할 말들을 연습해 보았습니다. 아버지가 나에게 어떤 상처를 주었는지, 그리고 왜 아버지가 나쁜 사람인지, ‘왜 아버지는 그것밖에 안 되는 사람이냐’는 식으로 아버지가 어린 나의 마음에 상처를 준 것처럼 날 선 말을 통해서라도 아버지를 아프게 하고 싶었습니다. ‘나중에 아버지를 만나면 반드시 이야기 해줘야지’하고 아버지를 다시 만나는 장면을 상상하며 수도 없이 연습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버지가 심장 마비로 사망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결국 수도 없이 연습했던 그 이야기는 끝내 아버지에게 전달할 수 없었습니다. 이제 이 분에게는 하나의 선택지만이 남아 있었습니다. 아버지에 대한 오래된 마음 속 분노와 미움을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과연 그렇게 할 수 있을지 스스로도 의문이 되었습니다. 아버지가 그렇게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났다는 사실까지도 미웠습니다.

의외로 우리 주변에는 이 여자 집사님과 같은 해결되지 못한 아픔과 상처를 간직한 채 살아가는 분들이 많이 계십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 속 요셉의 삶을 보십시오. 그의 마지막은 어떠합니까? 용서를 통한 치유와 깨어진 관계가 회복되는 복된 삶이었습니다. 요셉은 지나간 일들에 대하여 형들에게 복수할 의도가 전혀 없었습니다. 그는 이미 형들을 용서해 주었습니다. 용서는 상대방에게 새로운 삶을 살아갈 두 번째 기회를 줄 뿐 아니라, 우리들 자신들의 삶도 분노와 미움의 증오로부터 구원해 줍니다. 우리의 삶 속에서 이미 과거에 일어난 일들을 다시 되돌릴 수는 없을 것입니다. 우리에게 그럴 능력은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이 모든 상황 가운데서 그리스도를 닮은 삶을 살아가도록 결단할 수는 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용서의 결단이야 말로 우리의 삶을 더욱 풍성하게 만들어 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용서를 온전히 받아들인 그리스도인들의 특징은 무엇입니까? 먼저 그들의 마음에는 용서받음에 대한 기쁨과 감사가 있습니다. 또한 그 자신이 하나님께 용서 받은 것과 같이 다른 사람들을 용서합니다.

[코리 텐 붐]이란 이름을 가진 네덜란드 여자 분이 계십니다. 이 분은 지난 세계2차대전 때 독일 나치의 수용소에 붙들려가 말로 다 할 수 없는 잔인한 핍박과 학대를 받았습니다. 그녀의 언니는 독일의 수용소에서 나치들의 고문을 이기지 못하고 그만 먼저 세상을 떠났습니다. 영원할 것만 같았던 기니 긴 전쟁은 끝이 났고, 코리 텐 붐은 구사일생으로 독일의 수용서에서 살아남았습니다. 전쟁이 끝났을 때 코리라는 이 사람 마음에는 독일 사람들을 향한 분노와 미움이 가득했습니다. 히틀러와 그의 추종자들, 또한 수용소에서 자신을 고문하던 독일 사람들이 얼마나 미웠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이 [코리 텐 붐]이라는 분이 그리스도인 입니다. 독일 사람들이 너무 싫었습니다. 사랑하는 내 가족을 죽인 사람들이고, 자신의 인생에서 지울 수 없는 치욕과 상처를 준 사람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이 분의 마음 속에 독일 사람들에게 가서 주님의 사랑의 복음을 전하라는 마음을 주셨습니다. 처음에는 이 마음을 주신 하나님도 너무 싫었습니다. 그래도 예배할 때나 기도할 때면 반복적으로 하나님께서 주시는 그 마음에 결국 그녀는 순종하기로 했습니다. 코리 여사는 전쟁 직후 독일의 여러 마음을 찾아다니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그리고 그의 사랑과 용서의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독일의 한 마을에 가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외부에서 말씀 전하로 오신 분들은 예배가 끝나면 뒤에 가서 사람들 하고 악수도 하고 인사 하잖아요? 설교가 끝나고 많은 독일 사람들이 코리 여사하고 인사하기 위해서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 때 그녀는 줄을 서서 기다리며 자기 앞으로 다가오는 얼굴 가운데 뜻밖의 인물을 마주하게 됩니다. 바로 독의 그 나치 수용소에서 자기를 고문했던 그 사람, 자신의 언니의 목숨을 빼앗아간 그 감옥의 간수 얼굴을 보게 되었습니다.

코리 여사의 자서전을 읽어 보면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순간 내 심장은 얼어붙는 것 같았다. 나는 속으로 [하나님 저 인간만은 결코 용서할 수가 없습니다]라고 말했다.” 조금 전까지 강대상 위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과 용서를 전하던 코리 여사, 그러나 자기를 고문하고, 언니를 죽음에 이르게 한 그 사람, 쳐 죽이고 싶었던 그 원수의 얼굴이 자신을 향해서 한 걸음 한 걸음 다가오고 있습니다.

이 때 하나님께서 코리 여사의 마음에 말씀하십니다. “코리야, 용서하거라” 코리 여사가 속으로 하나님께 대답합니다. “No God I can’t!” (하나님 안 되요!, 저 인간만은 용서할 수가 없어요!”, “코리야 용서하거라”, “하나님 못해요” 이렇게 내적 싸움을 하는 동안 어느새 그 원수 같은 독일 사람이 그녀의 눈 앞에까지 와 있습니다. 이 때 그녀의 마음 속에서 번개 같은 생각이 스쳐 지나갑니다. 하나님의 음성이었습니다. “코리야, 나는 네가 저 사람을 용서할 수 있느냐, 없느냐를 묻고 있는 것이 아니라, 용서하겠느냐, 안 하겠느냐를 묻고 있는 것이다. 코리야, 용서하라는 것은 나의 명령인데, 너는 내 명령 앞에 순종 하겠느냐, 안 하겠느냐?”

여전히 그녀의 마음 속에는 그 원수 같은 사람을 용서할 마음이 없었습니다. 그녀의 자서전을 읽어보면 이 순간을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나는 그때 그 사람을 용서하고 싶은 마음이 조금도 없었지만, 용서해야만 한다는 주님의 명령이 내 마음속에 깨달아지는 순간 『하나님 명령이라면 할 수 없지요. 그러면 용서해야지요』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용서하고자 하는 마음과 느낌이 없이 다만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기 위해서 손을 내밀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은 내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손을 내밀어 그를 안는 순간 주께서 내 마음속에 그를 진심으로 용서할 수 마음을 부어 주셨다는 것이다.” 용서할 수 없을 것 같았던 그 사람을 진심으로 용서할 수 있게 하는 마음의 변화. 이것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큰 기적 아닐까요?

저는 오늘 설교를 코리 텐 붐 여사가 남긴 용서에 관한 유명한 글로 마무리하고 싶습니다. 한 번 따라 해 주십시오. 용서는 분노의 문과 증오의 수갑을 여는 열쇠입니다.”(“Forgiveness is the key which unlocks the door of resentment and the handcuffs of hatred.”)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아직 우리 마음 속에 용서하지 못한 사람 있습니까? 용서는 분노의 문과 증오의 수갑을 여는 열쇠입니다. 이제 그 원수 같은 사람을 용서로 놓아줍시다.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은혜로 용서 받았으니, 우리들도 원수 같은 그 사람들을 아무런 대가 없이 용서해 줍시다. 용서하는 삶을 살아감으로써 우리 모든 코너스톤 성도님들의 삶 가운데 하나님께서 주시는 참 기쁨과 감사, 미움과 분노로부터의 자유, 그리고 주님을 닮은 사랑이 가득하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