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220 인생의 함정을 피하라 시리즈 (5) 괴로움의 함정을 피하라 (창세기 45장 1-11절)

 

서론. 데스몬드 투투 대주교 이야기

아프리카 대륙은 본래 흑인들이 주로 살고 있었습니다. 유럽의 식민지배 과정에서 수많은 백인들이 이 대륙에 정착하게 됩니다. 1948년 남아공의 정권을 잡은 백인들은 유색인종에 대한 차별 정책을 법률로 공식 선언하였습니다. 이 정책을 ‘아파르트헤이트’(Apartheid)라고 부릅니다. 아파르트헤이트 정책은 모든 사람을 인종 등급으로 나누어 백인, 흑인, 유색인, 인도인 등으로 분류하였습니다. 인종별로 거주지를 분리했습니다. 이 정책으로 인하여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는 살기 좋은 땅은 모두 백인들이 차지하고 백인들의 거주지에서 흑인들을 몰아냈습니다. 또한 백인과 유색인종의 혼인금지, 출입구역분리 등 역사상 유례가 없는 노골적인 백인지상주의 국가를 지향하였습니다. 백인정권의 지배체제에 저항했던 흑인 지도자들은 암살당하거나 투옥되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습니다. 넬슨 만델라는 백인 정권에 저항하다가 감옥에서 무려 27년을 살았습니다.

국제적으로 아파르트헤이트에 대한 반론이 얼마나 거셌는지 이 정책 치하 당시의 남아프리카 공화국은 FIFA 월드컵과 올림픽 등 국제 스포츠 대회의 참가가 금지되어 있었습니다. 또한 주변 국가들이 이 정책에 강하게 항의하여 영공을 열어 주지 않을 정도였습니다. 그러다가 1990년부터 1993년사이에 남아공 백인 정부와 흑인 대표인 아프리카 민족회의 간의 긴 협상 끝에 이 정책이 급속이 해체되기 시작합니다. 남아공의 대통령으로 당선된 넬슨 만넬라가 1994년 4월 27일에 아파르트헤이트의 완전 폐지를 선언하였습니다.

넬슨 만델라와 함께 한 평생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인종차별 정책을 종식시키는데 기여하여 노벨 평화상을 수상한 [데스몬드 투투]라는 이름의 대주교가 있습니다. 투투 대주교는 아파르트헤이트를 종식시키기 위해 평생을 노력해 왔습니다. 그는 지난해 성탄절 다음날인 12월 26일에 사망하였습니다. 이에 영국의 엘리자베스 여왕,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 등 전 세계적인 인사들이 그의 죽음을 애도했습니다. 투투는 용서가 실천되는 곳에서 사람과 지역 그리고 사회가 변화될 수 있다고 믿었던 강력한 ‘용서의 지지자’였습니다. 투투 대주교는 용서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용서는 잊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실제로 기억하는 것입니다. 기억하되 반격하기 위한 권리로 사용하지 않는 것입니다. 용서는 새로운 시작을 위한 두 번째 기회입니다. 그리고 기억하는 부분이 특히 중요합니다. 특히 과거에 일어난 일을 반복하고 싶지 않다면 말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가슴 깊은 곳에 용서해야 할 대상을 가지고 있습니다. 용서함으로써 더 나은 미래로 나아갈 것인가? 아니면 과거에 받은 상처로 인한 괴로움의 함정에 빠져 있을 것인가? 선택은 우리들의 몫입니다. 오늘 우리는 요셉의 이야기를 통하여 어떻게 그가 인생의 괴로움을 이겨낼 수 있었는지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배경.

아버지 야곱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행복하게 살아가던 요셉은 시기심 많은 형들에 의해 이집트에 노예로 팔려가게 됩니다. 그 후 요셉은 노예로 약 11년을 살아가게 되고, 억울한 누명을 쓰고 지하감옥에서 최소 2년 이상 살아가는 파란만장한 인생을 살게 됩니다. 오늘 본문의 사건은 형들이 요셉을 노예로 팔아버린 배신 이후 약 20년 뒤에 일어난 일입니다.

온 땅에 대흉년이 찾아오고 2년이 지났습니다. 야곱과 그의 아들이 살고 있던 가나안 땅에도 식량이 떨어졌습니다. 이에 야곱의 아들들은 이집트에 가면 식량을 구할 수 있다는 소식을 듣고 이집트로 찾아가게 됩니다. 거기서 그들은 이집트의 총리가 된 요셉을 만나게 됩니다. 형들은 노예로 팔려간 요셉이 이미 죽었을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지금 자기들 눈 앞에 앉아 있는 이집트의 이인자가 그들이 20여년 전에 은 20개를 받고 노예 상인에게 팔아 넘긴 동생 요셉이라는 사실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습니다. 당시 이집트는 가장 힘이 센 국가로 요셉은 강력한 지도자의 위치에 앉아 있었습니다. 이에 형들은 벌벌 떨며 요셉 앞에 절하며 그에게 식량을 줄 것을 요청했습니다.

요셉은 수차례 형들을 시험하였습니다. 과연 이전에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동생을 노예로 팔아 넘긴 것처럼, ‘이번에도 자신들이 살기 위해서 막내 동생 베냐민을 팔아 넘길 것인가?’하는 시험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전과 다르게 형들 중 유다가 나서 동생 베냐민 대신 자신이 붙잡혀 죽겠노라고 대답했습니다. 이와 같은 형들의 모습을 보며 요셉은 더 이상 북받치는 감정을 억누를 수가 없었습니다. 요셉은 자기의 모든 시종들이 물러갈 것을 명령하였습니다. 그 후 요셉은 형들 앞에서 큰 소리를 내어 울었습니다. 아무리 오랜 시간이 지나가도 지워지지 않는 마음에 상처가 있기 마련입니다. 요셉의 경우가 그러했습니다. 타인도 아니고, 가족인 형들에게 배신당해 노예로 팔려간 사건은 요셉에게는 결코 지울 수 없고 잊을 수 없는 아픈 상처였습니다. 요셉은 형들에게 자신의 정체를 공개하였습니다. 창세기 45장 2-4절을 봅시다. “(창 45:2) 요셉이 큰 소리로 우니 애굽 사람에게 들리며 바로의 궁중에 들리더라 (창 45:3) 요셉이 그 형들에게 이르되 나는 요셉이라 내 아버지께서 아직 살아 계시니이까 형들이 그 앞에서 놀라서 대답하지 못하더라 (창 45:4) 요셉이 형들에게 이르되 내게로 가까이 오소서 그들이 가까이 가니 이르되 나는 당신들의 아우 요셉이니 당신들이 애굽에 판 자라” 먼저 요셉은 지난 20년간 한 번도 볼 수 없었던 아버지의 생사 여부를 물었습니다. 그 누구보다 자기를 사랑해 준 아버지가 무척이나 보고 싶었습니다. 요셉이 지난 형들의 배신 사건이 마치 안 일어난 것처럼 덮어버린 것은 아닙니다. 4절 후반절을 보면 “나는 당신들의 아우 요셉이니 당신들이 애굽에 판 자라!”하고 말했습니다. 이 말을 들은 형들은 얼마나 깜짝 놀랐겠습니까? 그들은 속으로 근심하며 겁에 질려 떨며 긴장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서로의 얼굴을 보고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습니다. 동시에 이제 이집트의 총리가 된 요셉이 그들을 벌할까 두려웠던 것이죠. 요셉은 분명 형들에게 큰 잘못이 있었음을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셉은 지난 날 형들의 과오를 용서하기로 선택하였습니다.

 

#1. 용서함으로써 과거의 상처로부터 자유케 되는 길을 선택하라

누군가가 우리에게 상처를 주면 우리는 그 사람을 우리 삶 밖으로 밀어내는 경향이 있습니다. “다시는 당신 보고 싶지 않습니다! 다시는 내 삶에서 나타나지 마십시오!” 이런 식으로 말이죠. 그러나 4절을 보면 요셉은 형들에게 “내게 가까이 오소서!”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자신을 팔아 넘긴 형들을 밀어내지 아니하고, 도리어 그들에게 가까이 나아오라고 말하였습니다. 형들을 더 가까이 모이게 하면서 “제발 내게 가까이 오십시오” 라고 권면한 것입니다. 요셉은 자신에게 악을 행한 형들에게 복수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깨어진 형들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길을 선택하였습니다. 본문 속 “내게 가까이 오소서”라고 말한 요셉의 초대는 멀어진 형들과의 관계의 거리를 좁히는 것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요셉이 이러한 선택을 하는데 얼마나 큰 용기가 필요했을까요?

지난 13년 동안 형들 때문에 말도 못할 정도로 고생했습니다. 형들 때문에 지난 20년 동안 부모도 못 보고 살았습니다.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나이여야 하는 그의 십대와 이십대는 형들 때문에 가장 비참한 시기가 되어 버렸습니다. 자신이 겪은 모든 불행의 원흉인 형들을 얼굴을 마주보고 이야기하는 것도 힘든 일인데, 그들을 용서한다는 것이 어찌 쉬운 일이겠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혹시 여러분 마음 속에 “나의 인생을 망친 사람”하고 원망하는 사람이 있지는 않습니까? 놀랍게도 대부분의 경우 그 사람은 나와 가장 가까운 사람일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어떤 분들에게는 “나의 인생을 망친 사람”이 가족일 때가 있습니다. 내 아버지, 내 어머니, 내 남편, 내 아내, 내 형, 내 누나, 내 오빠, 내 언니, 내 동생, 내 아들, 내 딸… 또 믿었던 친구, 가족 같이 지내던 교회 식구… 여러분도 혹시 마음 속에 “나의 인생을 망친 사람”하면 떠오르는 이름과 얼굴들이 있습니까? 중요한 질문은 다음 질문입니다. 여러분은 그 사람을 용서하셨습니까? 만일 그렇지 않다면 이제라도 용서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아니면 평생 이대로 서로 얼굴도 안 보고 살아갈 것입니까?

가족마다 사연이 각각 다릅니다. 어떤 분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아무리 가족이라도 다시 마주보고 이야기하며 용서하기 힘든 사연들도 분명 있습니다. 때로는 우리가 그 비극의 주인공이기도 합니다. 여러분, 만약 우리가 요셉이었다면 은 20개를 받고 애굽에 노예로 나를 팔아 넘긴 형들을 어떻게 대했을까요? 마음 속 차오르는 분노로 소리를 지르며 “여봐라 저들을 당장 감옥에 가두어라!”하고 말하거나 아니면 “저들을 당장 매로 치라”고 명령을 내리진 않았을까요? 용서는 결코 쉽지 않습니다. 오래 지난 일이라도 기억을 통해 우리는 지난 과거를 회상하며 그 때의 괴로움을 잊지 못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가 지난 과거의 일에 매이지 않고 앞으로 더 나아갈 수 있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요셉은 용서를 통해 지난 날 과거에 있었던 사건으로 인한 괴로움의 함정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는지 보여주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경우 우리는 우리에게 상처를 준 상대방이 양심의 가책을 느끼기를 원합니다. 내 앞에 와서 무릎이라도 꿇고 손발이 닳도록 싹싹 빌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어떤 분들은 상대방을 용서하기로 결정하기 전에 상대방이 나를 찾아와서 먼저 사과하기를 기다리기 위해 수년간 기다리기도 합니다. 그러다가 한 평생 용서하지 못하고 가슴 속 깊이 상처를 간직한 채 살아가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나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용서는 그러한 과정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치신 용서는 상대방의 양심적 가책이나 손발이 닳도록 싹싹 비는 행위를 요구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들의 반응에 관계없이 용서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고 옳은 일이기 때문에 용서하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4장 32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엡 4:32) 서로 친절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용서하심과 같이 우리도 서로 불쌍하게 여기며 용서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용서하는 일이 어렵겠지만, 우리는 쓰라린 감정에 맞서야 합니다. 과거에 나에게 상처 준 사건은 결코 잊혀 지지 않을 수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그 과거의 사건 속에서 머물러 살아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상대방이 어떻게 반응할지 모르더라도, 심지어 그가 우리에게 사과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우리의 쓰라린 감정을 극복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깨진 관계를 회복하려는 열망이 삶의 우선 순위가 되어야 합니다.

 

#2. 지나온 삶을 하나님의 관점에서 해석하라

분명 요셉에게도 용서는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요셉은 이처럼 힘든 결정을 내릴 수 있었을까요? 요셉은 지나온 자신의 삶을 하나님의 관점에서 바라보았습니다. 그와 같은 삶에 대한 그의 신앙의 태도가 본문 5절, 7절, 8절에 잘 나와 있습니다. “(창 45:5) 당신들이 나를 이 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창 45:7) 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니”, “(창 45:8)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이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이 나를 바로에게 아버지로 삼으시고 그 온 집의 주로 삼으시며 애굽 온 땅의 통치자로 삼으셨나이다” 5절에 “하나님이… 보내셨나이다”, 7절에 “하나님이… 보내셨나니”, 8절에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이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 이처럼 요셉은 하나님께서 그를 이집트로 보내셨다고 고백했습니다. 요셉이 자신을 노예로 팔아 넘긴 형들을 용서할 수 있었던 근본적인 이유는, 그가 애굽에서 보낸 세월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신 새로운 신앙의 관점 덕분이었습니다. 요셉은 자신을 상황의 희생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종으로 보게 되었습니다. 또한 요셉은 지나온 시련을 통해 하나님과 신실하게 동행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요셉은 그 어려운 시기를 지나는 동안 자신의 삶에서 역사하고 계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하나님께서 그의 완전하신 계획에 따라 그를 이집트로 보내셨다는 절대적인 확신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따라서 요셉은 자신이 형들에 의한 피해자 또는 희생자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요셉은 하나님께서는 형들이 한 일을 통해 놀랍게 역사하심으로써 요셉이 먼저 이집트에 도착하여 그의 백성을 먹여 살리려는 하나님의 계획을 수행할 수 있었다고 고백했습니다. 요셉은 자신에게 일어난 일에 대해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신 관점을 나눈 후 포옹, 입맞춤, 눈물로 그의 용서를 강조했습니다. 요셉의 형들은 그들이 요셉을 없애려고 한다고 생각했지만, 하나님은 더 높은 목적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이처럼 용서는 우리에게 오는 모든 일에서 하나님의 더 높은 목적을 신뢰할 때 가능합니다. 로마서 8장 28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롬 8:28)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분명 우리가 상대방으로부터 받는 상처는 죄악으로부터 비롯되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우리의 삶 속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은 선하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일상 속에서 경험하는 쓰라린 고통 가운데도 선하신 하나님은 변함없이 역사하고 계십니다. 이를 신뢰할 때 우리는 용서를 통해 다른 사람들의 실수와 실패를 받아들이고, 더 크신 하나님의 계획에 우리 삶의 초점을 맞출 수 있게 됩니다.

 

#3. 상처 준 사람에게 선을 행함으로 깨어진 관계를 회복하라

오늘 본문에서 요셉은 형들을 용서한 것에서 머물지 아니하고, 더 나아가 형들에게 자신이 해줄 수 있는 최선을 행함으로 깨어진 관계를 회복하는데 적극적으로 나섰습니다. 요셉은 형들을 얼마든지 고문하거나 사형시킬 수 있는 이집트의 절대권력을 가진 강력한 지도자였습니다. 그래서 형들은 요셉의 면전에서 공포에 떨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형들에게 가장 좋은 것을 행함으로써 깨어진 관계를 회복했습니다. 요셉은 형들의 어려움을 외면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오히려 최선을 다해 형들과 그들의 자녀들까지도 돌보아주었습니다. 요셉은 자신을 팔아 넘긴 형들의 가족들도 챙겼습니다. 그는 부족함이 없이 형들의 가족들을 돌보아 주었고, 최선을 다해 섬겼습니다. 이는 요셉이 그들을 진심으로 용서했음을 드러냈습니다. 이러한 요셉의 모습은 우리들로 하여금 상처를 준 사람들에게 가장 좋은 것을 구함으로써 깨어진 관계를 회복하도록 격려합니다.

어떤 분들은 본문을 보며 “그래도 결국에 형들은 가족이니까 요셉이 용서해 주었고 잘 챙겨준 건 아닌가?”하고 반문합니다. 그러나 결코 그렇지 아니합니다. 지금도 우리 주변에 부모, 형제, 자식과 다투고 싸워 지금도 서로 외면하고 살아가는 이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예를 들면, 부모의 유산 상속 문제 가운데 형제들끼리 싸워서 서로 남이 된 집안이 우리 주변에 얼마나 많은 지 모릅니다. 어렸을 적에는 한 부모 밑에서 우애 좋은 형제 자매 사이였는데, 서로 서운한 감정이 파고 들면서 남보다 못한 사이가 되기도 합니다. 인터넷에는 이와 관련하여 가슴 아픈 글들이 참 많았습니다. “돈 앞에는 형제간도 필요하지 않더라…”, “재산싸움으로 형제의 인연을 끊고 싶습니다.”, “상속재산 앞에 형제 간의 우애는 없다”, “가족들 힘들게 하고 욕심에 눈이 멀어 독식하는 놈 보니 얼굴도 보기 싫더군요 다시 안 보려니 그리하지 어찌 사람이 그리하나요?”, “돈 몇 푼에 영혼파는 자들은 가족은 아니지 싶네요. 손절이 답인 듯합니다.” 이런 글들을 보면 지금 이 시대에도 얼마나 많은 가족들이 서로 원수가 되어 살아가는지 볼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쓰라린 상처를 준 이들에 대해서 성경은 우리가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 정확하게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상대방에게 끝까지 선을 행하라는 가르침입니다. “(롬 12:17) 아무에게도 악으로 악을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 “(살전 5:15) 삼가 누가 누구에게든지 악으로 악을 갚지 말게 하고 오직 피차 대하든지 모든 사람을 대하든지 항상 선을 좇으라”, “(벧전 3:9)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복을 빌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이는 복을 유업으로 받게 하려 하심이라” 이처럼 성경에서는 이 주제에 대해서 수차례 반복해서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만큼 용서가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피해서는 안 되는, 반드시 마주해야 하는 주제이기 때문입니다.

주기도문에는 이런 대목이 나옵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형제를 용서하지 않으면, 하나님과의 관계도 영적 단절이 발생하게 됩니다. 그러나 용서는 우리 마음에 참 자유를 줍니다. 또한 용서는 우리를 하나님과 더 가까이 나아가도록 도와줍니다. 때때로 삶의 상황은 우리에게 복수할 기회를 제공합니다. 우리는 복수하는 것이 우리가 느끼는 괴로움을 극복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믿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심판을 하나님의 손에 맡겨야 합니다. 그 대신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를 용서하신 것처럼 다른 사람들을 용서해야 합니다.

우리들도 용서받은 자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보실 때 죄악을 지으며 살아가는 우리들은 모두 하나님의 원수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벌하시고 심판하셔야 마땅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용서하기로 선택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용서하시기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사 십자가에 달려 죽게 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모든 죄는 용서받고, 하나님과 화해하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이전에 원수 되었던 우리들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주와 함께 평화를 누리며 살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용서하신 것과 같이 우리들도 서로를 용서해 주는 것이야말로 하나님께 그리스도인에게 명령하신 삶의 모습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과거의 상처로 인해 감정적으로 고통받고 있습니까? 당신에게 잘못한 사람들을 용서하십시오. 용서의 말에 친절한 행동을 더하면 용서를 확인하고 관계를 강화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용서는 주어졌든 받았든 말 뿐 아니라 그 말의 진정성을 보여주는 행동을 포함합니다. 용서하셨습니까? 그럼 이제 그 상대방을 사랑으로 섬기며 살아가십시오. 이와 같이 놀라운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 안에 나타나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