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130 인생의 함정을 피하라 시리즈 (2) 유혹의 함정을 피하라 (창세기 39장 1-12절)


지난해 10월 [Eat This, Not That]이란 웹사이트에는 ‘미국에서 가장 인기 많은 스낵 식품’이란 제목으로 설문조사한 결과가 올라왔습니다. 총 10위까지 올라왔는데요 명단을 살펴보니 매년 슈퍼볼 광고에서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도리토스 칩스가 7위에 링크 되었습니다. 어린 아이들이 좋아하는 오레오 쿠키가 4위, 허쉬 초콜렛바와 허쉬 키세스가 2위를 차지했습니다. 미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스낵 식품은 무엇이었을까요? 1위는 M&M’s 초콜렛이었습니다. 10위 안에 든 스낵들은 브렌드는 각각 다르지만, 모두 사탕, 초콜렛과 같은 달콤한 제품이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스낵은 달콤할수록 그 유혹을 뿌리치기가 힘이 듭니다. 당근이나 양배추 같은 채소는 저항하기 싶지만, 초콜릿이나 케익 같은 것들을 저항하기 힘든 이유는 바로 그 안에 담긴 달콤함 때문입니다.
이는 비단 스낵에만 해당하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마주하는 여러가지 달콤한 유혹들이 있습니다. 현대인이 경험하는 다양한 유혹들에는 어떠한 것들이 있을까요? 지금 당장 필요하지도 않은 물건임에도 눈 앞에서 반짝이며 우리 마음을 흔드는 물품들을 계획없이 충동적으로 구매하는 것도 유혹일 수 있겠습니다. 하나님 보다 돈을 더 사랑하고 그 안에서 인생의 안전을 찾으려고 노력하는 것도 그리스도인이 빠질 수 있는 커다란 유혹입니다. 배우자 외의 이성과의 불온한 관계를 발전시켜 결혼생활을 파괴하는 것도 피해야 할 성적인 유혹입니다. 또한 나보다 큰 성공을 한 친구나 가까운 동료를 부러워하며 그를 시기하고 미워하는 것도 유혹이라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유혹을 경험하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저항하기 힘들게 느껴질 정도로 달콤해 보이는 이 유혹들을 우리는 어떻게 벗어날 수 있을까요? 오늘 우리는 유혹의 함정을 피한 요셉의 이야기를 살펴보려고 합니다. 이를 통하여 우리 각각 경험하고 있는 다양한 인생의 유혹들을 피할 수 있는 올바른 성경적 원리들을 함께 나누어 보고자 합니다.
우리는 지난 주 형들의 배신에 의해 이집트의 노예로 팔려간 요셉의 이야기를 함께 살펴보았습니다. 형들에게 버림받고, 노예로 팔려간 요셉에게는 아무런 꿈도 미래도 없었습니다. 이후 이집트에 도착한 요셉은 이집트의 왕 파라오의 왕궁을 지키는 경호대장 ‘보디발’에게 노예로 팔려가게 됩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아버지 야곱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가정의 따뜻한 품안에서 왕자처럼 자라던 요셉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17살이 된 요셉은 낯선 이집트 땅에서 매일 노예로서 고되고 힘든 노동을 감당하며 살아가야 할 운명에 놓이게 됩니다. 요셉의 미래는 불투명하고 소망의 달빛 하나 비추지 않는 어두컴컴한 밤과 같았습니다.
고대 시대 사람들은 신이란 존재를 한정된 지역만을 다스리는 지방신 즈음으로 생각했습니다. 각 지역마다 관장하는 신이 다르다고 생각한 것이죠. 그리스 신화를 예를 들면, 하늘은 제우스, 바다는 포세이돈, 지하세계는 하데스가 다스리는 것과 같이, 고대 사람들은 신마다 각각 관장하는 분야와 지역이 따로 있었다고 믿었습니다. 이러한 고정관념을 완전히 뒤집어 주는 말씀이 오늘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팔레스타인 땅에서만 계시는 줄 알았던 여호와가 이집트에서도 요셉과 함께하고 계시고 그를 보호하고 계셨다는 말씀입니다. 창세기 39장 2-3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창 39:2)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 그의 주인 애굽 사람의 집에 있으니 (창 39:3) 그의 주인이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하심을 보며 또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하게 하심을 보았더라” 형들은 요셉을 배신하고 그를 죽일 의도를 가지고 노예로 팔아버렸습니다. 이 당시 노예는 사람 대우를 받지 못하고 물건 취급을 당하던 시절이기에 형들은 아버지 품 안에서 자라온 온순한 요셉이 고된 노동을 얼마 버티지 못하고 죽을 운명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요셉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은 달랐습니다. 하나님은 요셉을 버리지도 떠나지도 않으셨습니다. 우리가 사람에게 배신당하고 버림받을 수 있을지 몰라도, 하나님은 절대로 주의 자녀들을 버리지 않으시고 떠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집트에 노예로 팔려온 요셉과 여전히 함께하고 계셨습니다. 창세기 39장에는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하셨다는 표현이 2절, 3절, 21절 23절 이렇게 모두 4번 반복되어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 요셉과 함께하셨다는 사실을 성경저자가 반복하여 강조하고 있는 것이죠. 하나님은 우리가 어디에 있는지 우리와 함께하심을 믿으시길 축복합니다.
이처럼 복의 근원이신 하나님께서 요셉과 함께하시니, 요셉의 인생에 어떤 일이 벌어집니까? 2절 말씀을 다시 보십시오. “그가 형통한 자”가 되었습니다. 아무리 낯선 타국의 노예가 된다고 할지라도, 만복의 근원이신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면 형통한 삶을 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함께하신 요셉의 형통함이 얼마나 분명했는지 3절 말씀을 보니, 그의 주인 보디발도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심을 확인할 수 있을 정도였습니다. 이 말씀은 요셉의 형통함이 하나님의 손길이 아니라면 설명이 불가능할 정도로 특별한 형통이었음을 보여줍니다. 또한 요셉이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고 살았음을 그의 주인 보디발도 알고 있을 정도로 요셉의 여호와 신앙이 확고했음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주인 보디발은 요셉을 그의 집안 일을 모두 돌보고 관리하는 총책임자로 그를 높여주었습니다. 창세기 39장 4-5절 말씀을 읽겠습니다. “(창 39:4) 요셉이 그의 주인에게 은혜를 입어 섬기매 그가 요셉을 가정 총무로 삼고 자기의 소유를 다 그의 손에 위탁하니 (창 39:5) 그가 요셉에게 자기의 집과 그의 모든 소유물을 주관하게 한 때부터 여호와께서 요셉을 위하여 그 애굽 사람의 집에 복을 내리시므로 여호와의 복이 그의 집과 밭에 있는 모든 소유에 미친지라”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는 요셉이 주인 보디발의 모든 소유물을 주관하기 시작한 때부터 어떤 일이 벌어집니까? 여호와께서 요셉을 위하여 그의 주인 집 위에도 복을 내리셨습니다. 여호와의 복이 집안에 있는 것에나 들에 있는 것에나 보디발이 가진 모든 것에 내렸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과 함께하는 사람이 누리는 엄청난 축복입니다. 실로 여호와 하나님과 동행함은 만민이 사모할 만한 축복입니다. 창세기 39장에서 사용하고 있는 ‘형통’이란 해석한 히브리어 단어는 ‘번영’으로 번역할 수도 있고, 또한 ‘성공’으로 번역할 수도 있습니다. 요셉의 형제들은 요셉을 버렸지만, 하나님은 그를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요셉에게 형통의 복을 주셨고, 그는 노예로 팔려간 이집트에서도 성공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요셉은 보디발의 ‘자산관리자’인 셈입니다. 요셉이 그의 주인에게 얼마나 큰 신임을 받고 있는 것입니까? ‘백악관의 보완을 총 담당하고 있는 경호대장 보디발의 자산관리자’, 멋진 명함 아닙니까? 이집트에 노예로 팔려온 요셉은 말 그대로 성공가도를 달리고 있었습니다. 모든 노예들이 닮고 싶은 성공의 롤-모델이나 다름없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 잘나가던 순간 드디어 일이 발생하게 됩니다. 유혹은 언제 찾아옵니까? 일이 잘 될 때에 찾아옵니다. 유혹은 어려움을 극복하고, 성공가도를 달리고 있을 때 찾아옵니다. 회사에서 승진하거나, 급여가 인상되거나, 또한 어떤 프로젝트나 일을 완수함으로 사람들에게 특별한 인정을 받고 존경을 받을 때, 사람들의 칭찬과 축하의 말들이 우리를 우쭐하게 만들고, 유혹에 취약해질 수 있습니다. 번영과 성공의 때에 함께 오는 유혹들은 때로는 “혜택”이라는 가면을 쓰고 찾아오기도 합니다. 그래서 “아, 이 정도 유혹은 내가 감당할 수 있어”라는 식으로 죄 앞에 자신을 속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사람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하여, 그들이 약속의 땅에 들어가서 잘 살고 번영하게 될 때 여호와 하나님을 잊을까 조심하라고 경고하였습니다. 신명기 8장 12-14절입니다. “(신 8:12) 당신들이 배불리 먹으며, 좋은 집을 짓고 거기에서 살지라도, (신 8:13) 또 당신들의 소와 양이 번성하고, 은과 금이 많아져서 당신들의 재산이 늘어날지라도, (신 8:14) 혹시라도 교만한 마음이 생겨서, 당신들을 이집트 땅 종살이하던 집에서 이끌어 내신 주 당신들의 하나님을 잊어버리는 일이 없도록 하십시오.” 모세의 말에 따르면 사람은 언제 하나님을 잊기 쉽습니까? 배부를 때, 좋은 집에 거할 때, 가축이 번성하고, 은과 금이 풍성하여 재산이 늘어나 마음이 교만해지기 쉬울 때입니다. 그때 사람은 하나님을 쉽게 잊어버릴 수 있음을 모세는 경고하였습니다. 왜 유혹은 일이 잘 될 때 찾아올까요? 그 때가 우리 마음이 교만하여 유혹에 가장 취약한 시기이기 때문입니다. 벼가 익을수록 고개를 숙이듯이, 우리의 삶이 성공가도를 다릴수록 겸손하게 주님을 더욱 의지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요셉을 낳아준 어머니 라헬은 상당한 미인이었습니다. 창세기 29장 17절을 보면 요셉의 어머니 라헬에 대한 묘사를 이렇게 하고 있습니다. “Rachel had a beautiful figure and a lovely face.” 라헬은 몸매가 아름답고 용모도 예뻤다. 그런 어머니 밑에서 태어난 요셉도 어머니를 닮아 용모가 빼어나고 얼굴이 매우 멋지고 잘생긴 사람이었습니다. 외모도 뛰어납니다. 그가 손대는 일마다 대박이 납니다. 성품도 온화하고, 얼굴에는 자신감이 넘치고 항상 밝은 요셉의 모습은 얼마나 매력적입니까? 그런 요셉을 곁에서 지켜보고 있던 한 여인이 있었습니다. 바로 주인 보디발의 아내였습니다. 그녀는 요셉에게 잠자리를 같이하자고 그를 유혹했습니다. 창세기 39장 6-7절 말씀입니다. “(창 39:6) 주인이 그의 소유를 다 요셉의 손에 위탁하고 자기가 먹는 음식 외에는 간섭하지 아니하였더라 요셉은 용모가 빼어나고 아름다웠더라 (창 39:7) 그 후에 그의 주인의 아내가 요셉에게 눈짓하다가 동침하기를 청하니” 유혹은 일이 잘 될 때에 찾아옵니다. 유혹은 성공가도를 달리고 있을 때 찾아옵니다. 일이 잘 풀릴 때 찾아오는 유혹을 더욱 주의해야 합니다. 요셉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그의 주인 보디발이 요셉을 가정 총무로 세운 후, 주인의 아내가 요셉을 유혹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녀는 요셉에게 은밀한 눈짓을 주며, 요셉이 그녀와 잠자리를 함께 할 것을 유혹했습니다. 달콤한 유혹이 가진 또 하나의 특징은 매우 은밀하게 찾아온다는 것입니다.
구약성경 잠언 30장을 보면 지혜의 왕 솔로몬이 ‘이 세상에서 아무리 연구해도 이해하지 못할 기이한 것’이 서너 가지가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하늘을 날아가는 독수리가 어디로 지나갔는지 그 길을 알 수 없고, 바위를 기어다니는 뱀이 어디로 지나갔는지 길을 알 수 없고, 바다 한 가운데로 항해한 배가 지나간 길을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솔로몬이 이어서 말합니다. 사실 솔로몬이 강조하여 말하고자 하는 것은 바로 이 마지막 이야기입니다. 솔로몬은 남자와 간음한 여인이 지나긴 길을 알 수가 없다고 말했습니다. 간음을 지은 것이 분명한 여인에게 죄를 묻는데도 그녀는 “나는 그런 일 한 적 없습니다!”하고 말합니다. 한 번 성경 속 솔로몬의 목소리를 직접 들어볼까요? 잠언 30장 18-20절 말씀입니다. 새번역성경으로 읽어봅시다. “(30:18) [새번역성경] 기이한 일이 셋, 내가 정말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넷이 있으니, (30:19) [새번역성경] 곧 독수리가 하늘을 날아간 자취와, 뱀이 바위 위로 지나간 자취와, 바다 위로 배가 지나간 자취와, 남자가 여자와 함께 하였던 자취이다. (30:20) [새번역성경] 간음한 여자의 자취도 그러하니, 먹고도 안 먹었다고 입을 씻듯이 “나는 아무런 악행도 한 일이 없다” 한다.” 이 잠언의 말씀은 우리에게 이 세상에 다른 사람들이 모르게 두 사람 사이에서 은밀하게 진행되는 간음죄가 무수히 많다는 사실을 가르쳐줍니다. 미국에서만 현재 인터넷에서 포르노를 보고 있는 사람의 평균 수가 1초에 28,258명입니다. 미국에서 포르노를 보는데 소비되는 돈을 계산해 보니 1초에 $3,075.64이 지출되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스마트폰으로 검색한 내용을 조사해 보니 그 중 20%가 포르노 검색이었습니다. 미국인 25살 이상의 성인들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실시했습니다. “포르노가 나쁜 것입니까?” 55%는 그렇다고 대답했고 45%는 아니라고 대답했습니다. 13-24세 십대 청소년들과 청년들에게 물었습니다. ‘쓰레기를 재활용하지 않는 것’과 ‘포르노를 보는 것’ 중 무엇이 더 도덕적으로 잘못된 것입니까? 청소년들과 청년들 대부분 ‘쓰레기를 재활용하지 않는 것’을 선택했습니다. 10대와 20대를 대상으로 한 이 설문조사는 포르노에 대한 이 시대의 청소년과 청년들의 인식이 결코 부정적이지 않음을 시사해줍니다. 실제로 미국에서 포르노에 처음 노출되는 나이가 평균 12세라고 합니다. 어쩌면 우리는 말 그대로 역사상 가장 음란한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너무나도 쉽게 컴퓨터 모니터와 스마트폰 화면을 통하여 수많은 보디발의 아내들이 우리들의 삶을 침투해 오고 있습니다. 잠언 속 솔로몬의 언급처럼 음란죄들은 다른 사람들이 모르게 어떠한 흔적도 남기지 않은 채 지금 이 시대에도 은밀하게 진행되고 있습니다.
보디발의 아내는 요셉과 은밀한 밀회를 갖기를 원했습니다. 이 집에서 이 두 사람보다 더 높은 지위를 가진 사람은 없습니다. 따라서 이 둘이 마음만 먹으면 아무도 그들의 음행을 눈치 채지 못하도록 만들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솔로몬이 이야기한 아무도 모르는 은밀한 간음죄가 성립할 만한 상황입니다. 자, 이제 선택은 요셉에게 달려 있습니다. 과연 요셉은 이 유혹에 대하여 어떻게 대처하였을까요? 8-9절 말씀을 함께 봅시다. “(창 39:8) 요셉이 거절하며 자기 주인의 아내에게 이르되 내 주인이 집안의 모든 소유를 간섭하지 아니하고 다 내 손에 위탁하였으니 (창 39:9) 이 집에는 나보다 큰 이가 없으며 주인이 아무것도 내게 금하지 아니하였어도 금한 것은 당신뿐이니 당신은 그의 아내임이라 그런즉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죄를 지으리이까” 보디발의 아내가 요셉을 유혹하기 전 이미 요셉에게는 그가 세워 둔 삶의 기준들이 분명하게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요셉은 이런 상황에서 무엇을 해야 하며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지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요셉은 주인의 아내가 베푼 제안을 단칼에 거절하였습니다. 그는 이 제안에 대해 어떠한 여지를 남겨두지 않고, 그녀의 요청을 단번에 거부했습니다.
요셉은 보디발의 아내에게 그의 주인인 보디발이 자신을 신뢰함으로써 주인의 집의 모든 소유를 맡겼다고 설명합니다. 이어서 지금 주인의 아내가 요셉에게 요청하는 간음은 그가 결코 넘어가서는 안 되는 선이며, 동시에 주인의 신뢰를 깨트리는 악행임을 이야기했습니다. 요셉은 이 어리석은 행동 하나로 인해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신 모든 특권을 잃어버릴 수 있다는 사실을 주인의 아내에게 강조하여 설명하였습니다. 유혹을 거부하는 요셉의 태도는 매우 차분하고, 올바른 판단이었습니다. 우리가 주목해서 봐야 하는 대목은 바로 9절 후반절 말씀입니다.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죄를 지으리이까” 요셉은 분명 이 모든 상황 가운데 함께하고 계시는 하나님을 인식하고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요셉에게 여호와 하나님은 분명 살아 계신 분이었고, 요셉에게 하나님은 인간의 선행과 악행에 따라 보상과 심판을 내리시는 하나님이었습니다. 따라서 요셉은 하나님에 대한 그의 확고한 신념에 따라 주인의 아내와 잠자리를 갖는 이와 같은 간음죄를 지을 수 없다는 것을 확실히 못 박았습니다.
보디발의 아내가 요셉을 유혹하는 방법은 “아무도 모를 것이다”였습니다. 그러나 요셉의 대답은 “아무도 몰라도, 하나님은 아신다!”였습니다. 지금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아무도 모를 것이다”란 자기 합리화로 크고 작은 죄들을 지으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그러나 요셉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모든 행위를 지켜보고 계신다고 고백하였습니다. 따라서 그는 언제 어디서나 그와 함께하고 계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믿음에 대한 따라 마음을 정하고 주인의 아내와 잠자리를 함께 할 것을 단칼에 거절하였습니다. 요셉과 같이 우리 삶에 하나님을 중심에 두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의 가치관들과 표준들을 미리 확고히 결정하여 놓고 살아간다면 유혹에 더 잘 저항할 수 있습니다. 또한 죄와 타협할 때 우리가 얼마나 많은 것을 잃어버릴 수 있는지 생각하면 유혹을 물리치는데 도움이 되기도 합니다. 우리들은 어떠한 도덕적 가치관과 기준을 세워 두고 살아가고 있습니까? 성경적인 가치관에 따라 삶의 기준들을 미리 세워 두는 것은 영적 전쟁을 앞두고 튼튼한 성벽을 쌓아 놓는 것과 같습니다. 이 세상이 제시하는 표준들이 우리를 공격하고 유혹할 때 하나님의 말씀으로 미리 세어 둔 표준으로 우리 마음을 방어하는 것입니다. 세상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평상시 미리 하나님의 표준으로 우리 마음의 성벽을 견고하게 세워놓는 작업을 해야합니다.그토록 수많은 남자들이 성적 유혹의 덫에 빠졌으나, 요셉은 굳건히 서 있었습니다. 요셉의 비결은 그가 이미 훨씬 이전에 이 일에 대하여 결정을 내려놓았다는 데 있습니다. 요셉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반응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신앙의 양심을 깨끗하게 유지하는 삶을 살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현대인들의 도덕성을 대표하는 말이 바로, “당신의 양심이 당신의 길잡이가 되게 하라”(Let your conscience be your guide.)입니다. 그러나 이 말은 반은 맞고 반은 틀렸습니다. 양심 자체만으로는 결코 올바른 도덕적 판단을 내릴 수 없습니다. 한 세대가 금지한 것을 후 세대는 허용합니다. 이전 세기에는 잘못된 것이면, 현 세기에도 잘못된 것이어야 하는데, 사회 질서는 그러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인간의 양심이란 사회의 흐름에 따라 변화되고 있습니다. 극단적인 예로, 원시 부족들 특별히 식인종들이 사는 섬에 가면, 사람을 잡아먹는 것이 결코 비양심적인 행위가 아니라고 그들의 양심은 진심으로 믿고 있습니다. 이전에 미국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동성애를 죄라고 생각했습니다만, 이제는 동성애를 반대하는 사람들이 오히려 속이 좁고 구시대적 편협한 견해를 갖고 있는 것으로 여겨지며 사람들에게 미움 받고 있습니다. 이처럼 인간의 양심이라는 것은 시대에 따라 지역에 따라 달라지곤 합니다. 인간이 정해 놓은 사회적 관습은 변화합니다만, 하나님의 말씀은 결코 변화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도덕성을 대표하는 말은 다음과 같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당신의 길잡이가 되게 하라”(Let God’s word be your guide) 최종적인 도덕적 판단은 시대와 장소에 따라 변화하는 인간의 양심이 아니라,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뜻에 근거하여 이루어져야 합니다.
다시 말씀으로 돌아가 봅시다. 보디발의 아내가 얼마나 끈질긴 사람인지요. 요셉이 이처럼 단호하게 거부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날마다 요셉을 유혹하며 잠자리를 같이할 것을 요청했습니다. 요셉은 한 번의 유혹을 무찌른 것이 아니라, 수차례 반복되는 유혹을 이겨낸 사람입니다. 거듭되는 유혹을 요셉은 어떻게 이겨냈는지 그의 태도를 봅시다. 창세기 39장 10-12절 말씀입니다. “(창 39:10) 여인이 날마다 요셉에게 청하였으나 요셉이 듣지 아니하여 동침하지 아니할 뿐더러 함께 있지도 아니하니라 (창 39:11) 그러할 때에 요셉이 그의 일을 하러 그 집에 들어갔더니 그 집 사람들은 하나도 거기에 없었더라 (창 39:12) 그 여인이 그의 옷을 잡고 이르되 나와 동침하자 그러나 요셉이 자기의 옷을 그 여인의 손에 버려두고 밖으로 나가매” 보디발의 아내는 하루가 멀다 하고 요셉을 유혹하였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계속해서 그녀의 청을 거절할 뿐만 아니라 그녀와 함께 있지도 아니하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요셉이 일을 하기 위하여 집에 홀로 있게 되었습니다. 이때다 싶은 주인의 아내가 들어와 요셉의 옷을 붙잡고 “나와 함께 잠자리를 갖자”고 또 다시 그를 유혹하였습니다. 아마도 주인의 아내는 주변 사람들이 아무도 없고 두 사람만 있기에 이번에는 요셉이 타협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을 것입니다. 처음에는 눈짓으로 유혹하던 여인이, 그 다음에는 달콤한 말로 유혹합니다. 말로도 안 되니까 그 다음에는 물리적인 힘까지 사용하며 요셉을 유혹합니다. 유혹의 강도가 갈수록 더해지는 것이죠. 이처럼 죄는 우리를 유혹하고 넘어뜨릴 기회를 찾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또한 우리가 시험을 피할 수 있는 수단을 마련하여 주십니다.
자, 이 때 요셉은 어떻게 행동합니까? 요셉은 주인의 아내가 옷을 놓지 못하게 만들지는 못했으나, 옷은 벗을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12절 말씀을 보니, 그는 자신의 옷을 꽉 붙잡고 있는 주인의 아내의 손을 뿌리치며, 자기 옷을 버려 둔 채 집 밖으로 도망쳤습니다. 유혹의 자리를 피하는 것은 나약함의 표시가 아닙니다. 그것은 오히려 건강한 영적인 지식을 갖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유혹이 벌어지는 현장에서 하나님께서 정하신 삶의 표준을 지키기 어렵다면, 때때로 가장 현명하고 지혜로운 방법은 그 유혹의 현장을 피하는 것입니다.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유혹과 시련에도 흔들리지 않을 것처럼 자부합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 사는 동안 사탄의 공격에서 예외 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다윗 왕을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 마음에 합한 삶을 살았다고 평가받았던 다윗도 그만 달콤한 유혹 앞에 한 순간 와르르 무너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다윗과 같이 하나님의 영이 충만했던 사람도 방심하니, 영적 순결보다 육체적 쾌락을 선택하였고, 그로 인해 그는 다른 남자의 아내와 잠자리를 갖는 간음죄를 저질렀습니다. 또한 다윗은 이를 덮기 위하여 수많은 사람들을 죽음으로 몰았습니다. 죄에 대한 어느 신학자의 통찰력 있는 글을 인용합니다. “죄는 항상 가고자 하는 것보다 더 멀리 데려가고, 머물고 싶은 것보다 더 오래 그곳에 머물게 하며, 지불하고 싶은 것보다 더 많은 대가를 치르게 합니다.”(Sin always takes you further than you want to go, keeps you there longer than you want to stay, and costs you more than you want to pay) 달콤한 죄악의 유혹에 넘어가, 죄악을 짓고 살아가는 것은 브레이크가 고장난 세미 트럭을 몰고 프리웨이를 달리는 것과 같습니다. 지금 당장은 모든 것이 괜찮고 아무 문제없는 것처럼 느껴질지 모르지만, 때가 되면 죄악의 결과는 나 자신과 주변 사람들에게 큰 고통과 피해를 안겨주게 됩니다. 그래서 죄가 무서운 것입니다. 작은 불이 큰 불을 일으키듯이 대수롭지 않아 보이는 죄악들이 우리를 더욱 심각하고 무시무시한 죄악의 삶으로 끌어당깁니다. 작은 죄가 더 큰 죄를 낳기에 요셉처럼 유혹의 암시가 주어질 때 도망쳐야 합니다. 우리가 죄로부터 도망친다는 것은 그와 동시에 우리가 예수님과 가까이 동행하기로 결심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무엇으로부터 도망칠 것인가에 초점을 맞출 것이 아니라, 무엇을 향해 달려가야 하는지에 집중해야 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단순히 죄로부터 도망칠 것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아니라, 날마다 하나님을 추구하며 예수 그리스도와 동행하며 살아가는 삶을 추구해야 합니다. 그와 같이 하나님을 구하며, 예수님을 따르는 삶이야말로 단순히 죄를 피하는 삶보다 훨씬 더 우리들을 영적으로 승리할 수 있도록 힘있게 만들어 줄 것입니다.
우리가 오늘날 주의해야 할 유혹은 성적 유혹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각자 다양한 유혹들을 받고 살아사고 있습니다. 나의 일상생활에서 피해야 할 유혹은 무엇입니까? 하나님 앞에서 깨끗한 양심을 유지하는 삶을 살아가기를 결단하십시오. 요셉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삶과 양심을 깨끗하게 유지하기 위해서 최선을 다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인 구원받은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마땅히 그렇게 살아가야 합니다. 종교개혁가 마틴 루터는 죄에 대해서 아주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새가 머리 위로 날아가는 것을 막을 수는 없지만 머리에 둥지를 짓는 것은 막을 수 있습니다.” (“You cannot keep birds from flying in the air over your head, but you can prevent them from building a nest in your hair.” By Martin Luther) 죄가 우리를 유혹하는 것 자체는 막을 수 없겠습니다만, 죄악의 유혹을 이겨내는 것은 가능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요즘 반복해서 넘어지는 죄가 있습니까? 죄라는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특정 유혹에서 벗어나기가 어렵습니까? 삶에서 반복되는 유혹에 맞서 싸울 계획을 세울 수 있도록 도와 달라고 하나님께 간구하십시오. 하나님 보시기에 올바른 성경적 가치관과 태도를 말씀을 통하여 계속해서 배워가십시오. 피할 수 있다면 유혹의 자리에서 도망치십시오. 우리가 작은 유혹에 거절할 때 더 큰 유혹에도 거절할 수 있는 영적 능력이 자라나게 됩니다. 죄악의 달콤한 유혹들을 거절하고, 성령의 도우심과 인도하심을 구하며 오늘도 하나님을 추구하고 예수 그리스도께 더 가까이 나아가는 삶을 살아가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