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123 인생의 함정을 피하라 시리즈 (1) 배신의 함정을 피하라 (창세기 37장 1-27절)

최근에 뉴욕 주에 있는 빙햄튼 대학교 경영대학원에서 한 가지 흥미로운 연구 결과를 내놓았습니다. ‘어떤 사람들이 팀에 뽑혀갈까?’하는 질문에 대한 연구였습니다. 우리는 흔히 생각할 때 개인 역량이 뛰어나고 그 분야에서 개인적인 평판이 잘 알려진 사람들이 팀에 뽑힐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런데 예상 외로 빙햄튼 대학교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사람들은 친절하고 신뢰할 수 있는 사람과 함께 같은 팀에서 일하기를 선호한다고 합니다. 사람들이 어떤 중요한 일을 위하여 팀을 구성할 때 그 팀에 지식, 기술, 또는 능력을 가지고 올 수 있는 사람들로만 구성할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실제로 조직과 팀을 보면 어떤 사람들은 그들의 능력과 상관없이 팀 멤버들의 기분을 편안하게 만들어 준다는 이유만으로도 팀 멤버에 뽑혔다고 합니다. 실제로 조사해 보니 사람들은 친절하고 친근하고 편안한 팀을 만들기 위하여 팀의 수행 능력을 조금은 희생할 의지가 있다고 판단되었습니다. 사람들은 탁월한 능력과 화려한 경력을 가지고 있어도 불친절하고 신뢰하기 어려운 사람은 함께하기 싫어했습니다. 그러나 반대로 능력과 경력은 조금 떨어져도 친절하고, 성품이 따뜻하며, 신뢰할 수 있는 사람과 함께 일하는 것을 사람들은 선호했습니다.
인간 관계에서 ‘신뢰’는 참으로 중요합니다. 두 사람 사이에 신뢰가 사라지게 될 때 그 같은 상대방과의 관계는 뾰족한 벌침 같이 매우 따갑게 우리를 쏘아붙입니다. 신뢰할 수 없는 사람과 함께 일한다는 것은 매우 큰 스트레스입니다. 혹시 깊게 믿었던 가까운 사람에게 배신당한 경험이 있으십니까? 예를 들면, 가장 가깝게 지내던 친구가 어느 날 갑자기 내게 차갑게 등을 돌린 적은 없습니까? 친한 사이이기에 믿고 동업을 했는데, 그 친구가 갑자기 큰 돈을 들고 잠적한다면 마음이 어떻겠습니까? 아니면 어렸을 적부터 같이 자라온 형제나 자매로부터 부모 유산 상속 문제 때문에 법적인 고소를 당했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이런 일을 당하게 될 때 느끼는 쓰디쓴 배신감과 좌절감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 주변에는 그토록 믿었던 동료가 원수로 변함으로 인한 상실감으로 인해 기나긴 겨울과 같은 우울증을 겪는 분들도 있습니다. 배신은 한 사람의 인생을 망가트릴 수 있는 쓰디쓴 독입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누구나 살다 보면 적어도 한 번 즈음은 가깝게 지내던 사람으로부터 상처받는 일이 생깁니다. 우리에게 상처주는 사람은 우리가 신뢰해온 사람인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사실 우리가 신뢰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상처받을 일이 거의 없습니다. 오히려 나와 가까운 사람들, 혹은 내가 신뢰하는 사람들에게 상처를 받습니다. 가까운 관계 속에서 발생한 상처들은 가정, 교회, 직장, 개인의 건강 등 우리 삶의 다양한 영역에 나쁜 영향을 끼칩니다. 그러나 과거 이처럼 사람으로부터 배신당한 상처와 아픔이 있다고 해도, 세상이 끝난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관계에서 얻은 상처 때문에 계속해서 좌절하며 살 필요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인간 관계 속 일어난 상처도 능히 치유하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우리가 믿고 섬기는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결코 우리의 믿음을 져버리지 않으십니다. 더 나아가 하나님께서는 우리 마음의 상처, 아픔, 고통을 이겨낼 수 있도록 도와 주십니다. 만일 우리가 앞으로 누군가에 의해 상처받는 일이 생긴다 하더라도, 혹 이미 과거에 일어날 일로 속상해하고 있을지라도, 지금 이 순간에도 모든 상처를 능히 치료하시는 하나님께서 우리 삶 가운데 역사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저를 한 번 따라해 주시겠습니까? “눈에 보이지 않아도, 하나님은 여전히 일하고 계십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좋으신 하나님은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의 마음 속 상처를 치유하고 계십니다.
신약성경에서 나오는 가장 유명한 배신은 예수님을 팔아 넘긴 가룟 유다의 배신입니다. 그는 악명 높은 입맞춤으로 예수님을 그를 붙잡으러 온 무리에게 넘겨주었습니다. 비록 가룟 유다의 배신으로 예수님은 병사들에게 붙잡히시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으나, 하나님은 그 일을 통하여 온 인류의 죄를 용서하시고 구원하는 통로로 사용하셨습니다. 이처럼 우리 하나님은 악을 선으로 바꾸어 역사하실 수 있는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가까운 이의 배신으로 인해 우리 인생이 어려움에 처할 수 있으나, 거기서 이야기가 끝나는 것은 아닙니다. 눈에 잘 보이지 않는다 할지라도 우리 하나님은 여전히 일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당하는 그 어떤 고통스러운 상황 속에서도 끝까지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유일한 믿음의 대상이십니다. 오늘 말씀을 통하여 우리 삶 속에서 역사하고 계시는 하나님의 도움의 손길을 신뢰하며 살아갈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1. 하나님께서 우리 삶의 모든 순간을 (심지어 고통까지도) 주님의 영광을 위하여 사용하고 계심을 신뢰하십시오.
우리 모두는 가족이란 공동체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가족은 예외 없이 저마다의 사연과 아픔이 있기 마련입니다. 야곱의 가정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야곱은 아들이 총 12명이나 있었습니다. ‘가지 많은 나무에 바람 잘 날 없다’는 한국 속담처럼 자식을 많이 둔 야곱의 식구들도 언제나 이런저런 일로 시끌벅적 했을 것입니다. 사실 야곱은 아버지의 편애를 겪고 살아온 사람입니다. 그의 아버지 이삭은 장남 ‘에서’를 편애하였습니다. 막내 야곱은 아버지 앞에서 늘 찬밥 신세였습니다. 어쩌면 어린 시절 형 에서만 예뻐하는 아버지 이삭을 보며 야곱은 속으로 생각하기를 ‘나는 나중에 커서 아버지처럼 되지 말아야지’하고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아버지가 된 야곱도 열 두 아들 중 요셉만 예뻐하는 편애의 길을 걷게 됩니다. 그리고 그와 같은 아버지의 편애가 이 가정의 모든 아들들의 마음에 큰 상처를 안겨주게 되었습니다.
우리 한국 사회는 전통적으로 딸보다 아들을 더 편애했습니다. ‘남아 선호 사상’이란 말이 있을 정도로 한국인들은 전통적으로 남자 아이를 더욱 선호했습니다. 그 이유는 이전에는 제사나 부모의 노후 돌봄 집안의 대 잇기 등 아들만이 할 수 있는 역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제 그와 같은 아들의 고정된 역할이 사라지면서 한국은 지난 30년간 전세계적으로 그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가장 빠른 속도로 남아 선호 사상이 사라지고 있습니다. 딸들이 아들보다 더 살갑고, 정서적 보살핌에 강하기에 딸들에게 애정을 느끼는 부모들이 점차 늘어나고 있는 것이죠. 실제로 2021년도 6월 성인 1000명을 대상으로 설문 조사를 해봤습니다. “자녀로 딸이 꼭 있어야 한다.”는 대답이 높게 나왔습니다. 예전에는 출가외인이란 말이 있어서 딸은 결혼하면 외인이라고 했으나, 이것도 다 옛말입니다. 결혼 딸이 부모 집에 자주 들르고 부양할 수 있는 상황에 이르렀고, 이제는 오히려 육아 때문에 처가 근처에 모여 사는 일이 많습니다. 그래서 지금 사회를 가리켜 ‘신 모계사회’라고 평가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여전히 한국 사회에서는 ‘남아 선호 사상’을 강하게 주장하는 찾아보기 어렵지 않습니다. 옛날 우리 한국 사회는 둘째나 셋째보다 첫째 장남을 더욱 편애했습니다. 그로 인해 둘째나 셋째 자녀들이 아버지나 어머니로부터 받은 섭섭한 상처들이 평생 가슴에 지워지지 않고 남아 있기도 합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야곱의 가정은 아버지 야곱의 편애로 인하여 형제 간의 다툼과 불행이 일어나게 됩니다. 야곱의 집에는 아버지의 사랑을 받지 못한 상처받은 자식들로 인해 항상 시기와 질투가 넘쳐났습니다. 야곱에게는 총 두 명의 아내가 있었습니다. 레아와 라헬입니다. 야곱은 두 아내와 두 아내의 여종인 실바와 빌하를 포함하여 총 4명의 여자에게서 모두 12명의 자녀를 낳게 됩니다. 아버지 야곱은 열 두 아들 중 유독 11번째 아들인 요셉만을 편애하였습니다. 왜냐하면 요셉은 야곱이 사랑한 아내 라헬에게서 태어난 아들이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요셉은 야곱이 노년에 얻은 아들이므로 그가 다른 아들들보다 요셉을 더욱 사랑했습니다. “(창 37:3) 요셉은 노년에 얻은 아들이므로 이스라엘이 여러 아들들보다 그를 더 사랑하므로 그를 위하여 채색옷을 지었더니” 야곱은 그가 사랑하는 아들 요셉을 위하여 특별히 제작한 채색옷을 입혀주었습니다. 성경학자들은 채색옷이 아버지가 택한 장자, 곧 유산의 상속자임을 나타내는 옷이라고 해석합니다. 채색옷이란 말 그대로 여러 가지 빛깔로 되어 있는 화려한 옷입니다. 일부 성경 해석들을 보면 채색옷을 롱코트나 로브처럼 길이가 긴 옷으로 해석합니다. 또 어떤 성경은 ‘귀한 옷’이라고 해석하기도 합니다. 분명한 사실은 이 옷이 들판에서 일할 때 입는 작업복이 결코 아니라는 것입니다. 본래 일상복은 소매가 없고 길이가 짧아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아버지 야곱이 아들 요셉에게 소매가 길고 색상이 화려한 채색옷을 입혔다는 것은 그가 들판에서 양을 돌보는 일하는 것을 기대하지 않았다는 것을 암시하기도 합니다. 형들은 더위와 추위를 견뎌내며 들판에서 양을 돌보고 있는데, 요셉은 아버지 품 안에서 특별 취급 받고 있습니다. 그러니 아버지가 지어준 채색옷을 입고 다니는 나이 어린 요셉이 형들 눈에는 얼마나 얄밉고 보기 싫었을까요? 그들은 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한 요셉을 매우 미워했습니다.
어느 날 요셉은 꿈을 꾸었습니다. 요셉이 꾼 꿈 속에서 그는 형들과 밭에서 곡식단을 묶었습니다. 요셉이 묶은 단이 일어나 똑바로 섰습니다. 그러자 형들이 묶어 놓은 곡식단이 각각 요셉의 곡식단을 둘러서서 절을 했습니다. 요셉은 또 다른 꿈을 꾸었습니다. 해와 달과 11개의 별들이 요셉에게 절을 했습니다. 누가 보아도 아버지와 어머니와 형제들을 상징하는 해와 달과 그리고 11명의 형제들을 상징하는 11개의 별들이 모두 요셉 앞에 절을 한 것이죠. 요셉은 안 그래도 형들에게 미움을 받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순진하고 미숙한 것인지 아니면 뻔뻔한 것인지 형들에게 꿈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요셉의 형들이 터무니없어 보이는 동생의 꿈 이야기를 듣고 얼마나 크게 분노했을까요? 형들은 요셉을 이전보다 더욱 미워했습니다. 형들이 요셉을 얼마만큼 싫어했는가 하면 말 그대로 ‘어떻게 하면 요셉을 죽일 수 있을까?’ 생각할 만큼 그를 싫어했습니다. 아버지 야곱에게서 받지 못한 사랑 때문에 형들은 “저 녀석 때문에 우리가 아버지의 사랑을 받지 못한다. 저 녀석만 없으면 된다!”는 식의 미움이 그들의 마음 속 깊이 새겨져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형들은 평상시처럼 들판에서 양떼를 돌보고 있었습니다. 요셉도 평상시처럼 아버지 야곱 곁에 있었습니다. 형들은 다 나가서 땀 흘려 일하는데, 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한 요셉만 일에서 열외 된 것이죠. 아버지 야곱은 아들 요셉을 형들에게 보내며, 형들이 양은 안 돌보고 게으르게 딴짓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또는 사고 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감시하고 오라고 심부름을 보냈습니다. 요셉은 평소에도 들판에서 양을 치는 형들이 잘못하면 그대로 자기 아버지에게 가서 이르곤 했습니다. 안 그래도 형들의 미움을 샀던 요셉인데, 형들의 실수를 감춰줄 망정 아버지 야곱에게 고자질까지 하니 형들은 더욱 더 요셉을 미워했습니다. 아버지의 편애를 상징하는 채색옷을 입은 요셉이 형들을 감시하기 위해 저 멀리서 걸어오고 있습니다. 형들은 저 멀리서 요셉이 다가오는 것을 보고, 급히 모여 상의한 후 그를 죽이기로 계획했습니다. 그러나 후에 형들은 요셉을 이집트로 향하는 상인에게 노예로 팔아 넘김으로써 이익을 보기로 결정합니다. 이로 인해 열 일곱 살의 요셉은 이후 무려 약 13년 동안 애굽에서 노예로 살아가게 되는 끔찍한 경험을 하게 됩니다.
우리가 요셉의 이야기에서 살펴볼 수 있듯이, 우리 삶에 찾아오는 아픔이나 고난이 때때로 우리의 잘못 때문에 일어나는 것이 아닌 경우들이 있습니다. 형들의 시기와 질투가 요셉의 인생을 구렁텅이로 밀었고, 어려운 환경에서 살아가도록 만들었습니다. 가장 믿었던 사람에게 배신당하고 뒤통수 맞는 기분은 얼마나 비참할까요? 요셉의 입장에서 보면, 은 20냥 받고 자신을 애굽의 노예로 팔아 넘긴 얼마나 형들이 미웠겠습니까? 심지어 본래 형들은 요셉을 잡아 죽이려고 계획 했었습니다. 그러니 이 사건을 요셉의 입장에서 보면, 몹시도 두렵고 형들에 대한 분노로 치가 떨리는 상황입니다.
오늘 본문 속 요셉의 인생은 우리 모두의 삶과 흡사합니다. 왜냐하면 요셉처럼 우리 중 그 누구도 관계에서의 갈등을 피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한 때 친했던 사람과 갈등을 겪기도 하고, 좋았던 관계가 깨지며 이전에는 없었던 팽팽한 긴장이 감돌기도 합니다. 우리 주변 사람들로 인해 우리 인생은 계획한대로 펼쳐지지 아니하고, 전혀 예측하지 못한 방향으로 펼쳐질 때가 더 많습니다. 인간 관계에서 받는 상처는 그 누구도 예외 가 없고, 모든 인류는 같은 배를 타고 있습니다. 그러나 요셉의 이야기는 연약한 인간의 죄악 속에서 꽃 피어나는 하나님의 아름다운 구원의 역사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형들의 미움과 시기 속에서 애굽에 노예로 팔려간 요셉의 삶을 통해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기근에서 구원하시게 됩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지극히 일상적인 삶의 사건들 속에서도 주님의 위대한 구원의 역사를 끊임없이 진행하고 계십니다. 한 번 더 따라해 보실 까요? “눈에 보이지 않아도, 하나님은 여전히 일하고 계십니다.”
로마서 8장 28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롬 8:28)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 곧 하나님의 뜻대로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에게는, 모든 일이 서로 협력해서 선을 이룬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조금 있으면 민족 고유의 명절, 설날입니다. 어린 시절 명절이 되어 시골에 계신 할아버지 할머니 댁에 내려가던 날을 떠올려 봅니다. 한참 자동차를 타고 할머니 댁에 도착할 때 즈음 되면 사방의 풍경이 어느 새 논밭으로 바뀌어 있습니다. 이 때 자동차의 창문을 열면 시골 특유의 냄새를 맡을 수 있습니다. 특히 할머니가 살고 계신 인적이 드문 시골 마을에는 소를 키우는 축사들이 많아서 구수한 냄새가 코를 더욱 자극했습니다. 어린 시절 자동차 뒤에 앉아 킥킥대며 “으음! 고향의 냄새!”하고 웃던 때가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 사실 이 냄새의 정체는 밭에 뿌린 거름 냄새입니다. 식물이 잘 자라나기 위해서는 햇빛도 중요하고 강수량도 중요하지만 영양분을 공급받는 것도 중요합니다. 비록 코를 찌르는 듯한 거름 냄새로 때로는 인상도 찌푸려 질 때도 있으나, 작물이 잘 자라도록 필요한 영양분을 공급해주는 거름의 순기능을 떠올려 보면, 그 냄새가 정겨운 고향의 냄새로 느껴지기도 합니다. 거름이 무엇입니까? 식물이 잘 자라도록 땅을 기름지게 하도록 하는 똥, 오줌, 썩은 동식물, 남은 음식물 쓰레기 같은 것들입니다. 가까이 가서 보면 냄새가 역겹고 인상이 찌푸려집니다. 그러나 그와 같이 아무런 쓸모 없어 보이는 거름도 농부 아저씨가 잘 사용하기만 하면, 작물이 잘 자라 많은 열매 맺도록 하는데 비료로 쓰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우리들의 일상 속 일어나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상처와 아픔까지도 놀랍게 사용하심으로써 결국에는 아름다운 인생의 열매 맺도록 도와주십니다.
요셉은 형들에게 배신당했습니다. 다른 이도 아니고 가족에게 버림받았으니 얼마나 상처가 컸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요셉을 이 사건을 통하여 훗날 온 세상을 덮은 7년 대기근에서 야곱 가족을 먹여 살리셨습니다. 삶이 우리에게 돌을 던진다 해도, 하나님은 주님의 품 안에 우리를 보호하시고, 마침내 우리 삶에 아름다운 꽃이 피어나도록 역사하십니다. 혹시 지금 여러분의 삶 속에서 겪고 있는 갈등은 무엇입니까? 사람에게 받은 상처 때문에 힘들어 하고 계시지는 않습니까? 하나님은 우리 삶의 모든 순간들 가운데 역사하고 계시며, 선하신 하나님은 우리 삶 속에 일어나는 고통과 아픔들을 통해서도 우리 삶이 아름답게 꽃피우고 열매 맺도록 사용하십니다. 농부가 더럽고 냄새나는 비료를 통해 오히려 더욱 아름다운 꽃이 피고 달콤한 열매를 맺게 하듯이, 힘들고 아프고 눈물나는 우리 인생 속 상처들을 통해 선하신 하나님께서 우리 삶 가운데 아름다운 열매를 맺으실 것을 신뢰하며 살아갈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 곧 하나님의 뜻대로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에게는, 모든 일이 서로 협력해서 선을 이루어집니다. 눈에 보이지 않아도, 하나님은 여전히 일하고 계십니다. (Even if we cannot see it, God is still at work.)

2. 시기와 미움으로부터 마음을 지키십시오.
요셉의 형들의 마음에는 시기심과 미움이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로 인해 형들은 자신들의 피붙이인 요셉을 살해하려는 마음까지 먹었고, 실제로 그 계획을 실행하기에까지 이르렀습니다. 창세기 37장 18-20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창 37:18) 요셉이 그들에게 가까이 오기 전에 그들이 요셉을 멀리서 보고 죽이기를 꾀하여 (창 37:19) 서로 이르되 꿈 꾸는 자가 오는도다 (창 37:20) 자, 그를 죽여 한 구덩이에 던지고 우리가 말하기를 악한 짐승이 그를 잡아먹었다 하자 그의 꿈이 어떻게 되는지를 우리가 볼 것이니라 하는지라” 형들은 아버지의 심부름을 받고 자기들을 감시하기 위해 찾아온 요셉을 구덩이에 빠트렸습니다. 그들은 요셉이 거기에서 굶어 죽기를 바랬습니다. 요셉의 형들은 시기와 미움을 다스리지 못했고, 결국 질투의 뿌리는 살인이라는 열매를 맺으려던 찰나에 이르렀습니다. 만일 우리 삶이 시기와 질투를 따라간다면 우리들의 삶은 파멸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들에게 시기와 미움을 따라 살아가지 않을 것을 반복해서 경고하고 있습니다. 잠언 14장 30절 말씀을 봅시다. “(잠언 14:30) [새번역성경 번역] 마음이 평안하면 몸에 생기가 도나, 질투를 하면 뼈까지 썩는다.” 질투에 사로 잡힌 사람은 그의 영혼이 몹시 괴로워집니다. 질투는 우리 마음 속 평안함을 잃게 만들고, 시기는 뼈가 썩어 들어가는 것처럼 우리 마음에 큰 고통을 가져다 줍니다. 타인을 향한 미움은 상대방에게 괴로움을 줄 뿐만 아니라, 타인을 미워하고 있는 자기 자신에게도 치명적인 결과를 가지고 옵니다. 시기심과 질투심이 이끄는 대로 살아가는 것은 망하는 지름길입니다. 야고보서 3장 16절을 봅시다. “(약 3:16) [우리말성경 번역] 시기심과 야심이 있는 곳에 혼란과 온갖 악한 행위가 있습니다.” 시기와 질투가 있는 곳은 그곳이 가정이든지 심지어 하나님의 이름으로 모인 교회일지라도 어디든지 평화가 깨뜨려지고 다툼이 일어납니다. 그 결과 시기와 질투에 사로잡힌 사람이 있는 공동체는 무질서와 파멸로 나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시기심은 매우 치명적인 독과 같습니다. 시기심은 상대방을 죽일 뿐만 아니라 그 마음을 품고 있는 사람도 함께 죽이는 독입니다.
소셜 미디어 공간은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시기심와 질투를 불러 일으키고 있습니다. 지난 2015년도, 미국 켈리포니아의 클레어몬트멕케나 대학교 심리학과에서 진행한 설문조사에 의하면 소셜 미디어를 하는 남성은 74.1% 여성은 79,4%가 질투심을 느낀다고 대답했습니다. 소셜 미디어를 하는 남녀 모두 10명 중 7명 이상이 질투심을 느낀다고 한 것이죠. 이 설문조사에서 흥미로운 사실은 사람들이 질투심이라는 감정을 느끼는 대상은 자신과 동일한 성별과 비슷한 연령대였다는 사실입니다. 질투를 한 사람과의 관계를 조사해 보았더니 지인이 17.6%, 일반친구들 18.3%, 나와 가장 친한 친구에게 질투를 느꼈다가 21.4%로 가장 많았습니다. 가장 많은 시기심의 원인은 크게 두 가지로 나왔는데 ‘재정적인 요소’와 ‘신체적 매력’으로 확인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연구 결과를 종합해 보면, 사람은 자신과 매우 친한 친구나 가까운 지인이 자신보다 훨씬 경제적으로 잘 살거나 건강하고 즐거운 인생을 살고 있다고 생각해 우울한 감정이 찾아오고, 그것이 시기심과 질투심으로 연결된다는 것입니다. 질투심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보편적인 감정입니다. 그러나 시기와 질투에 사로잡혀 누군가를 미워하게 되면 그것이 상대방과 자신 모두에게 해롭게 작용하기 시작합니다.
시기와 질투라는 감정을 보면, 그 안에는 “하나님께서 저 사람에게는 주셨는데 왜 나에게는 주지 않으셨는가?”하는 분노와 원망의 감정이 숨어 있습니다. 그래서 시기심과 질투심은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를 단절시키는 치명적인 죄가 되기도 합니다. 사실 시기와 질투의 근원에는 ‘교만’이라는 죄가 숨어 있습니다. “저 사람은 뭐가 잘나서 저렇게 내가 갖고 있지 않은 것을 누리고 있는가? 사실 내가 저 사람보다 더 나은 것을 누릴 자격이 있지 않은가? 그런데 현실에서는 그렇게 하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나는 이 현실을 받아들일 수가 없다! 나는 응당 지금 이 삶보다 더 나은 삶을 살아갈 충분한 자격이 있는 존재다!” 이처럼 시기와 질투는 교만함을 뿌리에 두고 있습니다. 교만은 하나님께서 가장 싫어하시는 죄로 알려져 있으며, 교만이야 말로 사람의 영혼을 반드시 파멸로 이끄는 죄입니다. 따라서 시기와 질투는 우리가 그냥 웃어 넘길 죄악이 아닙니다. 시기와 질투는 미움과 다툼을 불러 일으키고, 결국에는 살인으로까지 이어지게 만듭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시기심과 미움으로부터 우리의 마음을 어떻게 지킬 수 있을까요? 먼저 자신의 마음 속을 정직하게 들여다보십시오. ‘혹시 내 안에 다른 사람을 향한 시기와 질투가 있는가?’, ‘요즘 가정에서, 직장에서, 교회에서 내가 미워하고 있는 사람이 있는가?’ 우리가 시기와 미움로부터 우리 마음을 지키기 위해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가짐을 따라가야 합니다. 빌립보서 2장 3-5절 말씀입니다. “(빌 2:3) [우리말성경 번역] 무엇을 하든지 이기심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서로 겸손한 마음으로 다른 사람들을 자기보다 낫게 여기십시오. (빌 2:4) [우리말성경 번역] 여러분은 각자 자기 자신의 일을 돌아볼 뿐더러 다른 사람의 일도 돌아보십시오. (빌 2:5) [우리말성경 번역] 여러분 안에 이 마음을 품으십시오. 이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던 마음이기도 합니다.” 3절 보십시오. 다른 사람보다 괜찮은 사람이고 잘 살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 위하여 거짓으로 꾸미는 껍데기 뿐인 삶을 중단하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도리어 다른 사람들이 나보다 더 가치 있고 중요한 존재인 것처럼 대하며 살아가라고 말씀하십니다. 4절은 우리가 개인적인 일들에만 몰두하고 살지 말고, 상대방의 삶에도 관심을 갖고 살라고 말씀하십니다. 마지막으로 5절에 우리 안에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으라고 권면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셨으나, 우리들을 사랑하사 우리를 구원하기 위하여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자기를 낮추시고 십자가에 달려 죽기까지 하셨습니다. 이것이 우리를 사랑하신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참 된 겸손입니다. 성경은 우리가 예수님의 삶의 발자취를 따라 한 사람 한 사람을 소중하게 여기고, 그들의 삶에 깊은 관심을 갖고 돌봐 주며 나 자신보다 남을 위해 살아가는 겸손한 삶을 살아갈 것을 권면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의 겸손한 마음이었습니다.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낮추신 예수님의 겸손을 추구하십시오. 예수님과 같이 겸손하게 살아가십시오. 그것 만이 불타오르는 시기와 미움을 극복하고, 풍성한 사랑으로 살아가는 유일한 길입니다.
이 세상에 완벽한 사람은 없습니다. 따라서 불완전한 죄인들로 구성된 가족도 완벽할 수 없습니다. 야곱의 가족을 보십시오. 아버지 야곱은 요셉만 편애했습니다. 요셉은 그런 아버지의 사랑을 누리며, 형들의 잘못을 감싸주지 않고 오히려 고발했습니다. 요셉의 형들은 동생을 시기하고 질투하여 그를 죽이려고까지 했습니다. 이처럼 이 세상에 완벽한 가정은 없습니다. 겉으로 볼 때는 아무런 고민이나 문제가 없어 보이는 가족이 있다면, 그 집에 가서 한 달만 함께 살아보십시오. “아, 이 가정도 내가 모르는 아픔이 있었구나…”하고 그 가정만의 고민들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세상에 완벽한 교회는 없습니다. 불완전한 죄인들로 구성된 교회 역시 완벽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서로의 연약함을 보듬어 가며 살아야 합니다. 서로의 연약함을 용납하고, 서로의 실수와 잘못을 용서해주며 살아가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살아가는 공동체의 특징입니다.

결론. 보이지 않아도 일하고 계시는 하나님
성경 속 요셉의 이야기는 아주 유명합니다. 이 이야기는 주일학교 때부터 단골로 등장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요셉의 이야기하면 채색옷 이야기, 꿈 이야기, 동생을 노예로 팔아 넘긴 형들에 대한 이야기로 기억합니다. 그러나 요셉의 이야기 속 흐르고 있는 주요 메시지는 잘 기억하지 못합니다. 한 번 더 따라해볼까요? “눈에 보이지 않아도, 하나님은 여전히 일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보지 못하고, 깨닫지 못해도 하나님은 여전히 일하고 계십니다. 요셉의 이야기는 여태까지 창세기에서 나온 다른 이야기들과 큰 차이가 있습니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의 이야기를 보면 이 세사람은 하나님과 주고받는 대화 속에서 하나님의 언약을 신뢰하고 그를 따르는 이야기가 주를 이루고 있습니다. 이에 반해 요셉의 이야기를 보면 요셉의 이야기를 보면 요셉이 하나님과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 단 한 번도 등장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셉은 그의 삶 속에서 역사하고 계신 여호와 하나님을 항상 인정하며 살았습니다. 요셉의 삶은 눈에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과 동행한 삶입니다. 요셉은 언제 어디서나 그와 함께하고 계시는 하나님을 신뢰하며 살았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어떤 상황에서도 우리와 함께하고 계신 하나님을 계속해서 신뢰하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뚜렷하게 삶의 미래를 볼 수 없는 고통의 터널을 지나가고 있는 그 순간에도 여전히 일하고 계십니다. 언제 어디서나 주님은 우리와 함께하고 계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