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114 말씀을 믿은 왕의 신하 (요한복음 4장 46-54절)


사마리아 사람들의 요청으로 예수님은 수가 성에서 이틀간 그곳에 머무십니다. 그후 예수님은 그곳을 떠나 갈릴리로 가나로 가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갈릴리에 머물고 계시다는 소식을 듣고, 가버나움에 사는 한 왕의 신하가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왕의 신하라는 것은 이 사람이 당시 사회에서 높은 권력과 많은 재력을 가진 사람이었음을 말해 줍니다. 고위 관직에 부유하고, 부리는 하인들도 많았을 것입니다. 한 마디로 부족함 없는 인생을 살고 있는 사람이지요. 도대체 이 사람이 뭐가 아쉬워서 예수님을 찾아왔을까요? 46절 말씀을 봅시다. “(4:46) 예수께서 다시 갈릴리 가나에 이르시니 전에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곳이라 왕의 신하가 있어 그의 아들이 가버나움에서 병들었더니” 왜 인생의 부족함이 없을 왕의 신하가 직접 자기 두 발로 예수님을 찾아왔습니까? 그의 사랑하는 아들이 병들었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배부르고 등 따뜻하면 하나님을 잘 찾아오지 않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손으로 해결할 수 없는 인생의 고난과 문제 혹은 질병이 찾아올 때 인간은 하나님을 간절히 찾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일까요? 때로는 하나님께서 선한 목적을 가지고 인간의 삶에 고난과 시험을 허락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들이 두 손들고 하나님을 찾아오도록 만드십니다. 오늘 본문 속 왕의 신하가 그러합니다. 그는 풍요로운 삶을 사는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만날 필요도 이유도 없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사랑하는 아들이 병들었습니다. 그 어떤 의사도, 그 어떤 약으로도 고칠 수 없었습니다. 게다가 이 병은 그 아들을 죽음으로 내모는 심각한 병이었습니다. 아들은 병에 걸려 사경을 헤매고 있었고, 그의 아버지는 자신이 가진 권력, 재력 모든 것을 동원하여 아들을 살려 보려고 했습니다만, 아무것도 소용이 없었습니다.
이전에는 돈만 있으면, 힘만 있으면 행복할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아들이 아프고 난 후에야, 이 세상에는 돈으로도, 권력으로도, 인맥으로도 해결할 수 없는 문제들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아들의 몸은 하루하루 지나갈수록 점점 약해져 가고, 죽음의 그림자가 다가옵니다. 온갖 정성을 기울여 고치려 해도 그의 아들에게서 회복의 기미가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나병환자를 고치시고, 중풍병자를 고치신 예수님께서 갈릴리 지역에 다시 오셨다는 소문을 듣게 되었습니다. 46절을 보면 예수님은 현재 갈릴리 가나에 계십니다. 이는 전에 예수님께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곳입니다. 이 가나 동네 사람들은 이미 예수님께서 평범한 사람이 아님을 알고 있었습니다. 또한 이 때 즈음 갈릴리 지역이 이미 기적을 일으키시는 예수님에 대한 소문이 퍼져 있었습니다. 아들이 죽을 지경에 이르게 되었는데, 아버지 입장에서 뭔들 못하겠습니까? 아들을 살릴 수만 있다면 거센 강물이라도 건널 것이고, 높은 태산이라도 올라가지 않겠습니까? 사방팔방 다 알아봐도 고치지 못한 병이니,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예수님이 계신 곳을 찾아갔던 것이죠. 예수님을 만난 왕의 신하의 간절한 목소리를 들어봅시다. 47절입니다. “(4:47) 그가 예수께서 유대로부터 갈릴리로 오셨다는 것을 듣고 가서 청하되 내려오셔서 내 아들의 병을 고쳐 주소서 하니 그가 거의 죽게 되었음이라” 왕의 신하가 예수님께 무어라 말했습니까? “예수님 제발 가버나움으로 내려오셔서, 아들을 고쳐 주십시오” 우리는 여기서 왕의 신하의 생각을 읽을 수 있습니다. 그는 예수께서 자기 아들이 있는 병상까지 직접 내려오셔서 자기 아들의 이마에 손을 대시고 그 자리에서 그를 위해 기도하셔야만 치유의 기적이 일어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죽어가는 아들을 살려 달라는 아버지의 요청이니 얼마나 간절한 목소리였겠습니까? 눈시울이 붉어진 상태로 울먹이며 예수님께 “도와달라”고 “제발 나와 함께 가버나움으로 같이 가달라고” 애원하지 않았을까요? 그러나 이와 같은 간곡한 호소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은 어떠했습니까? 48절입니다. “(4:48)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표적과 기사를 보지 못하면 도무지 믿지 아니하리라” 여기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너희’는 예수님 주변에서 어떤 이적을 일으키시나 구경하려고 따라다니는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이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믿지 못했고, 오직 초자연적인 이적을 보여주기만을 원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사람들의 믿음 없음을 책망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따라다니는 구경꾼들은 왕의 신하가 그의 아들이 아프다고 하는 소식을 예수님께 전해드렸을 때, ‘과연 예수님께서 기적을 일으키실까?’에만 초점이 맞춰져 있었습니다. 한 시가 급한 왕의 신하는 또 한 번 예수님께 요청합니다. 49절입니다. “(4:49) 신하가 이르되 주여 내 아이가 죽기 전에 내려오소서” 집에서 죽어가는 아들의 숨이 혹 넘어가는 것은 아닌가 하여 왕의 신하가 다급한 목소리로 간절하게 요청했습니다. 자, 이 때 예수님의 반응이 무엇이었습니까? 왕의 신하의 간구대로 그의 아들이 아파 누운 곳으로 내려 가셨습니까?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봅시다. 50절을 보십시오. “네 아들이 살아 있다…!”하고 말씀으로만 선포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왕의 신하와 함께 그의 아들이 병상에 누워 있는 가버나움으로 내려가셔서, 그 병든 아들의 이마에 손을 얹으시고 안수하여 기도하실 수도 있으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다만 왕의 신하의 아들이 살아있다는 치유의 말씀을 선언하셨습니다. 오늘 이 본문은 우리에게 매우 중요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쳐 주고 계십니까? 기적은 눈에 보이는 가시적인 방법 곧 ‘예수님이 가버나움에 가서 그의 병든 몸에 손을 얹어야지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시공간을 뛰어넘어 주님의 말씀을 믿음으로 반응하는 자의 삶에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는 것임을 가르치고 계신 것입니다. 지금 우리 눈 앞에 예수님이 보이지 않습니다. 멀리 계시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님께 기도로 간구할 때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면 그대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병은 치유되고, 문제는 해결되고, 굳게 닫힌 문이 열리게 됩니다.
왕의 신하는 말씀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일어나는 놀라운 하나님의 역사를 선포하신 주님께 부응하는 성숙함으로 반응하였습니다. 다시 50절을 보십시오. “그 사람이 예수의 하신 말씀을 믿고 가더니…” 왕의 신하는 죽어가는 아들의 병이 다 나았다는 믿음의 근거로 주님의 말씀을 붙들었습니다. 이처럼 우리들도 하나님의 말씀을 믿음으로 붙들 때 우리 삶에 역사는 일어날 것입니다.
우리는 누구에게나 하나님께 기도하는 제목이 있습니다. 그리고 기도의 응답에 있어서 내가 정한 시간과 방법으로 하나님이 이루어 주시기를 바라는 마음도 있습니다. 그런데 정작 하나님께서 우리가 생각하지 않은 다른 시간, 다른 방법으로 이루어 주시겠다고 하실 때가 더 많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주님의 때가 가장 지혜롭고, 주님의 방법이 가장 선하다는 사실을 믿음으로 고백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왕의 신하의 소원은 당장 예수님이 내려오셔서 거창하게 손을 얹고 기도해 주길 바랐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가 원하는 방법을 거절하시고 주님의 방법으로“네 아들이 살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생각하지 못한 시간, 우리가 예상하지 않은 방법으로도 응답하십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간구하면 반드시 응답 받습니다.
51-52절 말씀을 읽겠습니다. “(4:51) 내려가는 길에서 그 종들이 오다가 만나서 아이가 살아 있다 하거늘 (4:52) 그 낫기 시작한 때를 물은즉 어제 일곱 시에 열기가 떨어졌나이다 하는지라” 왕의 신하는 아들의 병을 고치러 나왔던 연약한 믿음이 채워짐을 받고 집에 내려갑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위에서 허겁지겁 올라오는 하인들을 만났습니다. 하인들이 말하기를, “주인님, 아드님이 살아나셨습니다.”하고 보고합니다. 죽을 줄만 알았던 아들의 병이 다 나았으니 이 아버지가 얼마나 기뻤을까요? 그는 기뻐 뛸 듯 웃으면서 “그때가 몇 시더냐?”하고 물었습니다. “어제 칠 시입니다.”생각해 보니 그 때가 바로 예수님께서 “가라, 네 아들이 살았다.”하실 때의 시간이었습니다. 53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4:53) 그의 아버지가 예수께서 네 아들이 살아 있다 말씀하신 그 때인 줄 알고 자기와 그 온 집안이 다 믿으니라” 예수님이 말씀하시고, 왕의 신하가 주님의 말씀을 믿으니 그의 죽어가는 아들이 치유 받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그가 구하지 않은 은혜도 일어났습니다. 53절 후반절을 주목해 보십시오. “자기와 그 온 집이 다 믿으니라” 집에 도착한 왕의 신하는 이 사실을 온 가족을 모아놓고 전했을 것이고 온 집이 다 믿게 되었다고 성경은 전합니다. 실로 놀라운 일이 일어난 것이죠.
예수님께서 “네 아들이 살아났다.”고 말씀하셨을 때, 아들의 병이 나은 것은 신하의 눈에는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의 아들이 나았다고 선포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믿었습니다. 믿고서 가버나움으로 가는 중에 말씀대로 되어진 것을 확증 받게 됩니다. 저를 따라해봅시다 “순종이 먼저다.” 순종이 먼저요, 그 뒤에 역사가 따르는 신앙의 중요한 원리가 이 속에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먼저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십시오. 먼저 주님께 감사하십시오. 이것이 곧 믿음입니다. 말씀에 대한 믿음을 갖고 순종함으로써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를 체험하고, 주님의 크신 은혜와 축복을 누리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