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115 자비없는 자비의 집 (요한복음 5장 1-15절)

오늘 본문의 배경이 되는 곳은 ‘베데스다 연못 입니다. 이 장소는 성경에서 오늘 본문에 단 한 번 등장합니다. 베데스다 못은 제사를 드리기 위해 쓸 제물인 양을 사고 파는 시장인 양문 곁에 있었기에 ‘양의 연못’이라고 불리기도 합니다. 베데스다란 이름은 ‘자비의 집’이란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이름과는 다르게 오늘 이 베데스다 못에는 병자, 소경, 절뚝발이, 혈기 마른 자들이 누워 있었습니다. 마치 오늘날 종합병동을 보듯 수많은 환자들이 베데스다 연못 주변을 가득 메우고 있는 것이죠.
그 이유는 이 베데스다와 관련된 이야기가 하나 전해지고 있었기 때문 입니다. 그것은 이따금씩 이 연못에 천사가 내려와 못의 물을 동하게 하는데, 물이 파장이 일어날 때 가장 먼저 그 물에 들어가는 사람은 어떤 병에 걸렸든지 낫게 된다는 이야기였습니다. 왜 이런 전설과도 같은 이야기가 전해졌는가 학자들이 살펴보니, 이 못은 여러가지 질병 치유에 좋은 온천수 성분을 가지고 있는데, 이따금씩 간헐적으로 물이 솟아났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니 이런 다소 황당한 이야기에 기대를 걸고 여기에 모인 병자들은 어떤 사람들이었겠습니까? 단순히 감기처럼 별 것 아닌 병에 걸린 사람이 있을까요? 그 어떤 의사도, 그 어떤 약으로도 고칠 수 없는 병을 가지고 있는 죽음을 기다리고 있는 절망적인 환자들 입니다. 병을 고치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해 봤지만 결국 고치지 못한 좌절한 환자들이 모여 있습니다. 이처럼 다양한 환자들이 모여 있다 보니, 베데스다 곳곳에서는 신음소리, 끙끙 앓는 소리가 끊임없이 들렸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특별히 그 베데스다에 누워 있는 한 병자를 주목하고 있습니다. 5절에서 그는 ‘삼십팔 년 된 병자’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병을 앓고 있는지 38년 된 환자란 뜻 입니다. 우리가 이 사람의 질병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습니다만, 지금 그가 누워 있는 것으로 미루어 보았을 때 일상생활이 불가능한 상태의 중증 환자임을 추측해 볼 수 있습니다.
심각한 감기를 한 주만 앓아도 직장에 나가 일도 못하고 삶의 모든 리듬이 깨지기 마련인데, 이 사람은 무려 지난 38년 동안 병을 앓고 누워 있었으니, 그의 삶이 어떠 했겠습니까? 말 그대로 생지옥이 아니었을까요? 얼마나 그의 마음은 외롭고, 다른 사람들의 도움 없이는 일어나지도 못하고, 홀로 볼일도 보지 못하는 자신의 신세가 처량하게 느껴졌겠습니까?
그러니 이 사람의 유일한 소망이 하나 있다면 이 베데스다의 연못의 전설과도 같은 이야기를 믿는 것 뿐이었습니다. 1,2년도 아니고 38년이나 고쳐지지 않은 병이니, 그 자신도 나을 것이라 확신하기 힘들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푸라기도 잡는 심정으로 처절한 몸부림을 치며 이 자리에 나와 있는 것이죠. 그러나 더욱 절망적인 것은 아무리 천사가 내려와 물이 동하는 기적 같은 일이 벌어진다고 할지라도 그를 곁에서 도와줄 사람도 없습니다. 그는 다른 사람들이 먼저 그보다 물에 들어가는 것을 눈으로 바라보고 있어야 했을 뿐 입니다.
오늘 예수님은 바로 이 병자가 베데스다 연못가에 누워 있는 것을 주목하고 계셨습니다. 주님은 그가 지금 무엇 때문에 누워 있는지, 어떤 상황 가운데 놓여 있는지, 또한 누워 있는 그의 마음 상태가 어떠한지 정확하게 꿰뚫어 보고 계셨고, 그의 마음을 이해하고 계셨습니다. 누워 있는 병자에게 다가가신 예수님은 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 저는 이 본문을 읽으며 고개를 갸우뚱 하곤 했습니다. 아파서 죽어가는 사람에게 ‘낫고자 하느냐’라고 묻는 질문만큼 당연한 질문이 또 어디 있을까요?
그러나 주님은 고칠 수 없을 것 같은 병을 탓하며 절망 중에 빠져 있는 이 병자를 보며 가슴 아파하신 것이죠. 그리고 이 병자에게 ‘네가 낫고자 하느냐’하고 물어보심으로써 예수님의 사랑과 관심을 나타내고 계신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이런 마음을 알지 못했던 병자는 자신의 딱한 사정을 한탄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물이 동할 때 나를 못에 넣어 줄 사람이 없으니… 내가 어찌 낫겠습니까?” 어제 새벽에 우리가 살펴본 것처럼, 사람은 어떤 문제가 있으면 자기 나름대로 그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을 머리 속으로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때론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할 때도 매우 구체적으로 하나님께 문제 해결 방법까지 알려 드릴 때도 있습니다. “하나님, 이 문제가 해결되기 위해서는 이렇게 이렇게 되어야 합니다.” 물론 문제를 해결하는 데 관하여 우리 생각이 맞을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내가 가진 해결방식만 절대적이라고 생각하는 우리의 마음 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지혜와 능력을 뛰어넘으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상상하지 못한 방법으로 역사하십니다.
출애굽하여 광야로 나온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기들을 붙잡으로 온 애굽 군대를 보며 눈 앞에 홍해가 가로 막았을 때,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누가 하나님께서 감히 홍해를 반으로 가르실 것을 상상이나 해 봤겠습니까? 그리고 그 누가 하나님께서 그 동일한 물로 애굽 군대를 전멸 시킬 것이라 생각이나 해봤을까요? 하나님은 우리의 방법이 아니라 하나님의 방법대로 일하십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방법은 우리의 방법보다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탁월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골리앗 때문에 두려움에 떨고 있었을 때, 그 누가 소년 다윗이 던진 물멧돌에 거인이 쓰러질 줄 알았을까요? 먹을 것이 없는 광야에서 보리떡 다섯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5천명을 먹이실 줄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요? 주님의 방법은 우리의 생각과 우리의 지혜를 뛰어 넘습니다.
오늘 이 병자는 자신이 생각하는 방법대로 일이 이뤄질 기미가 없어 보이자, 절망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가 생각할 때는 물이 동할 때 제일 먼저 들어가는 것 밖에는 병이 고침 받는 다른 길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는 알지 못했습니다. 지금 그가 그토록 원하는 병 고침을 주실 수 있는 유일한 분이 지금 바로 자기 앞에 놔 있다는 것을…
오늘 이 베데스다의 병자 모습이 혹시 우리들의 모습은 아닙니까? 내 앞에 와 계신 능력의 하나님, 지혜의 하나님은 깨닫지 못한 채… 문제를 바라보며 나 홀로 전전긍긍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바둑을 둘 때 하수와 고수의 가장 큰 차이는 수가 보이냐 안 보이냐 입니다. 우리가 제아무리 인생의 고수라 자부한다고 하더라도, 사실 우리는 하나님과 비교하면 다 하수일 뿐 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야말로 인생 9단이시기 때문 입니다. 주님은 우리가 보지 못하는 길도 보십니다.
그래서 때로는 내가 볼 때는 이 길로 가는 것이 제일 좋은 길이라고 생각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더 큰 복을 주시기 위해서 다른 길로 우리의 삶을 이끄실 때가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나보다 지혜로우신 하나님, 나보다 탁월하신 능력을 가지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이 병자에게 말씀하십니다. “(요 5:8) 예수께서 가라사대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시니” 그 결과가 무엇입니까? 9절 입니다. “(요 5:9) 그 사람이 곧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가니라 이 날은 안식일이니…”
오늘 본문 속 병자는 평생 동안 자기가 가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다 시도해 봤을 것입니다. 그러나 정작 문제 해결은 자기가 한 번도 상상해 보지 못한 길에 있었습니다. 그가 그토록 찾아 헤매던 문제의 해결책은 바로 오늘 그를 찾아오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삶 역시 마찬가지 입니다. 무엇 때문에 그리 고심하고 계십니까? 무엇이 그렇게 염려가 되고 걱정이 되어 한숨을 짓고 계십니까? 우리 삶의 모든 문제의 해결은 주님 안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 나아가십시오. 예수님께 구하십시오. 우리가 구한 것보다 더욱 넘치도록 채워주실 우리 아버지 하나님께서 우리가 상상하지 못한 방법을 통해서 역사해 주시고 도와주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