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107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시리즈 [1] (고전 10:31)

서론. 존재 목적
어린 시절 문득 ‘이 세상에 먼지는 왜 있을까?’ 하는 엉뚱한 생각을 해본적이 있습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먼지는 쓸모가 없어 보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어린이용 과학 월간지를 읽다가 우연히 먼지에 대한 글을 읽게 되었습니다. 그 기사에는 이 세상에 먼지가 없으면 구름이 만들어지지 않고, 비가 내리는 데에는 먼지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습니다. 그제서야 무릎을 치며 알았습니다. “먼지가 소중한 것이구나?”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은 다 목적이 있습니다. 의자는 앉기 위해 존재하고, 숫가락은 음식을 먹을 때 사용하기 위해 존재합니다. 사람도 존재 목적이 있을까요? 있다면 과연 그 목적은 무엇일까요?

제1문
웨스트민스터 소요리 문답은 바로 이 질문과 이 질문에 대한 답으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소요리 문답 제1문을 함꼐 읽겠습니다.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은 무엇입니까?” 사람이 이 세상에 존재하는 가장 중요한 목적은 무엇일까요? 먼저 성경이 제시하는 해답을 보기 전에 우리 각자 스스로의 답을 한 번 생각해 봅시다. 이 질문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인생은 달라지게 될 것이기 때문이죠. 현 시대에 많은 사상가들과 철학자들은 인간이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목적과 의미가 따로 있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인간은 왜 존재하는가? 그 이유가 없다. 그렇다면 인생의 의미는 무엇인가? 없다. 이것이 이 시대의 대표적인 흐름입니다. 잠시 원자가 결합했다가 흩어지는 것이 인생이라고 보는 경향이 강합니다. 그러나 인간은 존재의 목적 없이 살 수 없습니다. 심지어 자신에게는 인생의 목적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가만히 들여다보면 무언가를 위해 살아갑니다. 그것이 자신의 행복추구이든 자기만족이든 성공이든 돈이든 건강이든 인간은 늘 무언가 내면에 목적을 정해 놓고 살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여러분은 무엇을 위해 살아가고 있습니까? 우리 삶의 제일 되는 목적은 무엇입니까? 이 세상에 사람이 존재하는 가장 중요한 목적은 무엇일까요? 성경은 이에 대해서 어떻게 이야기하고 있을까요? 사람이 존재하는 제일의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과 하나님을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인간의 제일 되는 목적은 두 가지로 ‘To glorify God’ and ‘to enjoy Him forever’ 입니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과 하나님을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1. 두 가지 마음가짐
장갑은 사람의 손에 넣어야 맞습니다. 신발에는 발을 넣어야 맞습니다. 장갑에 손을 넣거나 신발에 손을 넣고 다니는 것은 맞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장갑은 손의 형상을 닮아 만들어졌고, 신발은 발의 형상을 본 떠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장갑은 손에 맞고, 신발은 발에 맞습니다. 마찬가지로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Image of God)으로 창조된 피조물입니다. 그래서 다른 그 무엇도 사람의 마음을 채우려고 해도 채워지지가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우리의 영혼을 채우실 수 있습니다. 장갑에는 손이 들어가야 맞고, 신발에는 발이 들어가야 맞듯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인간은 오직 하나님만으로만 채울 수 있습니다. 그래서 본래 죄를 짓기 전 인간은 자기 중심이 아니라 하나님 중심으로 살아갔습니다. 아담의 모든 생각과 갈망은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 안에서 즐거워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니 아담은 기쁘고 행복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죄가 이 세상에 들어온 이후 모든 이야기가 뒤집혀집니다. 죄로 인해 타락한 인간은 하나님 중심으로 살아가지 아니하고 자기 중심으로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장갑에 손이 아니라 발을 넣으려는 시도이고, 신발에 발이 아니라 손을 넣으려는 시도입니다. 겉으로는 어느 정도 들어가는 것처럼 보여도, 사실 불편하고 불만족스럽습니다. 장갑에 발을 넣으려고 하면 할수록 몸이 고통스러운 것처럼, 하나님 외에 다른 것으로 우리 영혼을 채우면 채울수록 우리 영혼은 공허함과 외로움의 고통 속에 던져지게 됩니다. 사람이 목이 마를 때 생수를 마셔야 갈증이 해소되지, 바닷물을 마시면 더욱 목이 갈증으로 타오르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 중심으로 살아가는 것만이 인간이 이 세상을 가장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는 길입니다.
어떤 분들은 ‘하나님 중심’의 삶 하면, “그럼 하루 종일 기도만 하고, 성경만 봐야 하나”하고 생각하는데, 기독교에서 말하는 하나님 중심의 삶은 그런 모습이 아닙니다. 죄를 짓기 전 에덴 동산에서의 아담의 모습을 한 번 생각해 봅시다. 아담의 직업이 무엇입니까? 에덴 동산 관리하는 일입니다. 에덴 동산에 사는 동물들 이름 짓고, 에덴 동산 돌아다니며,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며 살았습니다. 겉으로는 하나님과 아무런 상관없는 일 같지만, 아담의 중심에는 언제나 하나님이 있었습니다. 즉 아담이 하는 모든 일은 하나님을 섬기기 위한 것이었으며, 아담은 그 가운데 인간이 누릴 수 있는 가장 큰 기쁨과 만족을 누리며 살았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오늘날 우리가 하나님 중심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24시간 교회에 와서 예배만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일하고, 교육받고, 공부하고, 결혼하고, 자식 낳고, 집 사고, 테니스 치고… 이런 평범한 일상을 하지만, 그 모든 활동들을 통해 하나님을 섬기고 그 삶 속에서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 중심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 중심으로 살아가지 않는 사람은 자연스럽게 자신을 위해서 살아갑니다. 그런데 그 중에는 자기 스스로를 가리켜 자신을 위해 살아가지 아니하고 남을 위해 살아간다는 이타주의적인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나라를 위해 살아가는 애국자, 인류의 더 나은 복지를 위해 살아가는 박애주의자, 그리고 더 나은 사상과 이념을 위해 희생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자기 스스로를 가리켜 자신 중심이 아니라 타인 중심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사실 이 경우데도 동일하게 자기 중심적인 삶입니다. 왜냐하면 비록 겉으로는 희생적인 모습이 있다 하더라도 그 역시 궁극적으로 그 활동들을 통하여 본인의 기쁨과 유익을 추구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인간의 마음에는 오직 두 가지 마음가짐만 존재합니다. ‘하나님 중심’이거나 ‘사람 중심’입니다. 하나님 중심으로 살아가는 사람은 삶의 모든 활동들이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을 기뻐하는 가운데 이뤄집니다. 자기 중심으로 살아가는 자는 삶의 모든 활동들이 자기 자신을 섬기고 자신이 기뻐하는 가운데 이뤄집니다.
소요리 문답 제1문은 사람이 제일 되는 존재 목적은 자기 중심이 아니라 하나님 중심으로 살아가는데 있음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이 존재합니다. 예수님은 여지껏 아무리 끊어버리려 해도 도저히 끊어낼 수 없었던 자기 중심적인 삶의 저주를 끊어내도록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 들어간 사람은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이전과 전혀 다른 존재가 됩니다. 이전에는 자기 중심으로 살았습니다. 그런데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자기 중심주의라는 죄악으로부터 건짐 받아 하나님 중심으로 살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성경적으로 말하면,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고 구원 받아 그의 영혼이 새롭게 거듭 태어난 그리스도인만이 하나님 중심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또한 그런 의미에서 오직 그리스도인만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수 있고, 하나님을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여기 있는 우리는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예수가 나의 죄를 위한 죽음이었음을 고백하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시고 다시 오실 예수를 우리의 구주로 고백하는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입니다. 우리는 이제 자기 중심에서 벗어나 하나님 중심으로 살아갈 수 있는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사람이 이 세상에 존재하는 제일 목적을 따라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과 하나님을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2.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
그렇다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한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한다’는 한국 말에는 우리가 ‘하나님을 영광스럽게 만든다’는 리앙스가 담겨 있습니다. 예를 들면, 마치 하나님의 영광이 98-99%까지 밖에 도달하지 못했기 때문에 우리가 모자란 나머지 1-2%의 하나님의 영광을 더해드리는 것처럼 생각됩니다. 이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하나님은 이미 영광스러우십니다. 우리가 그 분의 영광에 채워드릴 부족함은 없습니다. 만일 하나님의 영광에 우리가 더 채워 드려야 하는 면이 남아 있다면 하나님은 완벽하신 분이 아닙니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이 완벽하신 분으로 설명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영광을 돌리지 않아도 이미 더 이상 더할 수 없을 영광으로 충만하십니다.
또 어떤 분들은 ‘하나님의 영광은 100%로 이미 충분하지만, 우리가 거기에 플러스 알파로 더해드리는 것 아닌가?’하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역시 하나님의 영광이 현재의 상태에서 더 플러스 될 수 있다는 생각 자체가 하나님의 영광이 더 나아질 수 있는 부족함의 가능성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결국 이 두 생각 모두 틀렸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부족하기 때문에 우리가 온전해지도록 더 드릴 수 있는 것도 아니고, 하나님의 영광은 이미 충만하지만 우리가 보너스로 하나님께 더해 드릴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존재 없이도 이미 완전하신 영광으로 존재하십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한다는 말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우리는 자주 신앙생활의 목적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라고 말은 합니다만, 정작 그 말의 구체적인 의미는 이해하지 못하고 어렴풋이 이해한 상태로 습관적으로 사용할 때가 많습니다. 다시 강조합니다만, 우리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고 해서 하나님의 영광이 처음보다 증가하거나 많아진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한다는 말은, 우리가 이미 온 우주 가운데 충만하시고 완전하신 하나님의 영광을 우리의 삶과 존재를 통하여 반사한다는 뜻입니다.
시편 19편 1절 말씀을 함께 봅시다. “(시편 19:1)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의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 하늘은 노래를 부르거나 예배를 드리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높고 드넓은 푸르른 하늘을 보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게 됩니다. 왜냐하면 하늘 뿐만 아니라 이 세상의 모든 자연 만물이 하나님의 영광을 반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자연을 바라봄으로써 창조주의 손길을 느낄 수 있는 이유는 그 모든 것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연은 하나님의 영광을 반사하는 ‘거울’과도 같습니다. 우리가 자연이란 거울을 보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반사하는 것,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것, 그것이 바로 이 세상 만물이 존재하는 이유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경우에는 자연과 차이점이 있습니다. 하늘은 어느 순간에나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게 되어 있습니다. 자연에게는 선택의 감정과 의지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피조물들 가운데 유일하게 인간만이 자신의 의지를 가지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것인가 말 것인가를 선택할 수 있는 독특한 위치에 놓여 있습니다.
사실 이 세상을 보십시오. 이 세상을 살아가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거나 하나님을 기뻐하며 살아가지 아니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제가 이야기하고 있는 ‘인간의 제일가는 존재 목적’이 틀린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설령 이 세상에 단 한 사람이라도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려는 이가 없다 할지라도, 인간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지음 받은 피조물이란 사실은 여전히 변함이 없습니다. 심지어 성경은 하나님께서 구원받은 자들 뿐만 아니라 버림받은 자들도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존재가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요?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한다는 말은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만, 어떻게 구원받지 않은 자들, 즉 버림받은 자들의 삶이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낼 수 있을까요? 하나님은 구원받은 자들의 삶 속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와 자비를 나타내시고 예배를 받으심으로써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십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버림받은 자들, 곧 심판에 이를 자들의 삶 속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진노와 정의를 통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온 세상에 나타내십니다. 두 그룹 사이에 다른 것이 있다면 의지의 차이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이 기꺼이 자원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예배함으로써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지만, 버림받은 자들은 그들이 하나님을 혐오하고 싫어하고 하나님을 섬기려는 마음이 조금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들의 삶에 임하는 정의로우신 하나님의 심판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은 나타나게 됩니다. 우리와 같이 구원받은 자들의 축복은 우리는 기쁨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며 살아간다는 데 있습니다.

3. 제일 가는 목적
물론 우리가 24시간 예배만 드리는 것은 아닙니다. 교회에서 일주일 내내 사는 것도 아니고요. 구약성경 사무엘상에 등장하는 엘리와 그의 두 아들을 보십시오. 그들은 일주일 내내 하나님의 거룩한 성막에서 살았고, 그 누구보다 가장 많은 제사를 드리며 살았던 제사장들이나 그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반사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반대로 애굽의 노예로 팔려간 요셉을 보십시오. 그는 가장 천박하고 더러운 환경 속에서도 하나님의 영광을 반사하여 그의 삶 속에 계신 하나님을 나타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원받은 거듭난 그리스도인으로서, 새해에는 우리가 하나님 중심으로 살아갑시다. 우리가 어디에 있든지, 누구와 함께 있든지, 언제 어디서나 하나님을 영광을 반사하고, 하나님을 즐거워하며 살아가려고 할 때 우리들의 삶 가장 큰 기쁨과 만족과 행복으로 넘쳐날 것입니다. 그와 같은 기쁨이 우리 안에 충만하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