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107 실패를 이기는 믿음 (창세기 16장 1-6절, 17장 1-7절)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사라를 통하여 아들을 주시리라고 약속하신 지 10년이 지났습니다. 하염없이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사라는 자신에게 아기가 생기지 않는다는 사실로 인하여 점점 더 좌절하고 있었습니다. 이미 결론을 다 알고 성경을 읽는 우리들은 그녀가 믿음의 아들 이삭을 낳기까지 앞으로 약 15년을 더 버텨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본문 속 사라는 아무 사실도 모릅니다. 사라는 하나님의 약속이 이뤄질 것 같지 않아 보였습니다. 사라는 이미 경수가 끊어졌습니다. 그녀가 더 이상 아이를 가질 수 없는 몸이라는 사실을 그 누구보다 그녀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습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사라의 인내심은 바닥났습니다. 그녀는 믿음을 포기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질 것이라 믿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이런 사라의 마음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지금으로 따지면 과학적으로, 의학적으로 임신이 불가능한 상태가 된 것입니다. 병원에 가서 의사가 고개를 가로 저으며 불임이라고, 더 이상 아이를 가질 수 없다고 말해 준 상태다 다름 없습니다. 지난 10년 동안 아무런 임신 소식도 없었고, 게다가 이제 나이가 70대 중반입니다. 그러니 사라가 어찌 아이가 생길 것이라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본문 속 사라의 모습을 우리가 공감할 수 있는 이유는, 우리들에게도 이처럼 오래된 기도제목들이 하나 즈음은 다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래 기도했으나 응답 받지 못한 기도 제목들, 간절하게 기도했으나 아무런 변화가 없는 상황… 누구나 다 경험하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지난 10 년 넘게 아기를 임신하지 못함으로 좌절하고 있는 사라의 마음을 우리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사라는 하나님의 말씀이 이루어질 것이란 믿음을 완전히 포기하지는 않은 것 같아 보입니다. 그녀는 아브라함의 후손들에게 가나안 땅을 주시리라는 하나님의 말씀이 어떠한 방법으로든 성취될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 결과 사라가 택한 방법은 바로 그녀의 여종 애굽 사람 하갈을 통해 아브라함이 아기를 갖는 것이었습니다. 오늘날로 생각하면 대리모와 가까운 개념입니다. 하갈은 하인이었고, 주인 사라의 명령에 복종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1-2절 말씀을 봅시다. “(16:1) 아브람의 아내 사래는 출산하지 못하였고 그에게 한 여종이 있으니 애굽 사람이요 이름은 하갈이라 (16:2) 사래가 아브람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내 출산을 허락하지 아니하셨으니 원하건대 내 여종에게 들어가라 내가 혹 그로 말미암아 자녀를 얻을까 하노라 하매 아브람이 사래의 말을 들으니라” 사라는 하나님의 일하심을 더 이상 기다리지 못했습니다. 그녀는 불임의 문제를 어떻게든 자기 방식으로 해결하라고 했습니다. 결국 하갈은 아브라함의 아이를 임신하게 됩니다. 배가 커지면서 애굽 여종 하갈의 자신감도 커져갔습니다. 당시 메소포타미아 문화에서는 남편의 후계자를 제공한 여인은 비록 그가 첩이나 혹 두 번째 아내라 할지라도, 첫 번째 아내와 동등하게 간주 될 수 있었습니다. 후계자를 제공한 여인이 노예라면 자유를 얻게 되고, 유산도 얻을 수 있으며 혹 둘 다 얻기도 했습니다. 이런 사실을 잘 알고 있었던 하갈은 아브라함의 아기를 임신한 이후 그의 여주인 사라를 깔보고 업신여겼습니다.
살면서 가장 기분 나쁜 것 중 하나가 타인에게 무시 당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여종 하갈이 아브라함의 아기를 임신했다는 사실 때문에 자신을 여주인인 자신을 멸시하는 것을 느꼈을 때 사라 입장에서 얼마나 기분이 나빴겠습니까? 이 두 여자 사이의 긴장감과 적개심은 사라가 아브라함에게 화를 낼 정도로 고조 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갈은 사라의 여종이니 그녀가 여주인으로써 마음대로 그녀를 처분하라고 말하였습니다. 사라는 하갈을 학대했고, 결국 하갈은 사라를 피해 도망쳤습니다. 사라는 내키지는 않았으나, 자녀가 없는 현실을 어떻게든 해결해 보고자 자기 여종을 남편에게 주었습니다. 그러나 그녀가 택한 방법은 사라에게는 평생에 남는 후회가 되었습니다.
하갈의 임신 사건 이후 창세기는 곧장 13년 후의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창세기 16장과 17장은 한 페이지 밖에 안 되지만 그 한 페이지 안에 13년이란 긴 세월이 있습니다. 본문 속 아브라함의 나이 99세이고 사라는 89세입니다. 하나님께서 다시 아브라함을 찾아오셨습니다. 하나님은 약속을 잊지 않으셨습니다. 창세기 17장 4-5절 말씀을 봅시다. “(17:4) 보라 내 언약이 너와 함께 있으니 너는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될지라 (17:5) 이제 후로는 네 이름을 아브람이라 하지 아니하고 아브라함이라 하리니 이는 내가 너를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되게 함이니라” 여기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되리라는 표현이 2번 반복됩니다. 하나님께서는 무자한 99세의 노인 아브라함에게 찾아오셔서 그가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되게 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얼마나 황당합니까? 일흔 다섯에 처음 받은 이 약속 무려 지난 24년간 기다렸으나 사라의 뱃속에서 아기가 생긴 적이 없습니다. 게다가 이 두 부부는 백발의 노인이고, 사라는 아이를 낳을 수 있는 몸이 더 이상 아닙니다. 이 때 아브라함은 하갈이 낳은 아들 이스마엘이 자신의 후계자가 되리라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사라를 통해서 낳은 아들을 통해 하나님의 약속을 성취하실 것임을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15-16절을 봅시다. “(17:15) 하나님이 또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네 아내 사래는 이름을 사래라 하지 말고 사라라 하라 (17:16)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그가 네게 아들을 낳아 주게 하며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그를 여러 민족의 어머니가 되게 하리니 민족의 여러 왕이 그에게서 나리라” 도대체 그 누가 이런 상황 속에서 자녀를 낳을 수 있으리라 과연 믿을 수 있겠단 말입니까? 아브라함과 사라도 이미 자식 갖기를 거의 포기한 상태나 다름 없습니다. 17-18절 보십시오. “(17:17) 아브라함이 엎드려 웃으며 마음속으로 이르되 백 세 된 사람이 어찌 자식을 낳을까 사라는 구십 세니 어찌 출산하리요 하고 (17:18) 아브라함이 이에 하나님께 아뢰되 이스마엘이나 하나님 앞에 살기를 원하나이다” 아브라함이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 웃으면서 혼잣말을 하고 있는 것이죠. “나이 백 살 된 남자가 아들을 낳는다고? 또 아흔 살이나 되는 사라가 아이를 낳을 수 있을까?” 그리고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말했습니다. “주님, 괜찮아요. 이스마엘이나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을 받으면서 살기를 바랍니다.” 아브라함의 목소리에 실린 자조 섞인 웃음이 느껴지십니까? “내가 이 나이에 무슨 아이를… 하나님도 참… 사라도 나이가 이미 아흔인데…” 본문을 읽는 우리들도 아브라함 편이고 사라 편이 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렇게 반응할 수밖에 없는 아브라함의 현실과 그의 마음이 너무나도 이해되기 때문입니다. 어찌 99세 할아버지가 경수가 끊긴 89세 할머니와 자식을 낳는단 말입니까? 얼마나 황당한 이야기입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이 모든 일을 말씀하시기 전, 아브라함에게 자신이 어떤 분이신지 확실하게 못 박으시며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오늘 이 새벽에 우리가 집중 해서 바라보아야 할 것도 바로 이 대목입니다. 창세기 17장 1절을 봅시다. “(17:1) 아브람이 구십구 세 때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1절 말씀을 유심히 보십시오. 여기서 “아브라함이 구십구 세 때에”라는 말은 다른 말로 바꾸면 “아이를 갖기에는 이미 너무 늦어버린 때에”란 말입니다. 그런데 그 때 누가 나타나셨어요? 하나님께서 무엇이라고 스스로를 소개하고 계십니까?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이것을 히브리어로 엘 샤다이라고 합니다. 천지를 창조하신 온 우주만물의 창조주의 능력입니다. 아니 무에서 유를 창조하신 하나님이, 흙으로부터 인간을 만드신 분이 어찌 아기를 못 만들어 주시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그의 아내 사라를 통해 하실 일을 말씀하시며, 하나님이 곧 전능하신 하나님, ‘엘 샤다이’이심을 나타내셨습니다. 바로 이 창조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면 99세 할아버지와 경수가 끊어진 할머니라도 아이를 갖는 것이 가능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과 사라가 주어진 불가능해 보이는 상황과 환경을 바라볼 것이 아니라, 그들 가운데 역사하고 계시는, 그들에게 말씀하고 계시는 이가 엘 샤다이, 전능하신 하나님이심을 믿음으로 바라볼 것을 요구하고 계십니다. 오늘날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도 이와 같은 믿음 보기를 원하십니다. 믿음은 무엇입니까?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는 것. 소망할 수 없는 중에 소망하는 것. 그것이 곧 믿음입니다. 우리가 그런 믿음을 가질 수 있는 근거가 어디에 있습니까? 우리의 믿음의 근거는 오직 엘 샤다이, 전능하신 하나님으로부터 나옵니다. 창조주 하나님, 전능하신 우리 주님께서 우리의 참 소망되십니다.
결국 하나님은 주님의 약속대로 아브라함과 사라의 부부의 품에 아기를 안겨 주셨습니다. 아기 이삭을 가슴에 안던 그 날 사라는 얼마나 많은 눈물을 흘렸을까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모두는 때때로 실패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결코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사라에게 찾아오셔서 그녀가 가진 실패의 확신을 용서의 확신으로 바꾸어 주셨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우리들의 실패를 용서하시고 우리가 실패한 후에도 확신을 가지고 다시 하나님 앞에서 살 수 있는 길로 다시 돌아가게 하십니다. 바로 이와 같은 주님을 향한 큰 믿음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는 저와 여러분 되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