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1126 차별과 야망 (사사기 11장 1-11절)

사사기에는 총 12명의 사사가 등장합니다. 이 12명의 숫자는 아비멜렉은 제외한 숫자입니다. 사사기 뒤에 나오는 사무엘상에도 총 4명의 사사가 등장합니다. 엘리 제사장, 한나가 낳은 사무엘, 그리고 사무엘의 두 아들 요엘과 아비야 이렇게 네 사람입니다. 이처럼 성경에는 총 16명의 사사가 등장합니다.  이 가운데 믿음의 장이라 불리는 히브리서 11장에는 사사시대 인물 중 오직 5명만 대표로 언급이 됩니다. 그 인물들은 기드온, 바락, 삼손, 입다, 사무엘입니다. 오늘 본문의 주인공인 입다는 히브리서 11장 곧 믿음의 장이란 명예의 전당에 올라갈 정도로 성경에서도 주목하여 기록하고 있는 인물입니다.

성경에서 입다가 처음으로 등장하는 사사기 11장 1절 말씀에서 그는 길르앗 사람이며 큰 용사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11:1) 길르앗 사람 큰 용사 입다는 기생이 길르앗에게 낳은 아들이었고” 여기서 사용된 ‘큰 용사’라는 호칭은 이전에 하나님의 천사가 포도주 틀에서 숨어 밀을 타작하고 있었던 기드온을 부를 때 사용한 바로 그 호칭입니다. 본래 큰 용사라는 표현은 부유한 사람 혹은 재력이 많은 사람을 묘사할 때 사용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룻기 2장에 보아스를 표현할 때도 이 히브리어 단어가 사용됩니다. 그러나 전쟁의 맥락을 놓고 볼 때 이 표현은 한글 성경에서 번역한대로 전쟁에서 ‘용감하게 싸우는 군인’이나 ‘힘이 있는 장군’을 지칭할 때 사용됩니다. 분명 입다는 큰 용사로서의 재능을 가지고 있는 자로서, 외적의 침입에 맞서 싸워야 했던 이스라엘의 현상황에서 볼 때 가장 필요로 한 인물입니다.

그러나 이런 입다에게도 치명적인 약점으로 여겨진 것이 하나 있었습니다. 바로 그의 출신 성분이었습니다. 1절 말씀을 보십시오. 그의 어머니는 ‘기생’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기생’이라 번역된 히브리어 단어 ‘조라’는 ‘기생’보다는 ‘창녀’, ‘매춘부’의 의미에 더 가깝습니다. 이들은 당시 이스라엘 사회에서 공공연이 용인되었습니다만, 사회적으로 심한 경멸을 받았습니다. 이는 예수님 시대에도 그러했고, 오늘날에도 똑같습니다. 사사기의 저자는 1절 말씀을 통해 탁월한 군사적 재능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미천한 배경 때문에 한계에 놓이게 될 입다의 처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큰 용사로 태어났으나, 그 능력을 받쳐주지 못하는 가정 환경 때문에 입다는 그가 타고난 능력과 배경이 조화를 이루지 못하는 아픈 상황을 겪게 됩니다.

길르앗의 아내에게서 태어난 아들들은, 똑 같은 아버지를 두었으나 기생에게서 태어난 입다를 부정하고 눈에 가시처럼 여겼습니다. 본래 히브리인들에게 있어서는 자식이 기업을 얻는 데는 모계보다는 부계가 중요합니다. 아브라함이 하갈에게서 낳은 아들 이스마엘을 떠올려 보십시오. 비록 여종의 아들이었으나 만일 그가 아브라함 곁을 떠나지 않았더라면 본처에게서 난 이삭 뿐만 아니라 여종에게서 태어난 이스마엘에게도 상당한 유산이 떨어졌을 것입니다. 부계 중심 사회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길르앗의 아들로 태어난 입다에게도 아버지의 유산을 물려 받을 자격이 충분히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이복형제들은 그를 쫓아냈습니다. 2절 말씀을 봅시다. “(11:2) 길르앗의 아내도 아들들을 낳았더라 아내의 아들들이 자라매 입다를 쫓아내며 그에게 이르되 너는 다른 여인의 자식이니 우리 아버지 집 기업을 잇지 못하리라 한지라” 입다가 법적으로 자격이 없기 때문이 아니라, 그의 어머니가 ‘기생’, ‘창녀’라는 이유 때문입니다. 성경학자들은 그의 어머니가 이스라엘 민족이 아니라 이방인이었을 것이라고 추측합니다. 부계가 불분명하다면 억울할 것이 없겠으나, 입다는 그의 아버지기 길르앗 임에도 불구하고, 출신 배경이 미천하다는 이유로 쫓겨났습니다. 억울한 일을 당했습니다. 이 때 길르앗 사람들 중 그 누구도 나서서 이 문제를 중재하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장로들도 입다를 무시하였고, 그가 법적인 보호와 권리를 전혀 받지 못하고, 아버지의 유산도 하나 받지 못한 채 쫓겨남에도 불구하고 그 일을 방관했습니다. 우리는 입다가 고향에서 쫓겨난 이 일로 얼마나 큰 마음의 상처를 받았고, 이후 그가 얼마나 많은 고생을 하며 살아갔을 지 상상해 볼 수 있습니다.

입다는 능력이 출중한 ‘큰 용사’임에도 불구하고 ‘기생’의 아들이라는 이유만으로 공동체에서 추방당했습니다. 신체적 조건 혹은 사회적 조건 때문에 사람을 무시하거나 또한 배제, 차별하는 것은 모두 하나님 보실 때 큰 죄악을 범하는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교회와 사회에서 출신, 배경, 성별, 나이와 같은 요소로 사람을 차별하거나 그들이 마땅히 누려야 할 권리를 빼앗아서는 결코 안 됩니다. 또한 자신과 같은 혈연이나 지연을 강조하며 그 밖의 사람들을 배제하고 차별하는 것도 물론 지양해야 합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우리 죄를 씻어 주시고, 우리를 하나님 가족 공동체의 구성원으로 삼아 주신 것은 우리가 잘나거나 뛰어나서가 아닙니다. 우리 중에 하나님의 기준에 부합하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받을 만한 자격이 없고, 하나님의 백성에 포함될 수 없는 죄인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우리들을 무조건적으로 사랑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우리가 이웃들에게도 그와 같은 무조건적인 사랑을 베풀며 살아가기를 원하십니다.

예수님의 생애를 생각해보십시오. 당시 유대 사람들은 이방인과 결혼함으로 피가 섞인 사마리아 사람들을 부정한 죄인 또는 개와 동급으로 취급하며 사마리아 사람들과 어울리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어떻게 하셨습니까? 일부로 사마리아로 찾아가 우물가에 찾아온 사마리아 여인을 기다리셨고, 그녀에게 말을 거시고 구원에 이르도록 하셨습니다. 그 한 사람 뿐만 아니라 다른 사마리아인들도 예수님께 찾아왔을 때 주님은 그들과 교제하시며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셨습니다.

사마리아 사람들 뿐만 아니라 세리들, 문둥병자들, 소경들, 병든 자들, 이방인들 등등 예수님은 이 당시 유대 사람들이 소외시키며 집단 따돌림 시켰던 사람들을 일부로 찾아가셨습니다. 예수님은 소외된 이웃들을 찾아가 그들의 손을 잡아 주셨고, 그들과 함께 교제하시고, 또 그들의 영혼의 상처와 육신의 질병을 고치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가리켜 의사라고 소개하셨습니다. 주님은 건강한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가 없고 오직 병든 사람에게만 의사가 필요하다고 말씀하시며 몸과 마음이 병든 사람들 영혼의 치료자, 구세주가 필요한 사람들을 찾아가 만나 주셨습니다. 갈릴리의 어부 베드로, 세리 마태와 세리장 삭개오, 현장에서 간음 한 여인, 일곱귀신 들린 마리아, 거라사 지방에서 귀신들린 남성, 38년간 병상에 누운 병자 등 예수님은 수많은 소외된 이웃들을 몸소 찾아가시고 그들의 삶을 위로하시고 영혼을 구원해 주셨습니다.

우리 구주 예수께서 보여주신 본을 따라 우리들도 사람을 차별 없이 대우해야 합니다. 좋은 옷 입고, 좋은 차 타고, 좋은 향기 나는 사람들에게는 잘해주고 가까이 사귀기를 좋아하고, 반대로 나쁜 옷 입고, 나쁜 차 타고, 나쁜 악취가 나는 사람들은 교제하기를 꺼려하고 무시한다면 교회는 사랑을 잃어버린 것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그런 교회는 예수님 보실 때 얼마나 가슴이 아픈 교회입니까? 예수님은 우리 중에 가장 작고 연약한 자에게 한 것이 곧 주님 자신에게 한 것과 같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따라서 우리 주변에 가난한 사람들, 병든 사람들, 힘이 없는 연약한 사람들, 아무도 찾아가지 않으려고 하는 소외된 사람들에게 잘하는 것이 곧 우리 주님께 잘하는 것과 똑같습니다. 사람은 쓰고 버리는 소모품이 아닙니다. 이 세상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존귀한 피조물입니다. 어느 누구를 대하든 차별 없이 최선을 다하여 사랑하십시오. 그것이 하나님의 백성들이 이 세상을 살아가는 올바른 방법입니다.

이후 입다는 자신을 쫓아낸 이복 형제들을 피하여 ‘돕’이라 불리는 땅으로 옮겨가 거주하게 됩니다. 성경은 ‘잡류’가 그에게 왔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3절 말씀입니다. “(11:3) 이에 입다가 그 형제를 피하여 돕 땅에 거하매 잡류가 그에게로 모여와서 그와 함께 출입하였더라” 여기에서 사용된 ‘잡류’라는 표현은 ‘건달들’, ‘방랑자들’, 또는 ‘방탕한 자들’로 번역할 수 있습니다.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입다가 이들을 불러 모은 것이 아니라, 이들이 입다의 매력에 끌려 그에게로 모였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들은 입다가 사람을 끄는 지도력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입다는 그에게로 모인 잡류들과 함께 출입했다고 기록합니다. “출입하다”는 표현은 군사적 의미로 약탈했음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이복 형제들을 피해 돕 땅에 정착한 입다는 그를 따르는 무리들과 함께 도적 떼를 이루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은 입다의 모습을 살펴보면 그가 어떻게 사사가 되었는지 사실 잘 이해되지 않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사사기에 등장하는 12명의 사사들의 이야기는 단지 열 두 명의 인생을 비춰주는 것이 아니라, 그 각각이 모두 이스라엘의 영적 실태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모델임을 기억한다면, 본문 속에 등장하는 입다의 모습은 부도덕한 삶을 살아가는 이스라엘의 모습을 상기시키는 역할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사기는 백성을 이끄는 사사 한 사람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사사 한 사람이 올바른 길로 걸어가면 백성들 전체가 그의 선한 영향력 아래서 올바른 길을 따라갑니다. 그러나 사사 한 사람이 잘못된 길을 택하여 걸어갈 때, 그의 악한 영향력을 따라 백성들도 살아가게 됩니다. 그러니 리더 한 사람이 얼마나 중요합니까? 우리 가정에서도 가장 한 사람의 역할에 따라 가정 전체의 모습이 달라집니다. 가장이 하나님 중심으로 살아가면, 배우자도 자녀들도 하나님 중심으로 살아가는 삶이 무엇인지 보고 배우며 영향을 받습니다. 그러나 가장이 하나님을 버리고 잘못된 죄악의 길로 가면 다른 가족 구성원들도 그 영향을 받을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코너스톤 교회도 저와 함께 교회의 리더 한 사람 한 사람이 어떤 모습으로 성도들을 섬기며 살아가는지에 따라 교회 모습이 달라지게 될 것입니다.

시간이 흐르고 암몬 족속이 이스라엘을 공격하려고 길르앗 땅에 쳐들어 왔습니다. 위기의 상황 속에서 길르앗 장로들은 이스라엘 군사들을 이끌어 전쟁에 나갈 지도자가 부재하다는 것을 깨닫고, 입다를 찾아가게 됩니다. 6절 말씀을 봅시다. “(11:6) 입다에게 이르되 우리가 암몬 자손과 싸우려 하나니 당신은 와서 우리의 장관이 되라” 입다를 만난 장로들은 그에게 ‘장관’이 되어 줄 것을 제안합니다. 장관이란 오늘날로 말하면 국방부장관과 같이 군사들을 이끄는 우두머리를 의미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우리에게 이것이 본래 장로들의 계획이 아니었음을 말해주었습니다. 장로들의 계획은 따로 있었습니다. 그것은 누구든지 이스라엘의 군대를 이끌고 나가 암몬과의 싸움에서 승리하면 그가 이스라엘의 머리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사사기 10장 18절을 봅시다. “(10:18) 길르앗 백성과 방백들이 서로 이르되 누가 먼저 나가서 암몬 자손과 싸움을 시작할꼬 그가 길르앗 모든 거민의 머리가 되리라 하니라” 머리와 장관은 분명한 차이가 있습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머리는 ‘왕’이고 장관은 ‘국방부장관’입니다. 예를 들면 다윗은 ‘왕’이었고, 요압은 ‘군대장관’이었던 것과 같습니다. 사사기 10장 18절 말씀으로 미루어 보아, 본래 장로들은 암몬 족속을 무찌르는 일을 감당하게 될 사람을 ‘머리’로 삼으려고 계획을 갖고 있었습니다만, 원래 계획과 다르게 입다에게는 ‘머리’가 아니라 ‘장관’이 될 것을 제안했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성경학자들은 장로들이 ‘아버지 집’에서 쫓겨난 기생의 아들 입다가 길르앗의 머리 역할을 감당할 자격이 없다고 보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비록 장로들이 입다의 도움을 요청하기 위해서 그를 찾아왔으나, 군사적으로는 그를 인정했어도, 그를 여전히 무시하고 있었음을 엿볼 수 있습니다. 장로들은 도적 떼의 우두머리로 살아가던 입다가 군대의 장관 자리라면 흔쾌히 수락할 것이라 예상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추측은 빗나갔습니다. 입다는 장로들이 이전에 자신이 길르앗에서 쫓겨날 때 아무도 도와주지 않았던 일을 꺼내며 그들에게 핀잔을 주었습니다. 7절 말씀을 봅시다. “(11:7) 입다가 길르앗 장로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전에 나를 미워하여 내 아버지 집에서 쫓아내지 아니하였느냐 이제 너희가 환난을 당하였다고 어찌하여 내게 왔느냐” 입다는 길르앗의 아들로서 아버지의 집에서 보호를 받을 권리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모든 권리를 박탈당한 채 길르앗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고 쫓겨났습니다. 입다는 자신을 감싸주지 않았던 길르앗 장로들에게 자신을 미워하고 쫓아낸 공동체적 책임을 물으며 그들을 책망했습니다.

협상에서 불리한 위치로 내몰리자, 그제서야 길르앗 장로들은 본래 자신들이 가지고 있었던 제안을 꺼냅니다. 8절을 봅시다. “(11:8) 길르앗 장로들이 대답하되 이제 우리가 당신을 찾아온 것은 우리와 함께 가서 암몬 자손과 싸우려 하게 함이니 그리하면 우리 길르앗 모든 거민의 머리가 되리라” 장로들은 입다에게 ‘군대 장관’ 자리가 아니라, ‘길르앗의 머리’의 자리를 제안합니다. ‘군사적인 통치자’가 아니라 ‘공동체 전체의 지도자’로 삼겠다는 더 강력한 제안을 제시하였습니다. 협상에 능통한 이 기회를 놓치지 않습니다. 그는 재차 장로들의 제안을 확인합니다. 9절 말씀을 봅시다. “(11:9) 입다가 길르앗 장로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나를 데리고 본향으로 돌아가서 암몬 자손과 싸우게 할 때에 만일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게 붙이시면 내가 과연 너희 머리가 되겠느냐” 입다는 길르앗의 머리 즉 왕을 삼겠다는 장로들의 제안을 재차 확인했고, 장로들은 여호와를 그들 사이에 증인 삼아 반드시 그 일을 행할 것을 약속했습니다. 장로들의 약속을 받은 이후에야 입다는 장로들과 함께 백성들이 있는 곳으로 향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것에서 백성들은 입다를 그들의 머리와 장관으로 삼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