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410 (고난주간 새벽예배) 우리를 위해 형벌 받으신 예수 그리스도 (이사야 53장 5절)

“(사 53:5)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지금도 전 세계적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코로나19로 인해 고통 받고 있습니다. 제가 이 설교문을 작성한 시점을 기준으로 보니, 전 세계 확진자가 150만명이 넘었고, 사망자는 9만명이나 됩니다. 미국만 해도 확진자가 43만명이 넘고 사망자는 약 1만 4천명이 넘습니다 사랑하는 이와의 갑작스러운 이별을 맞이한 수많은 유가족들과 친구들 그리고 지인들의 가슴 아픈 눈물과 통곡을 생각해보면, 지금 전 세계적인 아픔과 충격이 지구촌을 감싸고 있는 셈입니다.
지난 달 26일, 한국의 이십대 중반의 한 여학생이 코로나19로 인해 호주 유학의 꿈이 좌절되자 가정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어버린 사건이 있었습니다. 또한 지난 달 31일, 미국 펜실베니아 주에서는 한 30대 남성이 코로나19로 인해 직장을 잃어버리자 미래에 대한 불안감으로 극단적 선택을 한 사건도 있었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일리노이주에서는 한 50대 남성이 지난 4월 6일, 코로나19로 인한 극심한 스트레스를 참지 못하고 총기로 스스로 자신의 목숨을 끊어 버렸습니다.
어쩌면 인간으로써 이 세상을 산다는 것이 그토록 무겁고 짐스럽고 어려운 것임을 코로나19 사태로 인해 우리는 다시 한 번 깨닫고 있는 것이죠. 이 시대에는 고통과 눈물로 점철된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래서 사람들이 그 고통을 피하기 위해 그렇게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지도 모르겠어요. 우리에게 [데미안]이란 소설책으로 잘 알려진 작가 헤르만 헤세는 그의 책 [황야의 이리]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자살은 인간이 절망의 순간에 택할 수 있는 비상구이다.” 코로나19로 인해 악성 채무에 시달리는 사람들… 성실하게 살아왔으나 빚 독촉에 시달리는 사람들… 먼 나라로 도망가 숨어버리고 싶어도 그럴 수 없고, 고통을 해결해보고 싶어도 방도가 없습니다. 어쩌면 인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따라다니며 괴롭힐 문제 때문에 ‘헤르멘 헤세’가 말한 그 마지막 ‘비상구’를 택하는 사람들이 더러 있는 것이죠. 물론 ‘죽음’이란 것이 인생의 많은 문제를 해결해주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결코 ‘죽음’이 인간에게 고통을 끝내는 ‘비상구’가 되지 못한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성경은 인간이 직면한 문제가 죽음의 문을 열고 도망쳐도 끝나지 아니하고, 오히려 본격적으로 시작한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죽음의 문을 열고 들어가는 순간, 그는 살아 생전에 당한 고통과는 비교할 수 없는 극심한 고통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죽음으로 인생의 문제를 회피하려 하는 시도는 돌이킬 수 없는 영원한 고통과 사망 속으로 들어가게 되는 어리석은 선택 입니다.
인간은 이 세상의 그 어떠한 수단이나 방법으로도, 심지어 자신의 죽음으로도, 그가 처한 고통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모든 인류가 처한 비참한 상태 입니다. 인간은 그 스스로 어떠한 노력이나 결심이나 굳은 의지로도 그의 저주 받은 운명을 돌이킬 수 없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 모든 인간이, 스스로 벗어날 수 없는 고통과 저주 아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을 때, 비로소 우리 인생의 문제에 유일한 해답 되시는 분이 메시아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하심은 이와 같이 우리 스스로 고통과 저주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는 우리들을 구원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방법이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인간이 그토록 간절히 바라던 고통과 저주로부터의 구원을 베푸시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셨고,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고통과 저주를 받으셨다는 것을 전해주었습니다. 5절 말씀을 다시 한 번 함께 읽겠습니다. “(사 53:5)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왜 예수님은 고난 당하시고 죽으셔야 했습니까? 그분이 우리의 죄악과 허물을 대속 하셔야 했기 때문 입니다.
이사야는 메시아가 당한 ‘찔림’이 우리의 ‘허물’ 때문이라고 말했습니다. 여기서 사용된 ‘허물’이란 단어는 ‘반역’ 또는 ‘반란’이라고 해석하는 것이 더 정확합니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은 것은 단순한 과일 절도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반역이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질서를 무시하고 자신들의 질서를 내세운 반란이었습니다. 그 반역의 결과 인간에게 고통과 사망의 저주가 찾아오게 된 것입니다. 만일 인간이 하나님께 반역하지 않았더라면, 메시아는 이 세상에 오셔서 찔림을 당하지 않으셔도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향한 가슴 저미는 그분의 사랑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시고 우리가 지은 반역죄를 대신 그가 찔림으로써 감당하게 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온몸으로 가시에 찔리셨습니다. 로마 병사가 사용한 채찍 끝에 달린 납 조각은 그의 살을 찢어버렸습니다. 그분이 머리에 쓰신 가시관은 살을 뚫고 깊게 박혀 버렸습니다. 주님의 두 손과 두 발에 박힌 못은 뼈까지 뚫고 들어가 버렸습니다. 예수가 당한 찔림은 우리의 허물 즉 하나님을 향한 인간의 반역죄를 감당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또한 이사야 선지자는 메시아의 ‘상함’이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고 말했습니다. 여기서 죄악이라는 것은 단순히 겉으로 드러나는 범법행위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인간의 마음 속에서 끊임없이 지하수처럼 흘러나오는 ‘내면의 죄성’을 가리킵니다. 인간의 마음 깊숙한 곳에 뿌리내린 내면의 죄성은 결국 모든 인간을 죄악의 행위를 일으키게 하고, 스스로 죄의 파멸의 길을 걷게 만들었습니다. 인간이 이러한 죄악으로 인한 하나님의 심판을 면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하나님께서 인간의 내면 깊숙한 곳에 자리잡은 이 죄악을 제거해 버리시는 것 밖에는 없습니다. 이것을 감당하는 방법은 예수님이 우리를 대신하여 ‘상함’을 당하는 것 밖에는 없었습니다.
‘상함’이란 단어는 히브리어로 ‘다카’라는 단어가 사용되었는데요. 이를 번역하면 ‘완전히 부서뜨려버리는 것’ 입니다. 예전에 우리 어머니들은 부엌에서 마늘을 빻을 때 나무나 돌로 만들어진 절구에 마늘을 담고, 공이로 마늘을 으깨 버렸습니다. 그러면 마늘이 빻아지면서 본래의 형체가 사라져 버립니다. 이게 ‘다카’에요. 완전히 부셔버리는 거죠. 자동차 폐차 시킬 때 위에서 큰 쇳덩어리판이 내려와서 자동차를 완전히 찌그러트려 버립니다. 그럼 자동차가 강한 압력을 이기지 못하고 마치 캔음료 다 마시고 발로 밟은 것처럼 완전히 납작해지고 으스러져버립니다. 이게 바로 본문에서 말한 ‘상함’이란 단어의 의미 입니다.
우리의 죄악을 대신 짊어지시기 위하여 예수님의 삶은 완전히 으스러져 버렸어요. 어느 복음성가 가사 대로 ‘짓밟힌 장미꽃처럼’ 완전히 찢겨버렸어요. 그분은 살은 찢으셨고, 뼈가 상하셨습니다. 그분의 온 몸은 상처투성이었고, 시퍼런 멍으로 온 몸이 얼룩져 버렸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당하신 말로 다할 수 없는 그 큰 고통은, 우리가 받아야했던 더러운 죄악을 향해 쏟으신 하나님의 진노를 대신 주님께서 받으신 것이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예수님의 고난은 하나님의 징계였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받은 징계는 자신의 죄와 허물로 인한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들의 죄악과 허물로 인한 징계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우리를 대신해서 받으신 하나님의 징계로 인해 어떤 은혜가 우리에게 주어졌습니까? 5절 말씀 다시 봅시다.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의 결과 우리에게 두 가지가 주어졌습니다. 첫째로, 하나님과의 평화를 얻게 되었습니다. 십자가 사건 전, 우리 모두는 하나님 보실 때 말 그대로 ‘죽어 마땅한 죄인’이었습니다. 하나님과 원수 사이나 마찬가지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예수께서 우리의 죄를 대신 짊어지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이뿐만 아니라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화목까지 누리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평화의 십자가’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우리에게 하나님과의 평화를 가져다 주었습니다.
둘째로,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은 우리에게 질병으로부터의 치유를 주셨습니다.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본문에서 이사야 선지자가 말하는 ‘나음’은 ‘완전한 회복’을 의미합니다. 의사 선생님이 환자를 보고 “환자 분 이제 더 이상 몸에 암 세포가 없습니다. 더 이상 치료 받으실 필요가 없습니다. 지금 당장 퇴원 하셔도 됩니다.”하는 의미의 ‘완치’, ‘완쾌’가 바로 오늘 본문에 사용된 ‘나음’이란 단어 입니다. 오래된 지병, 내 숙명과도 같이 받아들인 아픔, 절망적인 질병, 이 모든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으로 말미암아 사라지고 고침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보십시오.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미래형입니까? 과거형 입니까? 과거형 입니다. 이사야는 예수님 오시기 700년 전 사람 입니다. 메시아가 오시는 일은 미래에 일어날 일이지만 너무나도 확실한 일이라 아예 과거형으로 예언해 버렸습니다. 이러한 구약성경의 예언적 특징을 신학적 용어로 ‘예언적 과거’라고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숙명처럼 받아들이던 인생의 고통과 질병으로 인해 더 이상 아파하지 않아도 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찾아오셔서 우리들의 아픔을 고쳐 주십니다. 우리들의 육체 뿐만 아니라 죄악으로 인해 망가진 우리들의 영혼도 회복시켜 주십니다. 하나님 안에서 용서받지 못할 죄인은 없습니다. 하나님은 망가진 영혼을 고치셔서 새로운 삶을 살게 하십니다.
주님은 우리의 허물을 위해 찔림 당하셨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죄악을 대신하여 상함, 완전히 부서지는 삶을 사셨습니다. 이러한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평화를 누리고, 우리의 몸과 영혼은 완전하게 치유 받고 회복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처럼 우리를 대신하여 모든 고통과 저주를 감당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가 어찌 사랑하지 않겠습니까? 어찌 이 예수를 날마다 찬양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어찌 우리의 남은 생애를 예수를 위해 살아가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 형상 볼 때 내 맘에 큰 찔림 받아서, 그 사랑 감당 못하여 눈물만 흘리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이 하루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 놀라운 십자가 대속하심의 은혜를 묵상하며 주님만 사랑하고, 주님께 감사와 찬양을 올려드리는 귀한 하루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