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315 섬기는 자가 크다 (마가복음 9장 30-37절)

나이가 지긋이 든 한 아버지가 모처럼 오래간만에 온 가족이 모인 자리에서 무거운 마음으로 굳게 닫힌 입을 열었습니다. “어제 병원에 갔다 왔는데, 의사 선생님 말씀이 이제 내가 살날이 얼마 안 남았다는구나… 젊은 날에는 직장 다니느라 바쁘다는 핑계로 많은 시간을 함께 해주지 못해 미안하고… 부족한 아비 만나 너희에게 많은 도움이 되지 못해서 미안하다.” 아버지는 두 눈에 눈물이 글썽거리기 시작 합니다. 얼마 남지 않은 생이지만 지금이라도 사랑하는 자녀들과 조금이라도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 싶은 마음 뿐입니다. 육남매 중 첫째인 장남이 아버지께 이야기 합니다. “아버지 유산은 어떻게 하실 겁니까? 제가 장남이니까 반 이상은 저에게 주십시오.” 둘째 딸도 오빠에게 질새라 이야기 합니다. “아버지, 이 집은 제 앞으로 두고 가세요.” 셋째 아들이 말합니다. “아버지, 생명보험은 들어 계신가? 보험금 수령자는 누구 이름 앞으로 되어 있지?” 나머지 자녀들도 이에 뒤질새라 아버지에게 달려들 듯 유산 이야기를 던집니다. 조금 후 자녀들은 서로 자신이 더 많은 유산을 물려 받아야 한다며 욕설과 고성이 오고가며 다투기 시작합니다. 죽음을 앞둔 이 아버지의 심정이 어떠했을까요? 누가 찬물을 끼얹 듯 간담이 내려앉지 않았을까요? ‘지금 내가 다른 이야기 한 것도 아니고, 얼마 후면 죽는다는 말을 했건만.. 자식이란 놈들이 한다는 이야기가 결국 ‘돈 문제’라니…’ 이 아버지가 느끼고 있는 감정을 어떻게 한 가지 단어만으로 다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씁쓸함, 서운함, 외로움, 고독, 배신감… 어떤 단어로도 다 표현할 수 없겠지요.
오늘 예수님께서 가지신 감정이 이와 비슷하지 않았을까요? 지난 날 예수님은 마가복음 8장 31-38절을 통해 주께서 고난 당하실 것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림 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사흘 만에 살아나실 것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오늘 마가복음 9장 31절에 또 다시 예수님은 두 번째로 자신이 당하게 될 수난에 대해서 미리 예고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아무에게도 이 일을 알리지 않으셨습니다. 사람들에게 이 일이 알려지기를 극도로 꺼려 하셨습니다. 그러나 지난 3년 동안 자신과 동거동락 해 온 12명의 제자들에게만큼은 이 비밀을 공유하셨습니다. “베드로야, 이제 얼마 후면 내가 저 바리새인들에게 팔리워서 죽게 될 것이다. 요한아, 저 서기관들의 손에 내가 넘겨지고 저들에 의해 죽임을 당할 것이야… 도마야, 내가 비록 저들에게 죽임을 당할 것이지만 삼일 만에 부활 것이야…” 예수님은 십자가를 시간이 가까이 올수록 12제자와의 시간을 더 집중적으로 가지시며 이들에게 온 세상 죄를 지기 위해 자신이 겪으셔야 하는 대속사역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다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도리어 자기들의 스승이신 예수님께서 왜 죽어야 하는지, 또 살아나야 하는지 납득하기 힘들어하며 굉장한 당혹감에 휩싸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첫 번째로 자신이 죽임을 당하실 것을 가르치셨을 때, 수제자 베드로는 예수님을 붙잡고 “절대로 이러한 일이 일어나서는 안 됩니다!”하고 오히려 예수님을 향해 호통 치듯 말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베드로를 향해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거라!”하고 호되게 책망하셨습니다. 그러니 제자들은 또 다시 예수님께 이 일에 대해 선뜻 물어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12명의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가지신 특별한 능력을 보았습니다. 또한 제자들은 예수님이 하나님께서 보내신 메시아이심을 깨달았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이 생각하는 메시아의 모습은 많이 달랐습니다. 제자들은 혜성처럼 등장한 영웅 같이 예수님이 모든 로마의 군사들을 비상한 신적 힘과 능력으로 제압하시고 이스라엘을 세계 속의 강대국으로 우뚝 세우실 줄 알았습니다. 그리고 그 새로운 나라에서 예수님이 왕이 되시고, 자기들은 국무총리, 장관과 같은 중책을 맡는 건국 유공자들이 될 줄로 생각 했습니다. 이런 헌 된 꿈을 꾸며 예수님을 따르다 보니 결국 훗날 자신의 욕심을 채워줄 메시아로 예수님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정작 예수님은 이러한 정치적 메시아가 되실 생각이 없으신 것을 깨닫자, 배신감을 느낀 가롯 유다는 예수님을 배신하고 제사장들에게 은 30냥을 주고 팔아 넘기기 까지 한 것이죠. 그러나 사실 열 두 제자들도 처음에는 예수님의 메시아 되심을 세속적인 영광을 차지할 정치적 메시아로 오해하고 있었습니다.
그 결과 이들은 예수님 몰래 서로 그 동안의 농공행상을 따지기 시작했습니다. “나는 예수님 오른팔이야! 그러니까 나중에 예수님께서 나라를 세우시고 왕이 되시면, 국무총리는 내가 한다!”, “아니야 내가 자네보다 더 먼저 예수님 알았어! 국무 총리는 내가 해야 마땅하지? 내가 후하게 쳐 줌세. 자네는 나 보다 한 단계 아래 직급인 장관급을 맡게나.” 이런 식으로 제자들은 서로 ‘누가 더 높은 자리를 차지하는 것이 맞는가?’하며 말싸움을 하기 시작 했습니다. 이게 단순한 말장난이 아니었습니다. 이들은 실제로 예수님께서 로마의 황제, 이집트의 파라오, 바벨론의 제왕을 뛰어넘는 또 다른 정치적 왕이 될 것이라 믿어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메시야 왕국에서 한 자리 차지해 보려는 출세에 대한 욕구를 가지고 서로 진심으로 다투었던 것이죠. 제자들의 이러한 논쟁은 최후의 만찬을 먹은 후에도 계속 되었습니다. 그러니 제자들은 예수님의 마음을 몰라도 한참 몰랐습니다.
이런 제자들을 보고 계신 예수님의 마음은 얼마나 답답 하셨을까요? 지난 3년간 공생애 기간 동안 제자훈련하는 것에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신 예수님… 제자들을 향한 실망감이 이만저만이 아니셨을 거에요. 지금 자신의 죽음에 대해서 이야기하셨는데, 제자들은 신경도 안 씁니다. 오직 자기 밥그릇만 챙기고 있는 거죠. 그리고 누구 밥그릇이 더 큰가 서로 진심을 다해 다투고 싸우고 있으니 십자가를 앞두고 예수님께서 보실 때는 제자들의 모습이 너무 안타까운 거죠.
그러나 이 어리석은 열두 제자들의 모습… 다른 사람들 보다 높아 지려는 욕망이 우리 모두에게 있음은 부인할 수 없습니다. 교회 안에서 누가 장로가 되냐? 누가 권사가 되느냐? 누가 안수집사가 되느냐? 하는 것으로 다투고… 목회자들도 누구 교회가 건물이 더 크냐? 어느 교회가 성도가 더 많냐? 하는 식의 경쟁과 욕망이 교회 안에 가득 합니다. 그러나 이처럼 높아지려 하는 우리 안의 죄악된 본성을 깨뜨리지 않고서는 예수님의 참된 제자가 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을 본 받기 위해서는 우리 안에 높아지려고 하는 마음을 먼저 깨트려야 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은 한 자리에 불러 모으셨습니다. 그리고 좀 전까지 “누가 크냐?” 하며 뜨겁지만 동시에 허무한 토론을 벌린 저 어리석은 제자들에게 천국의 지혜를 가르치셨습니다. 35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막 9:35) 예수께서 앉으사 열두 제자를 불러서 이르시되 아무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뭇사람의 끝이 되며 뭇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하시고” 예수님께서 세우시는 하나님 나라는 세상의 원리와 다릅니다. 다른 사람 위에서 첫째가 되려고 발버둥 치는 사람은 더 낮아지게 됩니다. 하나님 나라에서는 높아지려는 교만한 자는 비극을 당하게 됩니다. 하나님 나라에서 첫째가 되고자 하는 사람은 세상의 원리와 다르게 자신을 낮추고 다른 이들을 섬기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세상은 낮은 자가 되지 말고 첫째가 되라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첫째가 되려면 가장 낮은 자가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세상의 논리와 예수님의 논리는 다릅니다.
백문이불여일견입니다. 예수님은 눈에 보이는 효과적인 실물 교육을 해주셨습니다. 제자들 앞에 어린 아이 하나를 세우셨습니다. 어린 아이, 나약합니다. 지혜도 완전하지 못합니다. 판단력도 흐립니다. 누군가에게 의존해서 살지 않으면 살 수 없는 연약한 존재 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어린아이를 안으시며 다음과 같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37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막 9:37)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나를 영접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함이니라” 비록 눈 앞에 보이는 것은 분명 어린 아이 입니다만, 이 아이를 대할 때 무명의 아이로, 나약하고 어리석고 힘 없는 아이로 생각하지 말고, 그 안에 만왕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여, 이 아이를 마치 주님께서 보내신 사자처럼 섬기라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이 어린아이처럼 작은 자를 주님께 대하듯 하면 예수님은 그것을 곧 자신을 섬긴 것과 동등하게 여겨 주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어린 아이는 천대받는 존재를 말합니다. 이 시대에 어린 아이는 인원수를 계수할 때 포함되지도 못했습니다. 그런 낮고 연약한 존재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섬기는 것이 곧 예수님 그 분을 섬기는 것이고, 또한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 됩니다. 예수님은 오늘 이 말씀을 통해 제자들에게 큰 자가 되려고 애쓰지 말고, 도리어 진정한 섬김의 도를 나타내며 살 것을 가르치셨습니다.
세상은 부와 권력이 있는 사람, 유명한 사람, 유식한 사람, 좋은 직장 다니는 사람과 친하게 지내고 그들을 섬김으로써 자신에게도 유익이 돌아오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삶의 방식은 다릅니다. 상대방이 나의 친절과 환대에 아무런 보답을 할 수 없는 상태에 있는 연약하고 나약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들의 가장 가까운 친구가 되어주고, 저들의 삶에 힘과 위로가 되어주어야 합니다. 무엇을 얻기 위해서 사람을 골라 사귀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자세가 아닙니다. 오히려 상대방에게 내가 가진 것을 주고, 상대방을 섬기기 위한 자세로 사람들과 교제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들을 향해 “너희는 세상의 ‘다이아몬드’다”라고 말씀하지 않았습니다. 주님은 우리를 향해 “너희는 세상의 빛과 소금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빛과 소금은 냄새 나고, 어두운 곳에 필요합니다. 예수께서 자기 보다 낮은 자들을 위해 자신의 삶을 내어주고 섬기시고 위로하시고 치료하신 것처럼, 우리들도 다른 이들을 섬기는 낮은 자세로 이 세상을 살아가야 합니다. 섬기는 자가 큰 자 입니다. 더 높아지려는 잘못된 욕망과 생각은 버리고 오직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섬김의 삶을 살아가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