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1129 골로새서 (10) 그리스도의 평강이 다스리는 삶 (골로새서 3장 15절)

서론. 빚을 탕감 받은 자에게 임한 넘치는 기쁨
조지아주에 위치한 모어하우스 대학은 미국의 인권 운동가이자 ‘흑인 해방운동가였던 ‘마틴 루터 킹’ 목사의 모교로 유명합니다. 모어하우스 대학교는 미국에서 흑인들을 위해 세운 대학교들 가운데 매년 Top 1,2위를 다툴 정도로 잘 나가는 명문입니다. 지난 2019년도 모어하우스 대학의 졸업식에 연사로 ‘로버트 F. 스미스’란 사람이 초대받았습니다. 이 사람이 누구인가 하면 미국의 유명 투자회사의 CEO로, 중, 대중에게 잘 알려진 흑인 유명 방송인 ‘오프라 윈프리’를 제치고 지난 2015년도 경제 잡지인 ‘포브스’지가 선정한 African Americans 중 최고 부자로 등극한 사람입니다. 미국 사회에서 최고로 성공한 흑인이 대학교 졸업식 연사로 초대받은 것이죠. 그런데 막상 졸업식 축사가 시작되자, 사람들은 점차 흥미를 잃어갔고, 시간이 길어지자 졸업식 당일 이른 새벽부터 대가족을 이끌고 졸업식에 참석한 학생들 가운데는 피곤함에 조는 학생들도 눈에 띄었습니다.
이처럼 너무나도 평범해 보이는 졸업식 현장은 연사 로버트 스미스의 입에서 나온 몇 단어로로 인해 한 순간 축제의 현장으로 바뀌게 됩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미국의 대학생들이 과도한 학자금으로 고통받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여러분의 학자금을 모두 갚아드리겠습니다.” 400 여명이나 되는 ‘class of 2019’ 졸업생들의 학자금 약 $48M 달러를 대신 모두 다 갚아주겠다고 선언했습니다. 졸고 있던 학생들, 흥미를 잃어가던 학생들, 지쳐가던 가족들 모든 사람들이 한 순간에 잠이 깨어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강단에 앉아 있던 총장과 교직원들도 모두다 두 눈이 휘둥그레졌고, 자리에서 일어나 다 같이 박수를 쳤습니다. 장내에는 큰 함성과 기쁨의 환호성이 여기저기서 들려왔습니다.
한국 사람들은 대학교 등록금을 대부분 부모가 내줘야 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이에 비해 미국 부모들은 자녀들 학자금을 부모가 대신 내주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비율이 한국 사람들에 비해 높지 않습니다. 한 조사 결과를 보니까, 미국 부모들 가운데 자식들 학자금을 대주기 위해서 saving 하려고 계획하는 사람들은 62%였는데, 실제로 부모가 자식을 위해 학자금을 fully support 하는 비율은 29%를 넘지 않았습니다. 미국 대학생 10명 중 7명은 부모가 아닌 자신이 직접 학자금을 갚고 있는 것이죠. 저희 교회도 대학생 자녀들을 두신 부모님들이 계십니다만, 요즘에 학자금이 얼마나 비쌉니까? 4년 동안 대학 등록금, 자녀들 생활비 보태려면 웬만한 집 한 채 값이 나온다는 말은 결코 농담이 아닙니다.
이처럼 무거운 빚을 등에 짊어지고 사회로 나가야했던 졸업생들에게 그 많은 학자금을 모두 다 갚아준다는 로버트 스미스의 약속은 학생들과 가족들에게 얼마나 큰 기쁨으로 찾아왔겠습니까? 너무 큰 소식이라, ‘이거 scam(사기) 아닌가?’하고 믿지 못하고 있는 학생들도 있었습니다. 서로 얼싸안고 뛰는 학생들, 기쁨의 탄성을 지르며 가족을 향해 달려가는 학생, 제 자리에 주저앉아 얼굴을 감싸고 눈물을 흘리는 학생 등 다양한 기쁨의 표현을 볼 수 있었습니다. 빚을 탕감 받는 다는 것은 이처럼 큰 기쁨의 소식입니다.
‘비니지스 인사이더’에서 조사한 자료에 의하면 2020년도 4월 기준으로 미국인 한 사람이 가지고 있는 평균 부채가 $51,900불입니다. CNBC가 조사한 자료를 보니까 코로나 이후 이 액수는 천정부지로 솟구치며, 지난 11월 19일 기준으로 $90,460달러로 7개월 사이 거의 두배 가까이 늘어났습니다. 코로나 이전에도 이미 미국에서 매달 ‘paycheck to paycheck’으로 사는 인구가 미국 인구의 78%나 됩니다. 미국에 사는 사람들 총 10명 중 8명 이상은 매달 빚을 갚으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죽을 때까지 빚만 갚다 죽는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빚을 탕감 받는다는 것은 얼마나 큰 기쁨입니까?
요즘 우리 주변에 코로나로 인해 직장과 일자리를 잃은 분들이 정말 많이 있습니다. 이는 미국의 많은 가정에게는 큰 불행이고 안타까운 소식입니다. 코로나로 인해 개인 비즈니스를 하시는 분들도 상황이 힘든 것은 비슷합니다. 신문기사를 보니까 코로나19가 미국을 강타한 이후 경제적 어려움으로 인해 렌트비를 내지 못하고 있는 세입자 가구의 숫자가 전국적으로 600만명이 넘는다고 합니다. 또한 은행에 모기지를 내지 못해서 ‘지불유예’(mortgage forbearance) 신청한 사람들의 비율의 경우 작년에 비해 20배가 넘게 증가했다고 합니다. 대학교 학자금을 갚지 못해서 연체된 사람의 숫자가 2,600만명을 넘었습니다. 우리 주변의 힘들고 어려운 이웃들에 대한 기도와 관심이 그 어느때보다도 많이 필요한 때입니다.
한 번 이러한 장면을 상상해 봅시다. 이틀 뒤면 12월 1일이죠? 12월 1일부로 미국 정부에서 코로나로 인해 큰 고통과 실의에 빠진 국민들을 위해서 12월 한달 동안 ‘mortgage loan’, ‘student loan’, ‘auto loan’, ‘business loan’의 빚 탕감을 실시한다고 발표를 했습니다. (물론 상상입니다.) 상상만 해도 얼마나 기쁩니까? 빚을 한달만 탕감해줘도 큰 기쁨 아니겠습니까?
복음서를 보면, 예수님은 사람들을 ‘왕에게 일만 달란트 빚진 신하’로 비유하셨습니다. 한 달란트는 노동자의 15년치의 임금이라 생각하면 됩니다. 따라서 일만 달란트는 15만년 동안 일한 노동자의 임금과 맞먹는 어마어마한 액수입니다. 우리 중에 15만년 동안 일할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이 비유를 통해 예수님은 우리들이 하나님께 갚을 수 없는 커다란 빚을 진 사람들임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죄를 지은 인간은 영적으로 이미 파산한 상태(to file an bankruptcy)나 다름이 없습니다.
평생토록 갚아도 갚지 못할 죄값으로 인해 영원히 죽을 수밖에 없었던 우리들을 하나님께서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직접 우리의 죄값을 대신 청산해 주시기로 결정하셨습니다. 죄를 지은 인간의 빚을 갚는 방법은 한 가지 길 밖에 없습니다. 의인의 자기 목숨으로 죄인의 목숨을 대신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죄가 없는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시고 그가 우리들을 대신하여 우리 죄를 짊어지고 십자가에 달려 죽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으로 인해 우리가 지은 모든 죄의 빚은 탕감 받게 되었습니다. 이 놀라운 은혜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자들에게 주어집니다. 우리의 모든 빚이 탕감되었다는 큰 기쁜 소식,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하신 사건을 가리켜 기쁜 소식 ‘복음’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공짜로 빚을 탕감해 주신다는데 예수 믿지 않을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본론. 그리스도의 평강이 우리 마음을 지배하게 하라.

1. 평강의 근원 예수 그리스도: 주 예수와 함께 함으로 평강을 누린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십자가에서 이루신 이 엄청난 빚 탕감 사건이 바로 우리의 죄값을 대신한 죽음이라는 것을 전인격적으로 받아들이고, 믿는 사람들의 마음에는 놀라운 ‘기쁨’과 ‘평강’이 찾아옵니다. 이제 예수님께서 자신의 모든 삶의 영역을 다스릴 뿐만 아니라 책임져주심을 깨닫게 되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의 ‘내적 심리 상태’는 예수님 믿기 전과는 다르게 변화합니다. 이전에는 ‘이 험악한 세상을 어떻게 살아가야 하나?’하고 불안해하고 염려하며 살아왔다면, 이제는 삶의 모든 필요를 채워 주시는 신실하신 공급자 예수님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마음에 큰 기쁨과 함께 하늘의 평강이 머물게 됩니다. 기쁨은 그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참 된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표지’입니다.
혹시 엄마 품에 안겨 있는 아기를 본 적이 있으십니까? 온 세상이 코로나로 인해 난리가 났든지, 조금 있으면 추운 겨울이 찾아오든지 아기는 전혀 걱정이 없습니다. 엄마가 다 알아서 해줍니다. 배고프면 엄마가 먹을 것 줍니다. 추우면 엄마가 따뜻한 blanket으로 몸을 덮어줍니다. 졸리면 엄마가 자장가도 불러주고 재워줍니다. 혹시 기저귀 값 걱정하는 아기를 보신 적이 있습니까? 분유 값 걱정하는 아기를 보신 적 있습니까? 엄마 푹 속 아이는 아무런 걱정도 없습니다. 엄마가 다 알아서 해줄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엄마 품속에 안긴 아이에게 주어지는 평강의 모습이 바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살아가는 모든 성도들에게 임하는 놀라운 ‘평강’입니다. 시편 131편 1-2절 말씀을 볼탠데요. 새번역성경으로 보겠습니다. “(시 131:1) 주님, 이제 내가 교만한 마음을 버렸습니다. 오만한 길에서 돌아섰습니다. 너무 큰 것을 가지려고 나서지 않으며, 분에 넘치는 놀라운 일을 이루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시 131:2) 오히려, 내 마음은 고요하고 평온합니다. 젖뗀 아이가 어머니 품에 안겨 있듯이, 내 영혼도 젖뗀 아이와 같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의 ‘내적 심리 상태’는 마치 젖 땐 아기가 어머니 품 안에 안겨서 새근새근 잠을 자는 것과 같이 평안합니다. 이전에 그리스도 밖에서 살아갈 때는 ‘어떻게 하면 세상의 물질들을 더 많이 쌓을 수 있을까? ‘더 많이 소유할 수 있을까?’ 고민하며 몸부림치며 살아왔습니다. 또한 그리스도 밖에서 지낼 때는 세상 속에서 나란 존재의 가치를 입증하기 위해서, 대중 가운데 나란 사람의 흔적과 발자취를 남기기 위해서 숨가쁘게 살아왔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들어온 후에는 더 이상 물질이나 명예, 권력을 위해 살아가지 않습니다. 높아지려는 마음, 유명해지고 싶은 마음, 더 많이 가지려는 욕심도 다 내려놓게 됩니다. 그리고 오직 젖을 뗀 아이가 어머니 품에 안겨 새근새근 잠을 자고 있듯이, 내 삶이 주님의 품 안에 안겨 있는 것으로 기뻐하고 평안한 마음으로 살아갑니다. 예수 안에 머물러 살아가는 삶, 그것이 하나님께서 주신 인생의 가장 큰 축복임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 구주 예수와 함께 살아가면 평강이 마음 속에 가득 차오르게 됩니다.

2. 평강이 우리 마음을 다스리는 방법? 그리스도 예수를 바라보라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께서 주시는 평강이 우리의 마음을 지배하게 하라고 권면합니다. 다시 한번 오늘 본문 골로새서 3장 15절 말씀을 봅시다. “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 본래 사람의 마음이란, 자신이 처한 상황이나 환경에 지배를 받고 살아가기 마련입니다. 예를 들면, 개인 비즈니스가 잘 되고, 회사에서 승진하고, 자녀들이 좋은 대학에 들어가면 마음이 기쁘고 즐겁습니다. 그러나 반대로 비즈니스에 어려움이 생기거나, 회사에서 해고당하거나, 대학을 졸업한 자녀들이 장기간 직장을 구하지 못하는 상황에 이르게 되면 마음에 염려와 불안이 엄습해옵니다. 자신이 처한 상황에 따라 심리 상태가 변화하는 것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겪는 당연한 현상입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한가지 새로운 도전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처해 있는 상황이나 환경이 우리 마음을 지배하지 못하도록 하고, 오직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평강이 우리 마음을 지배하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15절 말씀에서 ‘주장하게 하다’라는 말은, 그리스도의 평강이 우리 마음을 ‘control’하라는 뜻입니다. 상황이나 환경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평강이 우리 마음을 지배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마음 상태는 무엇을 바라보느냐에 따라 달라집니다. 힘들고 어려운 상황이나 환경만 바라보면 낙심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반대로 모든 상황 속에서도 변함없이 우리 삶을 붙들고 계신 주님을 바라볼 때 우리 마음에는 평강이 임하게 됩니다. 시편 23편 4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시 23:4)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코로나19로 인한 장기적인 경제 침체로 인해 많은 사람들의 삶에 고난과 신음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어떤 분들은 사망의 그림자가 드리운 골짜기를 지나가는 것처럼 무척 힘이 들고 고통스럽습니다. 그러나 시편 23편에 나타나는 다윗의 고백처럼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하시고 나를 지키고 보호하신다는 것을 확신할 때 우리 마음은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상황을 뛰어넘는 믿음으로 우리 삶을 바라보는 태도가 바로 그리스도의 평강이 우리 마음을 주장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마음 상태는 무엇을 바라보느냐에 따라 달라진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모든 짐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버리고, 인내로 이 믿음의 경주를 끝까지 달려가며,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십시오. 그리스도의 평강이 우리 마음을 지배하도록 하기 위해서는 계속해서 주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시편 42편 11절 말씀을 봅시다. “(시 42:11)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나는 내 얼굴을 도우시는 내 하나님을 오히려 찬송하리로다” 시인의 고백을 봅시다. “이 문제를 내가 어떻게 해결하지?”, “어디서 돈을 구하지?”, “어디서 일자리를 구하지?” 예상 외로 우리 삶에는 우리 스스로의 힘과 지혜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들이 너무나도 많습니다. 그래서 어려운 상황과 환경만 쳐다보고 있으면 내 스스로 문제 해결의 대안을 찾지 못해 마음이 불안해지고, 변하지 않는 현실 속에서 좌절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시인은 말합니다. “오! 내 영혼아 너는 왜 이리 풀이 죽어 있느냐? 왜 이렇게 내 속에서 불안해하느냐? 너는 하나님을 바라보아라!” 상황과 환경을 해결할 수 없는 내면으로 몰입하게 되면 좌절하고 불안해하며 살 수밖에 없지만, 눈을 들어 전능하신 하나님을 바라볼 때 우리에게는 넘치는 평강이 임하게 됩니다.
일제 강점기 활동했던 최봉석 목사님께서 일본순사에게 붙잡혀 취조를 받게 되었습니다. 일분 순사들에게 최목사님은 눈에 가시 같은 존재입니다. 순사들이 목사님을 얼마나 심하게 매질했는지 매를 맞다가 그만 기절해 버렸습니다. 양동이에 물을 담아 혼절했던 목사님 얼굴에 쏟아 붓자 목사님이 깨어나며 “예수 천국!”하고 크게 외칩니다. 기가 막힌 일본 순사가 묻습니다. “최 목사, 세상에 천당이 어디 있어? 자네는 하나님이 눈에 보이나? 나에게 천당을 보여주면 내가 자네 말을 믿지!” 이 말은 들은 목사님은 갑자기 자기 가슴 품을 활짝 보여줍니다. 그리고 말합니다. “내가 천국의 본점은 보여주지 못하지만, 천국 지점은 보여줄 수 있소! 하나님이 계시는 내 마음이 바로 천국의 지점이요!” 진실로 날마다 그리스도 예수를 바라보고 주님을 우리 마음에 모시고 살아갈 수만 있다면 우리가 거하는 모든 장소가 천국과도 같이 변하게 됩니다.
찬송가 495장 3절을 다같이 불러 봅시다. “높은 산이 거친들이 초막이나 궁궐이나 / 내 주 예수 모신 곳이 그 어디나 하늘 나라. 할렐루야 찬양하세 내 모든 죄 사함받고 / 주 예수와 동행하니 그 어니다 하늘 나라.” 우리 영혼이 하나님을 바라보기 시작할 때, 우리 마음에 놀라운 평강이 찾아오는 것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지금 머물고 있는 곳이 비록 ‘높은 산’과 같이 험난하고, ‘거친 광야와 들판’처럼 힘들고 고통스런 환경일지라도 우리 영혼이 그리스도 예수를 바라볼 때 우리가 서 있는 그곳은 그리스도의 평강이 가득한 하늘 나라가 됩니다.

3. 평강을 주시는 그리스도 예수를 바라보는 방법: 기도
자,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을까요? 두 눈을 들어서 푸른 하늘만 쳐다보고 살라는 말입니까? 아닙니다. 영이신 하나님은 육신의 눈으로 볼 수 없습니다. 영이신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는 우리도 영으로 나아가야합니다. 가장 좋은 방법이 바로 ‘기도’입니다. 우리가 마음을 모아 기도할 때 우리 영혼은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기도할 때 우리 영혼은 하나님을 바라보게 됩니다. 그래서 기도하는 자에게는 그리스도의 평강이 임하게 됩니다. 빌립보서 4장 6-7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빌 4:6)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빌 4:7)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어떤 상황 때문에 불안해하고 계십니까? 어떤 일 때문에 염려하고 계십니까? 말씀에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염려하지 않기 위해서 기도와 간구로 우리가 바라는 것들을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이야기하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이와 같이 하나님을 기도하며 하나님을 바라볼 때, 신비하게도 하나님께서 상황과 환경을 초월한 평강을 주심으로 우리 마음과 생각을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가도록 지켜 주십니다.
미국은 차가 없으면 장도 못 보고 교회도 못 가는 등 생활이 불편해서 차는 필수나 다름없습니다. 그러나 한국은 특별히 서울은 버스나 지하철 같은 대중교통이 발달해 있다 보니까 성인이 되도 운전면허를 딸 필요를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고, 운전면허가 없어도 직장생활 및 일상생활에 불편함 없이 사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그러나 한국에서 ‘교회 사역자가 되기 위해서는 운전면허가 있어야한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래서 저도 총신대학교 다닐 때 즈음에 운전면허를 땄는데요. 한국은 운전면허를 따기 위해서 총 3단계 시험을 통과해야 합니다. ‘필기시험’, ‘장내기능시험’, ‘도로주행시험’입니다.
제가 운전면허 시험을 ‘서울시 강남구 대치동 테헤란로’에 있는 ‘강남운전면허시험장’에서 봤거든요? 장내기능시험을 3번이나 떨어졌어요. 주행시험도 1번 떨어졌습니다. 제가 면허시험을 하도 많이 떨어지니까 시험보고 학교가면 친구들이 막 웃으며 놀립니다. “이야, 세상에 운전면허 4번이나 떨어지는 사람도 있네? 영목이 교회사역은 우찌하나?” 후배들도 웃으며 말합니다. “영목이형 또 떨어졌어요?” 지나가던 여자 후배가 자기는 1종 보통면허 한 번에 붙었다고 자랑을 하는데 제가 창피해서 얼굴이 다 붉어지더라고요. 우여곡절 속에서 운전면허를 땄는데요. 세상을 다 가진 기분이었습니다. 가난한 전도사가 차 살 돈이 어디 있습니까? 장롱면허로 수년간 지내다가 그렇게 때가 되어 교회 사역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사역지 가보니까 목사님들 어쩜 그리 운전을 잘하는지 몰라요. 남들은 다 운전을 잘 하는데저만 못하니까 너무 억울한 거에요. 그런데 운전을 잘 못하다 보니까 한 가지 습관이 생겼어요. 차만 타면 기도하는 거에요. 시동 걸기 전에 핸들 붙잡고 기도합니다. 때로는 교회 나이 많으신 할머니 권사님들 타시는 날이면 본네트에 손 얹고도 기도했어요. “하나님 사건 사고로부터 저를 지켜주세요.” 그렇게 하나님께 기도하고 나면 운전할 때 마음이 무척 평안합니다. 주행이 끝나면 시동 끄고 차에서 나가기 전에 감사기도 합니다. “하나님 오늘도 무사히 지켜 주셔서 감사합니다.”

결론. 기도하며 하나님을 바라볼 때 주님이 우리 마음을 붙잡아 주신다.
남들은 대수롭지 않게 타는 차고, 운전하는 것이 평범한 일상입니다. 그러나 저에게는 운전한다는 것 자체가 너무나도 큰 부담이었어요. 어쩌면 지금 이 코로나 기간 동안 어떤 분들에게는 삶이란 것이 평탄하고 대수롭지 않은 평범한 일상인 분들도 있을 겁니다. 그러나 마치 제가 기도하지 않으면 불안해서 자동차의 시동을 켤 수 없었던 것처럼, 오늘 하루를 시작하며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고는 당장 살 수 없을 것 같이 삶이 매우 힘든 분들도 분명 계실 겁니다. 경제적인 압박으로 인해 힘들어 하는 분들, 건강을 잃고 힘들어 하는 분들, 가정의 아픔과 어려움으로 인해 고난의 터널을 지나고 계신 성도님들도 있을 겁니다. ‘남들은 다 쉽게 운전해 가는 인생 같은데, 왜 이리 나만 사는게 이토록 어려운가?’하고 억울하게 생각하며 사는 분들 계시죠? 오늘부터 저와 함께 기도합시다. 우리가 기도하기 시작할 때 우리 인생의 운전대를 하나님께서 붙잡아 주십니다.
제가 고등학교 다닐 때 늘 저희 학교 입구에 붙어 있던 그림 하나가 기억납니다. 저희 고등학교 교복을 입은 남학생이 컴컴한 바다 위에서 배의 키를 잡고 항해하고 있습니다. 그 뒤에 예수님께 서 계십니다. 예수님의 왼손은 학생의 왼쪽 어깨를 올라가 있고, 오른손으로는 앞을 가리키시며 방향을 지시해주고 계십니다. 비록 바다는 폭풍우가 치고 있지만, 그림 속에서 예수님과 함께하는 학생의 표정은 평안해 보입니다. 바로 이것이 주님과 함께하는 자가 누릴 평강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인생은 하나님과 함께 할 때 비로소 안전합니다. 기도할 때 우리는 하나님을 바라보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바라볼 때 우리 마음에는 상황과 환경을 뛰어넘는 그리스도의 평강이 찾아오게 됩니다. 이 평강이 우리 마음을 지배하게 하십시오. 그렇게 모든 상황 속에서도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감으로써 하나님과 동행하는 복된 삶을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