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5/17] (전체예배영상) 성경인물 시리즈 베드로 (3) “베드로, 물 위를 걷다.” (마태복음 14장 22-33절)

사람마다 좋아하는 음식이 다릅니다. 예를 들면 나는 복숭아를 좋아하는데, 어떤 사람은 복숭아를 싫어합니다. 나는 김치찌개를 좋아하는데 상대방은 싫어할 수 있습니다. 그러고 보면 음식 뿐만 아니라, 이 세상 모든 것이 그것을 원하는 사람도 있고, 싫어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행복은 다릅니다. 이 세상 모든 사람은 누구나 다 행복을 원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사람이 다 행복한 것은 아닙니다. 왜 우리는 행복하지 않을까요? 행복이란 과연 무엇일까요? 요즘 [행복하십니까?]는 이 질문에 대다수 사람들이 ‘아니요’라고 대답합니다. 그 이유는 단연코 코로나 바이러스 때문 입니다.
현재 전 세계적으로 코로나 바이러스에 감염된 확진자의 숫자가 4백 50만명이 넘었습니다. 코로나로 인해 죽은 사망자는 약 30만명이나 됩니다. 뉴스를 보니까 지난 4월 유럽은 코로나 바이러스로 수많은 사람들이 죽자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최악의 참사”라는 말이 나왔습니다. 미국의 사정도 다르지 않습니다. 지난 13일 수요일, 미국의 연준 의장인 제롬 파월이란 사람이 말하기를 “코로나로 인한 미국의 경기 침체 범위와 속도가 전례가 없는 것으로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어떤 침체보다 훨씬 더 심각하다”고 말했습니다. 이처럼 뉴스를 보면 코로나 바이러스가 제2차 세계대전과 자주 비교되는 것을 쉽게 볼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인류 역사상 가장 큰 인명피해와 재산피해를 낳은 전쟁이 바로 제2차 세계대전 입니다. 전쟁 이후 집계한 사망자의 숫자만 5천만명이 넘습니다. 이것은 대략적인 숫자로, 보고되지 않은 희생된 민간인들까지 포함하면 7천만명에 도달할 것이라 추측하기도 합니다. 앞서 코로나로 인해 죽은 사람의 숫자가 30만명이라고 했으니, 현재 기준으로 보면 제2차 세계대전 때 전쟁으로 죽은 사람의 숫자가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해 죽은 사람의 숫자보다 165배가 넘습니다.
통계와 숫자가 모든 것을 말해주지는 않습니다. 또한 개인의 고통을 제 3자의 고통과 비교하는 것도 무리가 있습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우리는 제2차 세계 대전 때 사람들이 느낀 삶에 대한 두려움과 공포 그리고 낙심이 현재 코로나19로 인해 전세계가 당하고 있는 것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의 엄청난 것이었음을 추측해 볼 수 있습니다.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이후 역사를 돌아보니, 그 엄청난 고난 속에서 좌절하고 끝내 실패한 인생으로 마무리 지은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똑 같은 고난 속에서도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아름답게 성장하고 내면적 성숙해짐으로 더 많은 사람들에게 살의 희망과 기쁨을 가져다 준 이들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똑 같은 물을 마시지만 벌은 꿀을 만들고, 뱀은 독을 만들듯이, 똑같은 고난 앞에서도 전혀 다른 인생의 모습이 나올 수 있다는 것이죠.
세계 2차 대전 가운데 희생된 사망자 중, 전 세계적으로 가장 유명한 소녀가 바로 “안네의 일기”라는 책을 쓴 안네 프랑크 입니다. 그녀는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습니다. “어떠한 불행 속에서도 아름다움을 찾으려는 의지만 있다면 그만큼의 행복도 찾을 수 있다고 믿습니다. 그리고 행복한 사람들은 늘 다른 사람들까지 행복하게 만듭니다.” 16세의 꽃다운 나이에 전쟁 속에서 죽어야 했던 유태인 소녀 안네 프랑크가 남긴 이 말은 시대가 변화하여도 고통을 대하는 한 인간의 아름다운 면모를 보여 줍니다. 똑 같은 인생의 고통을 당하면서도 어떤 사람들은 그 고통 가운데 시들어가지만, 반대로 어떤 사람들은 그 고통 가운데 아름답게 꽃을 피웁니다. 오늘 우리는 본문에서 인생의 위기를 맞이한 베드로의 모습을 통해 고통의 숨어 있는 순기능은 무엇인지 또한 현재 고통에 처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어떠한 자세와 태도를 가져야 하는지 함께 살펴보려고 합니다.

1. 고난은 겸손하게 한다.

배를 타고 갈릴리 바다를 건너가던 예수님의 제자들은 큰 폭풍우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24절 말씀을 봅시다. “(마 14:24) 배가 이미 육지에서 수 리나 떠나서 바람이 거슬리므로 물결을 인하여 고난을 당하더라” 이미 육지에서 멀리 떠나 있었기에 지나 온 길로 다시 돌아갈 수도 없었습니다. 지금 이 배에 타고 있는 열 두명의 제자 중 4명은 어부 출신 입니다. 베드로, 안드레, 야고보, 요한… 이 네 사람은 갈릴리 바다에서 고기를 잡고 살아온 베테랑 어부들 입니다. 사람이 한 분야에서 오래 일하다 보면 그 분야에 익숙해지고 전문가가 되기 마련 입니다. 평생 공사판에서 일해 온 사람은 누구보다 현장의 생태를 잘 이해합니다. 흙은 언제 옮겨야 하는지, 벽돌은 어디로 가야 하는지, 시멘트는 어떻게 만드는지 모르는 게 없습니다. 공사판에서 잔뼈가 굵은 것이죠. 베드로, 안드레, 야고보, 요한 이 네 사람은 갈릴리 바다에서 잔뼈가 굵은 사람들 입니다. 그러나 이들아 가진 경력도, 경험도 폭풍우로 인해 집채만큼 높이 넘실대는 파도 앞에서는 속수무책이었습니다.
오늘 폭풍우를 맞이하여 자신이 가장 자신 있어 했던 갈릴리 바다에서 죽을 위기를 맞이한 제자들의 모습이야말로 현재 우리들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제야 인생을 어떻게 사는지 알겠다. 이렇게 하면 되겠구나?’ 싶다가도 갑작스럽게 발생하는 문제들 앞에 또 다시 좌절하고 넘어지는 것이 우리의 삶 입니다. 코로나 바이러스 사태 이전에는 삶이 평탄 했습니다. 뭐 넉넉한 것은 아니어도, ‘이렇게 살면 되겠구나?’ 싶은 세상을 살아가는 나만의 지혜, 경험, 능력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것만으로도 어느 정도 먹고 살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코로나 바이러스 사태가 터지고 보니까, 말 그대로 속수무책인 거에요.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습니다. 내 능력 밖의 일들이 너무 많이 일어나는 거에요. 내가 자랑하던 나의 지혜도, 나의 경력도, 나의 경험도, 나의 기술도… 그 어느 것도 이 인생의 위기를 극복하는데 별로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들은 인생에 내 힘으로 되지 않는 일들이 있다는 것을 새삼 실감하게 됩니다. 그제서야 우리는 이 세상을 나만의 힘과 지혜로 살아갈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게 됩니다. 이와 같이 고난은 우리들을 겸손하게 만들어 줍니다. 잘나갈 때는 내 힘으로, 내 지혜로 모든 것을 다 얻을 수 있을 것만 같았습니다. 그러나 인생의 고난 앞에 서 있을 때 비로소 나는 아무것도 아니며, 하나님의 도우심 없이는 살 수 없는 연약한 존재임을 인정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춘기를 심하게 겪고 있는 어느 십대 중반의 딸이 자기 어머니에게 말합니다. “엄마, 난 커서 절대로 엄마 같이 안 살꺼야. 엄마는 날 잘 이해 못해. 엄마는 날 잘 몰라. 엄마는 너무 무식해. 엄마는 세상을 잘 몰라.” 그 딸이 얼마나 어머니를 무시하고 어머니 속을 썩였는지 몰라요. 십대 때는 자기가 원하는 것은 뭐든지 다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어요. 우리 엄마처럼은 안 살겠다고 생각했어요. 세월이 가고 그 딸이 이제 나이 들어 시집을 가서 딸을 낳았습니다. 그런데 딸이 자기 어린시절 못지 않게 엄청 속 썩이는 거에요. 그제서야 자기가 얼마나 엄마 속을 썩였는지 깨달았어요. 그리고 자기 엄마에게 전화하는 거에요. “엄마, 아이가 이럴 때는 어떻게 해야 되? 엄마는 날 어떻게 키웠어? 우리 엄마 진짜 대단하다. 내가 엄마 였으면 다 포기했을탠데. 엄마 난 엄마처럼 잘 할 수 있을까?” 모든 사람은요 본래 그 마음이 교만합니다. 그래서 사람이란, 어려움을 당할 때 비로소 마음이 낮아지고 겸손해 집니다.
비즈니스 잘 되고 성공하는 사람은 실패하는 사람 잘 이해 못해요. 몸이 건강한 사람은 아픈 사람 잘 이해 못해요. 그러다가 자신이 실패하고 몸이 아프면 그제서야 주변에 실패한 사람들, 아픈 사람들 입장이 ‘공감’이 되는 거에요. 왜요? 자기도 겪어 보니까 세상에 내 맘대로, 내 뜻대로, 내 힘대로 안 되는 일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거에요. 마음이 겸손해 지는 거죠.
오늘 본문 속 제자들의 마음이 그러합니다. 폭풍우가 찾아오기 전, 제자들에게 갈릴리 바다는 그들의 놀이터나 다름 없었어요. “이건 내가 전문이지. 이 분야는 내가 잘 알지.” 갈릴리 바다 건너가며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할 필요도 이유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폭풍우를 만나고 보니까 완전히 사정이 변해버렸어요. 이제는 하나님이 도와주시기 않으면 망합니다. 하나님이 살려 주시지 않으면 죽습니다. 폭풍우를 만나니까 마음이 낮아집니다. 태도가 겸손해 집니다.
우리들도 마찬가지 입니다. 코로나 바이러스 사태로 인해 인생의 폭풍우를 만나셨습니까? 어쩌면 하나님은 이 난관을 통해서 우리 마음을 겸손하게 만들고 계신지도 몰라요. 여태까지는 내 힘으로, 내 경험으로, 내가 가진 기술로 얼마든지 살 수 있다고 생각해왔는지 몰라요. 그런데 인생의 폭풍우를 만나고 보니까 그게 아니라는 것을 절실히 깨닫게 되는 거에요. “아, 하나님이 안 도와주시면 나는 망하겠구나? 아, 여태까지 내가 살아온 것이 내 힘과 능력 때문이라 생각했는데 지금 다시 돌아보니까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였구나?”하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이죠. 하나님 없이는 살 수 없음을 인정하는 것, 그것이 겸손 입니다. 고난은 우리들로 하여금 겸손하게 만들어 줍니다. 인생의 폭풍우를 만나셨습니까? 하나님을 찾으십시오. 하나님께 기도하십시오. 하나님의 도우심 없이는 살 수 없는 인생 임을 겸손하게 고백하십시오. 하나님은 그와 같이 자신을 의지하는 겸손한 자를 구원하시고, 붙들어 주실 것입니다.

2. 고난은 성장하게 한다.

이와 같이 고난은 우리의 마음을 겸손케 합니다. 또한 고난은 우리의 신앙을 성장시켜 줍니다. 한 번 우리의 지난 삶을 돌아보십시오. 언제 우리의 믿음이 가장 많이 성장 했습니까? 언제 하나님을 가장 간절하게 찾았습니까? 평안할 때 입니까? 아니면 눈물 젖은 빵을 먹으며, 고통 가운데 신음하던 때 입니까? 사람은 고난 가운데 성장 합니다. 폭풍우를 만난 제자들의 믿음도 고난 가운데 성장하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오늘 본문에서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찾아오시는 시간 입니다. 25절 말씀을 봅시다. “(마 14:25) 밤 사경에 예수께서 바다 위로 걸어서 제자들에게 오시니” 밤 사경은 새벽 3시에서 6시를 가리킵니다. 하루 중 가장 춥고 가장 어두운 시간 입니다. 제자들이 배를 타고 육지를 떠난 시간은 해가 저물 때 즈음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지금 제자들은 적어도 9시간 이상 배를 타고 있었고, 적어도 서너 시간 넘게 폭풍우로 배가 뒤집어지지 않도록 비바람과 파도와 사투를 벌이고 있었던 것이죠. 그러다가 밤 사경이 되었습니다. 가장 추운 시간, 가장 캄캄한 시간, 배고프고, 지치고, 피곤한 시간 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밤 사경’에 예수님이 제자들을 찾아왔다는 이 말은, 제자들이 가장 힘들고 가장 괴로운 그 시간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찾아오셨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아마 이 설교를 듣고 계신 분들 중에는 현재 자신의 인생이 ‘밤 사경’을 지나고 계신 분들도 있을 것에요. 평생 살아오면서 이렇게 힘든 시간을 겪어보지 못한 분들도 계실 겁니다. 그것이 경제적인 위기이든지, 건강상의 문제이든지, 남에게 말못하는 가정 안에서 일어나는 갈등이든지…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사람 좋은 미소 보이지만, 정말 속으로는 눈물로 하루하루를 가슴앓이 하며 지내는 분들도 계실 거에요. 인생의 밤 사경이 찾아온 거죠. 그러나 우리에게 아직 희망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언제 찾아오셨다고요? 밤 사경에… 하루 중 가장 춥고, 가장 컴컴하고, 가장 피곤하고, 가장 외로운 그 순간에 우리 주님께서 제자들을 찾아오셨어요. 그와 같이 힘들고 괴로워하는 우리들을 오늘도 주님께서 찾아오고 계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더 흥미로운 사실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찾아오시는 방법입니다. 26절 말씀을 함께 봅시다. “(마 14:26) 제자들이 그 바다 위로 걸어 오심을 보고 놀라 유령이라 하며 무서워하여 소리지르거늘” 폭풍우 가운데 위기를 맞이한 제자들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찾아오셨어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어떻게 지금 제자들을 찾아오셨습니까? 바다 위를 걸어 오셨어요. 한 번 생각해 봅시다. 예수님께서 원하시면 얼마든지 다른 배 타고 오셔도 되었어요. 갈릴리 바다에 배가 한 두 척이었겠습니까? 그런데 예수님은 지금 배를 타고 오신 것이 아니라, 바다 위를 걸어 오셨어요. 왜 예수님은 바다 위를 걸어 오셨을까요? 성경 전체를 다 읽어보아도 예수님께서 바다 위를 걸어오신 사건은 본문 말씀 밖에는 없습니다. 주님은 항상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가셨어요. 그렇다면 왜 예수님은 지금 바다 위를 걸어 오셨습니까? 지금 누가 다급한 상황 가운데 있어요? 제자들이… 주님은 죽어가는 제자들을 가만히 지켜 보실 수 없었어요. 그래서 예수님은 가장 빠른 방법으로 제자들을 찾아오시기 위하여 바다 위를 걸어 오셨어요.
이와 같이 주님은요, 위기에 빠진 우리들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특별한 방법으로 일하십니다. 아니 세상에 그 누가 사람이 바다 위를 걸을 수 있다고 상상이나 했겠습니까? 이와 같이 위기 속에서 하나님은 주의 자녀들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우리의 생각하는 것이나, 상상할 수 없는 특별한 방법으로 역사하실 때가 있습니다.
폭풍우로 인해 죽어가는 제자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바다 위를 걸어오신 주님, 그런데 제자들은 주님을 알아봤어요? 못 알아봤어요? 바다 위를 걸어오시는 예수님을 본 제자들은 두려움에 빠진 나머지 그를 귀신이라 생각 했습니다. 이 때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27절 입니다. “(마 14:27) 예수께서 즉시 일러 가라사대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 말라” 예수님의 말씀을 봅시다. “안심하라. 나다. 두려워하지 말아라.” 여기서 예수님께서 사용하신 ‘나다’라는 표현은 매우 특별합니다. 헬라어로 성경을 보면, 이는 예수님께서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나타내실 때 쓰는 독특한 표현 입니다. 따라서 지금 두려워하고 있는 제자들을 안심시키시며 예수님께서 뭐라고 말씀하고 계신 거에요? “안심하라. 나는 너의 하나님이다. 두려워하지 말아라.”하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요즘 무엇 때문에 힘들어 하고 계십니까? 어떤 상황과 문제 때문에 한숨 짓고 계십니까? 우리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오늘 우리에게 찾아오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다시 한 번 들어봅시다. “안심하라. 나는 너의 하나님이다. 두려워하지 말아라.” 오늘 주님의 이 음성을 들으실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고통이 주는 또 하나의 유익이 바로 신아의 성장 입니다. 고통 가운데 우리의 신앙이 성장할 수 있는 이유는, 바로 그 고난을 통해서 나 홀로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와 함께 있음을 더 확실하게 깨닫게 되기 때문 입니다. 예수님은 바다 위를 걸어서라도 제자들을 찾아오셨습니다. 우리 주님은 단 한 순간도 제자들을 버린 적 없으시고, 잊으신 적이 없으십니다. 이것은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하나님 아버지는 단 한순간도 우리를 외면한 적이 없으십니다. 주님은 늘 우리를 도와주시고, 늘 우리를 찾아오십니다. 고난 가운데 찾아오시는 하나님을 더욱 가깝게 만나기를 축복합니다.

3. 고난은 새롭게 도전하게 한다.

자, 물 위를 걸어 오신 예수님을 보고 제자들은 깜짝 놀랐습니다. 사람이 물 위를 걷는다는 것이 어찌 가능하겠습니까? 그런데 오늘 여기서 베드로는 놀라운 믿음의 도전을 시도합니다. 28절 말씀을 봅시다. “(마 14:28)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만일 주시어든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 한대” 베드로가 예수님께 무엇을 구했습니까? 만일 지금 물 위를 걷고 계신 분이 정말로 예수님이시라면, 자기도 주님과 같이 물 위를 걷게 해달라는 거에요. 제가 한 가지 질문을 해 보겠습니다. 배 안이 안전할까요? 아니면 배 밖이 안전할까요? 당연히 배 안 입니다. 베드로는 지금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배 밖으로 나가려는 거에요.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정말로 내가 믿고 따르는 예수님이 전능하신 분이시라면, 이 불가능도 가능케 하실 것이란 믿음이 있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것이 베드로의 객기가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만일 베드로가 주님의 동의나 허락 없이 바다에 뛰어들었다면 미련한 객기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지금 객기를 부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에 동참하고 싶었던 것 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물 위를 걸으셨다면, 나도 주님 주시는 능력으로 능히 물 위를 걸을 수 있지 않을까?” 어쩌면 무모해 보이기도 한 이 도전을 주님께서는 허락해 주셨습니다. 29절 말씀 봅시다. “(마 14:29) 오라 하시니 베드로가 배에서 내려 물 위로 걸어서 예수께로 가되”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오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29절 말씀 다시 보세요. 배에서 내린 베드로, 배 밖으로 나온 베드로가 어떻게 했습니까? 예수님과 똑같이 물 위를 걸었습니다. 우리는 이 날 베드로가 몇 발자국을 걸었는지 정확하게 알 수는 못합니다. 그러나 변함없이 확실한 사실 하나는 그가 분명히 물 위를 걸었다는 것입니다. 모세도 물 위를 걷지는 못했어요. 홍해를 가르고 마른 땅을 지나갔을 뿐 입니다. 엘리야도 물 위를 걷지는 못했어요. 요단강을 가르고 마른 땅을 건너갔을 뿐 입니다. 구약성경을 대표하는 두 사람 모세와 엘리야도 하지 못한 일을 누가 했습니까? 베드로가 했습니다. 만일 이 날 비바람이 몰아치지 않았더라면, 만일 이날 폭풍우가 불지 않았더라면 베드로는 이러한 진귀한 도전을 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고난은 우리로 하여금 새로운 일들을 도전하게 만들어 줍니다. 어떤 사람들은 고난 가운데 위축됩니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은 고난 앞에서도 전능하신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을 가지고 “주님과 함께라면 이 힘들고 어려운 고난도 능히 이겨낼 수 있다”는 진취적인 태도를 갖고 살아가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바라보고 갈 때는 분명 물 위를 걸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의 시선이 예수님으로부터 폭풍우로 옮겨질 때 그는 바다에 빠질 수 밖에 없었습니다. 30-31절 말씀을 함께 보겠습니다. “(마 14:30) 바람을 보고 무서워 빠져 가는지라 소리질러 가로되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하니 (마 14:31) 예수께서 즉시 손을 내밀어 저를 붙잡으시며 가라사대 믿음이 적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 하시고” 베드로가 물 위를 걸으시는 예수님을 바라보고 믿음으로 배 밖으로 나왔을 때는 그 역시 물 위를 걸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몰아치는 바람을 보고 두려움에 휩싸였을 때 그는 물 아래로 빠져갔습니다. 이는 우리의 신앙을 그대로 잘 보여줍니다. 우리가 전능하신 하나님과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살아갈 때는 물 위를 걸어가듯이, 하나님 주시는 힘과 능력으로 살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세상을 바라보고 내가 처한 어려운 상황과 환경을 바라보며 두려움에 빠지게 될 때 우리는 낙심과 좌절할 수 밖에 없습니다. 31절에 예수님은 베드로를 책망하셨습니다. “믿음이 적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 주님은 오늘 동일한 질문으로 우리들을 책망하십니다. “믿음이 적은 자여 왜 내가 너를 도와줄 수 없다고 의심하였느냐?” 바다를 보고 두려움에 빠진 베드로처럼 우리들도 얼마든지 하나님의 힘과 능력을 의심할 수 있습니다. 그러할 때마다 주님께 믿음을 달라고 기도하십시오. 하나님께 도와달라고 간구하십시오. 31절에 ‘즉시’라는 단어 보이십니까? 우리 주님께서는 살려달라고 간구하는 자에게 지체하지 않으시고 ‘즉시’ 도와주십니다. 언제나 예수님을 바라보고 주님께 도움을 구하십시오.

결론. 고난 중에도 믿음으로 담대하게 살아가라

본문 한 구절만 더 보고 말씀을 맺겠습니다. 32절 말씀을 함께 봅시다. “(마 14:32) 배에 함께 오르매 바람이 그치는지라” 성난 폭풍우도, 집채 만한 파도도 예수님이 오시니까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 입니다. 아무리 힘들고 어려운 인생의 문제들도, 예수님께서 찾아오시면 해결할 수 있습니다. 이 세상의 그 누가 폭풍우를 그치게 할 수 있습니까? 오직 예수 밖에는 없습니다. 33절에 나오는 제자들의 고백처럼 예수님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전능하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 볼 때 인생의 모든 폭풍우가 그치게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세상을 바라보면 두려움이 떠오를 뿐입니다. 현재 우리 삶에 일어나는 많은 문제들은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우리를 한 숨 짓게 하고, 우리의 마음을 낙심케 할 뿐 입니다. 우리의 힘과 능력이 되시는 예수님만 바라보십시오. 주님을 바라볼 때, 주님의 도우심을 구할 때 기적은 일어납니다. 예수님의 별명이 바로 ‘Miracle Maker’ 입니다. 예수님이 가시는 곳곳마다 기적은 일어났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통해 물 위를 걸었습니다. 우리 삶에 예수님께서 찾아오시면 이와 같이 놀라운 일들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새로 시작하는 이 한주도 우리를 찾아오시는 예수님을 바라보며, 주와 함께 담대하게 이 세상을 믿음으로 승리하며 살아갈 수 있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