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1203 다시 자라기 시작하니라 (사사기 16장 15~31절)

 

블레셋 여인 들릴라는 삼손이 가진 초인적인 힘의 원천을 찾으려고 삼손을 재촉했습니다. 이에 삼손은 무려 3번이나 거짓말로 자신의 힘을 제압하는 방법을 들릴라에게 이야기했습니다. 삼손이 그녀에게 거짓말했다는 것이 밝혀질 때마다 들릴라는 삼손이 자신을 희롱했다고 불평하며 삼손의 마음을 힘들게 하였습니다. 이처럼 들릴라가 비밀을 알려 달라고 날마다 조르고 재촉하자 삼손의 마음이 몹시도 괴로웠습니다. 16절 말씀을 보면 삼손의 마음이 ‘번뇌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그가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는 표현이며, 이어서 그는 그 괴로움 때문에 ‘죽을 지경’에 이르렀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전에도 딤나에 사는 여인이 수수께끼의 정답을 알려 달라고 날마다 조르자 결국 그 수수께끼의 답을 알려줌으로써 자신이 큰 아픔을 당해야 했던 삼손은 이번에도 같은 실수를 반복하고 맙니다. 마침내 삼손은 자신의 진심을 들릴라에게 들어냈습니다. 그는 자신이 태어날 때부터 구별된 나실인이며 그의 머리에 한 번도 삭도를 댄 적이 없다고 말하며, 만일 자신의 머리를 자르면 힘의 원천이 사라질 것이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사실 삼손이 나실인으로서 지켜야 했던 것은 머리에 삭도를 대지 않는 것 하나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포도에서 난 것도 먹지 말아야 했고, 시체에 손을 대어서도 안 되었습니다. 게다가 지금 그가 하고 있는 것처럼 이방 여인과 관계를 가지는 것은 더더욱 금해야 했습니다. 삼손은 자신이 나실인으로서 거룩하게 살아야 한다는 것을 다 알고도 이 모든 것을 다 어겼습니다. 그러면서 여전히 자신이 머리에 삭도를 대지 않았다는 자부심은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나실인으로서 다른 규례들은 하나도 다 못 지켰지만, 태어나서 머리만큼은 단 한 번도 자르지 않았음에 대해서는 자부심을 느끼고 있었던 것이죠.

이게 마치 무엇과 같은가 하면, 어느 그리스도인이 성도로서 해서는 안 되는 죄악들을 다 지으면서도 자기 나름대로는 십일조 하고 주일성수 한다는 사실에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도 나 십일조는 해”, “그래도 나 주일날 교회는 간다”는 식의 자부심입니다. 삼손은 자신의 초인적인 힘이 머리를 자르지 않는 것에서 나온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힘의 원천은 그의 긴 머리카락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거룩한 삶 없이 머리카락만 긴 것이 하나님 보실 때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우리 성도들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도로서 살아야 할 모든 도리들은 무시한 채 세상의 유혹에 굴복하며 살아가면서도 자신이 택하여 집착하여 지키고 있는 그 하나의 규례가 우리를 지켜준다고 생각하는 것은 착각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온전한 삶을 살아가기를 원하십니다.

들릴라는 삼손이 자신에게 진심을 이야기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녀는 사람을 보내어 블레셋 방백들에게 삼손의 비밀을 알려줄 터이니 그들이 약속한 은을 준비해 오라고 말합니다. 성경은 들릴라가 삼손에게는 아무런 관심도 없고, 오직 돈을 좇고 있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삼손의 비참함을 더해줍니다. 들릴라는 삼손이 그녀의 무릎을 배고 잠들었을 때 사람을 불러 그의 머리털을 밀어버렸습니다. 들리라가 삼손에게 블레셋 사람들이 공격해 옴을 알리자 삼손은 잠에서 깨어 예전처럼 결박을 끊어버리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머리가 잘린 삼손은 이전과 같은 초인적인 힘을 발휘할 수 없었습니다. 20절 말씀을 보십시오. “삼손이 잠을 깨며 이르기를 내가 전과 같이 나가서 몸을 떨치리라 하여도 여호와께서 이미 자기를 떠나신 줄을 깨닫지 못하였더라” 삼손의 비극은 머리카락이 잘린 것이 아니라, 여호와께서 그를 떠난 것입니다.

마침내 블레셋 사람들은 삼손을 붙잡았습니다. 그리고 그의 두 눈을 뽑아버렸습니다. 삼손의 이야기를 보면 ‘보다’라는 단어가 사실 여러 차례 등장했습니다. 그 단어가 언제 사용되냐 하면 삼손이 블레셋 여인들을 ‘보았다’라는 말을 쓸 때 사용됩니다. 딤나의 여인을 좋게 보고, 가사의 창녀를 보았던 삼손… 이제 그의 두 눈이 뽑혔습니다. 얼마나 비참합니까? 블레셋 사람들은 이전에 삼손이 성의 문짝을 메고 달아났던 도시 가사로 두 눈이 뽑힌 그를 끌고 갔습니다. 가사로 잡혀간 삼손은 옥에 갇힌 채 맷돌을 돌리며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나라를 구원해야 하는 사사가, 적군의 감옥에 갇혀 쇠사슬에 묶인 채 두 무릎을 꿇고, 곡식을 가는 맷돌을 돌리고 있으니 얼마나 처량합니까?

자, 그런데 오늘 성경의 저자는 22절에 아주 흥미로운 대목을 이야기해줍니다. “(16:22) 그의 머리털이 밀리운 후에 다시 자라기 시작하니라” 이것은 삼손의 이야기가 이대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일이 시작되고 있음을 알리는 복선입니다. 자라나는 머리털은 상징입니다. 머리털 자체에 어떤 힘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따라서 머리가 자란다고 해서 그의 힘이 다시 생긴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고 있음을 알려주는 장면입니다.

삼손을 붙잡은 블레셋 사람들은 승전가를 부릅니다. “우리의 신이 우리 원수 삼손을 우리 손에 넘겨주었다” 이와 같은 신에 대한 찬양의 노래는 여호와를 섬기는 주의 백성들이 하나님께 불러야 할 찬양입니다. 그러나 삼손이 자신의 사명을 저버리고 육신의 정욕을 위하여 살아가자, 하나님께서 받으셔야 하는 찬송이 우상에게 넘어가버리는 일이 발생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삼손은 블레셋 사람들의 축제에 불려가게 됩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그를 조롱하며 그가 재주를 부리게 하였습니다. 사람들은 삼손을 웃음거리로 만들었습니다.

삼손은 블레셋 사람들이 모여 있는 집을 받치고 있는 두 기둥 사이에 서게 됩니다. 삼손은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주 하나님, 저를 기억해 주십시오. 하나님, 저에게 한 번만 더 힘을 주십시오. 내 두 눈을 뽑아 버린 이 블레셋 사람들에게 원수를 갚게 해 주십시오.” 이렇게 외친 삼손은 블레셋 사람들이 모인 다곤 신전의 지붕을 떠받치고 있는 두 기둥을 무너뜨렸습니다. 삼손은 블레셋 사람들에게 붙잡혀 두 눈이 뽑히고 조롱거리가 되어 차라리 죽기를 바라고 있었습니다. 자신의 죽음을 통해서라도 블레셋 사람들에게 원수를 갚고 싶었습니다. 결국 삼손은 두 기둥을 무너뜨렸고, 다곤 신전이 무너지며 수천명의 블레셋 사람들이 죽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삼손의 이야기는 철저한 비극으로 마무리 됩니다.

비록 삼손은 20년이란 긴 세월 동안 사사로 지냈지만, 이스라엘은 여전히 블레셋의 통치 아래 있었습니다. 삼손은 유명무실한 사사였습니다. 태어날 때부터 하나님의 선택 받은 영광스러운 사람이었으나, 사적 욕망을 추구하는 바람에 삼손은 적군에게 두 눈이 뽑힌 채 조롱거리가 되어 비참하게 죽었습니다.

삼손의 이야기는 욕망에 사로잡힌 삶이 얼마나 비참한지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이 주신 힘으로 자신의 탐욕과 유익만을 추구하며 살아간다면 결국 세상의 조롱거리가 될 것입니다. 우리의 탐욕을 내려놓고 오직 하나님을 위해 살아가십시오. 철저하게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며 살아가십시오. 그러할 때 우리들의 삶은 가장 복되고 풍성한 삶이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