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930 공정한 재판과 절기 준수 (출애굽기 23장 1~19절)

 

고대 사회에서는 일상생활의 작은 대립과 오해도 재판을 통해서 해결하곤 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재판이 불공정하게 이뤄지면 백성들은 억울함에 빠지고, 사회 전체가 부패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공정한 재판을 할 것을 명령하셨습니다. 재판에 증인으로 참석한 이가 근거 없는 이야기를 하는 것은 공정한 판결을 방해합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증인으로 나선 이가 ‘허망한 풍설’ 즉 ‘거짓말’을 퍼뜨리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거짓된 풍문은 진실의 여부와 상관없이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치는 결과를 초래합니다. 오늘날 인터넷에 있는 거짓 뉴스들은 천문학적인 피해를 사회에 안겨주고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재판장에 소환된 증인이 거짓되고 근거 없는 이야기들을 하는 것은 사회에 큰 피해를 가져오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제 9계명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하지 말라”는 말씀을 더욱 구체화하여 오늘 본문처럼 증인으로서 위증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특별히 1절 말씀을 보면 “악인과 연합하여 무함하는 증인이 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죄가 누구에게 있는지 뻔히 다 알면서도 악인이 권세를 부리는 자들이라는 이유로 그 편에 합세하여 의로운 자에게는 불리한 증언을, 악인에게는 유리한 증언을 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자신의 이해 관계에 따라서 아는 것을 모르는 체 하는 것과, 모르는 것을 아는 듯이 거짓 증언 해서도 안 됩니다.

오늘 본문 1-3절까지는 법정에서 증언함에 있어서 준수사항들을 잘 정리해 놓았습니다. 1절에서는 거짓 증언하지 말 것. 2절에서는 다수의 의견을 따라 악을 행치 말 것. 3절에서는 가난한 자를 위하여 편들지 말 것입니다. 특별히 3절을 주목해 봅시다. “(출 23:3) 가난한 자의 송사라고 편벽되이 두호하지 말지니라” 어떤 사람이 가난하다는 이유만으로 그가 늘 무죄인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평상시에 가난한 자, 힘 없는 자, 사회적 약자를 도와야 할 의무가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지금 죄가 있다고 의심받는 자가 가난한 자이며 사회적 약자라는 이유만으로 그에게 유리한 증언을 해서는 안 됩니다. 오늘 말씀을 유심히 보시면 3절과 6절의 내용이 동일합니다. 6절을 봅시다. “(출 23:6) 너는 가난한 자의 송사라고 공평치 않게 하지 말며” 왜 이렇게 똑 같은 내용이 두 번 반복되는 것일까요? 1-3절은 재판에 ‘증인’으로 참석한 자에게 주어지는 내용이고, 6-9절까지는 재판에 ‘재판관’으로 참석한 자에게 주어지는 내용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나중에 레위기를 읽을 때도 이와 비슷한 구조를 볼 수 있습니다. 레위기 1-7장을 보면 제사를 드리는 규정이 2번 반복해서 나옵니다. 언뜻 성경을 읽으면, 이미 앞에서 이야기한 불필요한 내용을 반복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자세히 읽어보면 첫 번째 설명은 제사를 드리는 이스라엘 백성의 입장에서 기록되었고, 두 번째 설명은 제사를 집례하는 제사장의 입장에서 기록되어 있습니다. 성경은 결코 불필요한 내용을 반복하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도 재판장에 참석하는 ‘증’인과 ‘재판관’의 입장을 두 개로 나누어 각각의 역할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1-3절까지는 증인의 역할, 6-9절까지는 재판관의 역할입니다. 판사 입장에서는 가난한 사람, 소외된 사람들의 편을 들어준다 한들 자기에게 득이 될 것이 없습니다. 얻어낼 것이 없다는 이유로 가난한 자들이 억울하도록 불공정하게 재판해서는 안 됩니다. 공의로우신 하나님은 재판관들이 공의로운 판결을 내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7절에서 하나님은 재판관들이 거짓된 일과 아예 관계를 멀리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재판관들이 악한 일에 연루되어 있으면 어찌 공정한 판결을 내리겠습니까? 판사가 악한 자들과 범죄를 가까이하면서, 재판에서는 선한 판결을 내린다는 것 자체가 이미 불가능한 일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재판관이 거짓 일을 멀리하라고 가르치십니다. 또한 무죄한 자, 의로운 자들을 죽이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재판관이란 자리는 한 사람의 목숨과 운명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막중한 책임이 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의로운 자는 의롭다 판결하고, 악한 자는 악하다고 공정하게 판결을 내리라고 가르치십니다. 그러한 공정함을 위하여 8절 말씀처럼 재판관이 뇌물을 받아서는 안 됩니다. 뇌물은 ‘밝은 자의 눈을 어둡게 한다’고 했습니다. 또한 재판에 참석한 사람이 이방인 나그네라고 해서 그를 무시하거나 불공정하게 대우하거나 학대해서도 안 됩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공평한 재판을 통해서 이스라엘 공동체에 하나님의 공의와 정의를 세울 것을 명령하셨습니다.

10절부터 13절까지는 안식년과 안식일에 관한 규례를 담고 있습니다. 여섯 해 동안은 땅에 씨를 뿌리고 그 열매를 거둡니다. 일곱째 해는 다릅니다. 제 7년째 되는 해는 땅을 경작하지 않고 묵혀 둡니다. 거기에 자연적으로 발생하는 소출은 가난한 자들이 먹고 또 남은 것은 들짐승이 먹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일년 동안 농사를 짓지 않는 것이 농부들에게는 얼마나 큰 손해이겠습니까? 특별히 11절을 보면, “너의 포도원과 감람원도 그리할지니라”고 했습니다. 포도는 팔레스틴 지역에서는 음료의 공급원이 었습니다. 감람 즉 올리브는 그 기름을 통해 집안을 밝히고, 기름으로 상처를 치료하고, 제사시 사용하는 등 아주 요긴한 생활 필수품이었습니다. 팔면 상당한 돈도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 중요한 비즈니스를 매 7년마다 1년간 쉬게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한 해 동안 씨를 뿌리지 않고 경작하지 않는다는 것이 어찌 쉬운 일이겠습니까? 따라서 안식년을 갖기 위해서는 하나님께서 먹이시고 돌보신다는 믿음이 필요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안식일 규례에 순종함으로써 물질적인 이익보다 하나님 명령에 순종하는 것에 대한 믿음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또한 6년간의 노동을 통해서 일하지 않는 안식년 때도 충분히 먹을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공급해 주시는 크신 능력의 하나님이심을 일깨울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이 안식년을 통하여 육체적, 경제적 노동에 몰두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안식을 통하여 하나님 안에서 영적인 일에 더욱 매진하는 기회를 갖기를 원하셨습니다. 또한 안식년에 자연적으로 발생한 곡식을 통하여 가난한 자들과 들짐승까지도 먹이시고 돌보시는 하나님의 모습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 나라에서는 모든 구성원들이 기쁨과 만족을 누리게 될 것을 깨닫게 됩니다.

14절부터는 이스라엘 민족의 삼대 절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출 23:14) 너는 매년 삼차 내게 절기를 지킬지니라” 3대 절기는 이스라엘 남자들이 매년 준수해야 할 의무가 있었습니다. 17절 말씀을 보면, 이스라엘 남자들은 여호와께서 지정하신 장소에 나아가 이 3대 절기들을 지켜야만 했습니다. 여기서 지정된 장소란 광야 생활할 때는 ‘회막’을 가리키고, 성전을 건축한 이후에는 예루살렘 성전을 가리킵니다. 3대 절기에 대한 규례는 이 말씀이 주어진 지 약 1500년 뒤인 예수님 시대에도 지켜지게 됩니다.

3대 절기 중 첫번째 절기는 ‘무교절’입니다. 15절을 봅시다. “(출 23:15) 너는 무교병의 절기를 지키라 내가 네게 명한 대로 아빕월의 정한 때에 칠 일동안 무교병을 먹을지니 이는 그 달에 네가 애굽에서 나왔음이라 빈 손으로 내게 보이지 말지니라” 무교절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한 사건을 기념하는 절기입니다.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급하게 나오며 먹은 누룩이 없는 빵, 효모가 들어가지 않아 발효되지 않은 납작한 빵을 먹은 것을 회상하며 이 절기에는 누룩이 없는 빵을 먹곤 했습니다. 15절에 나온 아빕월은 유대 종교력으로 보면 한 해의 시작인 제 1월입니다. 1월 10일에 1년된 흠 없는 어린양을 구별하여 두고, 14일에 그 양을 잡아 피를 문설주와 인방에 바릅니다. 그 밤에 잡아 죽인 어린 양을 온 식구들이 함께 먹습니다. 그리고 다음날인 1월 15일부터 7일 동안 누룩 없는 빵을 먹었습니다. 무교절을 통해서 이스라엘은 애굽 사람들의 손에서 그들을 구원하신 하나님을 향해 감사와 찬양을 드렸습니다. 15절 후반절을 보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빈 손으로 내게 보이지 말지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신명기 16장 16-17절을 보면 “네 하나님 여호와의 택하신 곳에서 여호와께 보이되 공수로 여호와께 보이지 말고, 각 사람이 네 하나님 여호와의 주신 복에 따라 그 힘대로 물건을 드릴지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또한 신명기에서는 이러한 말씀이 무교절 뿐만 아니라 맥추절, 수장절에 다 적용이 됩니다. 물론 이 표현은 ‘손에 아무런 예물도 가지지 않은 채로’ 하나님 앞에 오지 말라는 뜻입니다만 준비되지 않은 자세와 상태로 주님 앞에 나오지 말라는 뜻도 있습니다. 삼대 절기는 단순히 흥겹게 놀로 즐기는 절기가 아니라, 이스라엘을 구원하신 하나님께 대한 감사와 찬양을 드리는 절기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주님께 나오는 백성들에게 정성스런 예물과 그들의 온전한 예배를 요구하셨습니다.

삼대 절기 중 2번째 절기는 맥추절이고, 3번쨰 절기는 수장절입니다. 16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출 23:16) 맥추절을 지키라 이는 네가 수고하여 밭에 뿌린 것의 첫 열매를 거둠이니라 수장절을 지키라 이는 네가 수고하여 이룬 것을 연종에 밭에서부터 거두어 저장함이니라” ‘맥추절’은 무교절을 지나고 7주의 시간 즉 49일을 보내고 제50일째가 되는 날에 절기가 시작됩니다. 그래서 맥추절을 ‘칠칠절’ 혹은 ‘오순절’이라고도 부릅니다. 이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이 그 해에 처음 거둔 보리 열매를 가지고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와 같은 이유로 맥추절을 ‘초실절’이라고도 불렀습니다.

삼대 절기의 3번째 절기인 ‘수장절’은 말 그대로 곡식과 열매를 수확하고 저장하는 절기입니다. 이 때는 포도와 올리브 같은 팔레스틴의 주요 농산품들의 한 해 추수가 모두 끝나는 시기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한 해의 모든 수확물들을 다 거둬 들인 뒤에 초막을 짓고 거기서 7일 동안 생활하였습니다. 그래서 ‘수장절’을 ‘장막절’ 또는 ‘초막절’이라고도 부릅니다. 이와 같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벽돌로 지은 집을 놔두고, 수장절에는 7일간 장막을 치고 그 안에서 생활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것은 이스라엘 백서이 출애굽 이후 무려 40년 동안이나 장막에서 생활했던 고통스런 선조들의 경험을 기억하고, 그 가운데서 그들의 생명을 보존하여 주시고, 먹이시고 보호하시고, 마침내 약속의 땅으로 무사히 인도해 주신 하나님의 크신 은혜를 다시 한번 기념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이와 같이 무교절, 맥추절, 수장절 삼대 절기를 준수함으로써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베푸신 은혜를 기념하고 하나님을 섬기게 하였습니다.

18-19절에는 하나님께 제사를 드릴 때 금하시는 세 가지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첫쨰로, 희생의 피를 유교병과 함께 드리지 말라고 했습니다. 18절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내 희생의 피”는 유월절 어린 양의 피를 가리킵니다. 따라서 유월절 어린 양의 피와 누룩이 들어간 빵인 유교병을 함께 드리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어린 양의 피는 거룩하신 예수님의 보혈을 상징합니다. ‘누룩’은 오염을 상징합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부패한 것을 상징하는 유교병과 거룩한 것을 상징하는 유월절 어린 양의 피를 함께 드리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고전 5:7-8).

둘째로 하나님께 드릴 제사를 위해 바친 희생 제물에서 나온 기름을 다음 날 아침까지 남겨 두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18절에 사용된 ‘기름’이란 히브리어 단어는 어린 양의 신체 부위 가운데 가장 좋은 부위라는 의미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제사 드릴 때 이 부위는 제사장이 불태워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하나님께서 드려졌던 거룩한 제물이 잘못 사용되거나 나뒹굴러 다니면 하나님의 거룩하심이 훼손됩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그것을 다음 날 아침까지 남겨 두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19절에 처음 익은 열매 즉 가장 좋은 것, 으뜸의 것을 하나님께 드리라는 말씀과 일맥상통합니다.

셋째로, 염소 새끼를 그 어미 염소의 젖으로 삶아서는 안 됩니다. 이는 비록 하찮은 짐승일지라도 그 새끼를 어미의 젖에 넣어 삶는 것은 비윤리적인 행동이라 말씀하셨습니다. 심지어 레위기 22장 28절을 보면, 소나 양이나 어미와 새끼를 같은 날 죽이는 것도 하나님은 금지하셨습니다. “(레 22:28) 암소나 암양을 무론하고 어미와 새끼를 동일에 잡지 말지니라” 신명기 22장 6절을 보면, 하늘에 나는 새조차도 새 둥지에서 어미가 알을 품고 있는 것을 보게 되면, 어미와 새끼를 둘 다 가지고 가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무리 하찮아 보이는 생명체일지라도 하나님께서 주신 생명이기에 소홀히 대해서는 안 됩니다. 또한 이와 같이 짐승의 생명조차도 소중하게 생각하시는 하나님께서 심지어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인간의 삶과 생명을 얼마나 소중하게 생각하실지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