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822 사도행전 강해 (16) 애니아의 치유와 다비다의 부활 (사도행전 9장 32~43절)

1.   애니아를 치유하심

스데반의 순교 이후 그리스도인들은 핍박을 피하기 위하여 예루살렘에서 빠져나와 이스라엘 전지역으로 흩어져 살아가게 됩니다. 이에 예루살렘 교회의 수장이었던 베드로는 유대, 사마리아, 갈릴리 지역을 순회하며 흩어져 생활하고 있는 그리스도인 공동체들을 방문했습니다. 베드로는 각 지역에 사는 신자들을 방문하여 그들을 격려하였고, 또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쳤습니다. 그러던 중 하루는 베드로가룻다라는 도시에 들리게 되었습니다. 룻다는 예루살렘에서 서쪽으로 약 40킬로미터 (25마일)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는 큰 도시입니다. 애굽과 시리아를 이어주고, 지중해 연안에 위치한 욥바라는 도시와 수도 예루살렘을 중간에 위치한 교차지점으로 상업의 중심지였습니다. 베드로는 그곳에서 중풍병에 걸려 지난 8년간 사지가 마비된 채 침상에 누워서 지내야만 했던 애니아라는 이름의 한 여성을 만나게 됩니다.

팔과 다리를 쓰지 못해 자기 마음대로 몸을 가누지 못한다는 것이 얼마나 불편합니까? 누군가의 도움이 없으면 화장실도 자기 마음대로 가지 못 갑니다. 음식도 앉아서 먹을 수가 없습니다. 옷도 갈아입지 못하고, 세수도 샤워도 자기 마음대로 못합니다. 그러니 중풍병에 걸려 하루하루 침상에 누워 지내야 했던, 애니아라는 이 여인의 지난 8년이 얼마나 괴로웠을까요? 해가 지고 어두운 밤이 찾아오면 홀로 누워 있는 병상에서 남몰래 얼마나 많은 눈물을 흘렸을까요? ‘이대로 하루를 더 살아가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하고 삶을 포기한 적도 있진 않았을까요?

          애니아에게는 중풍병이라는 큰 아픔이 있었듯이, 지금 말씀을 듣고 계시는 우리 성도님들을 힘들게 하는 중풍병과 같은 인생의 문제들은 무엇입니까? 도무지 내 힘으로 해결해보려고 해도 벗어날 수 없는 중풍병과 같은 상황은 무엇입니까? 때로는 돈으로도, 사람으로도, 우리의 능력으로도 도무지 해결할 수 없는 어려운 문제들이 우리의 마음을 힘들게 합니다. 과연 우리에게는 아무런 소망도 없는 것일까요? 성경은 우리에게 아직 마지막 한 가닥 소망이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우리 삶에 유일한 소망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에게 있습니다. 예수님은 부활 승천하신 후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지만, 또한 주님은 변함없이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을 다스리고 계시며, 성령으로 우리와 함께 하고 계십니다. 예수님께서 함께하시기에 우리에게는 여전히 소망이 있습니다.

          오늘 이야기의 반전은 베드로의 방문으로 시작됩니다. 사도행전에서 사도들의 방문은 사도들 안에서 그들과 함께하시는 예수님께서 직접 방문하심과 같습니다. 베드로는 지난 8년동안 중풍병으로 인해 마음대로 서 있지도 앉아 있지도 못한 채, 언제나 침상 위에 누워 있어야만 했던 애니아를 긍휼한 마음으로 바라보았습니다. 베드로는 그녀가 그처럼 중풍병에 걸려 살아가는 모습이 자녀를 향하신 하나님 아버지의 뜻이 아님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본문에 베드로가 기도하는 모습은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그는 애니아에게 말을 걸기 전 아마도 예수님께서 이 여인을 고쳐 주시기를 간절히 구하는 기도의 시간을 가졌을 것입니다.

          이제 기도한 이후 베드로의 목소리를 들어봅시다. 34절 말씀입니다. “( 9:34) 베드로가 가로되 애니아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를 낫게 하시니 일어나 네 자리를 정돈하라 한대 곧 일어나니애니아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대를 고쳐 주십니다. 일어나서, 자리를 정돈하시오베드로는 그가 애니아를 고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애니아를 치유하신다고 말했습니다. 베드로가 애니아의 중풍병을 고치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다만 그녀의 병이 낫도록 기도하는 것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베드로가 애니아의 중풍병을 고쳐주십사 하나님께 드리는 그의 기도를 기적의 통로로 사용하셨습니다. 기도에는 능력이 있고, 기도하는 자의 삶에는 반드시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때로는 힘든 가족들이나 사랑하는 이들의 아픔을 곁에서 보며, 그들을 위해서 아무것도 해줄 수가 없고, 기도밖에 할 수 없는 우리의 현실이 매우 무력하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사실 우리가 사랑하는 이들을 위해서 할 수 있는 가장 위대한 일이 기도입니다. 기도야말로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는 가장 확실한 은혜의 통로이기 때문입니다. 기도는 내 손에 있는 상황과 문제들을 하나님의 손에 맡겨 드리는 작업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삶의 문제를 놓고 기도할 때 하나님은 역사하시기 시작합니다.

, 하나님께서는 베드로의 기도를 통해서 역사하셨고, 애니아를 고쳐 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잠시 한 번 생각해봅시다. 지난 8년 동안 베드로 말고는 그 누구도 애니아를 위해서 기도한 적이 없었다는 뜻일까요? 애니아는 중풍병이 낫도록 기도를 하지 않았을까요? 그녀는 다른 그 누구보다도 자신의 병이 치유되기를 위해서 간절하게 기도했을 것입니다. 애니아의 나이를 우리가 알 수 없습니다만, 어쩌면 그녀의 부모, 남편, 형제들, 자매들, 자녀가 있었다면 아이들도 그녀를 위해서 매일 밤 간절히 기도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8년 동안 아무런 변화가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그들의 기도는 다 헛수고였던 것일까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알 수 없는 때인 주님의 때에, 주님의 방법을 통해서 일하십니다. 때로는 우리가 기도한 후에도 즉각적으로 기도응답이 주어지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오랫동안 기도한 것 같은데도 문제가 해결되지 않거나, 어려운 상황이 계속 이어지는 경우들이 오히려 더 많아 보입니다. 문제가 지금 당장 해결되지 않는 것 같아 보인다고 해서 우리가 하나님께 드린 기도가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듣고 계시기에 기도는 어떠한 모습으로든 반드시 응답을 받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서 한 가지 주목해 보고 싶은 사실이 있습니다. 34절 말씀을 보면, 베드로는 애니아에게 말하며 애니아 집사님, 예수님께서 집사님을 고쳐 주실 겁니다.”하고 미래형으로 말하지 않았습니다. 베드로는 그가 애니아에게 말하고 있는 바로 그 순간에 이미 예수님께서 그녀의 몸을 고치고 계시다고 말했습니다. 베드로는 치유하시는 예수님의 능력이 즉각적으로 나타날 것임을 믿었습니다. 만일 이와 같은 베드로의 믿음을 우리 기도에 적용해본다면 우리가 기도하는 그 순간에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나고 있음을 믿음으로 고백하며 예수님께서 나중에 고쳐 주실 줄 믿습니다.”가 아니라 예수님께서 지금 고치고 계십니다.”로 변화될 것입니다. 우리 이 시간에 믿음을 가지고 선포해 보십시다. 저를 따라해 주십시오.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금 이 순간 나를 치유하십니다.” 사랑하는 코너스톤 성도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께서 바로 지금 이 순간 여러분은 치유하십니다. 주님은 우리의 병든 몸을 치료하시고, 우리의 상한 마음을 치유하십니다. 오늘 보문에서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바로 그곳 그 시간에 애니아를 고치고 계시다고 선언했습니다. 베드로와 함께하셨던 예수님은 동일하게 우리와 함께하고 계십니다. 그 예수님께서 지금 이곳에서 우리를 치유하고 계심을 믿음으로 고백하시기 바랍니다.

          지난 8년간 중풍병으로 인해 몸을 가눌 수 없어, 침상에서 누워지내야만 했던 애니아는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나게 됩니다.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초자연적인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그 어떤 의사도 고칠 수 없었던 중병이 치료되는 기적이 나타났습니다. 베드로의 고백처럼 예수님께서 애니아의 아픈 몸을 단번에 치료하셨습니다. 애니아는 8년만에 스스로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주변에서 그 광경을 지켜보던 가족들이 있었다면 눈물이 왈칵 쏟아져 나왔을 것입니다. 또한 주변 사람들은 중풍병자 애니아가 스스로 일어나는 모습에 놀라서 소리를 내며 탄성을 질렀을 것입니다. 그리고 애니아의 병이 나았다는 소식은 순식간에 마을 전체로 전달되었습니다. 동네 사람들은 소문의 진상을 확인하기 위하여 애니아를 보기 위해 찾아왔고, 그녀의 병이 깨끗하게 나은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이 사건을 통해 그 도시에 사는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2. 다비다를 다시 살리심

발 없는 말이 천리를 간다고 애니아의 중풍병이 완전히 치유되었다는 소식은 마을 밖까지 전파되어 룻다에서 약 16km (10마일)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한 욥바라는 마을에까지 전해졌습니다. 지중해 해안가에 위치한 욥바라는 도시에는 다비다라는 이름을 가진 여제자가 살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항상 선한 일을 하고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일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돈과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아낌없이 나눠주었습니다. 특별히 다비다는 가난한 과부들을 많이 도와주었습니다. 그녀가 손수 만든 옷들을 가지고 도움이 필요한 과부들에게 나눠 주기도 했습니다. 오늘날에야 옷을 쉽게 구할 수 있습니다만, 신약시대만 해도 옷은 재산목록에 들어갈 정도로 귀했습니다. 돈을 꾸고 갚을 능력이 안 되면 입고 있던 겉옷을 압류해 갈 정도로 그 당시 옷은 귀중품이었습니다. 그러나 가난한 사람들은 옷을 마련한 형편이 변변치 않았고, 그 때문에 다비다는 여러 가지 옷가지들을 손수 만들어 어려운 이웃들에게 나눠주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교회 안에서 사람들에게 사랑을 많이 베풀었던 여제자 다비다, 그녀가 병들어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에 욥바에 살고 있는 그리스도인 공동체는 큰 슬픔에 빠졌습니다. 사람들은 그녀의 시신을 씻어 다락방에 두었습니다.

유대인의 장례 문화를 살펴보면, 한국과 마찬가지로 염을 합니다. 고인의 시신을 깨끗하게 닦습니다. 이는 유대인들이 부활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어느 때든지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될 때에 깨끗하게 나타나도록 하려는 뜻에서 죽은 자들의 몸을 씻어 온 것이 유대인들의 전통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워낙 덥고 뜨거운 지역이라 시신이 금방 부패합니다. 그래서 사람이 죽으면 오래 기다리지 않고 매장하는 것이 장례 풍습입니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다비다의 시신을 바로 매장하지 아니하고 다락에 눕혀 두었습니다.

그렇다면 욥바에 사는 그리스도인들은 왜 이와 같이 다비다의 시신을 다락에 두었을까요? 구약성경을 통틀어, 사람이 죽었다가 살아난 경우가 딱 두 번 있습니다. 엘리야가 시돈에 속한 사르밧 과부의 죽은 아들을 살려낸 사건, 엘리야의 수제자 엘리사 선지자가 수넴 여인의 죽은 아들을 살려낸 사건, 이렇게 딱 두 번입니다. 공교롭게 이 두 사건 모두 죽은 자들이 살아난 집 안의 장소가 같습니다. 바로 다락입니다. 욥바에 사는 그리스도인들이 다비다의 죽은 시신을 매장하지 못하고, 다락에 안치해 둔 이유는 혹시라도 하나님께서 그녀가 살아 생전에 행한 선하고 착한 행실을 기억하사, 그녀에게 특별하 은혜를 베푸시지는 않을까?’하는 일말의 소망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간절한 소망과는 다르게 이미 죽은 다비다의 시신은 꿈쩍도 하지 않았습니다. 다비다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았던 과부들이 그녀의 곁을 떠나지 않고 슬퍼하며 울고 있었습니   .

때마침 욥바의 제자들은 그곳에서 가까운 곳에 위치한 룻다에 예수님의 수제자 베드로가 머물고 있다는 소식을 듣게 됩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베드로를 통해서 애니아의 오래된 중풍병을 고쳐 주셨다는 기적의 소식까지 듣게 됩니다. 이에 욥바에 사는 제자들은 두 사람을 룻다에 있는 베드로에게 보내어 신속히 욥바에 와 달라고 부탁을 했습니다. 본문 37-38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 9:37) 그 때에 병들어 죽으매 시체를 씻어 다락에 뉘우니라 ( 9:38) 룻다가 욥바에 가까운지라 제자들이 베드로가 거기 있음을 듣고 두 사람을 보내어 지체 말고 오라고 간청하니 38절을 보면 욥바의 형제들은 룻다에 머물고 이는 베드로에게 지체 말고 오라!’고 간절히 요청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미 다비다는 죽었습니다. 장례식에 참여하는 것이라면, 굳이 베드로가 지체하지 않고 욥바에 갈 이유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왜 이렇게 베드로가 빨리 욥바로 와 주기를 바라고 있었던 것일까요? 그것은 그들이 앞서 다비다의 시신을 바로 매장하지 않고 그 집 윗층 다락에 안치해 놓은 이유와 같습니다. 신학자 [존 칼빈]은 이 대목을 보고 이렇게 해석했습니다. “그들에게는 죽은 다비다가 살아날 소망이 어느 정도 있었다.” 설교를 준비하며 이 대목을 읽는데 온몸에 전율이 일어났습니다. “그래, 이게 바로 참 믿음이구나!” 예수님은 죽은 자도 살리신다는 믿음! 예수님은 불가능한 일이 없으시다는 믿음! 사람을 할 수 없으나, 예수님은 할 수 있다는 믿음! 우리에게도 욥바의 제자들이 가진 이와 같은 믿음이 있기를 축복합니다.

수술실에 들어간 사람이 죽기 전에는 의사 선생님의 하얀 가운을 꽉 붙잡고 의사 선생님, 제발 저 사람 좀 살려주세요.” 하고 애원해 보고, 두 손을 꽉 모아 하나님께 기도하며 울구불구 난리를 쳐보겠으나, 사람이 죽은 후에는 그런 소망도 다 사라지기 마련입니다. 다비다는 이미 죽었습니다. 그녀가 죽었다는 사실이 얼마나 확실한지 이미 시신을 깨끗이 닦는 염까지 다 마친 상태입니다. 무언가 손써 보기에는 너무 늦은 것 아닐까요? 그 어떤 소망도 가질 수 없는 암울한 상황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욥바의 제자들은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죽은 자도 살리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믿어 보기로 했습니다. 그들이 믿는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나인성 과부의 죽은 아들을 다시 살리신 분이십니다. 회당장 야이로의 죽은 딸을 살리셨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죽은 지 나흘이나 된 마르다와 마리아의 오빠 나사로도 살리셨습니다. 다비다가 죽은지 얼마가 지났는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습니다만, 욥바의 제자들은 비록 다비다가 죽었으나, 아직 끝난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에게 지체하지 말고 욥바로 와 달라고 간청했던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듣는 우리의 삶 가운데는 오래된 문제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 중에 해결하기에는 타이밍을 놓쳐버렸고, 이미 너무 오래 되어서 더 이상 손쓰기에는 늦어버렸다고 생각하며 포기해버린 상황이나 문제는 없습니까? 이미 오래된 몸의 질병, 깨져버린 인간관계, 부모와 자녀 간에, 혹은 형제들 간에 일어난 가정의 상처, 지우고 싶은 과거의 치명적인 실수 등 이미 손쓰기에는 너무나도 늦어버렸다고 생각하며 포기해버린 인생의 문제는 없습니까? 오늘 본문 속 욥바의 제자들이 가졌던 믿음을 한 번 시도해 보지 않으시겠습니까? 여러분, 우리가 믿어서 손해 볼 것이 무엇이 있단말입니까? 우리가 하나님께 간절하게 기도해서 손해볼 것이 무엇이 있단말입니까? 오히려 믿지 않고, 기도를 시도조차 안 하는 것이 우리 인생에서 가장 큰 손해가 아닙니까? 욥바의 제자들이 가졌던 믿음을 우리들도 한 번 가져봅시다. 저들은 죽은 다비다도 하나님께서 다시 살려주실 것을 믿었습니다. 우리들이 가진 문제가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나는 것보다 더 믿기 어려운 것입니까? 그렇지 않다면 이제 다시 한 번 하나님께서 지금이라도 치료하실 수 있으심을 믿어봅시다. 하나님께서 고치시고 회복시켜 주실 수 있으심을 믿음으로 다시 하나님께 고쳐 달라고, 한 번 더 기회를 달라고 간절하게 작정하고 기도해봅시다.

어려운 문제에 봉착했을 때 그리스도인들이 취할 수 있는최선의 방법은 살아 계신 주님께 도움을 청하는 것입니다. 주께서는 도움을 호소하는 자에게 주님의 사람들을 통하여 응답하시기도 한다. 드디어 욥바에 베드로가 도착했습니다. 베드로가 그 곳에 이르자 사람들이 그를 곧장 죽은 다비다가 안치되어 있는 다락방으로 안내했습니다. 과부들은 베드로의 곁에 서서 울며 도르가가 살아 있을 때, 그녀들을 위해서 만들어 준 여러 옷가지들을 베드로에게 보여주었습니다. 베드로는 사람들을 모두 내보낸 뒤에 무릎을 꿇고 기도했습니다. 죽은 자를 다시 살리는 기도입니다. 이 때 그가 얼마나 간절하게 기도했을까요? 베드로도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일입니다. 베드로는 그의 스승 예수께서 죽은 자들을 살리실 때 바로 가장 가까이에서 그 모든 광경을 두 눈으로 지켜본 사람입니다. 베드로는 그의 구주 예수께서는 죽은 자도 능히 살리실 수 있는 분임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믿음을 가지고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얼마나 긴 기도 시간이 흘렀을까요? 기도가 끝난 베드로그는 시신이 누워 있는 침상을 향해 몸을 돌렸습니다. 그리고 싸늘한 주검으로 누워 있는 다비다를 향해 말했습니다. “다비다여, 일어나시오!” 이것이 성경에는 헬라어로 기록되어 있습니다만, 신학자들은 베드로가 실제로는 그가 평상시 사용한 아람어로 말했을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다비다여 일어나시오를 아람어로 바꾸면 타비다쿰이 됩니다. 어디서 많이 들어본 말 아닙니까? 예수님께서 회당장 야이로의 죽은 딸을 살리실 때 하셨던 말씀 탈리타쿰과 아람어로 딱 한 글자 다른 말입니다.

이처럼 베드로가 죽은 다비다를 향하여 타비다쿰하고 말하자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분명 죽었던 다비다가 눈을 떴습니다. 그리고 베드로를 보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앉았습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통하여 또 다시 기적을 베푸셨습니다. 죽은 다비다를 다시 살리셨습니다. 그제서야 베드로는 성도들과 과부들을 불러서 다비다가 살아난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이 소식이 순식간에 욥바 전체에 알려졌습니다. 사람들은 죽은 다비다가 다시 살아난 것을 보기 위해 모여들었습니다. 그리고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그녀를 보고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잠깐 시간을 조금만 거슬러가 다시 한번 베드로가 죽은 다비다를 살리기 위해서 간절히 기도하는 장면을 살펴봅시다. 40절 말씀입니다. “( 9:40) 베드로가 사람을 다 내어보내고 무릎을 꿇고 기도하고 돌이켜 시체를 향하여 가로되 다비다야 일어나라 하니 그가 눈을 떠 베드로를 보고 일어나 앉는지라저는 병원에 입원해 계신 성도님들을 병문안 가는 경우, 기도할 때 항상 제 두 손으로 성도님의 손을 붙잡고 기도합니다. 그렇지 못하는 경우라면, 그래도 고개를 성도님께 향하고 기도합니다. 따라서 만일 제가 오늘 본문 속 베드로였다면 저는 기도할 때 침상에 누워있는 다비다 쪽을 향해 무릎을 꿇고 기도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40절 말씀을 유심히 보면, 베드로는 기도하는 동안은 시체를 쳐다보고 있지 않았습니다. 그는 오히려 반대 방향으로 고개를 돌려 다비다의 시신을 등에 둔 채 무릎을 꿇고 기도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기도가 다 끝나고 난 이후에야 시체를 향하여 그의 몸을 돌이켰습니다. 여기 40절에 돌이켜 시체를 향하여라는 표현 중에 돌이키다란 단어는 헬라어로 에피스트레포입니다. 이 단어는 몸을 돌이키다란 뜻도 있습니다만, 그 외에도 다시 돌아오다’, 영어로 ‘return’이란 뜻을 있습니다. 즉 베드로는 기도하는 동안 그의 모든 생각과 마음이 오로지 주님께만 향해 있었습니다. 그는 기도하는 동안 문제를 바라본 것이 아니라, 온 신경을 집중하여 하나님과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 집중했습니다. 기도하는 순간 베드로는 비록 그의 몸은 다비다의 죽은 시체가 누워 있는 다락에 있었으나, 사실 그의 영혼은 하나님의 보좌 앞과 그 우편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 앞에 무릎 꿇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는 그 보좌 앞에서 하나님의 능력을 구했습니다. 그리고 보좌 앞에서 받은 그 능력을 가지고 다시 돌아와 이제 죽은 다비다의 시체를 바라보았던 것입니다. 이것이 참 기도입니다. 문제를 보면 하나님이 작아집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바라보면 문제가 작아집니다. 기도는 문제를 바라보는 시간이 아닙니다. 기도하는 시간은 보좌에 앉아 계신 전능하신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시간입니다. 우리가 골방에서 기도하는 그 순간에도 우리의 영혼은 하나님 앞에 나가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베드로와 같이 온 마음과 뜻을 다하여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보좌 앞에 나아가 주님의 능력을 구할 수 있다면, 우리의 삶은 또 다른 차원의 영적 축복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오늘 말씀은 비슷해 보이는 두 가지 사건을 연달아 기록하고 있습니다. 지난 8년간 중풍병으로 고통당하던 애니아를 치료하신 예수 그리스도, 이미 죽은 후 싸늘한 주검으로 변해버린 다비다를 다시 살리신 예수 그리스도이 두 이야기는 조금 다른 것 같지만 똑 같은 결과를 가지고 왔습니다. 이 두 사람에게 나타나신 기적을 통해 더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여러분의 삶에 찾아온 힘든 문제와 극심한 위기는 무엇입니까? 치료받아야 하는 육신의 아픔은 무엇이고, 삶의 고통은 무엇입니까? 만일 그 문제가 해결된다면 사람들이 보고 예수님께 돌아올 만큼 놀라운 기적이 필요한 상황입니까? 아직 늦지 않았습니다. 베드로와 함께하셨던 예수님은 지금도 우리 안에 살아 계십니다. 오늘 본문은 베드로가 얼마나 위대한 사람인가를 보여주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말씀은 평범한 어부 베드로와 함께하셨던 예수 그리스도가 얼마나 위대하신 분이신가, 예수님과 함께 할 때 어떤 일들이 가능한지, 얼마나 놀라운 치유와 기적이 일어날 수 있는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욥바 사람들이 가졌던 믿음을 가지십시오. 아직 늦지 않았습니다. 베드로처럼 무릎을 꿇고 간절히 기도함으로 하나님의 보좌 앞에 나아가 구하십시오. 주께서 반드시 치료해주시고 문제를 해결해 주시고, 우리를 도우실 줄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