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815 사도행전 강해 (15) 박해자가 전도자로 (사도행전 9장 1~20절)

        

스데반 집사의 순교 이후,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에 대대적인 핍박이 일어나게 됩니다. 이에 성도들은 핍박을 피하기 위해서 예루살렘 성을 떠나 유대와 사마리아 지방으로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이러한 시대적 배경 속에서 ‘사울’이란 이름을 가진 열성적인 유대교 추종자인 청년이 성경에 등장합니다. 사울은 이 지구상에서 나사렛 예수 추종자들과 교회를 없애 버리는 일에 완전히 몰두하였습니다. 그는 집집마다 돌아다니면서 예수를 믿는 자를 찾아 남자든 여자든 닥치는 대로 끌어 내어 감옥에 넣었습니다. 또한 그는 잡아온 그리스도인들에게 형벌을 내리고 힘을 써서 그들이 강제로 예수님을 부인하게 했습니다. 사울은 예수를 따르는 자들을 모조리 죽이겠다는 생각으로 위협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의 뿌리를 뽑고, 씨앗을 말려 버리는 것이 그의 목표였습니다. 그러던 중 사울은 예루살렘에서 핍박을 피해 흩어진 예수의 추종자들이 ‘다메섹’이란 도시에 모여 있다는 소식을 듣게 됩니다. 이 일을 위하여 자신이 다메섹에 있는 회당들로부터 예수 추종자들을 붙잡아 오는 일에 협조를 받을 수 있도록 대제사장에게 공문을 하나 써 줄 것을 요청했습니다. 대제사장으로부터 공문을 받은 사울은 성전 경비대 분견대원들로 여겨지는 일행과 함께 다메섹에 살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을 붙잡기 위해 여정을 떠나게 됩니다. 다메섹은 예루살렘 북동쪽에 위치한 도시로 인류 역사상 가장 오래된 도시들 중 하나로 손꼽힙니다. 아브라함 시대에도 존재했던 도시이니 꽤 오래된 도시죠. 예루살렘에서 다메섹까지 거리가 대략 225km(140miles)로 걸어가게 되면 최소 5-6일은 걸립니다. 사울의 마음 속에는 예수의 추종자들을 잡아 죽일 생각밖에는 없었습니다. 사울의 위협과 살기가 어찌나 대단했는지요, 마치 스페인의 투우장 안에 화난 수소가 내달리기 전 다리로 땅을 구르며 숨을 거칠게 내쉬고 있는 모습과 같았습니다. 그러나 사울은 그 자신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 놓을 사건이 이 길 위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다는 전혀 사실을 알지 못했습니다.

사울과 그의 일행이 다메섹에 거의 다다르게 되었습니다. 이 때 갑자기 하늘로부터 밝고 환한 빛이 사울을 둘러 비추었습니다. 사도행전 22장과 26장을 보면, 이 사건이 일어난 시간을 ‘정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정오는 하루 중 태양이 가장 밝게 빛나는 시간입니다. 바로 그 시간 태양빛보다도 더 환한 초자연적인 빛이 사울을 둘러 비추었던 것입니다. 찬란하게 빛나는 눈부신 빛 앞에 사울은 땅에 엎드리고 말았습니다. 이 때 그의 귀에 들리는 소리가 있어 말합니다. 4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행 9:4) 땅에 엎드러져 들으매 소리 있어 가라사대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하시거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성경에서 사람을 부를 때 두 번 연달아 부르는 장면이 총 15번정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삭을 죽이려는 아브라함을 부르시며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하고 부르십니다. 또한 모세가 미디안 광야에서 양을 치다가 불타는 떨기나무를 보고 그리로 가까이 가자 하나님은 모세를 부르시며 “모세야, 모세야! 이리로 가까이 오지 말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만 상대방의 이름을 부를 때 두 번 반복한 것은 아닙니다. 다윗은 그의 아들 압살롬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자 “내 아들 압살롬아! 내 아들 압살롬아!” 하고 연달아 불렀고, 선지자 엘리사는 그의 스승 엘리야가 불병거 타고 하늘에 올라갈 때 “내 아버지여, 내 아버지여”하고 불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앞으로 멸망하게 될 예루살렘을 보시며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에 모음 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더냐?”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음식을 준비하느라 분주한 마르다를 향하여 “마르다야, 마르다야”하고 말씀하셨고, 최후의 만찬 자리에서 자신을 배신하지 않겠다고 호언장담하는 베드로를 향하여 “시몬아, 시몬아…”하고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돌아가시면서 “엘리! 엘리!!”(나의 아버지, 나의 아버지)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성경에서 누군가의 이름을 두 번 연달아 외치는 장면들을 살펴보면 상황은 조금씩 다르지만, 부르는 이가 상대방을 애끓는 마음으로 부른다는 공통점이 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살기가 가득한 사울이 예수의 추종자들을 잡아 죽이기 위해서 다메섹을 향해 가는 모습을 보시던 주님께서는 애끓는 마음으로 그를 연달아 두 번 부르셨던 것입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사울이 올바르지 못한 길을 향해 나아가는 모습을 보시며 주님은 안타까워하고 계셨고, 그가 바른 길로 돌아오기를 애끓는 마음으로 원하셨음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혹시 우리 주님께서 오늘 우리를 보시며 두 번 연달아 우리 이름을 부르고 계시지는 않을까요? “영목아, 영목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아무게야, 아무게야, 네가 어찌하여 나를 멀리하느냐? 네가 어찌하여 나를 떠나 살려 하느냐?”하고 주께서 애타는 마음으로 우리를 부르고 계시지는 않습니까?” 인생에서 중요한 것은 속도가 아니라 방향입니다. 아무리 빨리 달려도 잘못된 방향으로 가면 헛수고이기 때문입니다. 사울은 자신이 믿고 유대교가 진리라고 생각하며 그 누구보다도 최선을 다해 헌신적이고 열정적으로 하루하루를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방향이 잘못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니 주님께서 보실 때 사울의 삶이 얼마나 안타깝습니까? 우리는 무엇을 위해 살아가고 있습니까? 최선을 다해 살고 있기는 하지만, 그 길이 옳은 방향이라고 확신할 수 있습니까? 우리 인생에서 속도보다 중요한 것은 방향입니다. 우리 삶이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살아갈 때 비로소 우리는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하늘에서 홀연히 나타난 빛 속에서 들려온 애끓는 목소리는 사울을 향해 말했습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이 순간 사울은 크게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는 어린시절부터 지금까지 한 평생 유대교를 독실하게 믿어 왔고, 성인이 된 이 순간까지도 양심에 어긋나지 않도록 유대교의 지침들을 따라 행동했으며 최선을 다해 여호와 하나님을 섬겼습니다. 그런 그에게 초자연적인 빛과 음성으로 나타난 신적 존재가 ‘사울이 그를 핍박했다’고 말하고 있으니 사울은 무척이나 당황했을 것입니다. 사울은 빛 가운데서 자신에게 애끓는 목소리로 이야기하고 있는 목소리가 누구의 것인지 묻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5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행 9:5) 대답하되 주여 뉘시오니이까 가라사대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 사울은 물었습니다. “주님, 누구십니까?” 그러자 대답이 바로 들려왔습니다.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 이 대답을 들었을 때 사울이 느꼈을 충격은 온 몸에 퍼지는 ‘소름’ 그 자체였을 것입니다. 여태까지 그는 나사렛 예수가 이단이라고 생각해왔습니다. 자신이 유대교에서 배워온 기준으로 볼 때 예수는 절대로 ‘메시야’가 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를 구원자라 믿으며 추종하는 자들을 박해해왔습니다. 게다가 예수는 십자가에 못박혀 죽었습니다. 이는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들이 거의 다 직접 눈으로 목격했고,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예수가 지금 그의 앞에 나타난 것입니다. 얼마나 큰 충격이었겠습니까?

오늘 본문에서 우리가 주목해서 봐야 하는 것은 4절 말씀입니다. “(행 9:4) 땅에 엎드러져 들으매 소리 있어 가라사대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하시거늘” 예수님은 사울에게 “네가 어찌하여 그들을 핍박하느냐” 혹은 “나의 교회를 핍박하느냐?”라고 말씀하지 않으시고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라고 물으셨습니다. 이것을 통해 우리는 예수님께서 성도가 핍박당하는 것을 곧 예수님 자신을 핍박받는 것과 동일하게 보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께서 성부 하나님과 성령 하나님과 하나이듯이, 이제 성령으로 거듭나고 구원받은 우리들이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성도를 핍박하는 것은 곧 예수님을 핍박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와 같은 원리로 본다면 성도를 섬기는 것은 곧 누구를 섬기는 것입니까? 성도를 섬기는 것은 곧 예수 그리스도를 섬기는 것과 같습니다. “너희 중 지극히 작은 자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라고 예수님께서 친히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을 잘 섬기고 싶습니까? 지금 여러분 주위에 앉아 있는 코너스톤 교회 성도님들 한 사람 한 사람을 잘 섬기십시오. 성도를 사랑하는 것이 곧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성도들과 식사하는 것은 곧 주님과 식사하는 것입니다. 성도들을 위로하고 격려하기 위해 헌신하는 삶은 곧 예수님께 헌신하는 것과 같습니다. 왜냐하면 성도들과 예수님은 곧 한 몸이며,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성도를 섬기는 것은 곧 예수님을 섬기는 것이며, 성도를 핍박하는 것은 곧 예수님을 핍박하는 것과 같습니다. 사울이 교회를 핍박하고, 성도들을 잡아 협박하고 힘으로 그들을 대했을 때, 이미 예수님은 승천하신 이후였습니다. 그러나 그가 교회를 핍박했을 때 그는 사실 여전히 교회와 한 몸이신 예수님을 핍박했던 것입니다.

초등학생 아들이 학교에서 친구들에게 맞고 와서 눈에 시퍼런 멍이 들고, 온 몸에 상처가 났습니다. 어느 아버지가 가만히 있겠습니까? 아들이 맞은 것은 곧 아버지인 내가 맞은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성도를 핍박하는 자들은 하나님께서 가만두지 않으십니다. 이 시대가 아니면 마지막 최후의 심판의 때에라도 반드시 벌을 주시고 심판하십니다. 반대로 중증 장애는 아니지만, 그래도 초등학생 아들이 몸에 장애가 있어서 학교에 잘 적응하지 못할까 염려하고 있는 한 아버지가 있다고 생각해봅시다. 아버지는 아들이 학교에서 친구들에게 놀림 받는 것은 아닌지, 왕따 당하는 것은 아닌지 염려가 됩니다. 그런데 어느 날 학교에서 돌아온 아들이 싱글벙글 웃는 얼굴로 친구를 자랑합니다. 점심시간이 되면 함께 밥 먹어주는 친구, 학교가 끝나고 귀가할 때 늘 같이 걸어가주는 친구, 운동장에서 놀 때 늘 내 곁에서 함께 뛰놀아 주는 친구가 있습니다. 아버지 입장에서 그 친구가 얼마나 고맙겠습니까? “그 친구 이름이 뭐야?”하고 물어보지 않겠습니까? 내 아들에게 잘해준 학교 친구 초대해서 맛있는 밥이라도 한 번 사주지 않겠습니까? 성도들을 핍박하는 것은 곧 주님을 핍박하는 것이요. 성도들을 섬기는 것은 곧 그들의 아버지 되시는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며, 성도들과 하나되시는 예수님을 섬기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교회를 핍박하는 사울을 향하여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물론 사울은 예수님이 진짜 구원자 되심을 몰랐기에, 그는 자신이 선이라 생각하는 기준에서 이렇게 교회를 핍박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사울을 안타깝게 보시며 그가 갇혀 있는 유대교의 틀에서 꺼내 진리로 변화시키기 위하여 사울을 직접 찾아오셨습니다.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다니고, 예수님을 믿는다고 고백하면서도 정작 예수님을 만나려 하지 않고, 예수님과 가깝게 지내려고 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놀라곤 합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성경 속 예수님으로만 생각할 뿐, 종이 호랑이처럼 그들의 현실 속에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존재처럼 예수님을 대합니다. 분명 예수님은 부활하신 후 승천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지금도 살아 계셔서 한 사람 한 사람의 삶을 주의 깊게 보시고, 그들을 찾아오고 계십니다. 오늘 본문이 바로 그 증거입니다. 예수님은 사울을 찾아오셨고, 또 다메섹이란 도시에 살고 있는 ‘아나니아’란 이름을 가진 제자에게도 찾아오셨습니다.

먼저 사울에게 나타나신 예수님은 그에게 다메섹 도시로 들어가 그를 찾아올 자가 방문할 때까지 기다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에 밝은 빛에 눈이 멀어 일시적으로 장님이 된 사울은 주변 사람들의 부축을 받으며 다메섹에 들어갔습니다. 자신이 여태까지 가짜라고 생각하며 핍박해온 예수가, 실제로는 살아 있으며 구약성경이 증거해 온 메시야라는 사실에 커다란 충격에 빠진 사울은 사흘 동안 아무것도 먹거나 마시지 않았습니다.

이 때 예수님은 다메섹에 살고 있는 제자 아나니아에게 환상 중에 나타나셨습니다. 10-12절 말씀을 봅시다. “(행 9:10) 그 때에 다메섹에 아나니아라 하는 제자가 있더니 주께서 환상 중에 불러 가라사대 아나니아야 하시거늘 대답하되 주여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니 (행 9:11) 주께서 가라사대 일어나 직가라 하는 거리로 가서 유다 집에서 다소 사람 사울이라 하는 자를 찾으라 저가 기도하는 중이다 (행 9:12) 저가 아나니아라 하는 사람이 들어와서 자기에게 안수하여 다시 보게 하는 것을 보았느니라 하시거늘” 사울에게 나타나셨던 예수님은 아나니아에게도 나셨습니다. 이처럼 부활 후 구름 타고 승천하신 예수님께서는 세상과 단절된 상태로 계신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주님의 사람들과 교제하고 계십니다. 오늘 이 장면은 지금도 우리가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신 예수 그리스도와 교제하며 살아가는 것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알려줍니다. 예수님의 뜻을 배우고, 주님의 인도하심 대로 살아가는 것이 지금도 가능합니다. 기독교는 죽은 종교가 아닙니다. 성경이란 책 속에 갇혀 있는 종교도 아닙니다.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예수님께서 지금도 살아 계시고 우리 가운데 역사하고 계시기에, 성경 속 이야기는 책 속에 갇혀 있지 아니하고 우리의 현실 속에서도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마치 전장을 지휘하는 사령관과 같이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신 예수님께서는 온 인류 역사를 다스리고 계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나니아에게 그가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매우 구체적인 지시를 내려 주셨습니다. 11절에 나오는 ‘직가’라는 말은 길 이름이 ‘곧은 길’이란 뜻입니다(street called Straight). “아나니아야, Straight street에 위치한 ‘유다의 집’에 가서 ‘다소 출신 사울’을 찾으라! 그는 지금 기도하고 있다. 그가 환상 속에서 아나니아라는 사람이 찾아와 그에게 손을 얹어 시력을 회복시켜 주는 것을 보았다.” 예수님께 지령을 받은 아나니아는 사울이란 이름을 듣고 깜짝 놀라 묻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사울은 이미 교회와 성도들을 박해하기로 악명높은 자였기 때문입니다. 13-14절입니다. “(행 9:13) 아나니아가 대답하되 주여 이 사람에 대하여 내가 여러 사람에게 듣사온즉 그가 예루살렘에서 주의 성도에게 적지 않은 해를 끼쳤다 하더니 (행 9:14) 여기서도 주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를 결박할 권세를 대제사장들에게 받았나이다 하거늘” 아나니아가 예수님께 말했습니다. “주님, 그가 예루살렘에서 주님의 성도들에게 얼마나 해를 끼쳤는지를, 나는 많은 사람에게서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들을 잡아 갈 권한을 대제사장들에게서 받아 가지고, 여기에 와 있습니다.” 아나니아는 예수님의 뜻과 의도를 정확하게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가 가진 상식과 정보로 볼 때는 그 동안 많은 성도들을 박해해 온 저 악명 높은 사울은 차라리 맹인 상태로 지내는 것이 교회와 성도들에게는 더 큰 유익일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아나니아의 질문에 예수님은 박해자 사울을 향한 주님의 뜻과 계획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15-16절입니다. “(행 9:15) 주께서 가라사대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행 9:16)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해를 얼마나 받아야 할 것을 내가 그에게 보이리라 하시니” 예수님께서는 아나니아에게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서 주님의 이름을 전파하도록 쓰기 위하여 주께서 사울을 전도자로 택하셨다는 사실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뜻과 방법은 참으로 우리의 기대와 상상을 뛰어넘습니다. 그 누가 박해자 사울이 전도자 사울로 변화될 것이라 상상이나 했겠습니까? R. C. Sproul 이란 이름의 미국 목사님은 사울의 회심 장면을 보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최근까지 사울이 교회를 핍박했으니 최초의 그리스도인들은 그런 그가 교회의 지도자 자리에 세워지는 것을 믿기 힘들었을 것이다. 사울의 이름은 이미 모두에게 알려져 있었기 때문에 교회 지도자로 갑자기 나타난 그는 마치 오사마 빈 라덴이 미국으로 와서 자신이 미국 애국주의자로 전향했다고 말하는 것과 같이 보였을 것이다.” 하나님의 방법은 ‘신묘막측’합니다. 신통하고 묘하여 인간이 미리 추측할 수 없는 방법으로 주님은 역사하십니다.

예수님의 놀라운 계획을 알게 된 아나니아는 이제 사울을 만나러 갑니다. 17-19절 말씀입니다. “(행 9:17) 아나니아가 떠나 그 집에 들어가서 그에게 안수하여 가로되 형제 사울아 주 곧 네가 오는 길에서 나타나시던 예수께서 나를 보내어 너로 다시 보게 하시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신다 하니 (행 9:18) 즉시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어져 다시 보게 된지라 일어나 세례를 받고 (행 9:19 상반절) 음식을 먹으매 강건하여지니라…” 아나니아의 안수를 통해 사울은 잃어버렸던 시력을 회복하게 됩니다. 이전에 사울은 자신이 세상을 문제없이 보고 있다고 생각하고 살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실상 예수가 누구인지 모르고 살았던 그는 영적 맹인이나 다름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가 다시 보게 되었다”는 이 표현은 예수를 만남으로써 이전에는 보지 못했던 또 다른 세상을 보게 되었다는 것을 암시적으로 잘 나타내고 있습니다. 어둠에서 진리 되시는 예수를 만남으로써 빛으로 나오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사울은 아나니아의 안수를 통해서 성령으로 충만케 됩니다.

이후 사울의 인생은 송두리째 변화하게 됩니다. 전에는 교회와 성도를 핍박하던 박해자가 예수를 전파하기 위해 전 세계를 돌아다니는 전도자로 살아가게 됩니다. 예수의 제자들을 죽이려는 위협적인 태도와 살기로 살아가던 자가, 이제는 예수의 제자들을 세우는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박해자 사울은 전도자 바울이 됩니다. 이와 같은 변화는 바로 그가 예수님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살아 계신 예수님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향한 찾아오십니다. 누구든지 예수님과 만나면 그의 삶이 변화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