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813 기름부음 받은 자, 예수 (이사야 61장 1-3절)

오늘날은 종이가 그렇게 귀한 물건은 아닙니다. 마음만 먹으면 수백 장의 종이도 손쉽게 구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에는 1인 1성경으로 한 사람 앞에 성경책을 하나씩 가지고 있는 시대입니다. 그러나 아주 오랜 옛날에는 종이가 매우 귀했습니다. 지금으로부터 2천년에는 인쇄술이 발달하지 않았고, 또 종이가 귀하던 시절이라 온 동네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적힌 종이를 구하기가 매우 어려웠습니다. 신약시대 유대인들의 경우에도 많은 사람들이 함께 모여 생활하는 회당에 가야지만 율법이 기록되어 있는 두루마리를 볼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성경이 기록된 두루마리가 귀하다 보니, 회당마다 성경 두루마리를 맡아 관리하는 자가 따로 있었습니다. 안식일 되면 성경 두루마리 관리자가 말씀이 적힌 두루마리를 차례대로 보관된 장소에서 꺼내 옵니다. 그리고 그날 말씀을 읽게 될 사람에게 두루마리를 전달해주었습니다. 역사학자들에 의하면 모세 오경은 두개의 두루마리에 나누어 기록되어 있었고, 예언서는 하나의 두루마리로 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회당장은 그 날 성경 봉독자의 편리를 위해서 두루마리를 돌돌 말아 두지 아니하고, 펼쳐 주었을 것으로 예상이 됩니다. 안식일에 성경을 읽는 자는 자기 마음대로 그 날 읽을 본문을 정하는 것이 아니라, 관례대로 미리 그 날에 자신이 소리 내어 읽어야 되는 것으로 정해진 본문을 찾아 읽었습니다.

누가복음 4장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공생애를 시작하시며 자신의 고향 나사렛에 방문하십니다. 안식일이 되자 회당을 찾으신 주님은 그곳에서 관례를 따라 많은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하나님의 말씀을 읽으셨습니다. 이 날 주님께서 읽으신 본문이 바로 우리들이 오늘 읽은 ‘이사야 61장 1-2절’입니다. “(눅 4:18)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눅 4:19)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눅 4:20) 책을 덮어 그 맡은 자에게 주시고 앉으시니 회당에 있는 자들이 다 주목하여 보더라 (눅 4:21) 이에 예수께서 저희에게 말씀하시되 이 글이 오늘날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 하시니” 말씀을 다 읽으신 예수님은 예언서가 적힌 두루마리를 돌돌 말아서, 시중드는 사람에게 되돌려 주었습니다. 나사렛 회당에 모인 수많은 사람들은 좀 전에 말씀을 읽으신 예수님께서 이제 어떤 말씀을 그들에게 주실까 궁금해하며 숨을 죽인 채 예수님의 얼굴만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서 오늘 이루어졌다.” 이와 같은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이사야 61장이 바로 먼 미래에 이 땅에 메시아로서 오실 예수님께서 성취하실 일들에 대한 예언이었음을 분명하게 알 수 있습니다. 말씀을 통해서 이 세상의 구원자로 오신 예수님께서 우리들을 위하여 감당하신 사역과 일들이 무엇인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이사야 61장 1절 말씀을 봅시다. “(사 61:1) 주 여호와의 신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본문의 말씀이 예수님에 대한 예언의 말씀이란 것을 염두해서 볼 때, 우리는 하나님께서 예수님에게 성령을 주셨고, 그에게 기름을 부으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 10장을 보면 백부장 고넬료의 집에 찾아가 설교를 하던 베드로는 자신의 스승이자 구세주이신 예수님에 대해서 설명한 구절이 등장합니다. “(행 10:38)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붓듯 하셨으매 저가 두루 다니시며 착한 일을 행하시고 마귀에게 눌린 모든 자를 고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함께 하셨음이라” 이 말씀을 다시 정확하게 해석하면, “하나님께서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으로 기름을 부어 주셨습니다”가 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으로부터 성령과 능력으로 기름부음을 받으셨습니다. 본래 구약성경에서 ‘기름 부음을 받는다’는 것은 어떤 사람이 하나님으로부터 특별한 사명을 수행할 종으로 선택받았음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제사장들과 나라를 다스리는 왕들은 기름부음을 받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예언했던 선지자들도 기름부음을 받았습니다. 이처럼 ‘기름부음 반은 자’라는 것은 특별한 직분을 가리키던 표현이었습니다. 그러나 나중에는 이 표현이 그의 백성 이스라엘을 구원하시기 위해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인물에 대한 표현으로 변화됩니다. 히브리어로 ‘기름을 붓다’(anoint)라는 뜻을 가진 동사가 ‘masah(마샤)’입니다. 그리고 이 동사를 ‘기름부음을 받은 자’라는 명사로 바꾸면 그 발음이 우리에게 잘 알려진 ‘메시아’가 됩니다. 그러니까 ‘메시아’라는 단어에는 하나님의 백성을 구원하기 위해 하나님으로부터 택함 받은 ‘기름 부음 받은 자’라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구약성경은 바로 이 구원자, 메시아의 도래에 대해서 예언하였고, 신약시대에 오신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 찾아가신 나사렛 회당에서 메시아에 대한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을 읽으시며 이 말씀이 성취되었다고 말씀하심으로써 자신이 곧 주의 백성을 구원하기 위해 하나님으로부터 택함 받은 자, 기름부음을 받은 자 곧 메시아 되심을 나타내셨던 것입니다. 본래 히브리어로 ‘메시야’라고 발음되는 이 단어는 신약시대 전 세계적 공용어인 그리스어로 번역됩니다. 그 단어가 바로 ‘그리스도’입니다. 우리가 신앙고백을 하며 “예수가 곧 그리스도시다”라고 말하는 것은 곧 “예수가 곧 메시아이시다”라고 고백하는 것과 같은 말입니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라는 표현 자체에는 “예수님이 곧 우리들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이 땅에 보내신 기름 부음 받은 자이십니다”라는 신앙고백이 담겨 있습니다.

이사야서 61장 1절을 다시 한번 봅시다. “(사 61:1) 주 여호와의 신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예수님께서 기름부음 받은 자 메시아로서 가장 먼저 하시는 일은 무엇입니까? 바로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가난한 자’는 단순히 경제적인 가난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는 죄악과 사망으로부터 자기 스스로를 구원하기에 충분한 능력과 힘이 없는 영적인 가난함에 빠진 이 세상 모든 사람을 가리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해주시려고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 아름다운 소식은 무엇일까요? 바로 십자가 사랑입니다. 누구든지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이 자신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한 죽음임을 믿고, 사망 권세 이기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구원자와 주님으로 진실로 고백하는 자는 죄사함을 받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된다는 복음이야말로 이 세상에서 가장 기쁘고 아름다운 소식입니다.

예수님께서 전해주신 복음을 받아들인 자들에게는 어떠한 변화가 일어납니까? 1절 후반절을 그 내용이 구체적으로 나옵니다. 구원자 되시는 예수는 마음이 상한 자를 고쳐 주십니다. 1절에 나오는 ‘마음이 상한 자’라는 표현은 심장이 산산조각 깨어져 쓸모 없이 되고, 본래 그 형체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망가진 상태를 의미합니다. 어떤 불행한 사건이나 큰 충격으로 사람이 마음이 망가진 사람들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부모나 배우자 혹은 자녀를 잃어버린 충격과 슬픔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사람들, 혹은 자신이 겪은 불행한 사고로 인해서 평생 우울증이나 일종의 두려움에 갇혀 고통 당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목회하면서 여러 사람들을 만나다 보면 겉으로 볼 때는 멀쩡하지만, 영혼이 망가진 분들을 만나게 됩니다. “아, 이분 마음이 깨져 있구나. 영혼이 망가져 버렸구나”하는 인상을 주는 분들입니다. 계속해서 이야기하다 보면 또 한 가지 자연스럽게 깨닫게 되는 것이 있습니다. 이 분들의 상한 마음을 고칠 능력이 저에게는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아무런 소망이 없는 것일까요? 아니요. 저는 상한 마음을 고치지 못하지만, 주님은 고치실 수 있습니다.

1절에 나오는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신다”고 했을 때 고치다는 말은 끊어지거나 찢어진 것을 싸매 묶는 모습을 의미합니다. 복음서에 예수님께서 만난 사람들을 한 번 떠올려 보십시오. 저마다 가슴 속 깊은 외로움과 아픔을 가진 사람들이었습니다. 사마리아 여인의 경우 4명의 남자와 결혼과 이혼을 반복했습니다. 이제 자기 인생에서 5번째 남자와 동거하고 있으나, 법적으로 남편은 아닙니다. 얼마나 기구한 인생을 살고 있습니까? 동네 사람들이 이런 사실을 다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사마리아 여인이 지나갈 때마다 수근덕거리며 손가락질했겠습니까? 오늘날 사마리아 여인이 살았더라면 아파트 주민들, 동네 아주머니들 만나기 두려워 마트에 장보러 가기도 싫었을 것입니다. 교회 나가고 싶어도 이혼녀에 대한 곱지 않은 사람들의 시선 때문에 불편해서 못 나갔을 것입니다. 이혼을 4번이나 했으니, 보수적인 유대 사회에서 고립되어 친한 친구 하나 만들기 어려웠을 여인입니다. 사마리아 여인이 동네 사람들을 얼마나 마주치기 싫으면 해가 가장 뜨거운 정오의 때에 물을 뜨러 우물가에 나왔겠습니까? 아무도 가까이하려고 하지 않았던 사마리아 여인이 우물에 물 뜨는 시간에 주님은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그녀의 말에 귀 기울여 주셨고, 그녀가 하나님께 나아가는데 방해가 되었던 걸림돌들을 치워 주셨습니다. 그녀의 마음이 치유되자 동네 사람들 만나기 싫어 가장 무더운 우물가를 찾았던 여인이 온 동네 사람들을 찾아 만나러 가는 사람으로 변화합니다. 사마리아 동네를 돌아다니며 예수가 메시아 되심을 전파하는 전도자의 삶을 살게 됩니다. 이와 같이 고칠 수 없어 보이는 아픔과 눈물을 가진 사람들의 찢어진 마음을 예수님은 다시 싸매 주셨습니다. 사마리아 여인뿐만이 아닙니다. 세리장 삭개오, 나인성의 과부, 실로암의 맹인, 바리새인 니고데모 등 수많은 사람들의 찢어진 마음을 다시 싸매어 고쳐 주셨습니다.

혹시 삶이 너무 힘들고 어려워서 마음이 찢어지는 듯한 아픔을 경험해 보셨습니까? 아니면 혹시 지금 그런 아픔을 겪고 계시지는 않습니까? 아픔과 눈물로 인해 얇은 종이처럼 힘 없이 여러 갈래로 찢어지는 마음을 그 누구가 고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은 고치실 수 있습니다. 이사야서는 주님께서 이 세상에 메시아로 오신 이유가 바로 상한 마음을 치유하시기 위한 것임을 알려주십니다. 의사가 아무리 탁월한 명의라도, 환자가 병을 치유하고자 하는 의지를 가지고 수술대에 올라가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께서 그 누구도 치료할 수 없는 마음의 상처를 고치실 수 있는 분이라고 해도, 우리가 가진 마음의 상처를 주님의 수술대 위에 올려드리지 않으면 고침 받을 수 없습니다. 기도의 시간에 주님께 우리 마음 속 괴로움, 울분, 외로움, 두려움, 짜증, 미움 등 모든 상한 마음을 솔직하게 내려놓으십시오. 예수님께 우리 문제를 가지고 나아올 때 비로소 문제는 해결됩니다.

복음서를 보십시오. 그 당시 이스라엘에는 그 숫자를 헤아릴 수 없는 수많은 맹인들이 있었으나, 오직 치료자 예수님께 고쳐 달라고 간구한 사람들만이 고침을 받았습니다. 수많은 문둥병자들이 있었으나, 오직 예수님께 치료해 달라고 간구한 자들만이 깨끗이 나음을 입었습니다. 겸손한 자세로 주님의 수술대에 우리의 상처와 아픔을 올려놓으십시오. 비로소 주께서 고치실 것이며, 주님은 흉터 하나 남지 않도록 고치실 것입니다.

1절을 이어서 보면 메시아로 오신 예수님의 또 다른 사역은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전파”하는 것이었습니다. 죄와 사망의 쇠사슬에 매여 영혼의 두 손과 목에 쇠로 된 착고가 채어진 채 노예로 살아가던 것이 지난 날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인해 우리 목을 조르던 착고는 풀러졌습니다. 죄와 사망의 쇠사슬은 끊어졌고 이제 더 이상 우리는 노예가 아닙니다. 이제 우리는 예수님의 피 값으로 산 자유인입니다. 더 이상 죄의 노예가 아닌, 하나님의 존귀한 자녀가 되었습니다. 이것이 얼마나 기쁘고 감사한 일입니까?

저 유명한 마린 루터 킹 주니어 목사님의 “I have a dream” 연설에서 제가 개인적으로 제 영혼을 울렸던 파트가 있습니다. 바로 이 유명한 연설의 마지막 문장입니다. “Free at last. Free at last. Thank God Almighty, we are free at Last.” (마침내 자유를 찾았다! 마침내 자유를 찾았다! 전능하신 감사합니다. 우리는 마침내 자유의 몸이 되었다!) 이 마지막 문장이 끝났을 때 1963년 워싱턴 D.C. 링컨 기념관 앞에 모인 25만명의 사람들의 일제히 우뢰와 같은 함성과 박수갈채 소리를 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죄와 사망에서 구원을 얻은 우리들이 얻은 기쁨은 날마다 하나님께 함성과 같은 큰 목소리의 찬양과 박수갈채를 드려야 할 이유가 있습니다. 주님께서 포로 된 우리들을 죄악으로부터 자유케 하셨고, 사망의 저주에 갇혀 있던 우리들을 놓아주셨습니다. 그 누구도 풀 수 없었던 사탄의 결박과 어둠의 권세에서 주님은 우리에게 해방을 선포하시고 자유를 주셨습니다.

2절 말씀을 봅시다. “(사 61:2) 여호와의 은혜의 해와 우리 하나님의 신원의 날을 전파하여 모든 슬픈 자를 위로하되” 2절 말씀을 보면 메시아 되시는 예수님께서 오셔서 “여호와의 은혜의 해”가 되었음을 선포하십니다. ‘여호와의 해’라는 표현은 무슨 뜻일까요? 이것은 구약시대에 있었던 ‘희년’을 의미합니다. 희년은 영어로 ‘jubilee’라고 합니다. ‘희년’은 50년마다 한 번씩 돌아옵니다. 희년이 되면 채무자들의 빚을 탕감해 줍니다. 노예 되었던 자를 해방시켜 줍니다. 가난으로 인해 어쩔 수 없이 하나님께서 주신 기업 즉 땅을 팔아야 했던 사람들에게 그 땅을 다시 돌려줍니다. 모든 빚을 탕감해 주고, 노예에서 해방시켜 준다니, 듣기만 해도 꿈만 같은 해 아닙니까?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 오셔서 희년 즉 여호와의 해가 왔음을 선포하셨습니다. 어째서 입니까? 죄악의 빚을 모두 다 갚아주셨기 때문입니다. 죄악의 노예에서 살아가던 우리들이 해방되었기 때문입니다. 죄로 인해 빼앗겼던 약속의 나라 천국이 다시 우리의 것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희년’은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의 축제의 날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를 지시고 우리 죄를 대신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지금 기쁨의 희년을 누리고 있습니다.

2절 말씀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여호와의 은혜의 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신원의 날”을 선포하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하나님의 신원의 날”이란 “하나님께서 복수하시는 날”이란 뜻입니다. 그 동안 이스라엘을 조롱하고 억압했던 모든 악의 세력을 멸하시는 날입니다. 사탄과 그 모든 악한 영들과 졸개들을 심판하시는 날입니다. 그리고 이 세상의 모든 죄의 세력들을 꺾어 버리시는 날이기도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심으로 말미암아 구원받은 주의 백성에게는 즐거운 희년이 선포되고, 모든 원수들에게는 심판의 날이 선포됩니다.

계속해서 2절 말씀을 보면 예수님은 이와 같이 “여호와의 은혜의 해”와 “하나님의 신원하는 날”을 선포하심으로 말미암아 모든 슬픈 자들을 위로하신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슬픈 자’들은 극복하기 힘든 절망적 상황에 놓여 있는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아주 절박한 상태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이 사람들 누구일까요? 하나님을 거역하고 죄를 따라 살아간 비참한 죄인들인 바로 우리들입니다. 하나님께서 보내신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 모든 죄가 용서되고 구원받음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는 평강이 주어지며, 이제 더 이상 하나님의 무시무시한 진노를 두려워하지 않아도 되는 참된 위로가 주어집니다.

예수님께서 오심으로 나타나는 인간 영혼의 변화는 3절에 잘 나와 있습니다. 죄의 노예로 살아갈 수밖에 없었던 자신의 저주받은 운명을 슬퍼하는 자가 이제는 자유인이 되어 머리에 꽃으로 만든 왕관을 쓰고 기뻐하게 될 것입니다. 근심으로 옷 입었던 우리가 이제는 그 옷을 벗어버리고, 기쁨과 감사로 된 찬송의 옷을 입게 될 것입니다. 가장 비통하게 살아가던 자들이 이제는 가장 영광스러운 관을 쓰고 살아가게 됩니다. 죄악의 노예로 살아가던 자들이 이제는 여호와 하나님의 영광을 열방에 나타내며 살아가는 자들로 변화하게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모든 축복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에게 가장 좋은 길을 열어주시기 위해서 예수님께 기름을 부으시고 메시야로 보내주셨습니다. 이제 우리에게 남은 것은 하나님께서 온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 택하시고 보내신 예수님을 믿고 따르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사랑에 감사하고 찬양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고 따르며 살아가는 참된 행복이 저와 여러분에게 충만하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