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808 사도행전 강해 (14) 스데반 집사 (사도행전 6장 8절~7장 60절)

         도쿄 올림픽 기간 동안 대한민국 국가대표 선수들이 참 열심히 잘해주었습니다. 많은 선수들이 이슈가 되었습니다. 수영의 황선우 선수, 탁구의 신유빈 선수, 배구의 김연경 선수 등 연일 장안의 화제가 된 선수들도 많았습니다. 그 중 한국 양궁 여성 국가대표 ‘안산’ 선수는 한국 하계올림픽 역사상 첫 3관왕이란 대기록을 달성했습니다. 올해 20살이 된 안산 선수와 관련하여 가장 화제가 된 순간 중 한 장면은 여자 개인전 결승전이었습니다. 세트스코어가 5대5로 동점인 상황에서 단 한 발의 화살로 승부를 가리는 슛오프였습니다. 이번 도쿄 올림픽 때부터 양궁에 출전한 선수들의 심장박동을 화면으로 보여주었습니다. 단 한 발의 화살에 따라 금메달이냐 아니냐가 달라집니다. 상대선수인 러시아의 엘레나 오시포바 선수의 최대 분당 심박수가 168까지 치솟았습니다. 8점을 쏘았습니다. 한국의 안산선수의 심박수는 119로 비교적 차분함을 유지했습니다. 결국 10점을 쏜 안산 선수가 금메달을 차지하게 됩니다. 대한민국의 국가대표로써 전 세계 75억 인구가 지켜보는 가운데 자신의 운명이 걸린 한 발의 화살을 쏘면서도 흔들리지 않은 안산 선수를 보며, 중계해설위원들은 그녀의 이름 그대로 ‘산’과 같이 흔들림이 없었다고 말했습니다. 경기 직후 진행된 시상식 가장 높은 곳에 선 안산 선수는 태극기가 계양 되고, 애국가가 장내에 울려 퍼지자 그제서야 감격에 겨운 듯 눈물을 보였습니다. 사실 경기 내내 안산선수가 얼마나 긴장을 했을까요?

자신의 운명이 좌우되는 극한 긴장감 속에서도 안산 선수처럼 평점심을 유지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는 자신의 목숨이 걸린 상황 속에서도 빛나는 모습으로 서 있는 한 사람이 등장합니다. 그의 이름은 스데반입니다. 그는 초대 교회가 뽑은 일곱 집사 중 한 사람입니다. 스데반은 날마다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러던 중 예수님을 싫어하는 유대인들과 시비가 붙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변론으로는 지혜와 성령이 충만한 스데반을 이길 수 없음을 깨닫고는 거짓 증인들을 매수하여 그들로 스데반에 대해서 거짓 증거하도록 만들었습니다. 그리고는 백성들을 선동하여 스데반을 잡아 공회로 데리고 갔습니다. 스데반에 대한 재판은 시작되었습니다. 매수된 증인들은 약속된 대로 거짓 증언을 말했습니다. “우리는 스데반이 우리의 위대한 지도자 모세를 모욕했고, 감히 하나님을 모독하는 말하는 것을 똑똑히 들었습니다! 또한 우리는 그가 나사렛 예수가 이 곳을 헐고 또 모세가 우리에게 전하여 준 규례를 뜯어 고칠 것이라고 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거짓 증언으로 인해 재판은 점점 스데반에게 불리하게 진행되었습니다. 이 재판이 사실 스데반을 죽이기 위한 구실을 얻기 위해 열린 형식상의 재판이라는 것을 스데반을 포함하여 이미 모든 사람들이 공공연히 알고 있었습니다. 지금 스데반이 재판을 받고 있는 공회는 다름 아니라, 얼마 전에 예수님을 죽이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그 장소와 그 사람들입니다. 이들이 스데반을 궁지로 몰기 위해 거짓 증인들의 모함을 사용한 방법도 예수님을 죽이기 위한 방법과 똑같습니다. 스데반이 공회에 잡혀온 죄목도 예수님과 같습니다. 공회가 예수님께 유죄를 내린 율법 모욕, 하나님 모독죄를 스데반에게 고스란히 묻고 있습니다. 스데반의 말 한 마디가 그의 목숨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상황이며, 한 마디로 목에 칼이 들어온 상황이나 다름없습니다. 웬만한 사람이라면 이런 상황에서 심장이 쿵쾅쿵쾅 뛰며, 두 다리가 후들거리고, 손이 덜덜 떨릴 것입니다. 얼굴도 새하얗게 질려 있을 것입니다. 사도행전의 카메라는 자신의 목숨이 왔다갔다하는 절체절명의 위기의 순간에 놓인 스데반의 얼굴을 포커스인 해줍니다. 과연 그는 어떤 모습이었을까요? 사도행전 6장 15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행 6:15) 공회 중에 앉은 사람들이 다 스데반을 주목하여 보니 그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더라” 스데반의 얼굴이 천사와 같았다는 것은 그의 얼굴에 광채가 나고 보는 사람들이 압도될 만한 위엄으로 가득했음을 알려줍니다. 한 마디로 스데반의 얼굴은 천사와 같이 빛이 나고 있었습니다. 사도행전의 저자는 객관성을 더하기 위하여 심지어 스데반을 미워하여 그를 죽이고자 했던 공회에 앉은 사람들이 보아도 스데반의 모습은 천사의 얼굴과 같이 빛나고 있었다고 말해주고 있습니다. 지금 그가 놓인 상황이 무슨 아카데미 영화 시상식이나, 그래미 뮤직어워즈를 수상하는 그런 영광스런 순간이면 사람이 빛나 보일 수도 있겠습니다만, 사실 그는 절벽 끝에 서 있고, 그 뒤에서 그를 밀어서 떨어트려 죽이려고 하는 사람이 수도 없이 많은 상황이나 다름없습니다. 어떻게 스데반은 이처럼 자신이 죽을지도 모르는 상황 속에서도 천사의 얼굴을 하고 빛나는 모습으로 서 있을 수 있을까요?

  1. 하나님을 바라보고 살아온 스데반

스데반의 얼굴이 이처럼 천사와 같이 빛날 수 있었던 비결은 그가 하나님을 바라보며 살아왔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을 보면 스데반이 성령에 충만했다는 표현이 반복됩니다. 이로 말미암아 우리는 스데반의 얼굴이 천사와 같은 광채로 빛날 수 있었던 이유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의 마음 안에 하나님이 충만했기 때문입니다. 저를 한 번 따라해 주시겠습니까? “하나님을 바라보며 살아가는 자는 언제, 어디서나 빛이 납니다.” 스데반의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았던 이유는 그가 평상시에도 하나님을 바라보며 살아왔기 때문입니다. 밤 하늘에 떠 있는 달이 내는 빛은 그 자신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달의 표면에서 나오는 빛은 태양빛이 반사광일 뿐입니다. 마찬가지로 스데반이 가진 천사의 얼굴에서 나오는 빛 역시 그 스스로에게서 나온 빛이 아닙니다. 그가 평상시에도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며 살아갔기에 그의 얼굴에는 주님의 영광의 빛이 흘러 넘쳐습니다.

사람의 얼굴 빛은 그 사람 마음에 무엇이 있느냐에 따라 달라집니다. 마음에 근심이 있는 사람을 보며 우리가 얼굴 표정이 ‘어둡다’고 표현하죠? 그 말이 정확합니다. 사람은 그의 마음에 무엇이 있는가에 따라 얼굴빛이 달라집니다. 병원 중환자실 보호자 대기실에 앉아 계신 가족분들의 얼굴 표정을 보십시오. 염려와 근심으로 그 얼굴 빛이 무척 어둡습니다. 그런데 반대의 경우도 있죠? 젊은이들 사이에서 어떤 사람이 갑자기 평상시보다 더 예뻐 보이면 “너 요즘 연애하니?”라고 물어보는 이유는, 사람 안에 있는 사랑이라는 감정이 실제로 사람을 더욱 밝고 빛나게 만들어 주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인간의 얼굴 빛은 그 마음에 무엇이 자리잡고 있느냐에 따라 달라지기 마련입니다. 우리의 마음에는 무엇이 자리잡고 있습니까?

율법을 받기 위해 시내산에 오른 모세는 하나님의 얼굴은 보지 못하고 등만 보고 내려왔습니다. 그런데도 그의 얼굴에서 나는 광채로 인해 사람들은 모세를 쳐다보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출 34:29) 모세가 그 증거의 두 판을 자기 손에 들고 시내산에서 내려오니 그 산에서 내려올 때에 모세는 자기가 여호와와 말씀하였음을 인하여 얼굴 꺼풀에 광채가 나나 깨닫지 못하였더라 (출 34:30) 아론과 온 이스라엘 자손이 모세를 볼 때에 모세의 얼굴 꺼풀에 광채 남을 보고 그에게 가까이 하기를 두려워하더니” 모세의 얼굴에서 난 빛 역시 그 스스로 낸 빛이 아닙니다. 인간은 스스로 빛을 낼 수 없는 존재입니다. 우리는 태양이 아니라 달고 같은 존재입니다. 마치 스스로 빛을 낼 수 없는 달이 찬란한 태양빛을 받아 그 빛을 반사하는 반사체로서 빛이 나듯이, 모세는 찬란하게 빛나는 하나님의 영광의 빛을 받아 그의 얼굴에 광채가 났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 하나님을 가까이하는 사람들의 얼굴은 천사의 얼굴과 같이 변화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마음에는 기쁨이 가득하고 평강이 가득하기 때문입니다. 한 번 옆에 계신 분의 얼굴을 보십시오. 천사의 얼굴 같습니까? 얼굴이 환하게 빛나고 계십니까? 여성분들 피부를 뽀얗고 하얗게 보이기 위해서 파운데이션, 미백크림 바르시죠? 그러나 인류 역사상 우리에게 주어진 최고의 미백 방법은 바로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 영혼을 하나님으로 가득 채워 놓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지금 스데반이 서 있는 장소는 전혀 기뻐할 수 없는 곳이었습니다. 그가 처한 상황은 죽음과 한 걸음 떨어진 위기 그 자체입니다. 지금 스데반은 유대교의 가장 막강한 권력을 가진 정부 관리자들 앞에 서 재판을 받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은 결정적인 역할을 한 바로 그 동일 인물들에게 붙잡혀 왔습니다. 그의 생사를 결정할 수 있는 권한이 관리들에게 있습니다. 그의 중죄를 입증하는 증인들의 증언도 제출되었습니다. 오늘 해가 떨어지기 전에 그에 대한 사형 선고가 집행될 것입니다. 최악의 상황입니다. 이제 그가 곧 하게 될 진술의 여부에 따라 그의 운명이 결정됩니다. 과연 스데반에게는 중압감이 없었을까요? 놀라운 사실은 오늘 말씀의 이야기를 읽어보면, 공회 앞에선 스데반은 자신의 목숨을 건져야 한다는 중압감을 전혀 느끼지 않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오히려 그는 이 순간을 자신이 평상시 만날 수 없었던 유대교의 높은 관리들에게 예수님에 대한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일생일대의 전도의 기회로 보고 있었습니다. 스데반은 자신에게 주어진 천금 같은 시간을, 자신의 결백을 장황하게 변호하는데 사용하거나 거짓 증인들이 내뱉은 증언들을 논박하는데 허비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얼굴에서는 재판장에서 선 피고의 얼굴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불안감이나 죄책감의 모습을 전혀 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지금 천사의 얼굴을 하고 있습니다. 여기 우리가 스데반에게서 본받아야 할 신앙의 비밀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위기 상황이 되서야 부랴부랴 하나님 찾지 마시고, 평상시에 하나님과 가까이 지내십시오. 날마다 우리의 시선이 하나님을 바라보며 살아감으로써 주님의 빛이 우리 마음에 머물게 하십시오. 그리하면,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온 환난 날일지라 할지라도, 세상이 알 수 없는 하나님의 기쁨과 평강이 우리 마음을 지켜줄 것입니다. 위기 속에서도 우리 얼굴에는 하나님의 영광으로 빛이 날 것입니다.

 

  1. 하늘을 우러러 본 스데반

지금 스데반이 처한 상황을 한 마디로 정리하면 ‘사면초가’입니다. 그의 곁에는 그를 도와줄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외롭고 곤란한 지경에 빠져 있습니다. 이 때 스데반은 어떻게 반응했을까요? 그는 하늘을 우러러보았습니다. “(행 7:55) 스데반이 성령이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한 번 이런 장면을 머리 속으로 그려보십시오. 우리가 길을 걷고 있는데 저 앞에서 복면을 쓴 한 강도가 칼을 들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도망을 가면서도 한편으로는 두 눈은 그 강도를 계속해서 유의하고 그가 혹시라도 나를 잡으러 달려오는 것은 아닐지, 가까이 오지는 않을까 계속해서 주시하고 있지 않겠습니까? 권투를 하는 선수들을 보십시오. 종이 울리기까지 상대편 선수에게서 눈을 떼지 않습니다. 프로 복서들은 주먹 하나만 잘못 맞아도 골로 갑니다. 상대방 주먹 한 대에 ‘KO패’를 당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스데반 주변에는 증오와 분노로 가득 찬 사람들이 그를 죽이기 위해 물어뜯을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말 그대로 아무도 그를 도와줄 사람 없는 ‘외통수’이고, 도망칠 곳 없는 ‘진퇴양난’이며, ‘사면초가’의 상황입니다. 스데반도 알고 있습니다. 증인들은 자신을 죽이기 위해 거짓으로 모함했으며, 재판관들도 이미 자신의 편이 아니라는 것을 말입니다. 빠져나갈 수 없는 함정에 갇힌 상태입니다. 이미 그의 원수들은 ‘Checkmate’를 외쳤습니다. 정신을 초집중해서 상대편의 논리를 뒤집고 재판에서 이기는 방법 밖에는 나가는 길이 없어 보입니다.

바로 이 위기의 상황에서 스데반은 믿지 않는 사람들은 이해하기 힘든 선택을 합니다. 그는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보았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혹시 요즘 여러분의 상황이 혹시 사면초가가 아닙니까? 사방이 막혀 있는 것 같다고 느끼고 계시지는 않습니까? 어느 그 누구 하나 나를 도와줄 사람도 없는 상황, 혹은 그 누구도 도와줄 수 없는 상황에 처해 있지 않으십니까? 한 번 스데반이 취했던 방법을 사용해 보지 않으시겠습니까? 하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더 자세히 말하면 우리의 힘과 구원이 되시는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사방은 막혀 있어도 하늘은 언제나 우리를 향해 열려 있지 않습니까? 시편 121편 1-2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시 121:1)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꼬 (시 121:2) 나의 도움이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 사람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자꾸만 자기 내면 안으로 들어갑니다. 우리 속에서 지혜와 해결책을 찾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의 도움은 하나님께로부터 온다고 이야기합니다.

저와 함께 [여호와는 너를 지키시는 자] 찬양 후렴만 불러볼까요? 눈을 들어 산을 보아라 / 너의 도움 어디서 오나 /  천지 지으신 / 너를 만드신 / 여호와께로다.” 사방은 막혀 있어도 하늘은 열려 있습니다. 우리의 도움이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께로부터 오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지난 한 주간 제가 가장 많이 묵상해 온 한 문장이 있습니다. “문제만 바라보면 하나님이 작아 보이고, 크신 하나님을 바라보면 문제가 작아 보인다.” 이 문장 저를 한 번 따라해 주시겠습니까? 문제만 바라보면 하나님이 작아 보이고, 크신 하나님을 바라보면 문제가 작아 보인다.” 우리가 하나님을 보지 못하고, 계속해서 문제는 바라보면 어느 새 우리 마음은 산처럼 큰 부담과 무거운 짐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크신 하나님을 바라보면, 우리의 문제가 어린 아이가 놀이터에서 만든 두꺼비집처럼 작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에게 힘과 지혜를 주시고, 아무리 어려운 상황도 이겨낼 수 있는 은혜와 도움을 주시는 하나님을 바라보십시오.

 

  1. 스데반과 함께 서 계신 예수 그리스도

스데반이 하늘을 우러러 주목했을 때 그는 무엇을 보았을까요? 55-56절 말씀을 다시 한번 읽겠습니다. “(행 7:55) 스데반이 성령이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행 7:56) 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한대” 성령에 충만했던 스데반이 하늘을 우러러 보았을 때 그는 두 가지를 보았습니다. 첫째로,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습니다. 태양빛보다도 더 찬란하게 빛나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를 보았습니다. 둘째로, 그는 예수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 계신 것을 보았습니다. 저는 바로 이 두 번째 대목을 집중해서 보고 싶습니다. 사도신경을 보면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사오니 이는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장사한 지 사흘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시며, 하늘에 오르사 전능하신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저리로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 예수님께서 서 계십니까? 아니면 앉아 계십니까? 예수님은 본래 우편에 앉아 계십니다. 성경을 구약부터 신약까지 다 찾아봐도 승천하신 예수님은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신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시 110:1) [다윗의 시]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으라 하셨도다 // (마 26:64)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가 말하였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후에 인자가 권능의 우편에 앉은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 하시니 // (골 3:1)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 (히 1:3)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 죄를 정결케 하는 일을 하시고 높은 곳에 계신 위엄의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스데반은 예수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사도행전의 저자 역시 이 부분을 강조하기 위해서 55절, 56절에 두 번 반복해서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라고 기록했습니다. 성경 그 어느 곳에서도 예수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 계신 기록은 본문 말고는 없습니다. 우리는 오늘 엄청난 깊은 의미를 가진 본문을 읽은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셔야 할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늘 이 본문에서는 왜 서 계신 것일까요…?

혹시 재판을 하는 장면을 혹시 드라마나 영화를 통해서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재판의 판결을 내리는 판사는 재판이 진행되는 동안 서 있습니까? 앉아 있습니까? 앉아 있습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이 세상을 심판하는 권세를 주시고 그를 마지막 날에 세상을 심판할 재판관으로 세우셨습니다. 따라서 재판장이신 예수님은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는 것이 마땅합니다. 재판을 하는 장소에 가면 서 있는 사람은 딱 네 부류입니다. 법원에 죄를 고발한 원고’, 죄를 지었다고 고발을 당한 피고’, 그런 피고에게 법원의 심판을 요구하는 즉 공소를 제기하는 검사’, 그리고 마지막으로 피고의 무죄를 위해 피고의 곁에서 함께 하는 변호사’입니다.

지금 스데반은 공회의 재판 장소에 나와 있습니다. 그는 그의 원수들 앞에 서 있습니다. 그러나 스데반은 혼자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셨던 주님께서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스데반의 보혜사 즉 그의 변호자가 되사 그의 무죄를 입증해주고 계십니다. 땅에 사는 사람들은 그를 욕하고, 그의 믿음을 무시하고, 그를 죽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스데반의 믿음의 가치를 인정해주시고 그를 천국으로 환영해 주셨습니다. 스데반은 돌에 맞아 죽었습니다. 그는 교회 역사상 최초의 순교자입니다. 예수님의 복음을 위해 이 땅에 피를 흘리며 죽은 첫 번째 열매입니다. 하나님의 우편에 앉아 계시며 온 세상의 심판자이신 지금 이 순간 그의 보혜사, 변호자가 되어 주셔서 예수님께서 그의 믿음을 인정해 주셨습니다. 그의 죽음은 헛되지 아니하고, 그의 죽음은 쓸쓸한 죽음이 아니었습니다. 하늘에 계신 예수님께서 자리에서 일어나셔서 그의 믿음을 인정해주시고 함께해 주시는 영광스런 순교의 현장이었습니다. 스데반은 최고의 영예를 누리며 살아간 승리자였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무엇을 바라보고 살아가고 계십니까? 여러분의 마음 속 나침반의 바늘은 계속해서 하나님을 가리키고 있습니까? 스데반의 믿음을 본 받으십시다. 아무리 힘들고 어려운 위기 상황이라 할지라도 하늘을 바라봅시다. 사방은 막혀 있어도 하늘은 열려 있습니다. 계속해서 하나님을 바라보며 살아갑시다. 크신 하나님을 바라볼 때 비로소 우리 인생의 문제는 작아집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바라보고 살아갈 때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삶을 인정해 주십니다. 그리고 주님은 끝까지 우리 곁에 서서 우리를 도우시며, 우리와 함께 해주십니다. 성령에 충만한 스데반이 날마다 하나님을 바라봄으로써 살아갔던 영광스러운 삶을 동일하게 살아갈 수 있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