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807 위조된 경건 (이사야 58장 1~14절)


몇일 전에 한국 분당에 위치한 한 김밥짐에서 김밥을 사 먹은 고객 약 200명이 식중독에 걸리는 일이 발생했습니다. 식중독에 걸린 환자들은 김밥을 먹은 후 심한 복통과 어지러운 증상이 나타나 병원을 찾았습니다. 문제는 김밥에 들어간 계란이 원인인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그 많은 사람들이 김밥을 먹었으나, 사실 그 누구도 김밥에 문제가 있는지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겉으로 볼 때는 김밥에 아무런 이상이 없어 보였기 때문이죠. 우리가 먹는 음식도 눈에 보이지 않는 부분이 잘 못되면, 이처럼 온 몸에 병을 유발하는 일들이 발생하는 것처럼, 우리 신앙생활에 있어서도 눈에 보이지 않는 부분이 잘못되면 온 영혼이 병드는 일이 발생합니다. 그렇다면 신앙생활에서 눈에 보이지 않는 부분이란 무엇입니까? 바로 마음의 상태입니다.

오늘 본문은 겉으로는 그럴싸해 보이는 경건한 신앙생활을 하고 있지만, 정작 마음은 그렇지 못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위선적인 경건생활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먼저 1절을 보면,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와 허물을 숨기지 말고 나팔소리처럼 크게 외쳐서 그들의 죄악을 알리라고 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이 겉으로 볼 때는 매우 경건합니다. 겉으로 보면 하나님의 뜻과 길 알기를 즐거워하는 백성 같고, 날마다 이웃에게 공의를 행하는 것 같고, 하나님의 규례를 저버리지 않는 경건한 백성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가식이고 위선이었습니다. 이 모든 것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섬기기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섬기도록 조정하기 위한 일종의 ‘Show’ 였습니다.

주의하십시오. 우리가 예배 드리고, 기도하고, 말씀 보는 이유는 우리가 주님께 속한 백성으로써 하나님 아버지를 섬기기 위한 것이지, 하나님께서 우리를 섬기도록 하기 위한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신앙생활의 목적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이지, 우리의 뜻을 이루는 것이 아닙니다. 아직도 이 부분이 해결되지 못한 사람은 진짜 기독교가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이며, 변질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한 사람이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에는 어떠한 의미가 있습니까? 그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통해 자신의 모든 죄가 사함 받았음을 믿고, 이제 예수가 그의 삶의 주인 되심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엄밀히 말하면 예수가 내 삶의 주인이 아닌 사람은 아직 구원받은 것이 아닙니다. ‘거듭남’, ‘회심’, ‘구원’은 모두 인생의 주인이 ‘나’에서 ‘예수’로 변화한 사건을 가리킵니다.

아무리 겉으로 경건한 모습으로 기도하고, 말씀보고, 예배 드리는 요소가 그의 삶에 있다고 하더라도, 그 마음 중심에 하나님의 뜻을 이루려는 마음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탐욕을 이루려 하는 마음이 자리잡고 있다면 그의 경건은 헛것입니다. 실제로 이스라엘이 그러했습니다. 그들이 하는 경건생활은 남들에게 거룩해 보이기 위한 가식적이고 위선적인 행태에 불과했습니다. 또한 이스라엘은 경건생활을 통해 자신의 탐욕을 채우고자 했습니다. 심지어 자신의 욕심을 이루고자 금식도 했습니다. 그리고는 하나님께서 금식하며 기도했는데도 자신이 원하는 바를 들어주지 않는다고 불평, 불만을 가졌습니다. 3절을 봅시다. (사 58:3) 이르기를 우리가 금식하되 주께서 보지 아니하심은 어찜이오며 우리가 마음을 괴롭게 하되 주께서 알아주지 아니하심은 어찜이니이까 하느니라…” 하나님께서 자신의 탐욕을 채워주지 않는다고 불평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목소리를 들어보십시오. “내가 금식까지 했는데… 안 들어주나?”하는 불만에 쌓여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들이 금식을 통해서 하나님을 조종하여 자기 마음대로 부려 먹으려고 하는 마음을 잘 알고 계셨기 때문에 괘씸하게 여기시며 오히려 이들의 잘못된 금식을 책망하셨습니다. 3절 후반절부터 5절까지 봅시다. ”…보라 너희가 금식하는 날에 오락을 찾아 얻으며 온갖 일을 시키는도다. (사 58:4) 보라 너희가 금식하면서 다투며 싸우며 악한 주먹으로 치는도다 너희의 오늘 금식하는 것은 너희 목소리로 상달케 하려 하는 것이 아니라 (사 58:5) 이것이 어찌 나의 기뻐하는 금식이 되겠으며 이것이 어찌 사람이 그 마음을 괴롭게 하는 날이 되겠느냐 그 머리를 갈대 같이 숙이고 굵은 베와 재를 펴는 것을 어찌 금식이라 하겠으며 여호와께 열납될 날이라 하겠느냐” 오늘 본문에 ‘오락’이란 단어가 자주 등장합니다. 여기서 ‘오락’이란 말은 오늘날 말하는 ‘게임’이 아니라, ‘경제적 이익’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하시면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금식을 하면서도 마음을 괴롭게 하는 것이 아니라, 속으로는 ‘어떻게 돈 벌까?’ 이 궁리를 하고 있었던 것이죠.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금식하는 이유도 사실 재물에 대한 축복을 받기 위한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이들은 금식하면서 일꾼들을 무리하게 일을 시킵니다. 금식하는 날에 사람들과 다투고 싸우며 주먹질을 합니다. 그러면서도 이들은 하나님을 향하여 “왜 우리가 금식했는데 안 들어줍니까?”하고 반응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금식은 금식이 아니며, 아무리 갈대 같이 머리를 숙이고, 굵은 베를 입고 재를 깔고 앉는다고 해서 다 참 금식이 되는 것은 아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매년 수능 시즌이 되면 절에 찾아와 불상 앞에서 108번 절하는 어머니들의 모습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습니다. 자기 자식의 밝은 미래를 위하여 어머니들이 바닥에 방석을 하나 깔아 두고 온 몸이 땀에 젖도록 절을 합니다. 어떤 분들은 절이 다 끝나면 너무 힘들어서 털썩 쓰러집니다. 불교 사람들이 그들의 종교생활 하는 것 보면 참 정성이 지극합니다. 그런데 그들 마음에는 결국 인간적인 욕심과 탐욕을 채우기 위한 것밖에는 없습니다. 기독교는 이러한 점에서 타 종교와 구분이 됩니다. 기독교는 신자 자신의 욕구를 채워주는 것이 목표가 아닙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날마다 우리의 필요를 채워주시고 공급해 주심을 우리는 믿고 고백합니다. 그러나 거기에 궁극적인 목적이 있지 않습니다. 결국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셨듯이, “내 뜻대로 하지 마옵시고, 아버지 뜻대로 하옵소서.”하고 고백하며 자신의 삶을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드리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모습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주님께서 정말로 기뻐하시는 금식의 모습이 어떤 것인지 설명해 주십니다. 단순히 밥을 굶거나, 불편하게 생활하거나, 사람이 자신을 괴롭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이게 하지 못합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참된 금식입니까? 바로 이웃을 섬기는 것입니다. 6-7절 말씀을 봅시다. “(사 58:6) 나의 기뻐하는 금식은 흉악의 결박을 풀어주며 멍에의 줄을 끌러주며 압제 당하는 자를 자유케 하며 모든 멍에를 꺾는 것이 아니겠느냐 (사 58:7) 또 주린 자에게 네 식물을 나눠 주며 유리하는 빈민을 네 집에 들이며 벗은 자를 보면 입히며 또 네 골육을 피하여 스스로 숨지 아니하는 것이 아니겠느냐” 이스라엘은 바벨론에게 멸망당한 후 농촌 경제가 말할 수 없는 지경으로 피폐해졌습니다. 게다가 수년간 거듭된 흉작은 농민들에게는 치명적인 피해를 안겨주었습니다. 그 결과 빚을 갚지 못하고 집과 농경지를 채권자에게 빼앗기고 노예가 된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바로 이와 같은 노예가 된 동족 형제들을 자유롭게 풀어주는 것이 하나님의 마음을 기쁘시게 하는 참된 금식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삶 속에서는 형제들을 착취하고 억압하면서 밥을 굶고 금식한다고 내세우며 자신은 하나님의 뜻을 행한다고 말하는 것은 하나님 보실 때 설득력이 전혀 없었습니다. 길거리에 굶주린 사람들 데려다가 먹을 것 나눠주고, 떠돌이 나그네들에게 쉼터를 제공하고, 옷이 없어 헐벗은 자들에게 옷을 주고, 어려움에 처한 친척들 외면하지 않는 이웃 사랑이야말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참된 금식의 모습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와 같이 살아가는 자가 받을 축복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그의 삶을 치유하시고, 그를 존귀하게 만드시고, 그의 기도에 응답해 주십니다. 8-9절 말씀을 봅시다. “(사 58:8) 그리하면 네 빛이 아침 같이 비췰 것이며 네 치료가 급속할 것이며 네 의가 네 앞에 행하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뒤에 호위하리니 (사 58:9) 네가 부를 때에는 나 여호와가 응답하겠고 네가 부르짖을 때에는 말하기를 내가 여기 있다 하리라…” 자기 탐심을 이루기 위해서 하나님을 조종하려는 마음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바대로 신앙생활을 하게 될 때, 비로서 말씀과 같은 축복을 받게 됩니다. 신속하게 치유하심, 삶을 존귀케 하심, 기도에 응답하심과 같은 일들은 우리가 얼마나 간절히 사모하는 삶의 모습입니다. 바로 이와 같은 축복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이웃을 섬기며 살아가는 참된 경건한 자들에게 주어집니다. 특별히 하나님은 굶주린 자들을 먹이고, 괴로운 자들을 위로하는 사역을 하는 자들을 축복하십니다. 그러한 자들의 삶을 짧게 정리해서 말하면 ‘물댄 동산’ 같습니다. 11절을 봅시다. “(사 58:11) 나 여호와가 너를 항상 인도하여 마른 곳에서도 네 영혼을 만족케 하며 네 뼈를 견고케 하리니 너는 물댄 동산 같겠고 물이 끊어지지 아니하는 샘 같을 것이라” 하나님을 섬기고, 이웃을 사랑하는 자의 삶은 심지어 마른 곳에서도 복을 받습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두려워하는 재앙과 환난이 임해도 참으로 경건하게 살아가는 자의 인생은 물이 끊어지지 아니하는 샘과 같이 하나님으로부터 복을 받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는 것에는 분명 복이 있습니다. 그러나 위선과 가식적인 신앙생활은 아무런 유익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외적인 모습보다 사람의 중심을 더욱 중요시하십니다. 외식적인 종교 활동은 그치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만한 마음을 품고 이웃에게 참된 사랑을 실천하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 되길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