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725 사도행전 강해 (12) 다 나음을 얻으니라 (사도행전 5장 12절~16절)

         

예수님과 제자들은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에 이르렀습니다. 이 때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런 질문을 던지셨습니다. “사람들은 인자를 누구라고 하느냐?” 제자들이 대답했습니다. “네, 선생님. 선생님을 가리켜 세례 요한이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고, 엘리야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고, 예레미야나 예언자 가운데 한 분이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제자들의 대답을 들으신 주님은 또 다시 물으셨습니다.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이 질문에 예수님의 수제자인 베드로가 대답했습니다. “주님은 그리스도시며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베드로의 대답을 들으신 예수님은 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요나의 아들 시몬아, 너는 복이 있다. 너에게 이것을 알려 주신 분은 사람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나의 아버지시다. 나도 너에게 말한다. 너는 베드로다. 내가 이 돌 위에 내 교회를 지을 것이니 지옥의 문이 이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 내가 너에게 하늘 나라의 열쇠를 줄 것이다. 무엇이든지 네가 땅에서 잠그면 하늘에서도 잠겨 있을 것이요, 무엇이든지 네가 땅에서 열면 하늘에서도 열려 있을 것이다.”

천주교는 이 말씀을 해석하며 예수님께서 실제로 베드로 개인에게 천국 열쇠를 주셨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천주교는 베드로를 천국 열쇠를 가진 초대 교황으로 추대하고 지금도 계속해서 교황의 명맥을 이어오고 있습니다. 베드로를 포함하여 대략 260명 이상의 교황이 있었습니다. 천주교는 교황의 권위를 절대적으로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그가 천국 열쇠를 가진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천주교에서 사용하는 교황의 문장을 보면 황금 열쇠가 들어가 있습니다. 지금도 교황이 나타나면 수천 명의 사람들이 운집해서 그의 손 등에 키스하고 그와 손을 잡으려 하는 등 많은 사람들이 교황에게 환호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영국의 목회자였던 마틴 로이드 존스 목사는 천주교야말로 ‘마귀의 가장 뛰어난 걸작품’이라고 말했습니다. 우리 코너스톤 교회와 모든 장로교 교회 신앙의 근간이 되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25조 6항을 보면 로마 카톨릭 교황을 적그리스도로 못박고 있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 외에 교회의 다른 머리는 없다. 로마 교황도 또한 결코 그 머리가 될 수 없고, 다만 적그리스도요, 불법의 사람이요, 멸망의 아들이요, 교회 안에서 그리스도와 하나님이라 일컫는 모든 것에 대적하여 자기를 높이는 자이다.” 개신교는 천주교와 같이 특정한 개인이 천국 열쇠를 가지고 있다고 고백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개신교에는 교황과 같은 존재가 없습니다. 개신교는 천주교와 성경을 다르게 해석합니다. 앞서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내가 이 반석 위에 교회를 세우겠다”고 말씀하셨을 때, 주님의 의도는 베드로 개인에게 하신 말씀이 아니라, 베드로와 같은 믿음의 고백, 즉 예수가 그리스도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믿음의 고백 위에 교회를 세우시겠다는 말씀으로 해석합니다. 즉 천국 열쇠는 교황과 같은 특수한 소수의 개인이 지닌 것이 아니라, 누구든지 예수를 자신의 구원자와 주님으로 고백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따라서 누구든지 이 땅에서 살아가는 동안 예수를 구주로 고백한 사람은 하나님의 나라 문을 열고 들어갈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개신교의 신앙고백 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에게는 하늘 문을 열고 들어갈 믿음의 고백이 있습니까? 십자가에 달려 죽은 나사렛 예수가 여러분을 죄에서 구원하기 위해 이 땅에 오신 구원자요 하나님의 아들임을 믿으실 수 있기 바랍니다. 바로 그 믿음의 고백을 하는 자들에게 하나님은 천국문을 열어 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1. 믿음이 있는 교회

실제로 사도행전을 읽어보면, 사도 베드로가 자신이 구원을 베푸는 존재인냥, 하늘 문을 열고 닫는 열쇠를 가진 존재처럼 행동하지 않습니다. 베드로는 오직 예수가 그리스도 되심을 증거했습니다. 베드로는 더욱 많은 사람들이 이 진리를 믿음으로 고백하도록 복음을 전파했습니다. 베드로와 사도들이 일심으로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증거하자 그들의 손으로 하는 일들에 ‘표적’과 ‘기사’가 많이 나타났습니다. 오늘 본문 12절에 사용된 ‘표적’이란 단어는 영어로 ‘sign’이라고 번역되어 있습니다. 표적이란, ‘하나님께서 사도들의 사역을 인정해주시고 그들과 함께 하고 계심을 나타내는 증거’를 의미합니다. 사람들은 사도들의 손에 의해 나타나는 초자연적인 기적들을 통해 하나님께서 이들을 보내셨음을 분명하게 알 수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유대인들 가운데는 믿는 사람들이 날마다 더해졌습니다. 12절을 보면 “믿는 사람이 다 마음을 같이 하여”라고 표현했고, 14절을 보면 “믿고 주께로 나오는 자가 더 많으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교회는 믿는 자들의 모임입니다.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예수의 죽음이 바로 나의 죄를 대신한 죽음이었음을 믿음으로 고백하며, 예수의 부활하심과 이 세상에 다시 오심을 믿음으로 고백하는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이 고백을 할 수 없다면, 몸으로는 교회의 일원이 되었는지 몰라도, 영적으로는 아직 하나님 나라 가족이 아닙니다.

아름다운 들판에는 꽃도 심기어 있지만, 잡초도 함께 심겨 있기 마련입니다. 식물이 다 자라지 않은 상태에서는 꽃과 잡초를 구분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함부로 잡초를 뽑으려 하다가 꽃도 뽑기 십상입니다. 그래서 시간이 어느 정도 지난 후에 꽃과 잡초가 자라면 그 이후에 잡초를 뽑습니다. 교회 안에는 꽃과 같이 믿음의 열매를 맺는 참 신자가 있고, 아무런 유익이 없는 잡초와 같이 예수에 대한 믿음이 없어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이 공존합니다. 우리가 어떤 사람들이 구원받았는지 구원받지 못했는지 판단할 수 없습니다. 오직 마지막 날에 심판자 되시는 주님께서 판단하실 뿐입니다. 지금은 꽃과 잡초가 정원에 심기어 있지만 때가 되면 농부 되시는 하나님께서 잡초는 아궁이 불과 같은 지옥불에 던지시고, 꽃은 영생의 열매를 맺도록 보호해 주실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교회 안에는 양과 염소가 있습니다. 양은 예수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받은 자들을 상징하고, 염소는 양처럼 생겼으나, 실상은 양이 아니라 구원받지 못하는 자들을 상징합니다. 누가 양인지 누가 염소인지 우리는 알지 못합니다.

휴가를 끝내고 비행기를 타고 오는데, 처음 비행기 출발 전에 스튜어디스 (flight attendant)가 안전벨트 착용법과 비상상황 시 행동 요령을 설명해줍니다. 기내 압력이 저하되는 경우 산소가 나오는 노란색 컵 모양의 호흡기가 위에서 자동으로 나옵니다. 어린 아이들을 둔 부모는 본능상, 자녀를 살리기 위해서 먼저 아이에게 호흡기를 씌우고, 그 다음 자기가 호흡기를 쓰려고 합니다. 그러나 스튜어디스는 제일 먼저 부모가 쓰고 그 다음 자녀에게 호흡기를 씌어 줄 것을 안내합니다. 그것이 생존 가능성을 높이는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 내에 누가 예수를 믿는가, 우리 가족 중에 누가 구원을 받았는가, 저 사람은 구원을 받았는가 남을 판단하기에 앞서 먼저 자기 자신을 살펴보십시오. 진실로 우리가 예수의 십자가 죽음이 나를 위한 죽음으로 받아들이고 있는지, 예수의 장사시낸지 3일 후 부활하심과 마지막 날에 이 땅에 다시 오심을 믿고 있는지 점검해 보십시오.

혹시 아직 이와 같은 복음을 믿지 못하고 계신 분이 있습니까? 계속해서 말씀을 들으십시오. 믿음은 들음에서 납니다. 살아 계신 하나님의 말씀을 꾸준히 들을 때 믿음이 생겨납니다. 성경을 펼쳐서 복음서를 읽으십시오. 그리고 복음서에 나온 예수님의 가르침들을 진지하게 묵상하십시오. 그리고 어느 날 이제 때가 되었다고 생각되면, 예수를 나의 구원자로 믿고 받아들이기로 결단하십시오. 예수님에 대한 그 믿음이 여러분을 천국 문을 열고 들어가게 할 것입니다.

 

  1. 칭송을 받은 교회

자, 예수를 나를 위해 죽으신 구원자이심을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습니까? 그럼 그 다음은 무엇입니까? 삶이 변화해야 합니다. 초대 교회는 가난한 사람들을 구제하고 돌보는 일에 많은 힘을 쏟았습니다. 13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행 5:13) 그 나머지는 감히 그들과 상종하는 사람이 없으나 백성이 칭송하더라” 이미 유대교 지도자들은 예수를 따르는 무리를 이단으로 규정했습니다. 이에 누구든지 나사렛 예수의 무리를 따르는 자들은 유대인 사회에서 추방당하게 되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이러한 상황에 이를 것을 두려워하며, 그리스도인들과 상종하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초대 교회의 선행을 눈으로 보고 귀로도 들었습니다. 교회가 힘 없는 고아, 과부, 나그네, 이방인들을 돌보고, 먹을 것이 없어 굶주린 가난한 사람들을 돕기 위해 자신의 집과 밭을 팔아먹을 것을 나눠주는 모습을 다 보았습니다.

비록 유대인들이 출교 당할 것을 두려워하여 그리스도인들과 서로 교제하거나 상종하지 않았습니다만,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의 구제와 선행으로 인해 유대인들에게 칭송을 받았습니다. 이것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을 살아가는 모습이 되어야 합니다. 비록 세상 사람들이 예수의 존재를 부인하고, 그의 십자가 죽음이 역사적 사건이 아니라 허구라고 생각하며 우리의 믿음을 비웃을지 몰라도,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만큼은 칭송을 받을 수 있어야 합니다. 모두가 자기 자신의 유익을 위해 살아가는 세상 속에서, 내가 가진 것을 이웃들에게 나눠주고, 사랑으로 섬기며, 맡은 일에 대해서는 누가 보는 이 없어도 성실하고 정직하게 일하며 최선을 다하며 살아감으로써 우리는 믿지 않는 세상 사람들로부터 칭송을 받을 수 있습니다.

자식이 범죄하면 범죄자의 부모까지 욕을 먹는 것과 같이, 세상에서 기독교인인 우리들이 불성실하고 부정직함으로써 욕을 먹게 되면, 우리가 믿고 섬기는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이 모욕당하게 됩니다. 반대로, 올림픽에서 선수가 금메달을 따면 그 선수의 부모도 영광을 함께 받습니다. 마찬가지로 교회가 세상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충실히 감당할 때, 세상은 교회를 칭찬하고 또한 우리가 믿고 섬기는 하나님을 칭송할 것입니다. 처음에 유대인들은 나사렛 예수를 따르는 무리들을 멀리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의 삶을 가까이서 들여다보며 그들이 가진 생명력과 참 사랑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시간이 지나감에 따라 한 사람 두 사람 교회가 믿고 고백하는 예수를 만나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점차 늘어났습니다. 그 결과 14절 말씀처럼 예수를 주로 고백하며 나오는 남녀의 큰 무리가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비록 우리 주변 사람들이 우리들이 가진 예수님을 향한 믿음을 받아들이지는 못해도,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삶은 그들에게 존경과 칭찬받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가정에서도, 직장에서도, 가게에서도, 일상의 삶 속에서도 사랑과 나눔의 삶, 성실과 정직한 삶을 통해 이웃들에게 칭송 받는 삶을 살아가십시오. 그리하여 우리가 믿고 섬기는 하나님 아버지께도 영광을 돌려드리는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

 

  1. 치유가 있는 교회

초대 교회는 예수를 구주로 고백하는 믿음이 있었고, 또한 구제와 선행으로 사람들에게 칭송 받는 교회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초대 교회에는 치유의 역사도 함께 나타났습니다. 15-16절 말씀을 함께 보겠습니다. “(행 5:15) 심지어 병든 사람을 메고 거리에 나가 침대와 요 위에 뉘우고 베드로가 지날 때에 혹 그 그림자라도 뉘게 덮일까 바라고 (행 5:16) 예루살렘 근읍 허다한 사람들도 모여 병든 사람과 더러운 귀신에게 괴로움 받는 사람을 데리고 와서 다 나음을 얻으니라” 15절 말씀을 보면 사람들이 병든 사람을 데리고 왔습니다. 병세가 얼마나 심각했는가 하면 혼자서는 교회에 나올 수 없어서 사람들이 부축해서 데리고 와야 했습니다. 게다가 일어서 있기도 힘들어서 간이침대 위에 눕혀 두거나, 바닥에 요를 깔아 놓고 그 위에 환자를 눕게 했습니다. 한 번 머리속으로 이 장면을 그려보십시오. ICU (중환자실)에 누워 있어야 하는 환자들이 교회로 가는 길에 누워 있습니다. 자기 혼자서는 걸어갈 수도 없을 정도로 중병을 앓고 있던 환자들이 고쳐달라고 나왔습니다. 병을 고치기 위해서 무엇을 안 해 봤겠습니까? 약이란 약은 다 먹어보고, 의사란 의사는 다 만나봤을 겁니다. 그래도 병이 낫지 않으니까 기적을 바라고 치료자 예수를 소망 삼아 나왔습니다.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전파하는 교회에서 치유의 역사가 일어난다는 소식과 소문을 듣고 마지막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환자의 가족들과 친구들이 그들을 데리고 교회에 나왔습니다. 16절을 보니 예루살렘 근방에 있는 다른 마을에서 찾아온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수를 헤아릴 수 없는 많은 병든 사람들과 또 더러운 귀신들린 사람들까지도 다 예수를 믿는 공동체를 찾아왔습니다. 교회 안에 치유의 역사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은 놀라운 사실을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16절 후반절을 보십시오. “와서 다 나음을 얻으니라” 현대 병원에서도 입원한 환자가 100% 다 나아서 돌아가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불치병 환자들, 오래된 지병을 앓고 있는 환자들 등 다양한 중환자들의 경우 장기간 병원에 입원해도 질병을 못 고치는 일들이 비일비재합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초대 교회를 찾아온 그 허다한 환자들이 다 나음을 얻었습니다. 이는 말 그대로 기적입니다. 하나님의 치유의 역사가 일어난 것입니다.

예수를 구주로 믿는 자들의 모임인 교회 공동체 안에서는 여전히 이와 같은 치유의 역사가 일어나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16절에 “병든 사람”은 육신의 문제로 아파하는 사람입니다. 16절에 “더러운 귀신에게 괴로움 받는 사람”은 영혼의 문제로 고통을 겪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가진 문제가 육체의 문제이든지, 마음 속 영혼의 문제이든지 치료자 되시는 예수님께서 고치시지 못할 문제는 없습니다. 16절 말씀, “다 나음을 얻으니라”처럼 교회 안에서 역사하고 계시는 성령 하나님께서는 그를 찾아온 모든 사람들을 능히 치유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에 침대에 누워 있던 사람들이 무엇을 했겠는가? 그냥 아파하며 누워만 있었습니다. 그러나 은혜의 자리에 나와 있으니 그들의 병이 나았습니다! 너무 신기하지 않습니까?

우리들도 우리 스스로 도저히 고칠 수 없는 인생의 문제들이 있지 않습니까? 도저히 세상 그 무엇으로도 해결할 수 없는 영적 상황과 육체적 질병과 인생의 문제들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까? 은혜의 자리에 나아오십시오. 치료자 예수님께서 반드시 역사하십니다. 예수님은 믿는 사람들 두 세 사람이 모인 그 자리에 주님도 함께 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눈에 보이지는 않아도 예수를 구주로 고백하는 우리가 모인 지금 이 자리에 치료자 되시는 예수님도 함께하고 계십니다. 주님께서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 모두를 치료하고 계시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