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718 사도행전 강해 (11) 나눔이 있는 공동체 (사도행전 4장 32절~5장 11절)

 

       

  1. 나눔이 있는 공동체

우리는 인류 역사상 그 어느 때보다도 부유한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이 세상에는 아직도 하루에 한끼를 제대로 먹지 못하는 사람들이 수두룩합니다. 지난 2019년도 기준, 전 세계에서 제일 부유한 나라로 불리는 미국 안에서 일명 ‘Household Food insecurity’ 상태에 있는 인구가 35 million (3천 5백만명)이었습니다. COVID 팬데믹 이후 그 숫자는 약 700백 만명이나 늘어났습니다. 2021년도 현재 미국 안에서 오늘 하루 먹고 살 끼니를 걱정해야 하는 위기에 놓인 가정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은 약 42 million (4천 2백만명) 이상으로 추정됩니다. 전 세계에서 가장 부유하다고 여겨지는 미국 안에서도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제대로 먹지 못해 굶고 있습니다. 식량 부족은 미국만의 문제는 아닙니다.

유엔 인권위원회 식량특별조사관으로 일했던 [장 지글러]라는 작가가 쓴 책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을 보면 지난 2007년 전 세계에서 만성 영상실조에 허덕이는 사람들, 심각한 기아 상태에 빠진 사람들의 숫자를 다 더해보니 8억 2천 8백만명이 나왔습니다. (828 million) 2021년도 자료를 조사해보니까 이 숫자는 거의 변함이 없습니다. 지난 15년간 전 세계의 수많은 국가들과 단체와 기관들이 천문학적인 돈을 투자해서 기근을 해결해 보려고 했지만, 식량부족 문제는 여전히 해결하지 못했습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지구에는 현재 살고 있는 총인구보다 2배나 많은 인구도 먹여 살릴 수 있을 만큼 충분한 식량이 생산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먹을 것이 없어서 굶주리는 것이 아니라, 식량이 필요한 사람들의 손까지 음식이 전달되지 않아서 전 세계의 8억명이 넘는 사람들이 지금까지도 굶주린 배를 움켜쥐고 기아에 허덕이고 있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 굶주림의 문제를 해결한 한 공동체가 있었습니다. 그것도 사회복지나 자선단체 같은 개념조차 존재하지도 않았던 2천년 전에 말이죠. 바로 초대 교회 이야기입니다. 비결은 간단했습니다. 먹을 것이 충분한 성도들이 부족한 사람들과 함께 자신의 것을 서로 나누어 썼습니다. 사실 빈번한 전쟁과 열악한 농업 관개시설, 가뭄 그리고 로마 제국에 내야 하는 높은 세금 등으로 인해 먹을 것이 부족했습니다. 그로 인해 사회적 약자들인 고아, 과부, 나그네, 이방인, 노예, 장애를 가지고 있거나 중병에 걸려 가족으로부터 외면 받는 환자들 등 수많은 사람들이 기아에 허덕여야 했습니다. 이러한 상황 가운데 유대인들은 성도들이 자신의 소유를 팔아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나눠주는 모습을 보며 깊게 감동했습니다. 그 감동은 유대인들이 십자가 복음을 믿고 예수를 영접하는 전도의 기회로 이어지기도 했습니다. 교회의 선행에 대한 소식을 들은 유대인 사회는, 여태까지 누구도 해결하지 못하던 기근의 문제를 해결해가는 초대 교회를 보고 놀라워하며 칭찬을 아까지 않았습니다.

더 놀라운 사실은 이 모든 나눔이 성도들의 자발적인 헌신으로 이어졌다는 것입니다. 사도들의 강압적 설득이나 공동체의 억압에 의한 헌신이 아니라, 형제들을 사랑하는 성도들의 자발적인 마음에서 나눔이 이루어졌습니다. 진심으로 성도들은 다 한 마음과 한 정신으로 서로의 소유를 나누며 살았습니다. 때로는 밭이나 집이 있는 사람이 그의 가진 소유를 팔아 판 돈을 교회 공동체에 헌물 했고, 교회는 그 돈으로 교회 안에 굶주린 자들, 어려운 사람들을 돕는데 사용했습니다. 참으로 이상적인 공동체의 모습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얼마나 다른 성도들과 우리의 삶을 나누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나눔도 훈련이 필요합니다. 나눔은 누가 시켜서 하면 오래하지 못합니다. 자발적인 나눔이 몸에 베일 수 있도록 작은 나눔부터 실천하시기 바랍니다.

 

  1. 바나바 요셉

초대 교회가 보여준 나눔은 이 공동체가 얼마나 성령으로 충만한 공동체였는지, 얼마나 사랑이 가득 넘치는 공동체였는지 우리로 짐작하게 해줍니다. 이제 사도행전의 카메라는 성도들 중 요셉이라는 인물에 포커스를 맞춥니다. 사도들은 그를 ‘바나바’라고 불렀습니다. 바나바란 이름의 뜻은 ‘격려하는 사람’(Son of Encouragement), 혹은 ‘위로자’ (Son of Comfort)란 뜻입니다. 바나바가 얼마나 형제들을 위로하고 격려하는데 그의 삶을 헌신했으면 사도들이 그를 부를 때 ‘격려자’, ‘위로자’하고 별명을 붙여서 그를 불렀을까요? 힘든 사람을 한두 번 잘 해주는 것은 비교적 어렵지 않습니다. 그러나 꾸준히 위로하고 격려하고 함께 해주는 것은 많은 헌신이 필요합니다. 바나바는 어렵고 힘든 상황에 처한 형제들을 돕기 위해서 자신의 삶을 헌신할 줄 아는 성숙한 사람이었습니다. 우리 코너스톤 교회 안에도 바나바와 같은 성도님들이 계십니다. 자신의 시간을 내어 형제, 자매들을 찾아가 위로하고, 물질로 섬기시는 분들이 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모두가 바나바와 같은 사람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서로가 서로를 격려하고 위로하고 자신의 삶을 나눠줌으로써 든든히 세워주는 교회가 되기를 축복합니다.

바나바는 본래 이스라엘 본토 출신이 아니라 지중해의 섬인 구브로(키프로스)에서 태어난 유대인입니다. 그러나 그는 예루살렘에 친척도 있었고, 땅도 있었습니다. 36절 말씀을 보면, 바나바는 레위 지파 사람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성경을 자세하게 보시는 분들은 여기서 한 가지 궁금증이 생깁니다. 본래 모세오경을 보면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은 땅을 소유하는 것을 금지하고 있는 규정이 있습니다. 민수기 18장과 신명기 10장에 레위인은 가나안 땅을 분배 받지 못하고 또한 물려받을 땅도 없다고 분명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오늘 본문을 보니, 레위 지파 출신의 바나바가 땅을 소유하고 있는 것이죠. 성경학자들은 가나안 땅에 정착하고 오랜 세월이 흐른 뒤 제사장들과 레위인들도 개인 땅과 토지를 소유하고 있었음을 발견하고 있습니다. 한 예로 예레미야 32장에는 예레미야 선지자가 그의 숙부의 아들 하나멜로부터 아나돗에 있는 밭을 사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본문을 자세히 읽어보면 예레미야 선지자가 밭을 사촌으로부터 매입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정확히 언제부터인지는 알 수 없으나, 제사장과 레위지파가 땅을 소유하는 것을 금지해온 규정이 실제적인 효력을 잃어버렸다는 것을 짐작해 알 수 있습니다.

요셉이란 이름을 가진 격려자, 위로자 바나바는 교회의 어려운 형제, 자매들을 섬기기 위해서 자신이 가진 땅을 팔았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나온 매매 대금을 공동체의 유익을 위해 사도들에게 전달했습니다. 바나바 뿐만 아니라 이미 여러 성도들이 굶주리고 가난하고 병든 형제자매를 위해 자발적으로 자신의 소유를 팔아 공동체의 어려운 지체들을 섬겼습니다.

 

  1.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의 거짓말

이와 같이 나눔이 넘치는 초대 교회 분위기 속에서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가 등장합니다. 이들 부부도 교회에 어려운 형제, 자매들을 돕기 위해 자기들이 소유한 땅 일부분을 팔았습니다. 여기까지만 보면 이 부부도 참 대단한 결정을 한 사람들 아닙니까? 우리가 평생 교회 다니면서 어려운 형제자매를 위해서 자기가 소유한 땅을 판 사람들을 몇 명이나 만날 수 있겠습니까? 참 보기 드문 부부임에는 분명합니다. 그 마음 속 동기가 정말로 교회 내 어려운 사람들을 돕기 위해서인지, 아니면 초대 교회 분위기가 너도 나도 개인의 소유를 팔아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터라 사회적 압박을 느껴서 그랬는지는 우리가 알 길이 없습니다. 또한 어떤 분들은 본문을 보며 아나니아 삽비라에게 참 믿음이 있었느냐 없었느냐, 이 사람들이 정말로 예수님을 믿었느냐 안 믿었느냐에 대해 질문합니다. 그러나 사실 그런 질문들에 대해서 대답할 수 있는 정보가 본문에 나와 있지 않습니다.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이들이 하나님 앞에서 해서는 안되는 큰 잘못을 저질렀다는 사실 뿐입니다.

먼저 한 가지 분명하게 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이 부부가 자신들의 개인 소유였던 땅을 팔아서 그 중 일부는 자신들이 갖고, 나머지를 교회에 헌금한 행위가 죄는 아닙니다. 기독교는 개인의 사유재산을 인정합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가 자신들의 개인적 용도를 위해 땅값의 일부를 가지고 있는 것은 그들의 권리이며, 거기에는 아무런 잘못이 없습니다. 아무도 아나니아에게 그의 재산을 팔라고 어떤 강요도 억압도 할 수 없습니다. 말 그대로 개인 소유물이기 때문입니다. 땅과 밭은 하나님께서 아나니아에게 주신 그의 사유재산이었고, 그는 것을 가지고 있든지 팔든지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권한이 있습니다. 심지어 그가 땅을 팔아서 다른 건물을 사거나 다른 비니지스에 투자했더라도 그것 또한 그의 자유이며 그것은 죄가 아닙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문제였을까요?

오늘 본문을 다시 한번 읽어봅시다. 사도행전 5장 1-5절 말씀입니다. “(행 5:1) 아나니아라 하는 사람이 그 아내 삽비라로 더불어 소유를 팔아 (행 5:2) 그 값에서 얼마를 감추매 그 아내도 알더라 얼마를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두니 (행 5:3) 베드로가 가로되 아나니아야 어찌하여 사단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 값 얼마를 감추었느냐 (행 5:4) 땅이 그대로 있을 때에는 네 땅이 아니며 판 후에도 네 임의로 할 수가 없더냐 어찌하여 이 일을 네 마음에 두었느냐 사람에게 거짓말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로다 (행 5:5) 아나니아가 이 말을 듣고 엎드러져 혼이 떠나니 이 일을 듣는 사람이 다 크게 두려워하더라”

아나니아는 자신이 소유했던 땅을 팔고 남은 돈의 일부를 공동체의 유익을 위해 사용하도록, 어려운 형제자매들을 돕는데 사용하도록 교회에 헌금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어떤 마음의 동기인지 우리가 정확하게는 알 수 없지만, 그는 거짓말을 했습니다. 그는 사도들에게 자신이 지금 전달하는 돈은 땅을 팔고 받은 매매 대금의 전부라고 거짓말을 했습니다. 아마도 아나니아보다 앞서 공동체에 큰 자비를 베푼 바나바가 사람들에게 칭찬받고 존경받는 모습을 보며, 자신도 그와 같이 교회 내에서 자비로운 사람으로 인정받기를 원하는 시기심과 욕심 때문에 그런 거짓말을 했을 것입니다. 교회 내에서 다른 성도들이 자신을 쳐다보며 “저 아나니아 집사님 참 관대한 분이야. 저분 정말 멋있는 분이야. 글쎄, 이번에 자기 땅을 팔아서 그 대금을 전부 힘들고 어려운 형제, 자매 돕는데 쓰라고 다 헌금하셨다니까?” 하고 반응하는 성도들의 존경심과 우러러봄을 받고 싶은 마음에서 교회를 속이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아나니아가 성령께서 세우신 믿음의 공동체인 교회를 속이려고 했을 때, 그는 사실상 그 공동체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속이려고 했던 것입니다. 우리 사회는 거짓말을 큰 죄로 인식하지 않습니다. 상거래를 하며 상대방을 속이는 행위는 일상다반사가 된 세상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거짓을 용납하지 않으십니다. 특히 성경에서 하나님을 속이려고 한 사람들은 모두 무시무시한 심판을 받았습니다. 여리고 성을 점령할 때 모두를 속이고 물품을 몰래 감추었던 아간, 그와 온 식구들은 다 돌에 맞아 죽었습니다. 엘리사 선지자를 속이고 몰래 나아만 장군을 뒤따라가 금품을 요구하고, 자기 장막에 숨긴 엘리사의 몸종 게하시, 나아만 장군의 문둥병이 그에게 옮겨 갔습니다. 평생 문둥이로 살다 죽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세우신 공동체인 교회를 속임으로써 사실상 하나님께 거짓말을 한 아나니아, 그는 결국 그 자리에서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 아래 즉사하고 말았습니다. 아나니아의 갑작스런 죽음은 그의 죽음이 일반적인 사건이나 사고에 의한 것이 아니라, 분명한 하나님의 심판으로 인한 죽음이었음을 보여줍니다. 이 사건에 대해서 들은 사람들은 하나님이 몹시도 두려웠습니다.

우리는 다음과 같은 메시지를 자주 들어왔습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을 사랑하십니다. 예수님은 여러분의 가장 친한 친구가 되십니다.” 공의의 하나님, 심판의 하나님을 빼놓고, 하나님에 관하여 한쪽으로 편향된 메시지만 듣다 보면, 정작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얼마나 두려운 분이신지 잊어버릴 때가 많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자신들에게 말씀하시는 것이 두려워서 모세에게만 말씀해 달라고 간청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 자신은 이제 죄악으로 인해 죽겠구나 하고 두려워하며 하나님 앞에서 벌벌 떨며 엎드렸습니다. 하나님은 이처럼 두려운 분이십니다. 우리나라 속담에 “오냐 오냐 키우면 할아버지 수염도 뽑는다”는 말처럼, 사랑의 하나님, 자비의 하나님에 대한 메시지만 듣다 보면, 거룩하신 하나님 무서운 줄 모르고 하나님께 함부로 대할 때가 종종 있습니다. 기도할 때도 하나님이 얼마나 크고 위대하신 분이신지 생각하지 않고 카페에서 만난 친구에게 대화하듯 거침없이 함부로 하나님께 말을 내뱉는 것, 힘들고 어려운 일 있으면 하나님께 짜증내고, 원망하고, 불평하는 것, 또 오늘 본문처럼 하나님께서 보고 계시다는 것을 알면서도 하나님의 존재를 무시하고 죄악을 행하는 것. 이 모든 것은 가벼운 죄가 아닙니다. 신성모독이라는 가장 큰 죄에 해당합니다. 아나니아가 하나님께 거짓말을 한 것이 바로 신성모독이었습니다. 그 대가로 그는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을 받아 그 자리에서 즉사했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십시오. 창조주 하나님은 우리가 옆집 사는 친구 대하듯 함부로 하실만큼 가벼운 분이 아닙니다. 주님은 우리의 경배를 받기에 합당하십니다. 경배란 상대방 앞에 나의 머리와 온 몸이 바닥에 닿을 만큼 납작 엎드려서 드리는 예배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우리는 경외하는 마음과 경배의 자세로 나아가야 합니다.

이스라엘의 뜨거운 기후를 생각해보면, 무더운 날씨 속에서 아나니아의 죽음 이후 그의 시체는 급속도로 부패되었을 것을 예상해 볼 수 있습니다. 그런 이유로 본문 6절 말씀을 보면, 아나니아가 죽자 즉각적으로 교회의 젊은 사람들이 그의 시체를 매고 나가서 장사를 지냈습니다. 이 사건이 있은 후 약 세 시간 즈음 지난 후 아나니아의 아내 삽비라가 교회 공동체를 찾아왔습니다. 그녀는 자신의 남편 아나니에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전혀 모르는 상황이었습니다. 이제 아나니아에게 펼쳐질 일을 말씀 속에서 봅시다. 7-11절 말씀입니다. “(행 5:7) 세 시간쯤 지나 그 아내가 그 생긴 일을 알지 못하고 들어오니 (행 5:8) 베드로가 가로되 그 땅 판 값이 이것뿐이냐 내게 말하라 하니 가로되 예 이뿐이로라 (행 5:9) 베드로가 가로되 너희가 어찌 함께 꾀하여 주의 영을 시험하려 하느냐 보라 네 남편을 장사하고 오는 사람들의 발이 문 앞에 이르렀으니 또 너를 메어 내가리라 한대 (행 5:10) 곧 베드로의 발 앞에 엎드러져 혼이 떠나는지라 젊은 사람들이 들어와 죽은 것을 보고 메어다가 그 남편 곁에 장사하니 (행 5:11) 온 교회와 이 일을 듣는 사람들이 다 크게 두려워하니라” 사도 베드로는 삽비라에게 단도직입적으로 질문했습니다. “그대와 그대의 남편 아나니아가 땅을 팔아서 받은 돈이 이것뿐이오?” 그녀의 남편이 하나님을 속이고 바로 그 같은 자리에서 죽었다는 사실을 꿈에도 알지 모했던 삽비라는 베드로에게 자신 있게 대답했습니다. “예, 그것뿐입니다”라고 그러자 베드로가 다시 말했습니다. “어찌하여 그대와 그대의 남편은 서로 짜고 주님의 성령을 시험할 수 있단 말이오? 보시오! 그대의 남편을 장사지내고 온 사람들이 문 앞에 있으니, 그들이 그대를 메고 나갈 것이오.” 베드로의 말이 끝나자마자 삽비라는 베드로 앞에 쓰러져서 죽었습니다. 젊은 청년들이 아나니아의 시신을 땅에 매장하고 돌아오는데 약 3시간 정도 걸렸습니다. 그들이 교회에 돌아왔을 때 이번에는 아나니아의 아내 삽비라가 하나님을 속이려고 한 죄로 인해 그의 남편과 동일하게 그 자리에서 쓰러져 죽었습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의 소식을 들은 초대 교회 사람들과 그 밖에 모든 사람들은 거룩하신 하나님을 생각하며 큰 두려움으로 떨었습니다.

하나님을 속이는 죄는 결코 작은 죄가 아닙니다. 그것은 한 사람의 인생을 죽음에 이르게 하는 죄입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의 이야기에서 엿볼 수 있듯이 성령께서 세우신 공동체인 교회를 속이는 것은 곧 그 교회의 주인이신 하나님 아버지께 거짓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 사실이 거짓을 행하는 자들에게는 두려움 뿐이겠으나, 하나님 앞에서 거룩하고 신실하게 살아가는 자들에게는 두려움인 동시에 지금도 하나님께서 그가 세우신 교회와 함께하고 계심을 확신케 하는 기쁨이 되기도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아직도 교회 내에는 우리의 나눔과 섬김을 필요로 하는 지체들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코너스톤 교회가 성령 하나님께서 세우신 교회임을 여러분 믿으시죠? 그렇다면 초대교회 성도들과 같이, 바나바와 같이 나눔과 섬김과 헌신을 통해 형제 자매들을 위로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두 눈은 지금도 우리가 코너스톤 교회에서 어떻게 지체들을 대하는지 유심히 바라보고 계십니다. 아나니아처럼 사람들의 칭찬과 인정에 목마른 것이 아니라, 바나바처럼 형제 자매들을 사랑으로 돌보고 격려하고 위로함으로써 거룩하신 하나님께 칭찬받고 인정받는 귀한 코너스톤 교회 성도들이 되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