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711 사도행전 강해 (10) 가둘 수 없는 복음 (사도행전 4장 1-12절)

  1. 복음은 가둘 수 없다.

태어날 때부터 앉은뱅이였던 40세 남성, 그는 날마다 성전에 앉아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구걸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곳을 지나던 베드로는 발걸음을 멈추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앉은뱅이의 손을 잡아 일으켰습니다. 그러자 놀랍게도 태어나서 한 번도 걷지 못했던 이 남자가 걷고, 뛰기 시작했습니다.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수많은 무리가 이 놀라운 기적의 중심에 서 있는 베드로와 요한에게로 모여 들었습니다. 사람들은 어떻게 이러한 기적이 일어났는지 자조치종을 듣고 싶어했습니다. ‘정말 베드로와 요한이 따르는 예수에게 무슨 신비한 능력이 있는가?’ 사람들은 진실을 알고 싶었습니다. 자신들을 주목하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 베드로와 요한은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을 하나님께서 다시 살리셨음을 전파했습니다. 1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행 4:1) 사도들이 백성에게 말할 때에 제사장들과 성전 맡은 자와 사두개인들이 이르러” 제사장들은 성전에서 행해지는 모든 제사와 예배를 주관하는 책임자들입니다. 제사장들과 함께 ‘성전 맡은 자’도 왔습니다. 그는 성전의 경비를 맡은 책임자입니다. 성전은 유대교에서 가장 중요한 건물입니다. 그래서 유대교에서는 대제사장이 유대교의 서열 1위이고, 성전 책임을 맡은 자는 서열 2위입니다. 이 사람도 제사장입니다. 유대교 서열 2위인 성전 맡은 자가 제사장들과 함께 나사렛 예수님의 제자들인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서 많은 사람들을 모아두고 말씀을 가르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유대교의 신앙 내용과 맞지 않는 이단적인 설교를 하는 것은 아닌지 확인하기 위해 찾아왔습니다. 이들은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은 주동자들입니다. 이들은 예수의 제자인 베드로와 요한이 그들의 가르침과 다른 내용을 성전에서 백성들에게 가르칠 것을 염려하여 찾아온 것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전하는 말을 듣기 위해 찾아온 무리 중에는 사두개인들도 있었습니다. 사두개인들은 부활을 믿지 않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예수님의 부활에 대해서 전파하자, 이것이 이들의 심기를 매우 불편하게 했습니다. 또한 사두개인들은 예수님이 그리스도 곧 메시아라고 전파하는 이들의 말을 묵과할 수 없었습니다. 결국 이단이라고 정죄 받아 십자가에 달려 죽은 예수를 전파하고, 또 그가 죽지 않고 하나님께서 그를 다시 살리셨다는 가르침을 전했다는 명목으로 인해 베드로와 요한은 붙잡혀 감옥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2-3절 말씀입니다. “(행 4:2) 백성을 가르침과 예수를 들어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는 도 전함을 싫어하여 (행 4:3) 저희를 잡으매 날이 이미 저문 고로 이튿날까지 가두었으나” 유대교 종교지도자들은 베드로와 요한이 증거하는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를 용납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십자가에 달려 죽은 예수가 다시 살아났다는 소식을 거짓말과 허풍처럼 받아들였습니다. 특별히 부활을 믿지 않는 사두개인들은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났다는 도저히 상식적으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가르침을 전파하는 베드로와 요한을 공회 앞에서 심판하기 위해 잡아서 가두어 버렸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감옥에 갇혀 있다는 것은 그들이 전파하던 복음도 감옥에 갇혀 있다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과연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가둘 수 있을까요? 아니요. 이 세상 그 누구도 복음은 가둘 수 없습니다. 사도행전 4장 4절을 함께 같이 읽겠습니다. “(행 4:4) 말씀을 들은 사람 중에 믿는 자가 많으니 남자의 수가 약 오천이나 되었더라” 베드로와 요한이 선천적 앉은뱅이로 태어난 사람이 다시 걷게 된 사건은 예수의 이름을 힘입어 된 것이라 전파하며, 십자가에 달려 죽은 예수는 그대로 죽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를 다시 살리셨다고 증거하였을 때, 그들이 전해준 복음을 듣고 자신들의 지난 날의 죄를 회개하고 예수님을 새롭게 믿게 된 사람들의 숫자가 성인 남자의 숫자만 약 5천명이나 되었습니다. 이처럼 베드로와 요한은 감옥에 붙잡아 놓아도, 주 예수의 복음은 가둘 수 없었습니다. 인류 역사를 살펴보면 세상은 계속해서 복음을 없애려고 시도해왔습니다. 그러나 복음은 사라지지 않고 지금까지 우리들에게 전달되어 왔습니다. 로마의 네로 황제는 기독교인을 박해했습니다. 로마 시대 기독교인들은 십자가에 못 박혀 사형당했고, 콜로세움에서 사자들의 먹이감이 되었으며, 나무에 매달린 채 불에 타 죽는 화형을 당하는 등 극심한 박해를 받았습니다. 기독교신자들의 재산은 몰수당했고, 그들은 이방신의 제사에 희생제물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복음은 가둘 수 없었습니다. 네로 황제 이후 무려 250년간 지속되어 온 박해에도 불구하고 살아남은 교회를 보며 기독교 저술가 터툴리안은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순교의 피가 곧 교회의 씨앗이다”

1863년 5월도 런던선교회의 파송을 받아 중국 상해로 선교를 떠난 로버트 토마스, 그의 아내 케롤라인은 낯선 환경에 적응하지 못하고 아이를 낳다가 그만 유산을 하고 죽고 말았습니다. 사랑하는 아내와 뱃속의 아이를 잃어버린 충격으로 토마스는 결국 선교사직을 내려놓게 됩니다. 그후 그는 중국 세관에서 통역사로 취직하게 된 토마스는 모든 슬픔을 잊기 위해 일하는 것에 전념하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우연한 기회에 토마스는 조선이란 나라의 소식을 듣게 됩니다. 조선에서 예수를 믿는 것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가며, 순교의 피를 흘리고 있다는 소식이 그의 뇌리를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래. 이제부터 나의 선교지는 조선이다!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리라!” 이 때부터 그는 짧은 기간 동안 집중적으로 한국어 공부를 하게 됩니다. 1866년 8월 토마스는 미국 국정의 무장상선 제너럴셔먼호에 승선하여 통역 및 안내인 자격으로 한반도로 들어오게 됩니다. 조선은 배의 입국을 불허했습니다. 그럼에도 제너럴셔먼호는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와 양각도에 닻을 내렸습니다. 이 과정에서 조선 관군들과 접전이 벌어졌고 결국 배는 불길에 휩싸이게 되었습니다. 토마스 선교사는 급히 성경책을 한 권 품에 안고 배에서 뛰어나와 뭍으로 나왔습니다. 하지만 결국 병졸 박춘권에 의해 대동강 모래사장에서 순교의 피를 흘려야 했습니다. 그의 나이 불과 스물일곱이었습니다. 조선에 복음을 전파하기 위한 그 동안의 모든 땀과 노력이 헛수고처럼 보였습니다.

토마스 선교사가 죽기 전에 박춘권에게 성경을 전해주려고 했습니다. 박춘권은 이렇게 회고했습니다. “내가 서양 사람을 죽이는 중에 한 사람을 죽인 것은 내가 지금 생각할수록 이상한 감이 들었다. 내가 그를 찌르려고 할 때에 그는 두 손을 마주잡고 무슨 말을 한 후 붉은 베를 입힌 책을 가지고 웃으면서 나에게 받으라고 권하였다. 내가 죽이기는 하였으나 이 책을 받지 않을 수가 없어서 받아왔노라.” 몰래 현장에 가서 흩어진 성경책을 가져다 읽던 박춘권은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1899년 그는 세례를 받았고, 그후에 안주교회의 장로가 되었습니다. 이외에도 많은 이들이 토마스 선교사가 전해준 성경을 받아 읽고 훗날 평양의 유력한 신앙인들이 되었습니다. 한국에서의 첫 번째 개신교 순교자가 된 로버트 토머스… 그는 사실 복음을 한 번도 제대로 전하지 못하고 대동강 모래사장에서 피를 흘리며 죽었습니다. 그러나 가지고 온 주 예수의 복음은 가둘 수 없었습니다. 그가 가지고 온 복음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다.

당시 토마스 선교사가 순교하는 장면을 목격했던 12세 소년 최치량은 제네럴 샤먼호에서 나온 한문선경 3권을 남몰래 가지고 왔습니다. 조선시대 성경은 금서였습니다. 성경책이 금서임을 알고 겁이 난 최치량은 당시 영문주사였던 박영식에게 성경책을 주었습니다. 박영식은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한문성경 3권을 수중에 넣게 되었습니다. 원칙적으로는 금서는 태워 없애 버리는 것이 맞습니다만, 워낙 종이가 희귀하고 귀했던 시절이었습니다. 인쇄된 종이의 질이 너무 좋아 태워버리기에는 아까웠습니다. 그래서 고심 끝에 박영식은 성경을 한 장 한 장씩 뜯어서 평양에 있는 자기 집 벽지로 사용했습니다. 세계 최초로 성경책으로 도배된 집이 평양에서 나온 순간입니다. 그런데 이 결정이 예기치 못한 결과를 만들어 내었습니다. 집을 오갈 때마다 자연스럽게 성경을 읽게 됩니다. 좌로 누워도 성경구절이 보이고, 우로 돌아 누워도 성경을 읽게 됩니다. 처음에는 심심풀이로, 호기심으로 별 뜻 없이 읽었습니다. 그러던 중 사람이 죽으면 심판이 있고, 예수를 믿는 자에게는 영원한 생명이 주어진다는 말씀이 그의 마음에 들어왔습니다. 심각하게 고민하던 그는 결국 예수님을 영접하게 되었고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에게 성경을 전해 주었던 12세 소년 최치량도 평양 최초 교인 중 한 사람이 됩니다. 또한 성경으로 도배가 된 박영식의 집은 예배 처소가 되어 평양 최초의 교회인 ‘널다리골 교회’가 되었습니다. 이 교회가 바로 1907년 평양 영적 대각성운동의 근원지인 ‘장대현교회’의 전신 교회입니다.

이처럼 사탄은 주 예수의 복음이 전파되는 것을 어떻게 든지 막으려고 합니다. 복음을 전파하던 베드로와 요한을 감옥에 가둔 것과 같이 세상은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고 심지어 죽이기까지 합니다. 그러나 복음은 가둘 수 없습니다. 복음은 결코 사라지지 않습니다. 지금도 세상은 교회를 핍박하고 복음을 가두려고 합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을 보십시오. 동성애 결혼, 트렌스젠더, 낙태, 음란물 시청, 성전환 수술 등 세상은 복음과 반대되는 삶을 오히려 두둔하며 복음을 핍박하고 제지하려고 합니다. 복음을 이 세상에서 제거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역사를 보십시오. 주 예수의 복음은 핍박할수록 더욱 확산되어 왔습니다. 지금도 복음을 막으려 하는 중동 국가들, 북한, 중국, 무슬림 국가, 공산당 국가 속에서도 수많은 순교자들과 복음 전도자들을 통해 복음은 전파되고 있습니다. 진리는 결코 사라지지 않습니다. 사람이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릴 수 없는 것처럼, 세상의 그 어떤 핍박도 주 예수의 복음을 막을 수는 없습니다. 따라서 사람들에게 복음 전파하는 것이 실패할까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복음은 그 자체로 능력이 있습니다. 우리는 씨를 뿌리면 됩니다. 자라게 하시는 분은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복음 증거하기를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연약해도 복음은 강합니다. 우리는 무능해도 복음 자체에 능력이 있습니다. 우리는 갇혀도 복음은 갇히지 않습니다. 사도 베드로와 요한과 같이 담대하게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예수가 다시 살아나셨음을 전파하십시오. 하나님의 능력이 복음과 함께 역사할 것입니다.

 

  1. 예수 그리스도를 가둘 수 없다.

이처럼 세상이 복음을 가둘 수 없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무엇이 복음을 특별하게 만드는 것일까요? 그 비밀은 복음의 중심에 계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께 있습니다. 이 세상 그 누구도 그 무엇도 예수 그리스도를 가둘 수 없습니다. 유대인들은 예수가 전하는 복음이 싫어 그를 십자가에 매달아 죽였습니다. 그러나 사망도 무덤도 그를 정복할 수 없었습니다.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예수님은 3일만에 부활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망과 죽음의 권세를 정복하시고 승리하셨습니다. 이 세상 그 누구도 이루지 못한 승리였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예수의 부활하심이야말로 복음의 능력임을 전파했습니다. ‘어떻게 태어날 때부터 걷지 못하던 앉은뱅이가 일어날 수 있는가?’ 그 해답은 바로 그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힘입어 그 능력으로 된 것임을 베드로와 요한은 확실하게 선포했습니다. 8-10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행 4:8) 이에 베드로가 성령이 충만하여 가로되 백성의 관원과 장로들아 (행 4:9) 만일 병인에게 행한 착한 일에 대하여 이 사람이 어떻게 구원을 얻었느냐고 오늘 우리에게 질문하면 (행 4:10) 너희와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알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고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사람이 건강하게 되어 너희 앞에 섰느니라” 복음의 핵심 내용은 예수님께서 죽음을 정복하시고 승리하셨다는 것입니다. 세계 위인전을 샅샅이 읽어보고 꼼꼼히 찾아보십시오. 이 세상에 그 누구도 사망을 이긴 존재는 없었습니다. 세계 3대 종교는 기독교, 불교, 이슬람교입니다. 불교의 창시자 석가모니도, 이슬람의 창시자 무함마드도 결국 다 죽었고 그들의 무덤도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무덤이 없습니다. 왜 무덤이 없습니까? 그는 사망과 죽음을 정복하시고 부활하셨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은 그를 십자가에 매달아 죽임으로써 그를 무덤에 묻어두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무덤도 죽음도 예수를 감출 수는 없었습니다.

유대인들의 지혜서라고 불리는 책 [탈무드]에는 이 세상에서 감출 수 없는 세 가지가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재채기’, 둘째는 ‘가난’, 셋째는 ‘사랑’입니다. 재채기는 참아보려고 해도 결국에는 나옵니다. 가난은 잠시 동안 속일 수는 있으나 감출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사랑입니다. 사탄은 예수님을 무덤에 묻음으로써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감추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죽음도 크고 위대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감출 수는 없었습니다.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는 부활하셨고 지금도 살아 계십니다. 그 무엇으로도 하나님의 사랑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감출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누구든지 저를 믿으면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으리라.” 지금도 전 세계에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은 끊임없이 전파되고 있습니다. 그 분은 사망 권세를 이기신 구원자이십니다.

 

  1. 믿음을 가둘 수 없다.

이 위대하신 구원자 되시는 예수님을 향한 우리의 믿음도 가둘 수 없습니다. 유대인 관원들과 종교지도자들은 베드로와 요한이 예수님의 부활하심을 증거하는 것을 금지시켰습니다. “(행 4:17) 이것이 민간에 더 퍼지지 못하게 저희를 위협하여 이 후에는 이 이름으로 아무 사람에게도 말하지 말게 하자 하고 (행 4:18) 그들을 불러 경계하여 도무지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 하니” 베드로와 요한을 심문하고 있는 이 사람들은 바로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은 장본인들입니다. 따라서 베드로와 요한은 만일 이들의 명령을 듣지 않고 계속해서 예수를 증거한다면, 자신들도 그들의 스승 예수의 뒤를 따라 십자가에 처형 달할 수 있음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목숨을 걸어야 하는 엄청난 두려움과 압박이 주어지고 있는 상황입니다. 이에 대한 베드로와 요한은 어떻게 반응했을까요? 19-20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행 4:19) 베드로와 요한이 대답하여 가로되 하나님 앞에서 너희 말 듣는 것이 하나님 말씀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행 4:20)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 하니” 베드로와 요한이 가진 예수님에 대한 믿음은 그 어떤 협박으로도 감출 수 없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예수를 증거하는 일을 멈출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이들은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를 분명히 목격했고, 뒤이어 부활하신 예수님도 자신의 두 눈으로 직접 보았기 때문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는데 어떻게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부인할 수 있겠습니까? 이와 같이 부활하시고 살아 계신 예수님을 영적으로 체험하고 인격적인 만남을 가진 사람들은 절대로 예수님을 향한 믿음을 부인하지 않습니다. 그들의 믿음은 그 누구도 그 무엇으로도 감출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가진 복음은 그 자체로 능력이 있습니다. 우리들은 갇혀도 복음은 갇히지 않습니다. 세상은 복음을 없애려고 해도, 복음은 감춰지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그 복음의 중심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가 사망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를 믿는 자들을 없애려고 수도 없는 사람들이 시도했으나, 한 번도 성공한 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박해와 핍박은 예수를 더 굳건하게 믿고 따르도록 했습니다. 성도의 믿음 또한 그 무엇으로도 막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가진 복음의 능력을 확신하십시오. 복음의 중심에 서 계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내 구주로 고백하고 날마다 그와 교제하며 살아가십시오. 예수를 향한 우리들의 믿음을 이웃들에게 증거하며 살아가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