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627 서로 사랑하는 교회 (요한일서 3장 16-19절)

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사랑은 어떤 모습일까요? 요한복음 15장 13절을 보면, “사람이 자기 친구를 위해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자신의 목숨을 기꺼이 내어 줄 수 있는 친구가 있습니까? 사람이 자기 부모, 배우자, 자녀를 위해서 목숨을 내놓는 것도 쉽지 않습니다. 하물며 친구를 위해 목숨을 내어놓는다는 것이 어찌 쉬운 일이겠습니까? 놀랍게도 성경은 우리 모두를 위해 자신의 목숨을 내어 준 친구가 있다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바로 우리의 구원자요, 주님이시며,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은 죄로 인하여 사망에 이를 수밖에 없는 우리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자기의 목숨을 내려놓으셨습니다. 그로 말미암아 저와 여러분은 이 세상에서 가장 큰 사랑을 받은 자들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을 통하여 사랑이 무엇인지 깨닫게 됩니다. 사랑은 상대방을 위해서 희생하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을 내어주는 것이 사랑입니다. 오늘 본문 3장 16절 말씀을 보면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진정한 사랑 무엇인가 묻는 우리들에게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참 사랑을 보여주셨습니다. 사랑은 상대방을 위하여 희생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희생이 없으면 사랑이 아닙니다.
수년 전, 영국문화협회가 세계 102개의 비영어권 국가 4만 명을 대상으로 가장 아름다운 영어 단어를 묻는 설문조사를 했습니다. 한 번 답을 맞춰 보시겠어요? 수많은 사람들이 뽑은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영어 단어는 무엇이었을까요? 4위는 사랑, ‘love’였습니다. 였습니다. 3위는 미소, ‘smile’이었습니다. 2위는 정열(열정), ‘passion’이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영어단어 1위는 바로 어머니, ‘mother’였습니다. 한참 이에 관한 글을 보고 있는데 반박을 할 수가 없겠더라고요. 이 세상에서 ‘엄마’(mother) 이 한 단어보다 우리의 가슴을 깊게 울리고 따뜻하게 만들어 주는 아름단어가 또 있을까요?
지난 90년대에 일요일 저녁에 TV를 키면 MBC에서 뽀바이 이상용씨가 진행하셨던 [우정의 무대]라는 군인위문 프로그램이 있었습니다. 병사들의 노래와 춤과 다양한 장기자랑을 볼 수 있는데, 이 프로그램의 백미는 마지막 즈음 가면 ‘일병의 눈물’이란 순서입니다. 무대 뒤에서 얼굴을 감춘 한 어머니에게 마이크를 전해주고 목소리를 들려줍니다. “어머니 어디에서 오셨어요?” “네 저는 아들보러 강원도에서 왔어요.” “아니, 어머니, 어떻게 이 먼 길을 오셨어요? 얼마나 걸리셨어요?” “예 꼬박 하루 걸렸어요.” “어머니 아들 보고 싶으시죠?” “예, 그럼요.” 이 때 뽀빠이 이상용씨가 연병장의 장병들을 향해 크게 말합니다. “저 무대 뒤에 계씬 분이 자신의 어머니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무대위로 나오세요.” 그럼 수많은 장병들이 무대위로 뛰어올라옵니다. 진행자가 병사 한 사람씩 인터뷰를 합니다. (강원도, 입대 일주일 전 돌아가신 어머니…) “뒤에 있는 분이 어머니가 맞습니까? “예! 저의 어머니가 확실합니다! 어제 꿈에서 어머니께서 나타나셔서 저를 보러 꼭 오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확실합니다!” 인터뷰가 끝나고 이제 드디어 무대 뒤에서 어머니가 나옵니다. 그리고 그토록 보고싶던 어머니를 만난 아들 병사는 한 걸음에 달려가 어머니를 부둥켜안고 울음을 터트립니다. 어머니도 울고 아들도 울고, 이 모습을 지켜보는 모든 병사들과 시청자들도 울었습니다. 무엇이 이처럼 많은 사람들이 어머니와 아들이 부둥켜안고 있는 모습 하나만 보고도 눈물을 흘리게 만드는 것일까요? 바로 자식을 향한 어머니의 사랑 때문입니다. 어머니께서 사랑하는 자녀들을 위해서 얼마나 많이 희생하는지 우리는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느끼는 가장 큰 사랑 중에 하나가 바로 어머니의 사랑입니다. 왜냐하면 어머니는 자녀들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는 희생하는 사랑이 무엇인지 배웠습니다. 이처럼 진정한 사랑에는 언제나 희생이라는 요소가 들어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우리를 사랑하신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기꺼이 우리들을 죄와 사망으로부터 구원하시기 위하여 자신의 하나 밖에 없는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우리들의 죄값을 대신 짊어지기 위하여 기꺼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습니다. 천지를 창조하신 창조주 하나님께서 그분의 피조물인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를 위해서 희생하셨습니다. 사도 요한은 말합니다.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는 나를 위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을 바라봄으로써 ‘참 사랑은 희생하는 사랑이구나’, ‘진실한 사랑은 내 자신을 내어주는 사랑이구나’하고 사랑을 깨닫게 됩니다. 사도 요한은 하나님의 놀라운 이 사랑을 깨달은 우리들을 향하여 도전합니다. 16절 말씀을 다시 함께 읽겠습니다.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해 자기 목숨을 내놓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희생하는 사랑이 무엇인지 깨닫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이와 같이 우리들도 형제들을 위해 섬기고 희생하며 서로 사랑하며 살아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참 사랑에는 희생이 있습니다. 희생이 없으면 사랑이 아닌 셈입니다. 이러한 사랑의 특징에 대해서 듣고 난 후 사랑하기가 부담된다고 느끼는 분들도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자녀들을 위해서 희생하시는 어머니의 얼굴 표정을 한 번 떠올려보십시오. 자신이 먹을 하나 덜 먹어도 어머니는 자녀가 맛있고 배부르게 먹는 모습을 보며 행복해 하십니다. 자신이 이 입는 옷은 오래되어 색이 다 바래고 쭈글해진 것이라도, 돈을 아껴 가며 자녀들 새 신발, 새 옷 사주며 행복해하시는 마음이 바로 어머니 마음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하는 희생은 행복합니다. 내가 가진 것을 나눠주는 것이 행복이요, 기쁨입니다.
부모가 자녀에게 주는 희생은 기쁨입니다. 평소에는 1불 5불 쓰는 것도 아까워하는 사람도, 자기 자녀들이 식당 가서 맛있게 음식을 먹을 때 내는 돈이 하나도 아깝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이 5불 달라 하면 주기 싫은데, 내 자녀가 달라고 하면 지갑에서 10불, 20불, 100불짜리 찾는 게 부모입니다. 사랑하니까 더 주고 싶습니다. 할 수 있다면 내 자녀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고 싶습니다. 부모는 자녀에게 쏟는 희생을 기뻐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자녀를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어린 시절에는 부모의 희생적인 사랑을 받고 자란 아이가 커서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부모가 되었습니다. 그는 이전에 자신이 부모에게 받았던 그 희생적인 사랑을 자기 자녀에게 또 다시 나누어 줍니다. 이처럼 사랑은 계속해서 흘러갑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사랑을 받았습니다. 이제는 우리가 또 다른 사람들을 사랑할 차례입니다. 코너스톤 교회 모든 성도가 서로가 서로를 위해 기쁨으로 희생하고 섬김으로써 주님의 참 사랑이 가득 넘치는 아름다운 교회가 되기를 축복합니다.

이와 같은 희생적인 사랑은 구체적인 행동으로 나타납니다. 그래서 우리가 해야 하는 사랑은 두 가지 특징이 있어야 합니다. 저를 다시 한번 따라해 주시겠습니까? ‘눈에 보이는 사랑’, ‘손에 잡히는 사랑’ 상대방을 사랑할 때는 눈에 보이게 사랑해 주십시오. 손에 잡힐 수 있게 사랑해주십시오. 말로만 때우는 식의 사랑은 무의미합니다. 우리의 사랑은 실제적이어야 하며, 구체적이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 17-18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요일 3:17) 누가 이 세상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 줄 마음을 막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할까 보냐 (요일 3:18)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오직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지난 3일간 아무 것도 먹지 못해 굶주린 사람이 있습니다. 지금 이 사람이 가장 필요한 것은 밥이고 빵입니다. 내 자신이 그에게 먹을 것을 나눠 줄 수 있는 형편임에도 불구하고 상대방의 배고픔을 외면하고, “당신이 배부를 수 있도록 기도할께요”하고 말만 한다면 어찌 그것이 사랑이겠습니까? 사랑은 실제적이고 구체적이어야 합니다. 배가 고픈 사람에게는 밥을 주는 것이 사랑입니다. 추위에 떨고 있는 사람에게는 따뜻하게 덮어주는 것이 사랑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성도들에게 명령하시는 사랑은 눈에 보이는 사랑이며, 손에 잡히는 사랑입니다. 상대방을 사랑하기 위해서는 구체적인 행함이 따라야 합니다. 한 번만 더 저를 따라해 주십시오. ‘눈에 보이는 사랑을 하자’, ‘손에 잡히는 사랑을 하자’ 우리의 사랑은 내 자신 속 느낌이나 머리 속 생각으로만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머리 속에서 혼자 상상으로 하는 사랑은 아무런 유익이 없습니다.
어린 자녀를 둔 엄마가 있습니다. 만일 엄마가 아이를 말로만 사랑하면 어떻게 될까요? 아이가 배고프다고 엉엉 우는데 “그래 배고프지 엄마가 너 위해서 기도할께”하고 말만 하고 밥도 주지 않는다면 이 엄마 어딘가 이상한 거 아니겠습니까? 아이가 춥다고 우는데, “그래 너 춥지? 엄마가 너 따뜻해지라고 열심히 기도할께.”하고 말만하고 따뜻하게 옷이나 이불로 덮어주지 않는다면 과연 그 누가 이 어머니가 아이를 사랑한다고 생각하겠습니까? 사랑은 언제나 상대방을 위한 구체적인 행동으로 나타납니다. 우리가 주변에 힘든 분들을 보면서 “집사님, 힘드시죠? 힘내세요. 힘낼 수 있도록 제가 기도할꼐요.”라고 관심을 갖는 것은 참 잘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만날 때마다 말만 하는 것과 눈에 보이는 사랑으로, 손에 잡히는 사랑으로 구체적인 희생과 섬김을 행동으로 실행하는 것은 하늘과 땅 차이입니다. 형제의 아픔을 볼 때 우리는 말로만 하지 말고 구체적으로 섬기며 사랑해야 합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이 죽은 것과 같이 행함이 없는 사랑도 죽은 것입니다.
행함의 크기가 꼭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때로는 우리가 베푸는 작은 관심과 친절도 상대방에게는 큰 위로가 될 수 있습니다. 매우 일상적인 것, 작은 것부터 시작하셔도 괜찮습니다. 함께 차를 한 잔 마시는 것도 좋습니다. 한끼 식사를 같이 하는 것도 좋습니다. 1시간만이라도 함께 해주며 이야기 나누는 것도 좋습니다. 크게 행동하려고 하면 부담만 생기고 잘 사랑하지 못하게 경직됩니다. 작은 것부터 구체적으로 표현하며 눈에 보이게, 손에 잡히도록 사랑하십시오. 말로만 사랑하려고 하지 말고 구체적으로, 실제적으로 사랑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우리를 사랑하신다고 말씀하신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희생적인 사랑, 구체적인 사랑, 눈에 보이는 사랑, 손에 잡히는 사랑을 우리에게 나누어 주셨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가장 큰 사랑을 받은 자들입니다. 자, 이제 우리가 사랑할 차례입니다. 사랑하는 코너스톤 교회 성도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해 자기 목숨을 내놓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사랑을 알게 됐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형제들을 위해 우리 목숨을 내놓는 것이 마땅합니다. 주 예수께 받은 사랑으로 우리도 서로 사랑하며 살아가는 하나님의 공동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