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620 사도행전 강해 (8) 은과 금보다 귀한 예수 그리스도 (사도행전 2장 43-47절)

경건한 유대인들은 하루 중 세번 시간을 정해 놓고 기도했습니다. 아침 9시, 낮 12시, 오후 3시 이렇게 세번입니다. 본문 1절에 나오는 ‘제구시’는 이 중에 오후 3시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하루 중 마지막 기도하는 시간입니다. 사도 베드로와 요한은 오후 기도 시간에 맞추어 성전을 찾아갔습니다. 이 날 베드로와 요한은 ‘미문’이라 불리는 문을 통해 예루살렘의 성전을 들어갔습니다. ‘미문’ 즉 ‘아름다운 문’(Beautiful Gate)문입니다. 예루살렘에 있는 성전의 문들 중 가장 아름다운 문이었습니다. 역사가 요세푸스의 기록에 따르면 미문은 높이가 23미터(75ft)나 되는 커다란 문이었으며, 금과 은을 입힌 황동으로 만들어진 이중문으로서 그 크기가 웅장하고 장엄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바로 이 미문에 사람들이 나면서부터 앉은뱅이가 된 자를 메고 왔습니다. 이 앉은뱅이는 사람들에게 구걸하기 위해서 날마다 미문으로 출근하다시피 했습니다. 두 다리를 쓸 수 없는 형편이라 노동을 할 수가 없었고, 먹고 살기 불가능한 이 불쌍한 앉은뱅이를 사람들이 구걸이라도 하라고 성전 미문에다가 옮겨준 것이죠. 성전에 들어가는 많은 문들 중에 하필이면 ‘미문’에다가 앉은뱅이를 두었을까요? 미문은 성전 밖인 ‘이방인의 뜰’과 성전 안쪽의 첫 번째 장소인 ‘여인의 뜰’을 구분하는 출입구로서 평소에도 수많은 유대인들이 왕래하는 장소였습니다. 경건한 마음을 가진 유대인들이 기도하러 성전에 들어가는 길목이며, 하루에도 많은 사람들이 이용하는 문이니 구걸하기에는 안성맞춤인 장소였습니다. 오늘날로 따지면 유명한 대형교회 앞에서 예배를 드리러 들어오는 사람들의 길목에 앉아 구걸하고 있는 셈이죠.
사도행전 4장 22절을 보면 이 앉은뱅이의 나이가 40세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가 몇 살 때부터 미문에 앉아 구걸했는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겠습니다만, 이 사람이 성인이 된 후 불의의 사고로 다리를 못 쓰게 된 것이 아니라, 날 때부터 앉은뱅이였다는 사실을 감안해보면 아주 오랜 세월 전부터 미문에 앉아 구걸을 하지 않았을까 추측해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웬만한 유대인들은 이 사람을 다 알고 있지 않겠습니까? “아, 그 미문 앉은뱅이?” 이런 식으로 그의 생김새나 외모에 대해서 대략적으로 이 사람에 대해서 알고 있었습니다.
또 한가지 앉은뱅이가 미문에 앉아 있던 이유가 있습니다. 율법에 따라 몸에 장애가 있는 사람은 성전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장애는 부모의 죄나 그 당사자의 죄로 인한 결과라고 생각했고, 그로 인해 장애자들을 부정적인 시선으로 바라보고 더러운 죄인으로 취급하는 경향이 매우 강했습니다. 따라서 앉은뱅이는 평생 구걸하기 위해 성전 미문에 앉아 있었지만, 성전 안에는 들어가 본 적이 한 번도 없었습니다. 매일 같이 찾아오는 성전 미문, 그러나 정작 자신의 몸에 장애가 있어 성전에 들어갈 수는 없습니다. 얼마나 안타까운 상황입니까? 걷지도 못하는 아무 쓸모 없는 자신의 두 다리를 보며, 얼마나 큰 고통과 괴로움을 겪어야 했겠습니까? 오늘 본문은 예루살렘에서 가장 거룩하고 가장 아름다운 장소에서 가장 비참하고 불쌍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 바로 앉은뱅이의 모습을 그려주고 있습니다. 성전에서 가장 아름다운 문인 미문에 앉아 자신을 벌레 보는 듯 쳐다보는 지나가는 사람들의 따가운 눈총을 받으면서도, 먹고 살기 위해서는 ‘한 푼만 줍쇼’하고 구걸해야 하는 비참함과 불쌍한 앉은뱅이 입니다. 사실 따지고 보면 앉은뱅이가 잘못한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그가 큰 죄를 저질러서 앉은뱅이가 된 것이 아니라, 태어나 보니까 이미 앉은뱅이였습니다. 얼마나 억울합니까? 얼마나 많은 밤들을 눈물로 지새웠을까요? 사람들에게 놀림당하고 조롱당하고 배척 받고 무시 받아야 했습니다.
혹시 오늘 본문을 보며 ‘미문에서 구걸하며 살아가고 있는 앉은뱅이의 이야기가 나의 이야기다’라고 생각하는 분은 없으십니까? ‘미국, 이름도 ‘아름다운 국가’라 불리는 이 나라에서 다른 사람들은 다 행복하게 누릴 것 다 누리며 살아가고 있는데 왜 나는 이렇게 힘들고 고단한 나날들을 보내야 하는가?’하고 자신의 인생이 비참하다고 불쌍하다고 생각하며 살아가고 계시는 분은 없습니까? ‘내가 특별히 잘못한 것도 없는 것 같은데, 왜 이렇게 내 인생은 힘들고 고단한 것일까?’하고 생각하는 분들은 없습니까? 이와 같이 피곤하고 지친 우리들의 인생에 과연 무엇이 소망이 될 수 있을까요?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앉은뱅이 이야기는 비참함과 불쌍함으로 시작했으나, 그 끝은 달랐습니다. 앉은뱅이의 인생에 놀라운 역전과 반전이 일어났습니다. 지난 40년간 한 번도 상상해보지 못한 놀라운 일들이 벌어졌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나게 되었는지 그 과정을 한 번 자세하게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제구시, 즉 오후 3시에 기도하기 위해서 성전을 찾은 사도 베드로와 요한은 미문을 통과하고 있던 참이었습니다. 이 때 미문에 앉아 구걸하고 있는 앉은뱅이는 베드로와 요한을 발견하고 그들에게 돈을 달라 구걸했습니다. 매일 똑 같은 자리에서 구걸하던 앉은뱅이였으니 대다수의 사람들이 그를 무시하고 그냥 지나쳤습니다. 앉은뱅이도 별로 대수롭지 않게 특별한 생각을 갖지 않고 평상시처럼 습관에 따라 베드로와 요한에게 구걸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오후 3시에 시작하는 기도 시간에 늦지 않게 가기 위해서 분주한 걸음으로 성전 안으로 향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와 요한은 다른 사람들과는 달랐습니다. 그들은 성전으로 향하던 발걸음을 멈추어섰습니다.
분주한 현대인들은 타인의 아픔을 보고도 관심을 가지려고 하지 않습니다. 괜히 타인의 인생에 개입했다가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빼앗길까봐 염려하며 도망칩니다. 길거리에 쓰러져 있는 사람을 보고도 도와주는 사람보다는 지나치는 사람이 더 많습니다. 그러나 사랑은 관심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이웃의 탄식소리에 못들은 척하지 않고 관심을 가져주는 것, 이웃의 아픔을 볼 때 못 본 척하지 않고 관심을 가져주는 것이 사랑입니다. 성전을 찾는 많은 유대인들은 기도하고 예배 드리기 위해서 미문을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들 중 그 누구도 미문에서 구걸하고 있는 앉은뱅이에게 별로 깊은 관심을 보인 사람은 없었습니다. 이들에게는 제 시간에 맞춰 기도하는 것이 이웃을 돕는 것보다도 더 중요했기 때문입니다. 종교활동이 이웃사랑보다 더 중요했습니다. 그러나 이사야서 58장에서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여러 날 동안 금식하며 간절하게 기도하는 것보다도 굶주린 사람에게 음식을 나누어 주고, 가난하고 집 없는 사람 도와주고, 헐벗은 사람에게 옷을 나눠주고, 어려움에 빠진 가족이 있을 때 못 본 체하지 않는 것을 더욱 바라고 원하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분주하여 각자 자기 먹고 살기 바쁩니다. 실로 자기 몸 하나 챙기기도 바쁜 세상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이웃들에게 사랑과 관심을 갖는 삶을 살아가기를 원하십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가던 길을 멈추고 깊은 관심을 갖고 앉은뱅이를 주목하여 바라보았던 것처럼, 우리들도 이웃의 아픔과 탄식에 발걸음을 멈추고 함께하기를 원하십니다. 사랑은 관심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사도 베드로와 요한은 자신들에게 구걸하는 앉은뱅이에게 “우리를 보시오.”하고 말했습니다. 앉은뱅이는 평상시 잘 일어나지 않는 이 상황 속에서 자신에게 말을 걸어온 베드로와 요한의 주머니에서 금화나 은화가 나오기를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뜻밖의 선물을 그에게 주고자 했습니다. 바로 예수님의 이름입니다. 5-6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행 3:5) 그가 저희에게 무엇을 얻을까 하여 바라보거늘 (행 3:6) 베드로가 가로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 하고” 많은 사람들이 이웃의 아픔과 탄식을 보고도 그냥 지나치는 또 다른 이유는 사람들의 삶 속에서 일어나는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는 힘과 자원이 우리에게는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은과 금이 인생의 해결책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은과 금으로 앉은뱅이를 일으킬 수는 없습니다. 은과 금으로는 생명을 살 수 없습니다.
작년 10월에 삼성 이건희 회장이 세상을 떠나자, 전 세계의 수많은 사람들은 그가 남긴 천문학적인 유산이 누구에게 얼마만큼 갈 것인가에 주목했습니다. 사람들은 “저 많은 유산 중 1%만 있어도 행복하겠다”, “다시 태어나면 이건희 회장 자식으로 태어나고 싶다”는 반응들을 보였습니다. 지난 2005년 이건희 회장의 막내 딸인 이윤형씨는 뉴욕 맨해튼 근처 숙소에서 스스로 목을 매고 죽었습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벌어진 것이죠. 당시 스물 여섯 살이었던 그녀가 보유했던 주식만 돈으로 환산해도 약 2천 억원이 되었습니다. 달러로 환산하면 거의 2억달러나 됩니다. 26살의 젊은 나이로 일반인들은 상상하기조차 힘들만큼 천문학적인 재산을 소유했습니다. 그러나 그 엄청난 부와 재물도 그녀를 죽음으로부터 지켜주지 못했습니다. 은과 금은 단지 삶을 살아가는 도구일 뿐, 그 어떤 경우도 우리 삶의 목적이 될 수 없습니다. 은과 금으로는 인간의 본질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오늘 본문 속 베드로의 이야기에 다시 한번 귀 기울여보십시오. 베드로에게는 은과 금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에게 은과 금이 없다는 구실로 앉은뱅이의 아픔을 외면하지 않았습니다. 베드로에게는 은과 금은 없었으나, 그 보다 더 귀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함께하고 계셨습니다. 베드로는 앉은뱅이를 향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손을 내밀었습니다. 인간의 탄식과 아픔을 치료하고 회복하시는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는 사람들에게 치료자 예수, 구원자 예수를 전해줌으로써 사람들을 아픔과 고통으로부터 자유케 할 수 있습니다. 아픔과 신음 속에서 살아가는 자들을 위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그들의 삶의 유일한 소망되시는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하는 것입니다. 낙심한 사람들이 예수 이름을 붙들고 다시 일어날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합니다.
베드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앉은뱅이의 오른손을 잡아 일으켰습니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7-8절 말씀을 함께 보겠습니다. “(행 3:7) 오른손을 잡아 일으키니 발과 발목이 곧 힘을 얻고 (행 3:8) 뛰어 서서 걸으며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가면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미하니” 태어나서 40년 동안 한 번도 자기 두 발로 걸어보지 못한 앉은뱅이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났습니다. 곧 발과 발목이 힘을 얻어 서서 걸으며 뛰어다니는 놀라운 기적이 일어난 것이죠. 만일 베드로와 요한이 이 날 앉은뱅이를 그냥 지나쳤더라면, 이 사람은 이 날 이후로도 평생 계속해서 앉은뱅이로 살다가 불쌍하게 죽었을 것입니다. 우리가 사람들에게 구원자 예수를 전파하는 일은 그들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 놓을 만큼 중요한 사건이 됩니다. 태어나서 한 번도 걸어보지 못했던 앉은뱅이가 제일 먼저 한 일이 무엇입니까? 8절을 봅시다.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가면서…” 앞서 말씀드렸듯이 몸에 장애가 있는 사람은 성전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따라서 앉은뱅이가 뛰어 서서 걸으며 성전에 들어갔다는 것은 그의 몸이 온전히 회복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 오랜 세월 동안 성전 미문에 앉아 구걸하면서 얼마나 성전 안으로 들어가고 싶어했을까요?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치유 받은 큰 은혜의 감격을 누리며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앉은뱅이는 선천성 앉은뱅이입니다. 불의의 사고를 통해서 다친 것이면 재활을 통해서 몸이 나아질 가능성이라도 있겠습니다만, 태어날 때부터 단 한 번도 일어나 본적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러니 이 사람은 평생 걷지 못하는 비참한 상황을 자신의 운명처럼 받아들이며 살았을 것입니다. “걷고 싶다”는 소원은 있어도, “언젠가는 걸을 수 있겠지”하는 소망은 갖지 못했습니다. 이처럼 우리들 안에도 해결하고 싶은 소원은 있어도 소망하지 못하는 어려운 문제나 상황은 없습니까? 너무나도 오래된 문제라서 이제 더 이상 아무것도 소망하지 못하고 있는 삶의 요소들은 없습니까?
우리 한국 사람들이 힘들고 어려울 때 자주 쓰는 말이 “아이고 내 팔자야”입니다. 힘들고 어렵게 사는 사람을 볼 때도 “다 제 팔자다.”하고 말합니다. 여기서 ‘팔자’는 ‘사주팔자’의 줄임말 입니다. “다 타고난 운명이니 어쩔 수 없다”는 뜻이죠.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운명론을 믿지 않습니다. 성경은 오히려 비참하고 불행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만남으로 인해서 그들의 인생이 놀랍게 변화하는 모습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베데스다 못에서 38년 동안 누워 있던 병자가 예수님을 만나 고침 받았습니다. 열 두 해 동안 혈루증을 앓아 죽어가던 한 여인이 예수님을 만나 치유되었습니다. 사마리아 여인, 세리장 삭개오, 나인성의 과부, 실로암의 맹인, 죽은 야이로의 딸, 나사로, 일곱 귀신 들렸던 막달라 마리아 등 성경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만남으로 인해 자신의 비참한 운명을 변화시켰던 수많은 사람들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우리 구주 예수는 사람들의 저주받은 운명을 변화시켜 풍성한 생명을 살아가게 하시는 생명의 주인이 되십니다.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게 되면 삶이 변화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우리들의 슬픔을 기쁨으로 바꾸시고, 상처 입은 우리 몸과 마음을 고치시고 새롭게 회복시켜 주십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이 앉은뱅이는 매일 같이 미문에 앉아 구걸을 했습니다. 그래서 성전에 찾아온 사람들은 그가 걷고 뛰며 하나님을 찬양하는 모습을 보며 이 사람이 본래 미문에 앉아 구걸하는 바로 그 앉은뱅이임을 알아보고는 깜짝 놀랐습니다. 이 사건의 결과 더 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받아들이고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한 사람의 인생을 복음으로 변화시키는 것은 그 한 사람으로 끝나지 않고, 그가 속한 공동체 전체에 영향을 줍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코너스톤 교회의 한 사람이 복음으로 변화하면 교회 모든 성도님들에게 은혜가 흘러갑니다.
지난 주 심방을 갔던 한 성도님과 대화를 나누던 중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목사님 많이 힘드시죠? 교회는 항상 힘들고 어려운 사람들로 가득한 것 같아요. 그래도 목사님, 그 분들을 위로하는 게 목사님 일인데 어떻게 하겠어요.” 너무나도 당연한 이야기였는데 그 대화가 저에게 잔잔한 감동을 주었습니다. 맞습니다 교회는 몸과 마음이 병들고 아픈 사람들이 찾아오는 곳입니다. 세상에서 큰 상처 입고 눈물 흘리는 사람들, 외로운 사람들, 가족이 없는 사람들, 친구가 없는 사람들,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 교회입니다. 우리들은 그 아픈 사람들을 위로하고 치료하고 돌봐 주어야 하는 역할을 감당하도록 부르심을 입었습니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지금도 우리 주변에는 영적인 앉은뱅이들이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아픔과 고통을 외면하고 지나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바쁜 일상 속에서도 발걸음을 멈추고 사랑과 관심을 갖고 자신의 삶을 헌신할 또 한 사람의 베드로와 요한을 찾고 계십니다. 우리들이 주님이 찾으시는 그 사람들이 되십시다. 우리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위로하시고, 치료하시고, 구원하시도록 우리의 삶을 하나님께 내어 드립시다. 은과 금은 없어도 우리와 함께하고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는 사람들에게 소망을 나누어 줄 수 있습니다. 우리 안에 계신 성령 하나님은 지금도 역사하고 계십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사람들을 치료하고, 위로하고, 구원하는 귀한 삶을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