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619 미련한 자에게 막대기를 (잠언 26장 1-16절)

유치원 학생을 대학교 교수의 자리에 앉게 한다면 얼마나 안 어울릴까요? 마찬가지로 어리숙하고 미련한 자를 나라의 통치자로 세우는 것도 어울리지 아니합니다. 오늘 본문은 미련한 사람이 영광스럽고 명예로운 자리에 앉아 있는 것은 어울리지 아니한 것이 마치 무더운 한 여름에 새하얀 눈이 내리는 것과 같이 비합리적이고 부자연스럽다고 이야기합니다. 팔레스틴 지역에는 추수 때에 비가 오지 않습니다. 추수 때에 비가 오는 것은 매우 비정상적인 일로 간주했습니다. 우리로 따지면 추운 한 겨울인 크리스마스 비가 오는 것과 비슷합니다. 괴이한 현상이지요. 이처럼 미련한 사람이 영예를 얻는 것은 비합리적이고 부자연스럽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역사를 살펴보면 미련한 자들이 통치자의 자리에 올라간 예는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일단 성경을 보면 아합과 이세벨처럼 사악하고 미련한 자들이 왕의 자리에 올라갔습니다. 독일의 아돌프 히틀러나 이탈리아의 무솔리니 같은 여러 독재자들도 가장 높은 지도자의 자리에 올라갔습니다. 또한 지금도 나라의 녹을 먹고 사는 고위 관직들 중에도 뇌물을 받거나 비리를 저지르는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측근을 위해 법을 어기고, 인권과 정의를 무시하고 사람들의 권리를 빼앗는 일들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특별히 성경에서 말하는 미련한 자는 하나님을 모르는 자,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이와 같은 자들이 통치자와 권력의 자리에 오를 때 비합리적이고, 비인격적으로 사람들을 대함으로써 불합리한 일을 당할 때가 많습니다. 비록 이 땅에서 미련하고 악한 자들이 권세를 차지하고 영화를 누리는 것을 본다 할지라도 우리는 이 때문에 불평하거나 원망하며 신앙이 흔들려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은 때가 되면 반드시 이러한 자들을 심판하시고, 선한 자들의 영광과 명예를 회복시켜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2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잠 26:2) 까닭 없는 저주는 참새의 떠도는 것과 제비의 날아가는 것 같이 이르지 아니하느니라” 2절 말씀에서 ‘까닭 없는 저주’란 아무런 정당한 근거 없이 상대방을 향해 비난하거나 저주를 퍼부은 경우를 의미합니다. 참새와 제비의 특징은 정처 없이 이곳저곳 떠돌아 다닙니다. 분명한 목표나 지향점이 없이, 먹이를 찾아 날아다닐 뿐입니다. 마찬가지로 아무런 이유도 없이 이웃을 비난하거나 남을 헐뜯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2절에서 ‘이르지 아니하느니라’라고 한 것은 근거 없는 말로 저주하는 것이나 악한 말로 이웃을 험담하는 것이 우리에게 미치지 아니한다는 뜻입니다. 즉 우리가 진실하게 살아가고 공의를 행한다면 근거 없는 저주의 말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근거 없는 말로 예수님을 저주하고 공격했지만, 그들의 저주는 시행되지 않았고 아무런 힘도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공의를 행하셨고 잘못을 저지른 적이 없으시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성도들이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간다면, 원수들의 근거 없는 공격에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3절입니다. “(잠 26:3) 말에게는 채찍이요 나귀에게는 자갈이요 미련한 자의 등에는 막대기니라” 말과 나귀는 고집이 센 짐승들입니다. 이 둘을 다루기 위해서는 채찍이나 막대기와 같은 물리적인 힘을 사용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말로서 길들이기가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물리적 힘으로 육체적 고통을 수반함으로써 길들여집니다. 솔로몬은 미련한 자를 말과 나귀에 비유하면서 언어만으로는 교육하고 변화시키기가 힘들고, 엄중한 태도로 대해야 한다는 것을 이야기했습니다. 이는 동시에 우리에게 주는 하나의 경고이기도 합니다. 만일 우리가 계속해서 미련하게 말하고 행동한다면 하나님의 채찍과 막대기가 우리에게 주어질 것입니다. 미련한 사람은 하나님의 진노를 당하면서도 끝까지 그 미련한 함을 버리지 못합니다. 그러나 지혜로운 사람은 왜 자신의 삶에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고난 채찍과 사람 막대기가 주어진지 빨리 깨닫고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옵니다.
4-5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잠 26:4) 미련한 자의 어리석은 것을 따라 대답하지 말라 두렵건대 네가 그와 같을까 하노라 (잠 26:5) 미련한 자의 어리석은 것을 따라 그에게 대답하라 두렵건대 그가 스스로 지혜롭게 여길까 하노라” 4-5절은 그 내용이 서로 반대되고 모순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두 구절은 하나로 합쳐서 해석해야 합니다. 미련한 자를 대할 때는 상황에 맞게 적절하게 대처해야 합니다. 때로는 4절 말씀처럼 미련한 자의 행동에 미련하게 대해서는 안 되고, 때로는 5절 말씀처럼 미련한 자의 장단에 맞추어 줄 필요도 있습니다. 쉽게 예를 들면 아직 지혜와 지식이 부족한 아이들이 맨날 하루 3끼 아이스크림과 초콜릿만 먹고 살자 할 때, 미련하게 “그래 그렇게 하자”하고 대답하면 안 되죠. 이런 경우 미련한 자를 따라가면 우리도 미련한 길을 걷게 됩니다. 그러나 만일 아이가 “아빠, 인형 놀이하자” 하면, 우리도 얼마든지 어리숙한 아이의 수준에 맞추어 함께 놀아줄 수 있습니다. 어린 아이를 대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미련한 자는 상황에 맞게 적절히 대처해줘야 합니다.
4절 말씀처럼 미련한 자의 대답에 미련하게 대해서는 안 되는 예를 하나 들어봅시다. 악하고 어리석은 자가 욕설과 저주를 퍼붓는다고 해서 우리가 거기에 휘말려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악을 악으로 갚아서는 안됩니다. 만일 우리도 그렇게 하면 똑 같은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개가 나를 문다고 똑같이 물어서는 안 되죠. 누군가 나에게 흙탕물을 튀긴다고 해서 나도 응수해서 똑같이 흙탕물을 튀겨서도 안 됩니다. 그것은 악을 악으로 이기는 것이 아니라 지는 것입니다.
6절을 봅시다. “(잠 26:6) 미련한 자 편에 기별하는 것은 자기의 발을 베어 버림이라 해를 받느니라” 이전에는 전화나 이메일이 없던 고대 시대에는 먼 곳에 있는 사람들에게 소식을 전하기 위해서는 메신저를 세웠습니다. 메신저는 왕의 말을 잘 듣고 그 내용을 그대로 수신자에게 전달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만일 메신저가 미련한 사람이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내가 본래 전달하려던 내용이 왜곡되고 축소된다면 큰 손해를 봐야할 때도 있습니다. 특히 지금 전쟁을 앞두고 있는 상황이라면 메신저의 역할이 더욱 중요해집니다. 따라서 솔로몬은 이와 같이 중요한 메신저의 역할에 미련한 자를 세우는 것은 자기 발을 직접 베어버리는 것과 같이 커다란 피해를 입을 것이라고 경고했습니다. 특별하고 중요한 소식일수록 가장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을 선택하여 보내야 합니다. 하나님은 주의 복음을 전하는 일들에 우리들을 선택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복음이 왜곡되지 않도록 주님의 말씀을 잘 경청하고, 세상에 전달해야 하는 역할이 우리에게 주어졌습니다. 우리들이 바로 하나님의 복음 메신저입니다.
9절을 봅시다. “(잠 26:9) 미련한 자의 입의 잠언은 술 취한 자의 손에 든 가시나무 같으니라” 만일 미련한 자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잘못 들어가게 되면 치명적인 결과를 낳을 때도 있습니다. 예를 들면, 말씀을 잘못 적용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자에게는 잠을 주신다고 했어. 그러니까 나는 많이 자야지.” 게으른 자들이 성경을 잘못 이용하는 대표적인 예입니다. 술에 취한 자의 손에 가시나무를 쥐어져 보십시오. 그것으로 사람의 눈이라도 찌르면 큰일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자기 입맛에 맞게 골라 선택하여 잘못 적용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미련한 자가 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하며, 미련한 자들의 입에서 나오는 잘못 적용된 말씀을 배우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10절 말씀처럼 자격이 없는 자에게 말씀을 가르치도록 하는 것은 교회를 해롭게 합니다. 아직 구원도 받지 않은 사람에게 교회를 세우도록 봉사의 임무를 맡기는 것도 미련한 자를 고용하는 것과 같습니다.
12절을 봅시다. “(잠 26:12) 네가 스스로 지혜롭게 여기는 자를 보느냐 그보다 미련한 자에게 오히려 바랄 것이 있느니라” 자만은 사람을 자기도취에 빠지게 만듭니다. 자만한 사람은 멸망의 길을 걷고 있습니다. 따라서 스스로 지혜롭게 여기는 자에게는 우리가 배울 것, 얻을 것이 없습니다. 도리어 자신은 아는 것이 없다고 말하며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아가는 겸손한 사람에게서 배울 것이 더 많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