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528 성숙한 지혜 (잠언 14장 14-19절)


사람마다 좋아하는 음식이 다 다릅니다. 어떤 사람은 고기를 좋아하지만, 생선이나 야채를 더 좋아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커피를 즐겨 마시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커피를 싫어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처럼 사람들이 즐기고 좋아하는 것은 전부 다릅니다. 음식만 사람들마다 기호가 다른 것이 아니라, 삶에 만족을 주는 요소들도 그러합니다. 어떤 이들은 돈을 벌어 저축하고 매달 돈이 불어나는 것을 보는 것에서 큰 행복을 느낍니다. 반면에 어떤 사람들은 물질이 주는 기쁨 보다는 봉사활동을 통해 우리 사회에서 힘들고 가난한 이웃들을 돕는 일을 하며 큰 행복을 느낍니다. 사람마다 만족과 기쁨을 누리는 요소가 각기 다릅니다. 그렇다면 우리 마음은 어떤 경우에 만족을 느낍니까?
오늘 성경은 바로 이 부분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의인과 악인의 가장 커다란 차이점은 인생의 만족을 찾는 영역이 다르다는데 있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어떻게 다를까요? 본문 잠언 14장 14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잠 14:14) 마음이 패려한 자는 자기 행위로 보응이 만족하겠고 선한 사람도 자기의 행위로 그러하리라” ‘마음이 패려한 자’란 표현이 나옵니다. 여기서 ‘패려하다’란 말은 ‘변절하다’, ‘돌아서다’란 뜻입니다. 그러니까 ‘마음이 패려한 자’는 ‘하나님으로부터 돌아선 변절자’를 가리킵니다. 세상이 좋아서 하나님을 버린 사람입니다. 더 나아가서는 하나님만 버린 것이 아니라, 자신의 유익을 위해 인간 관계서 꼭 지켜야 할 신의도 저버린 사람입니다. 세상 죄악에서 만족을 구하려 하고, 세상이 주는 유익을 추구하기 때문에 하나님도 버리고, 이웃도 상처주는 사람입니다. 이들은 결국 자신들이 추구한 세상의 쾌락을 얻게 됩니다. 세상의 유익과 쾌락은 패려한 자들이 추구하는 것이며 그들이 받을 보응입니다. 그들은 그것으로 만족합니다.
하나님을 버리고, 다른 사람과의 신의를 저버림으로써 오는 물질적 이익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패려한 자가 얻는 만족함은 영원히 지속되지 않습니다. 세상이 주는 유익과 쾌락으로 인해 잠시 잠깐 동안은 그들의 마음에 만족함이 찾아올 수는 있지만, 마침내 그들의 삶은 자신이 저지른 죄악으로 인해 큰 불행에 빠지게 됩니다. 그리고 그토록 좋아했던 세상 일들을 미워하게 되고, 불행에 빠진 자신의 삶을 보며 비관하게 됩니다. 사람은 심은 대로 거둡니다. 악을 행하는 자는 악으로부터 고통과 저주를 거둡니다. 사람은 자기 행위에 따르는 보응을 반드시 거두게 된다. 세상의 유익과 쾌락을 위해 하나님을 버리고, 인간 관계에서의 신의를 버리면서까지 악한 일을 서슴지 않는 패려한 자들은 결국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됩니다.
따라서 패려한 자가 찾는 만족이란, 마치 아침에 잠깐 있다가 사라질 안개와 같이 허무합니다. 하나님 없이 세상에서 만족을 얻고자 하는 모든 시도는 굴뚝 위로 연기를 피우는 것과 같습니다. 그들의 모든 노력은 곧 아무런 대가도 없이 사라져 버릴 것입니다. 사람이 아무리 목이 말라도 바닷물은 마실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바닷물은 마시면 마실수록 갈증이 더 심해지기 때문입니다. 생명의 샘 되시는 하나님을 떠난 인간은 바닷물 같은 세상을 자꾸만 찾습니다. 그러나 세상에서 만족을 찾으면 찾을수록 그들의 삶에는 더 큰 갈증과 공허함만 남을 뿐입니다. 연기나 아침 안개를 잡으려 하는 것과 같이 그들이 원하는 참된 만족과 참된 평안은 아무리 잡으려 해도 점점 더 멀리 달아날 것입니다. 하나님을 떠난 패려한 자의 삶은 공허하고 무의미한 결말을 맞이하게 됩니다. 하나님을 버린 인생이 이 세상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은 불행과 불만족 밖에는 없습니다. 인간 간의 신의를 저버리고 온갖 악을 행하고, 하나님을 무시하고 방탕함 가운데 빠져 살아가는 자는 결국에는 하나님의 심판에 이르게 됩니다. 이것이 패려한 자가 궁극적으로 받을 보응입니다.
패려한 자가 세상의 유익과 쾌락에서 만족을 얻는 반면, 선한 사람은 그가 하는 선한 행위가 주는 보상에서 만족함을 얻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기쁨, 가난하고 연약한 이웃들을 돌보는 데서 오는 보람은 세상에 줄 수 없는 기쁨과 만족이 있습니다. 무엇보다 선을 행하는 자들에게는 하나님께서 함께하시기 때문에 인생의 참된 만족과 기쁨이 주어집니다. 앞서 언급했던 패려한 자는 시간이 지나갈수록 자신이 지난 날 추구해 왔던 모든 것들이 허무해지고, 아무것도 아님을 느끼며 비참한 결말을 맞이합니다. 악을 쌓은 것이 도리어 자신에게는 고통과 저주로 돌아오게 됩니다.
그러나 반대로 선한 행위에 대한 만족함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크게 느끼게 된다. 왜냐하면 선한 행위는 시간이 흐를수록 더 큰 열매를 맺기 때문이다. 죄는 지으면 곧바로 쾌락을 줍니다. 그러나 사실 선한 행위는 그 보상이 곧바로 주어지지 않을 때가 더 많습니다. 선을 행하다가 손해를 보거나, 마음이 다치는 경우들도 종종 있습니다. 그러나 점차 시간이 지날수록 선을 행한 자는 선행의 열매가 익어감에 따라 더 큰 기쁨과 만족을 얻게 됩니다. 패려한 자와 선인의 차이는 그들의 인생의 마지막 날 또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시는 심판의 날이 되면 더욱 분명하게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을 배신하고 돌아선 패려한 자는 그의 소망을 세상에 두고, 거짓과 속임수를 행하므로 하나님께서 심판하시는 영원한 벌을 받게 될 것입니다. 반대로,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선한 자는 그의 소망을 하나님께 두며, 정직하고 바른 길로 행하므로 하나님이 주시는 참되고 영원한 상급인 생명을 받게 될 것입니다.
자, 다시 한번 우리 스스로를 돌아봅시다. 우리는 무엇을 인생 최고의 기쁨으로 여기며 살아갑니까? 죄와 불법을 행할 때 기쁨을 누리며, 육신의 쾌락을 최고의 만족으로 여기며 살아가서는 안 됩니다. 그 길은 패려한 자와 같이 결국 파멸에 이르게 될 길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에서 기쁨을 누리고, 선한 일을 하는 데서 오는 보람을 받고, 자신에게 주어진 일에 대하여 성실하게 일하며 받는 대가에서 만족하며 살아가는 것이 우리가 추구해야 할 삶의 모습입니다. 하나님 안에서 기쁨을 발견하고, 이미 내게 주어진 것에서 만족을 발견하는 사람만이 주 안에서 참된 행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계속해서 선을 추구하고, 선을 행하는 것을 우리 기쁨과 만족의 도구로 삼아야 합니다. 삶의 위기와 어려움 속에서도 선한 행위를 통하여 참된 기쁨의 열매를 매는 삶을 살아가기를 바랍니다.

15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잠 14:15) 어리석은 자는 온갖 말을 믿으나 슬기로운 자는 그 행동을 삼가느니라” 15절 말씀을 보면, “어리석은 자”의 특징에 대해서, 무분별하게 온갖 말을 다 믿는다고 했습니다. 본문에 사용된 ‘어리석은 자’란 말 자체가 ‘단순한 자’, ‘남의 말에 쉽게 유혹되거나 동화되고 설득되는 자’를 가리킵니다. 어떠한 검증도 없이 남이 말하는 것을 무분별하게 수용하는 사람입니다. 요즘 Social Media 나 Youtube에서 나오는 가짜 뉴스들 때문에 많은 나라들이 골머리를 겪고 있습니다. 거짓 뉴스가 사실처럼 둔갑하여 많은 사람들이 피해를 입었고, 지금도 진행중입니다. 또 요즘 한국이 주식과 가상화폐로 난리 아닙니까? 기사를 보니 이삼십대 젊은이들이 수천만원 빚을 내서 가상화폐를 사고 주식을 사는 일명 ‘빚투’가 번지고 있습니다. 기사를 보니 ‘결혼자금을 주식 시장에 투자했다가 다 잃었다’, ‘신혼집 구매비용으로 부모님이 주신 돈으로 가상화폐 샀다가 엄청난 손해를 입어 막막하다’는 등 많은 이들이 무분별한 주식투자와 가상화폐 구입으로 피해를 보고 있습니다. 이삼십대 젊은이들이 빚을 내서 투자하는 것은 정상이 아닙니다. ‘주식이 좋다 나쁘다’, ‘가상화폐가 좋다 나쁘다’, ‘집값이 너무 올라서 이거 아니면 방법이 없다’는 차원을 다 떠나서, ‘주변 사람들이 다 하니까 나도 해야한다.’는 식의 의사결정은 매우 어리석은 것입니다. 15절에서 말하는 어리석은 자는 한 마디로 경솔한 사람입니다.
반면에 15절 후반절을 보면 “슬기로운 자는 그 행동을 삼가느니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사용된 ‘삼가느니라’는 말은 ‘식별하다’,’ 신중하다’란 뜻이 있습니다. 즉 슬기로운 자는 매사에 신중을 기울입니다. 사람들의 말을 들을 때에도 분별없이 모든 말을 곧이곧대로 믿지 않습니다. 듣는 일에도 분별력이 필요합니다. 슬기로운 자의 특징은 한 걸음 한 걸음 내딛을 때마다 신중하게 살핍니다. 자신이 왜 그 길을 걸어가야 하는지에 대한 필요성과 그 길을 걸어감으로써 지불해야 하는 기회 비용과 보상에 대한 이해와 자각이 분명합니다.
지혜자를 이와 같이 신중하게 만들어주는 가장 큰 요소는 바로 그의 선택 기준입니다. 우매자는 분별력 없이 기분과 느낌에 따라 일을 결정하지만, 지혜자는 매사에 신중하게 판단하고 움직입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지혜자는 선택을 할 때 하나님의 뜻과 주님의 말씀을 기준으로 삼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기분과 느낌대로 살아가는 자는 큰 고민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지혜자는 “이렇게 하는 것이 정말 하나님의 뜻인가?”하는 가장 중요한 질문을 물어봄으로써 매사에 신중함을 더합니다. 그와 같이 하나님을 삶에 초청하는 태도는 결국 지혜자의 삶을 풍성하게 만들어 줍니다. 잠언은 우리에게 지혜자가 되기 위해서는, 타인의 입에서 나오는 많은 정보 속에서 믿을 수 있는 말이 무엇인지 분별하고, 신중한 판단에 따라 행동할 것을 촉구하고 있다. 거짓 뉴스 뿐만 아니라, 여러가지 속임수가 난무하는 세상입니다. 우리가 올바르게 판단하고 분별하는 지혜를 얻는 방법은 하나님의 말씀을 중심에 두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와 같은 자가 신중한 자, 곧 슬기로운 자입니다.
16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잠 14:16) 지혜로운 자는 두려워하여 악을 떠나나 어리석은 자는 방자하여 스스로 믿느니라” 16절에는 지혜자와 어리석은 자의 마음상태가 어떻게 다른 지 보여주고 있습니다. 먼저 “지혜로운 자는 두려워하여 악을 떠난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지혜로운 자가 두려워하는 대상은 바로 하나님입니다. 이와 같은 의미를 더해 다시 본문을 해석하면, “지혜자는 하나님을 경외하기 때문에 악에서 떠난다”는 의미가 됩니다. 죄악을 범함으로 얻는 기쁨보다, 하나님 앞에서 받을 심판이 더 두렵기 때문에 방향을 돌이켜 악을 떠나게 됩니다. 이것이 지혜의 특징입니다. 보디발의 아내가 유혹할 때 요셉이 그 자리를 떠나며 이와 같이 말했습니다. “제가 어떻게 그렇게 악한 짓을 저질러 하나님께 죄를 짓겠습니까?” 요셉은 하나님을 두려워했기 때문에 악을 떠났습니다. 요셉은 오늘날로 말하면 중고등학교도 졸업하지 않은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는 어떻게 애굽을 다스리는 총리의 자리에까지 오를 수 있었을까요? 지혜의 근본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에 있기 때문입니다. 요셉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악에서 떠났습니다. 그리하여 그의 이름은 지금도 지혜로운 자의 대열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와 다르게 16절을 보면, 어리석은 자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어리석은 자는 방자하여 스스로 믿느니라” ‘방자하다’는 말은 앞서 15절에서 보았듯이 매사에 신중함이 없이 경솔하게 살아가는 마음 상태를 말합니다. 어리석은 자는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기 때문에 일을 선택할 때 자기 기분과 마음에 따라서 결정합니다. 그래서 방자히 행동합니다. 어리석은 자는 자기 스스로에 대해서 자신만만합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고 자신에 대한 신뢰가 가득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고, 자기 스스로에 대하여 과도하게 평가함으로써 무모하게 행동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죄악을 범하는 일에도 하나님을 무시하고, 양심에 걸림이 없다 보니, 방자하게 행동합니다. 이와 같은 우매자의 삶의 방식은 결국 멸망으로 귀결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먹음직스러운 선악과를 먹지 못하는 것과 같은 제한선이 분명 존재합니다. 미련한 자는 이것이 인간의 자유를 제한하는 것이라고 불만을 갖고 하나님의 뜻을 무시하고 방자한 태도로 죄악을 저지르지만, 지혜로운 자는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복을 주시고 보호하시기 위한 생명선이라고 여기며,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며 살아갑니다. 따라서 어리석은 삶에서 벗어나는 길은,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지금도 다스리고 계시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권위를 인정하고, 하나님을 경외하며, 주님의 뜻을 실천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17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잠 14:17) 노하기를 속히 하는 자는 어리석은 일을 행하고 악한 계교를 꾀하는 자는 미움을 받느니라” 우매자의 2가지 특징이 더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매자는 노하기를 속히 합니다. 사람이 화를 내는 것이 다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분노 중에는 의로운 분노도 있습니다. 우리 사회에서 벌어지는 불의를 보고도 분노하지 않는 것이 오히려 잘못된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이와 같은 의분이라 할지라도 성급하게 분노를 발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노하기를 속히 하는 자, 즉 다혈질 같이 급한 성격으로 불과 같이 화를 내는 자는 마음의 분노를 절제하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분노는 사람의 이성을 마비시키고, 감정을 극대화합니다. 분노에 빠진 사람은 사리분별을 제대로 할 수 없고, 분노라는 감정에 매여 행동하게 됩니다. 그 결과 마음의 분노를 억제하지 못한 사람은 어리석은 일을 행하고, 나중에 분명히 후회할 일들을 합니다. 따라서 쉽게 분노하는 사람이 일을 지혜롭게 처리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분노에 사로잡힌 사람들은 어리석은 일을 하기 때문입니다. 분노를 제어하지 못하는 사람은 자기 자신 뿐만 아니라, 가족과 친구들 뿐만 아니라 다른 이웃들도 치명적인 위기로 몰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끔찍한 살인 사건들을 한 번 살펴보십시오. 층간 소음, 아파트 주차 시비, 부부간의 말다툼 등 사소한 일들이 발단이 되어 엄청난 비극으로 확대됩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한 순간에 욱하는 분노를 참지 못해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자신의 감정을 다스리지 못하고 쉽게 분노의 노예가 되는 자는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잠언 16장 32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잠 16:32) 노하기를 더디하는 자는 용사보다 낫고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나으니라” 우리는 분노라는 감정의 노예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훨훨 타오르는 불을 잘 다스리는 자가 되어야 하듯이, 화라는 감정을 제어하고 자기 스스로 격한 감정도 추스림으로써 지혜롭게 일을 해결해 나가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17절 후반절을 봅시다. “악한 계교를 꾀하는 자는 미움을 받는다” ‘악한 계교를 꾀하는 자’는 이웃을 속이고, 이웃의 소유를 빼앗아 자신의 유익을 삼으려고 하는 교활한 자를 가리킵니다. 이런 자는 미움을 받는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미움의 주체가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만, 우리는 이러한 악한 계획을 꾀하는 자는 하나님과 사람들 모두에게 미움을 받는다는 것을 유추해 볼 수 있습니다. 교활한 사람은 그 어디서도 환영 받지 못합니다.
18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잠 14:18) 어리석은 자는 어리석음으로 기업을 삼아도 슬기로운 자는 지식으로 면류관을 삼느니라” “어리석은 자는 어리석음으로 기업을 삼는다”는 말은 ‘어리석음을 그의 재산으로 여긴다’는 말입니다. 보이스 피싱으로 남을 속이는 기술, 소매치기 기술 같은 것들로 돈을 벌며 자랑스러워 하는 사기꾼들과 범죄자들의 예를 생각해 볼 수 있겠습니다. 이런 범죄가 그들의 인생을 망치고 비참하게 한다는 것을 깨닫지 못합니다. 자신의 어리석음을 어리석음으로 볼 줄 모르는 것이 어리석은 자의 특징입니다. 어리석은 자들은 오히려 자신의 어리석음에 스스로 도취되어 그것을 만족하며 자랑합니다.
그러나 슬기로운 자는 어떻습니까? “슬기로운 자는 지식으로 면류관을 삼는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지식이란 책이나 학문적인 지식이 아닙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경외하는 데서 오는 지식을 가리킵니다. 슬기로운 자는 여호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에서 나오는 지식으로 말미암아 모든 자들에게 영예로운 대우를 받게 됩니다.
오늘 마지막 결론인 19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잠 14:19) 악인은 선인 앞에 엎드리고 불의자는 의인의 문에 엎드리느니라” 악인은 망하고 의인이 흥왕하는 것이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다스리시는 기본 섭리입니다. 악인은 일시적으로 득세할 수 있으며 번창할 수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아무리 막강해 보이는 악한 세력도 끝나는 날이 반드시 찾아옵니다. 마지막에 가서는 의인이 승리할 것이다. 하나님께서 궁극적으로 악인을 굴복시키고 의인이 승리를 거두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19절에서 “악인은 선인 앞에 엎드린다” 고 했습니다. 여기서 ‘엎드린다’는 말은 철저한 패배와 함께 의인에게 자비와 긍휼을 구해야 하는 비참한 처지에 이르게 될 것을 비유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19절 후반절을 보면, “불의자는 의인의 문에 엎드린다”고 했습니다. 불의자는 의인이 문에 출입할 때마다 그 앞에서 엎드려야 합니다. 이는 의인이 종들을 거느리는 큰 집의 주인이 되어 출입할 때마다 사람들의 문안을 받는 존귀한 인물이 되는 것을 암시합니다.이에 반해 악인은 몰락하여 종의 신분이 되어 의인의 종정을 구하거나 구걸하는 비참한 신세가 된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이 세상에서 불법, 탈법, 편법과 악행을 행하는 것이 쉬운 길처럼 보이고 당장은 확실히 앞서가는 길인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설령 세상에서 손해 당한다 해도, 그 해를 감수할지언정 불의에 동참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 성도들은 끝까지 죄와 어두움의 세력과 타협하지 않고 진리를 지키며 선한 길을 향해 나아가야 합니다. 심판자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악인이 선인 앞에 엎드리는 날이 올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코너스톤 교회 성도 여러분, 성숙한 지혜는 악을 꾀하지 않고, 악을 미워하며 멀리하는 것입니다. 세상은 불법과 거짓이 편한 길이라고 유혹하지만, 하나님께서 반드시 악인은 심판하시고, 의인에게는 상을 주신다는 진리를 기억하고, 세상의 유혹을 뿌리치고, 선을 행하는 것이 참된 지혜자입니다. 우리 모두 이와 같이 선을 행하는 지혜자들이 되어 하나님 아버지의 기쁨이 되고, 이웃들에게 덕을 베풀며, 우리 자신의 삶에는 참된 기쁨과 만족이 가득한 복된 삶이 되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