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430 애굽을 떠나라 (출애굽기 12장 37-42절)


지금으로부터 약 3천 5백년 전,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들의 지도자 모세와 함께 애굽을 빠져나오게 됩니다. 우리는 이 일을 ‘출애굽’ 사건이라고 부릅니다. 과연 이렇게 오래 전 발생한 이스라엘의 ‘출애굽’ 사건이 신약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에게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구약 시대 때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은 신약 시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받은 성도들의 모습을 상징적으로 잘 보여줍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를 따라 애굽을 빠져나왔듯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죄악에서 빠져나왔습니다. 이스라엘이 구름기둥과 불기둥을 따라 약속의 땅 가나안을 향해 걸어가듯이, 우리 성도들도 성령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약속하신 하나님나라를 향해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처럼 출애굽은 비록 3천 5백여년 전에 발생한 사건이지만, 시간의 간격을 뛰어넘어, 오늘날 구원받은 성도들이 광야 같은 이 세상에서 겪게 될 삶의 모습들을 상징적으로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1. 출애굽의 출발지는 어디이며, 애굽 생활을 한지 얼마 만입니까?
‘출애굽’이란 본래 ‘길 밖으로’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애굽 사람들이 정해 놓은 길의 모습 밖으로 나가는 사건이 바로 출애굽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 37절을 보면 출애굽 여정의 시작 지점이 ‘라암셋’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성경에 ‘라암셋’이라고 기록된 이 지명은 오늘날 우리가 ‘람세스’로 발음하는 이집트의 통치자 파라오의 이름입니다. 도시 이름이 애굽 왕의 이름이었던 것에서 알 수 있듯이, 도시 전체가 왕을 기념하는 건축물들이 세워졌습니다. 이 모든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은 것으로, 히브리인들은 라암셋에서 애굽 왕을 위한 국고성을 짓기 위해 강제 부역을 당했습니다. 이들은 애굽의 노예로서 엄청난 노동력을 제공하면서도 아무런 보수나 대가도 받지 못했습니다.
어떤 분들은 성경을 보면서 ‘왜 출애굽의 시작 지점이 라암셋이지?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머물던 곳은 고센 땅 아니었나?’ 하고 묻습니다. 라암셋이란 도시가 바로 이스라엘 백성의 거주지인 고센 땅 안에 있는 도시들 중 하나입니다. 경기도 안에 있는 수원시, 강원도 안에 원주시처럼 ‘고센 땅에 속한 도시 라암셋’ 이렇게 이해하시면 되겠습니다. 고센 땅이 처음부터 강제 노동의 아픔이 있는 장소는 아니었습니다. 요셉이 총리로 재임하던 당시 야곱과 그의 아들들이 거주할 수 있도록 애굽 왕 바로로부터 직접 하사 받은 땅입니다. 가나안에서 일어난 기근을 피해 애굽으로 이사 온 야곱 가족들에게는 고센 땅은 피난처였고, 하나님의 보호와 구원을 경험한 위로의 땅이었습니다. 그러나 총리 요셉이 죽고 시간이 흐른 뒤 히브리인들은 애굽의 노예로 전락해 버렸습니다. 그 결과 이후 고센 땅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 왕 바로의 국고성을 짓기 위해 엄청난 흙과 무거운 돌을 옮겨야 하는 고난의 땅으로 변해 버립니다.
비록 애굽 사람들에게 수모를 당해야 했고 갖은 고초를 겪어야 했습니다만, 사실 애굽 땅이 한 가지 좋은 점도 있었습니다. 애굽은 나일강으로 인해서 땅이 매우 비옥해서 먹을 것이 많았습니다. 나중에 출애굽 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생활을 할 때, 모세에게 불평 불만을 하며 애굽을 그리워했던 가장 큰 이유 중에 하나는 애굽 땅에 먹을 것이 풍부했기 때문입니다. 민수기 11장을 보면 고기도 마음껏 먹었고, 값없이 나일강에서 생선도 많이 잡아먹었고, 그들이 먹은 과일과 채소를 보면 멜론, 부추, 파, 마늘도 먹었습니다. 한 마디로 고센 땅은 강제 노동으로 엄청나게 힘들고 어려웠지만, 동시에 먹고 살기에는 풍요로운 애증이 교차하는 지역이었습니다. 오래 전 미국으로 온 초기 이민자들 가운데 많은 분들이 미국이 바로 고센 땅 같은 곳이었을 거에요. 이민자로서 영어도 안 되고, 돈 도 없고, 사회의 밑바닥에서부터 힘든 노동을 해야 했습니다.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일하는 것은 너무 힘이 들어요. 그런데 어떻게 보면 또 살기 좋은 나라가 또 미국이거든요. 자녀들 교육 환경도 좋고, 자연도 아름답고, 식료품도 비교적 값이 쌉니다. 지금도 미국에서 하루하루 힘겹게 살아가는 이민자 분들 중에는 잠들기 전에 ‘한국에 다시 돌아갈까? 말까?’ 고민하는 분들이 엄청나게 많습니다. 미국에서 살다 보면 항상 고향이 그립지만, 그렇다고 또 떠나기에는 아쉬운 애증의 나라인 거죠.
이스라엘 백성들은 무려 430년 동안 고센 땅에 거주했습니다. 이 당시 사람들은 평균 수명이 길었습니다. 모세는 120세에 죽었고, 그의 형 아론은 123세에 죽었습니다. 대부분 100세 이상 살았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지낸 430년은 약 4세대가 지나간 후의 이야기라고 생각해 볼 수도 있겠습니다. 한 가족이 미국으로 이민 온지 4세대가 지났다고 생각해 보세요. 우리 한인 2세들만 보더라도 겉으로는 한국 사람이지만, 속으로는 완전 미국 사람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4세대가 지났으니까 애굽 땅에 살고 있는 이스라엘 사람들은 삶의 모습이나 그들의 가치관과 정신이 얼마나 애굽화 되었겠습니까? 이민 4세 한인 자녀들에게 한국 가서 살아보라고 한 번 해보세요. 한국 생활 적응하기 무척 힘들어 할 것입니다. 직장에 가면 야근 문화, 술 문화, 조직 문화 등 익숙하지 않은 것들이 많이 있을 겁니다. 미국으로 다시 돌아가고 싶어할 것입니다. 그만큼 이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애굽에서의 생활이 한편으로는 좋은 점도 있고, 익숙하다 보니까 떠나기 힘든 나라가 되어 버렸습니다. 실제로 출애굽기 14장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 앞에 가로 막히고, 애굽 군대가 그들을 좇아오는 모습을 보고 두려움에 빠져 모세에게 불만을 표시할 때 이렇게 말했습니다. “(출 14:12) 우리가 애굽에서 당신에게 고한 말이 이것이 아니뇨 이르기를 우리를 버려 두라 우리가 애굽 사람을 섬길 것이라 하지 아니하더뇨 애굽 사람을 섬기는 것이 광야에서 죽는 것보다 낫겠노라” [(출 14:12) 이집트에 있을 때에, 우리가 이미 당신에게 말하지 않았습니까? 광야에 나가서 죽는 것보다 이집트 사람을 섬기는 것이 더 나으니, 우리가 이집트 사람을 섬기게 그대로 내버려 두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애굽에서 살아가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라암셋은 애증의 땅이었습니다. 떠나가고 싶으면서도 한편으로는 먹고 사는 것이 풍부하니까 참 살기 좋은 땅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을 나가고서도 한참 동안이나 애굽에서의 삶을 그리워했던 것입니다. 라암셋은 풍요로운 땅이었으나, 자유는 없는 곳입니다. 우리가 만일 이스라엘 백성이었다면 그 땅에서 나왔을까요? 아니면 그대로 머물렀을까요? 제가 출애굽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은 신약 시대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상징한다고 말씀드렸죠?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도 ‘고센 땅 라암셋’을 떠나야 하나 말아야 하는 선택이 주어졌습니다. ‘풍요로움을 약속하는 이 세상의 삶에 머물러 있을 것인가?’ 아니면 ‘고난이 주어지겠으나 참 자유와 구원을 주시는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갈 것인가?’하는 선택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머물고 있는 고센 땅 라암셋은 세상적으로는 풍부한 곳이지만, 참 자유와 생명은 없는 곳입니다. 혹시 지금 우리들이 있는 곳이 라암셋은 아닌지 점검하십시오. 경제적으로, 심리적으로 풍요롭지만, 참된 자유와 영적 생명은 전혀 없는 죄악의 환경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혹시 우리 삶 속에서 여전히 애증의 관계를 맺고 있는 죄악은 없습니까? 끊어내야 한다는 것은 알면서도 그 죄가 주는 짧지만 강렬한 쾌락과 큰 부요함 때문에 차마 끊어내지 못하고 있는 죄는 없습니까? 그것이 우리 삶의 라암셋입니다. 아무리 큰 쾌락과 부요함을 약속하는 삶이라 할지라도, 영적 생명을 앗아가고 참된 자유를 빼앗아가는 죄악의 삶이라면, 더 이상 머물지 말고 빨리 떠나야 합니다. 반드시 끊어내야 합니다.
그리고 내 자신이 짓고 있는 죄악이 나쁘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 죄악을 끊어냈으면 이제 다시 그 죄악을 그리워하지 마십시오. 이스라엘 백성들이 후에 애굽을 떠난 이후에도 이따금씩 ‘아 그때가 참 좋았지! 아, 라암셋으로 돌아가고 싶다!’하고 애굽에서 노예로 살아가던 시절을 그리워했던 것처럼, 죄악의 노예로 살아가던 때 죄가 주었던 과거를 회상하며 쾌락과 부요함을 그리워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죄악의 노예로 살아갈 사람들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미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라암셋을 떠났습니다. 이제는 가나안을 향해 나아가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2. 이스라엘 자손 외에 그들과 함께 애굽에서 나온 사람들은 누구입니까?
애굽에 들어온 야곱의 가족은 총 70명이었습니다. 430년이 지나고 애굽을 떠날 때가 되자, 그 숫자가 장정만 무려 60만명이나 되는 큰 민족을 이루게 됩니다. 여자와 어린아이들은 숫자에서 제외되었으니 출애굽을 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숫자는 최소 200만명이 넘었을 것으로 예상해 볼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애굽을 떠날 때 이스라엘 민족만 나온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 38절을 읽어보면 ‘중다한 잡족’이 그들과 함께 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누구일까요? 일단 혈통적으로 아브라함의 자손이나 이스라엘 사람이 아닌 이방인들을 지칭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출애굽 행렬에 이스라엘 사람들뿐만 아니라 이방인들도 함께 포함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럼 이 사람들은 이방인임에도 불구하고 왜 애굽에서 이스라엘과 함께 나왔습니까? 이들은 히브리인들이 믿고 섬기는 여호와께서 그의 종 모세를 통해 행하시는 열 가지 재앙을 다 보았습니다. 나일강이 붉은 피로 변화하고, 개구리, 메뚜기, 파리 떼가 애굽을 덮치는 것을 보았습니다. 우박과 흑암이 애굽 땅을 덮었지만, 이스라엘 백성이 머물고 있던 고센 땅에는 아무런 재앙도 미치지 못하는 장면도 다 보았습니다. 이 엄청난 역사의 현장을 두 눈으로 목격하며 이방인들은 애굽 땅에 안주하지 않고 이스라엘 민족이 섬기는 하나님을 따르겠다는 결심으로 이스라엘과 함께 애굽을 빠져나왔습니다. 따라서 출애굽 행렬은 순수 혈연 공동체가 아니라, 이스라엘의 여호와 하나님을 믿고 그 뜻에 순종하기로 결단한 다양한 사람들이 함께 어우러진 신앙 공동체였습니다.
그러나 애굽에서 역사하신 하나님의 일하심을 똑 같이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애굽 땅에 머물고 있는 사람들도 많이 있었습니다. 애굽에 거하는 모든 이방인들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따라 나온 것은 아니었습니다. 애굽은 당대 가장 부요한 나라였습니다. 가장 강력한 군사력을 자랑했고, 화려한 문명을 꽃피우고 먹을 것이 가장 풍부한 곳이 애굽이었습니다. 따라서 여호와 하나님의 위대한 역사하심을 두 눈으로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애굽의 부유함을 차마 버리지 못하고 끝까지 애굽에 남아 있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광야로 나온 이스라엘 백성들을 인도하던 모세는 젊은 시절 애굽의 가장 화려한 문명의 부유함의 정점에 서 있던 사람입니다. 그는 애굽의 왕자였습니다. 이 세상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부귀영화를 두 손에 가득 쥐고 평생토록 누릴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그러한 삶을 거부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어떻게 모세는 풍요로움과 쾌락과 화려함을 약속한 애굽의 생활을 버릴 수 있었을까요? 히브리서 11장은 모세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평가하고 있습니다. “(히 11:24)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하고 (히 11:25)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히 11:26)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 믿음으로 모세는, 어른이 되었을 때에, 바로 왕의 공주의 아들이라 불리기를 거절하였습니다. 오히려 그는 잠시 죄의 향락을 누리는 것보다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학대받는 길을 택하였습니다. 모세는 장차 오실 메시아 곧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모욕을 애굽의 재물보다 더 값진 것으로 여겼습니다. 모세는 장차 받을 상을 내다보고 있었습니다.
모세와 같이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최후에 주께서 주실 상을 바라보는 사람만이 세상의 모든 유혹을 뿌리칠 수 있습니다. 세상의 것들이 좋아 보이면 세상을 따라 가십시오. 그러나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들이 더 좋아 보인다면 하나님을 따라 가십시오. 출애굽의 행렬에 동참한 이들은 강압적으로 간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들은 여호와 하나님을 발견하고 자발적으로 이스라엘 민족을 따라 애굽을 떠났습니다. 이들은 안전하고 풍요로운 삶을 제공하는 애굽을 과감하게 버리고 이스라엘과 함께 광야로 나간 것입니다. 애굽에는 없지만 광야에는 있는 분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광야로 나온 출애굽 행렬에게 구름 기둥과 불 기둥으로 함께 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기 위하여 애굽을 떠나 광야로 향하는 이스라엘 민족의 행렬에 동참하는 이방인들과 부유한 삶을 살기 위해 애굽 땅에 안주하는 이방인들 이렇게 두류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우리들도 본래 복음과 아무런 상관없는 외인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죄악에서 벗어난 우리들은 영적 출애굽을 감행한 사람들입니다. 아직도 화려하고 부유한 애굽과도 같은 세상의 유혹 때문에 죄악에 머물러 살아가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혹시 우리들도 일상의 삶 속에서 애굽을 향해 되돌아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3. 출애굽의 밤을 어떻게 부르고 있습니까?
이스라엘의 모든 절기는 낮에 지킵니다. 그러나 유월절은 유일하게 밤에 절기를 지킵니다. 본문 42절 말씀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민족에게 유월절 저녁을 ‘여호와의 밤’이라고 부르게 하셨습니다. 여기서 ‘여호와의 밤’이란 말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주무시지 않으시고 깨어서 지키시는 밤’이란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유월절은 이스라엘이 항상 깨어 자신들을 지키시고 구원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을 기념하기 위하여 저녁 늦은 시간까지 잠을 자지 않고 철야하며 지키는 절기였습니다. 그러나 결국 이스라엘 백성들은 유월절이 끝나면 피곤함에 잠에 들어야 했습니다. 이 세상에 잠을 자지 않고 살 수 있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이처럼 인간이 잠을 자야 계속해서 살 수 있다는 사실은, 인간이 가진 연약함과 한계를 잘 보여줍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은 단 한 순간도 졸지도 않으시고, 주무시지도 않으십니다. 우리를 도우시는 하나님은 한 치의 실수도 없으시고, 한 번의 소홀함 없이 우리들을 돌보아 주십니다. 하나님은 항상 깨어 우리를 보호하십니다. 유월절 저녁 죽음의 사자가 애굽의 모든 장자들을 쳐 죽이던 그 날 밤, 하나님께서는 밤새도록 이스라엘을 보호하셨습니다. 그래서 유월절은 ‘여호와의 밤’입니다.
지금도 세상에는 죽음의 사자가 계속해서 사람들을 그들의 죄악 가운데 죽음으로 이끌고 있습니다. 애굽 왕 바로의 장자도 죽음을 피할 수 없었듯이, 이 세상 왕족과 고관들도 죽음을 피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지금도 하나님은 주님의 백성들을 죽음으로부터 보호하고 계십니다. 우리 삶 속에는 ‘여호와의 밤’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우리를 돌보시는 하나님은 졸지도 주무시도 않으시는 분이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스라엘 백성은 바로 이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강력한 바로와 그의 군대와의 싸움에서도 승리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애굽을 빠져나와 출애굽하여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성도들도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강하신 힘과 능력으로 원수 사탄과 죄악의 권세를 싸워 승리할 수 있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를 위해 일하고 계십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평생토록 지키시는 날들을 살아가는 복된 사람들입니다. 주님께서 지금도 우리를 보호하고 계시고, 우리를 구원해가고 계심을 신뢰하며 이 위대하신 여호와 하나님을 날마다 찬양하며 섬기며 살아갈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