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423 어둠에 빠진 태양의 제국 (출애굽기 10장 21-29절)

하나님께서는 애굽에서 노예로 살아가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부르짖음을 들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모세를 부르시고, 그를 애굽에 보내셨습니다. 바로 왕 앞에 선 모세는 하나님의 소유인 이스라엘 백성을 내보내라고 요구했습니다. 그러나 애굽 왕 바로는 완강하게 이 요구를 거절했습니다. 이로부터 애굽에는 계속해서 재앙이 내리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출애굽기 7장부터 11장까지 기록되어 있는 애굽의 열 가지 재앙입니다.
열 가지 재앙은 단순히 하나님께서 초자연적인 기적을 행하신 사건이 아니라, 애굽 사람들이 섬기던 우상들을 하나님께서 하나씩 무너뜨리시는 사건입니다. 애굽 사람들은 나일강을 신으로 섬겼습니다. 강의 신의 이름이 ‘하피’입니다. 애굽 사람들은 나일강의 신 ‘하피’가 모든 생명의 근원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나일강을 피로 물들이심으로 그들의 신이 아무런 힘도 쓰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나머지 재앙도 이와 같습니다. 개구리 신 ‘헤켓’, 이와 파리의 신 ‘케프리’, 황소 신 ‘아피스’, 독종의 신 ‘세크메트’, 비를 관장하는 하늘의 신 ‘누트’, 농사의 신 ‘세트’까지 하나님은 각각의 재앙을 통해서 애굽의 신들을 차례대로 무너뜨리셨습니다.
여덟 번째 메뚜기 재앙에도 불구하고 애굽 왕 바로가 그의 고집을 꺽지 않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내기를 거절하자, 이제 드디어 아홉 번째 재앙인 ‘흑암’ 재앙이 시작됩니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애굽 사람들은 다양한 신들의 존재를 믿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애굽 사람들이 섬기는 신 중 최고의 신이 있었습니다. 바로 태양신입니다. 그 신의 이름이 ‘아몬 레’입니다. ‘라’라고 발음하기도 합니다. 이른 아침 동쪽에서 밝아오는 태양은 얼마나 아름답고 웅장합니까? 그리고 태양은 만물을 소성케 하는 열과 에너지를 발산합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피조물 가운데 태양처럼 독보적인 아름다움을 가진 존재도 드뭅니다. 천지를 창조하신 여호와 하나님의 존재를 알지 못했던 애굽 사람들은 바로 이 태양을 애굽의 최고 신으로 섬기며 살았습니다. 그리고 애굽 왕 바로를 그 태양신의 아들로 받들며 섬겼습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아홉 번째 재앙을 통해서 ‘태양’을 가리신 것은 곧 애굽 사람들의 최고신인 ‘아몬 레’가 여호와 앞에서 아무것도 아닌 무력한 존재임을 나타내신 것입니다. 자신들이 가장 의지하고 섬기던 태양신이 눈 앞에서 3일 동안 사라졌으니 애굽 사람들은 여호와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본래 이집트 지역에서는 춘분을 전후로 약 50 여일간 계절풍이 불어옵니다. 이 계절풍은 일명 ‘캄신’이라 불리는 사막 바람을 일으키는데, 이것은 거대한 먼지 구름이 되곤 합니다. 그로 인해 애굽 전역은 이 사막 먼저 구름으로 뿌옇게 덮이고, 햇빛도 차단이 됩니다. 그래서 오늘 성경을 읽는 일부 사람들은 오늘 본문에 나오는 흑암 재앙을 보며, ‘이것은 계절풍으로 생긴 사막 폭풍인 ‘캄신’이 아닌가?’하고 의심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계절풍과 사막 폭풍은 매년 찾아오기에 이미 익숙한 애굽 사람들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일어난 흑암 재앙이 매년 반복해서 일반적인 자연 현상이었다면, 애굽 왕 바로가 3일 만에 모세에게 항복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또한 본문에 사용된 ‘캄캄한 흑암’이라는 히브리어는 계절풍이나 개기일식 과 같은 자연적 현상에 사용되는 단어가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 일어난 초자연적인 심판을 나타낼 때 사용하는 표현입니다. 애굽에 찾아온 흑암은 일반적인 자연현상으로 일어나는 어두움이 아니었습니다. 게다가 온 애굽 전역에 흑암이 있었으나, 본문 23절 말씀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거주하고 있던 고센 땅에는 흑암이 없었고, 광명이 있었습니다. 이 같은 사실들로 미루어 보아 오늘 본문에 기록된 ‘흑암’ 재앙은 분명 자연현상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일으키신 초자연적인 재앙임을 알 수 있습니다.
피의 재앙으로 시작된 하나님의 애굽의 거짓 신들에 대한 징벌이 이제는 최고의 신인 태양신까지 이르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흑암 재앙을 통해서 태양신 ‘아몬 레’의 무력함을 드러내셨습니다. 처음에 모세가 애굽 왕 바로 앞에 섰을 때 바로는 모세가 전해준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며 “도대체 여호와가 누구길래 내가 그의 말을 들어야 하느냐?”라고 말했습니다. 이에 대해서 하나님은 보란듯이 바로 왕에게 애굽의 모든 거짓 신들을 징벌하고 무장 해제하여 그들의 무력함을 드러내심으로써 바로를 포함한 애굽 모든 사람들에게 여호와가 바로 유일한 참 신이시며, 자연과 인간의 역사를 주관하시는 참 하나님이심을 나타내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모세가 하늘을 향하여 손을 들자, 애굽 전역에 칠흑 같은 어둠이 찾아왔습니다. 이 흑암은 단순히 해가 지고 나서 밤이 되었을 때 찾아오는 정도의 어두임이 아니었습니다. 양초를 키거나 불을 지핀다고 해서 사라지는 자연적인 어두움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니 애굽 사람들이 흑암 재앙이 일어났을 때 얼마나 큰 두려움과 공포를 느꼈겠습니까? 마치 앞이 보이지 않는 장님들처럼 함께 사는 가족들도 서로 알아보지 못해 더듬어 가며 사람과 사물을 구분할 정도의 흑암이 애굽 온 땅에 찾아왔습니다. 이로 인해 애굽은 일상 생활이 불가했습니다. 몸을 씻고, 음식을 만들고, 논밭에 나가 일을 하는 모든 것이 멈춰버렸습니다. 애굽 사람들은 흑임이 주는 두려움에 자기 집 밖에 나가지 못했습니다.
만일 우리가 하룻밤 사이에 장님이 되어, 눈 앞이 보이지 않는다면 사는 것이 얼마나 괴롭고 힘들겠습니까? 또 눈 앞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으니 얼마나 답답하고 두렵겠습니까? 3일 간 이어진 흑암 재앙은 앞서 임했던 어떤 자연 재앙보다도 애굽 사람들에게 더 치명적인 공포를 주었습니다. 두려움에 빠진 아이들의 울음소리, 절망에 빠진 어른들의 탄식소리가 애굽 길거리를 가득 채웠을 것입니다.
이와 같이 애굽 전역이 캄캄한 흑암으로 뒤덮인 상황 가운데서도 여전히 광명이 비추는 곳이 있었습니다. 바로 이스라엘 사람들이 거주하던 고센 땅이었습니다. 만일 이 지역이 애굽 땅 경계 가장자리에 있었다면, 흑암이 비켜갔나 보다 하고 생각할 수 있겠습니다만, 고센 땅은 애굽 지경 안쪽에 위치한 땅이었습니다. 따라서 이와 같이 고센 땅에 광명이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알 수가 있습니다.
예를 들면, 어느 한 도시에 토네이도가 지나갔습니다. 도시의 모든 건물들이 토네이도로 부서지고 쓰러졌는데 도시 가장 자리에 위치한 집 몇 채가 무사했다면, 사람들은 토네이도가 저기는 비켜갔나 보다 하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런데 만일 다른 집들은 다 폐허가 되어버렸는데, 도시 한 가운데 위치한 집 한 채가 토네이도가 지나간 흔적도, 피해도 없이 서 있다면 이것은 대서특필감 뉴스 아니겠습니까? 이는 분명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도 기적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애굽 전역에 흑암이 찾아왔을 때, 애굽 안쪽에 위치한 고센 땅에만 광명이 머뭄으로 이스라엘 사람들은 아무런 재앙의 피해를 입지 않고, 3일 동안 평안하게 일상생활을 유지하는 모습을 통해서 우리들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보호하시고, 특별하게 그들의 거주지를 구별하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은 모습들은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다스리시며, 세상 사람들과 주의 백성들을 구분하시고 다른 방식으로 대우하신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본문에 등장하는 애굽 사람들은 거신 신들과 우상을 섬기는 이들로써 이들은 하나님께서 내리시는 재앙으로 인해 결국 멸망하게 됩니다. 그러나 여호와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세밀한 은총과 보호하심을 입고, 주의 인도하심에 따라 구원받게 됩니다. 애굽 땅에 임한 흑암은 하나님을 무시하고 살아가는 이 세상 사람들이 받게 될 영원한 파멸을, 이스라엘 땅에 임한 광명은 하나님을 섬기며 살아가는 주의 백성들이 받게 될 영원한 구원의 소망을 각각 상징합니다.
흑암이 3일 동안 계속되자, 바로는 모세를 왕궁으로 불러 협상을 제안했습니다. 여태까지 애굽 왕 바로는 모세에게 총 3번 타협안을 제시했고, 이번이 4번째 타협안입니다. 제일 처음에 바로는 “너희가 이 땅에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라”고 말하며 첫 번째 타협안을 제시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고 예배할 자유를 주겠으나, 계속해서 자신의 노예로 살아가라는 타협안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는 마치 구원받은 그리스도의 백성이 세상의 가치관에 사로잡혀 죄악의 노예로 살아가라는 것과 같은 말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타협안을 받아들여서는 안 됩니다.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은 단호하게 세상 사람들의 삶의 방식에서 떠나야 합니다.
둘째로 애굽 왕 바로가 제시한 타협안은 “내가 너희를 보내리니 너희가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 광야에서 제사를 드릴 것이나 너무 멀리 가지는 말라”하는 것이었습니다. 오늘날로 바꾸어 말하면 ‘예수 믿기는 하는데 적당히 믿어라’ 입니다. “한 발은 교회에 두고, 다른 한 발은 세상에 두고 살아가라” 입니다. 제대로 신앙생활하지 못하도록 받는 사탄의 교묘한 속임수입니다. 그러나 신앙생활에서 ‘적당히’는 없습니다. 영적 전쟁에서는 하나님 편과 세상 편이 있을 뿐, 중간은 없습니다. 신앙생활은 ‘적당히’ 하는 것이 아니라 ‘제대로’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으려면 제대로 믿어야지, 적당하게 믿는 것은 사실 믿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가 나의 주인이시든지, 내가 내 삶의 주인이든지 한 가지 상태 밖에는 없습니다. 이것 역시 우리는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세 번째 바로의 타협안은 “너희 장정만 가서 여호와를 섬기라”였습니다. 여자와 아이들 그리고 가축은 다 애굽에 남겨두고, 이스라엘 성인 남자들만 가서 제사하라는 것입니다. 이는 오늘날로 말하면 “나만 예수 믿고 천국가면 된다”는 식의 개인주의적, 편의주의적 신앙입니다. 옆 사람이 죽어가든지, 지옥에 가든지 관여하지 않고 나만 열심히 신앙생활 하라는 것입니다. 사실 여자와 어린 아이들까지 다 데리고 먹을 것도 마실 것도 없는 광야에 나간다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쉬운 일은 아닙니다. 바로의 타협안이 달콤하게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신앙생활을 편의적으로 생각하며 ‘나 혼자 잘 믿으면 그만’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사탄의 속임수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모두가 구원받고, 우리 모두가 주의 자녀가 되어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기를 원하십니다.
자, 이제 오늘 본문 24절에서 애굽 왕 바로의 마지막 네 번째 타협안이 나옵니다. “너희는 가서 여호와를 섬기되 너희의 양과 소는 머물러 두고 너희 어린 것들은 너희와 함께 갈지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은 유목민들입니다. 양과 소를 애굽에 두고 가라는 것은 ‘갔다가 다시 돌아오라’하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께 제사 드리러 가도 다시 애굽으로 돌아올 여지를 남겨두라는 것입니다. 특별히 여기서 가축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재산이며, 하나님께 드릴 제물입니다. 이것을 두고 가라는 것은 마치 신앙생활 할 때 빈손으로 하나님께 나가라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되, 내가 가진 시간과 물질과 에너지는 세상 다른 곳들에 쓰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무늬만 신앙입니다. 다시 애굽으로 돌아갈 신앙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을 주님께 드리기를 원하십니다. 다시 애굽으로 상징되고 있는 이 세상으로 돌아갈 가능성과 길을 완전히 차단해버리고, 하나님이 우리의 주인으로 섬기며 주님께 우리의 모든 것을 드리며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이처럼 바로는 4가지 타협안을 모세에게 제시하며, 마지막에는 이제는 이스라엘 민족의 어린 자식들도 보내줄 테니 가축만큼은 두고가라고 함으로써 그럴싸한 타협안을 제시했습니다. 그러나 가축에 대한 억류는 결국 이스라엘로 하여금 애굽으로 돌아가게 만드는 얄팍한 속임수였습니다. 모세가 바로의 마지막 타협안을 단호히 거부한 것은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서는 희생 제물과 번제물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모세는 이스라엘의 남녀노소 뿐만 아니라 양과 염소 모두 하나님께 드릴 제사로 다 사용해야 하기 때문에 하나도 남기지 않고 가지고 가야한다고 말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을 향해서 모세와 같은 자세와 태도를 가져야합니다. 세상에 우리의 마음의 일부를 남겨두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것을 원하십니다. 우리에게 속한 모든 것이 주인 되시는 하나님의 것입니다. 세상과 타협하지 아니하고, 주님께 모든 것을 드릴 수 있는 삶을 살아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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