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409 위기와 성취 사이에서 (출애굽기 1장 1-22절)


하나님은 갈대아 우르에서 살고 있었던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브라함아! 네 고향, 네 친척, 네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주는 땅으로 가거라. 내가 너를 큰 민족으로 만들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크게 할 것이니 네가 복의 근원이 될 것이다.” 아브라함이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나이가 75세입니다. 그의 아내 나이는 65세입니다. 아이를 낳기에는 너무나도 많은 나이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습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을 따라 가나안 땅으로 먼 거리를 이사해 왔습니다.
그러나 20년이 넘도록 아브라함은 자식이 없었습니다. 그가 99세 백발의 할아버지가 되도록 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었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약속의 아들 이삭을 낳았습니다. 이삭은 야곱을 낳았고, 야곱은 열 두 아들을 얻게 됩니다. 그리고 그 열 두 아들은 또 다른 자손을 낳았습니다. 가나안 땅에 흉년이 찾아오자, 야곱은 그의 아들 요셉이 총리로 지내고 있는 애굽으로 내려갑니다. 이 때 야곱과 요셉을 포함하여 애굽에 머물게 된 아브라함의 자손이 70명입니다. 그리고 시간은 또 다시 흘러갔습니다. 그 동안 야곱의 자손들은 온 땅을 가득 채울 정도로 그 숫자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이 성취된 것입니다. 출애굽기 1장 7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출 1:7) 이스라엘 자손은 생육이 중다하고 번식하고 창성하고 심히 강대하여 온 땅에 가득하게 되었더라” 하나님께서 하신 약속은 반드시 지키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은 반드시 성취됩니다. 비록 우리가 볼 때는 그 속도가 더딘 것 같아 보일지는 몰라도,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완벽한 타이밍에 주님의 뜻은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99세가 되도록 자녀가 없었던 아브라함에게 100세 때에 이삭을 주셨고, 그로 인해 7절 말씀과 같이 온 땅에 이스라엘 자손은 가득할 정도로 하나의 민족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우리 삶을 향한 하나님의 뜻이 더딘 것 같고, 아무리 기도해도 응답이 없는 것 같아서 고통 중에 신음하고 계신 분들이 분명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믿음을 포기하지 마십시오. 우리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를 위해서 일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역사는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우리가 감당해야 할 것은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믿음으로 하나님을 붙들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의 숫자가 얼마나 많았는지, 당시 애굽의 왕 바로는 그들을 두려워할 지경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하루는 바로 왕이 애굽의 신민들을 불러 모아두고 말했습니다. “이 백성 곧 이스라엘 자손이 우리보다 수도 많고, 힘도 강하다. 이스라엘 백성이 너무 많아서, 그들은 우리보다도 강해졌다. 그러니 이제 우리는 그들에게 신중히 대처하여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그들의 수가 더욱 불어날 것이고, 또 전쟁이라도 일어나는 날에는, 그들이 우리의 원수들과 합세하여 우리를 치고, 이 땅에서 떠나갈 것이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언약대로 그 숫자가 날로 늘어나자, 애굽의 왕 바로는 흥왕하는 이스라엘 백성을 보고 겁을 먹게 됩니다. 그는 이스라엘의 원수가 되어 그들의 숫자를 억제하고 말살하려는 정책을 펼치게 됩니다. 애굽 왕 바로는 이스라엘을 멸살하려고 했고,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그의 백성이 온 땅에 충만할 것을 약속하셨기에, 애굽 왕 바로의 계획이 성공하게 되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이 실패하게 되는 셈입니다.
애굽 왕 바로는 히브리인들을 괴롭히고 학대하려는 목적으로 그들의 노역을 더욱 고되게 만들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강제노동을 시켰고, 흙을 이겨 벽돌을 만들게 하고, 온갖 밭일과 고된 일을 다 시켜 이스라엘 자손들을 매우 힘들게 만들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자손은 억압을 받을수록 그 숫자가 더욱 불어나고 번성하였습니다. 이에 애굽 사람들은 이스라엘 민족을 몹시 싫어하셨고, 그럴수록 그들을 더욱 혹독하게 대했습니다.
이대로는 안되겠다고 판단한 이집트 왕 바로는 두 명의 히브리 산파를 왕궁으로 불렀습니다. 이 두 산파의 이름은 ‘십브라’와 ‘부아’라는 여인들이었습니다. 지금에야 병원이 있고, 산부인과 담당 의사가 있어 임산부가 아이를 낳을 때 곁에서 도와주지만, 고대 사회에서는 이런 시스템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따라서 임산부는 아이를 낳을 때 그들의 곁에서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들이 필요했고, 바로 이러한 일을 전문적으로 감당했던 사람들이 바로 산파였습니다. 오늘날에야 산부인과 의사들도 사회적 존경을 받으며 대접을 받는 사회입니다만, 출애굽 시대는 그렇지 않습니다. 산파라는 직업은 낮고 천한 일로 여겨졌습니다.
두 산파를 부른 애굽 왕 바로는 두 여인에게 무시무시한 명령을 내렸습니다. “너희가 히브리 여자들의 해산을 도울 때 그 낳는 것을 잘 보고 있다가 아들이면 죽이고 딸이면 살려라.” 십브라와 부아, 두 산파가 바로 왕의 이 명령을 들었을 때 얼마나 가슴이 쿵쾅거렸겠습니까? 사람을 죽이라는 명령입니다. 그것도 갓 태어난 아이를 죽이라는 명령입니다. 이 시절은 절대왕정 시대입니다. 왕의 말이 곧 법입니다. 왕의 말 한 마디면 이유불문하고 사형에 처할 수 있습니다. 만일 두 산파가 왕의 명령을 무시하고 히브리 여인들이 갓 낳은 아들들을 죽이지 않는다면, 결국 두 산파가 애굽 왕 바로에 의해 죽게 될 것입니다.
두 산파는 선택의 기로에 놓여 있었습니다. 히브리인 아이들을 죽이고 내가 살 것인가, 아니면 동족의 아이들을 살리고 내가 죽을 것인가? 두 산파와 같이 이 세상을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은 이와 같이 선택의 기로에 놓이게 됩니다. 한 길은 옳은 길이고, 다른 하나의 길은 쉬운 길입니다. 대부분의 경우 우리들은 어느 길이 옳은 길인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옳은 길을 택할 때 지불해야 하는 대가가 크기에 사람들은 그 길을 잘 택하지 못합니다. 결국 쉬운 길을 택합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이 쉬운 길을 택합니다. 옳은 길을 택하는 사람들은 많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두 산파의 경우 바로 왕의 명령에 따라 아이들을 죽이고, 자신이 사는 것이 쉬운 길입니다. 이들의 경우 옳은 길을 가기 위해서 지불해야 하는 대가는 그들의 목숨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산파는 옳은 길을 택했습니다. 무엇이 이 두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의 목숨을 걸고 옳은 길을 택하도록 했을까요? 본문 17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출 1:17) 그러나 산파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애굽 왕의 명을 어기고 남자를 살린지라” 무엇이 이 두 여인으로 하여금 애굽 왕 바로의 명령을 거역하고 옳은 길을 택하도록 만들었습니까?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이었습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여호와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입니다. 여호와를 경외한다는 것은 어떤 뜻일까요?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을 두려워한다’,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표현은 히브리어로 ‘하나님을 무겁게 여기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무겁게 여긴다는 말은 자신의 삶에서 하나님을 최고의 가치로 여긴다는 뜻입니다. 어떤 일을 하든지 하나님을 중심으로 놓고 생각합니다. 돈을 인생의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사람은 돈을 위해서 살아갑니다. 건강을 인생의 최고의 가치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건강에 매달려 살아갑니다. 권력이나 명예가 세상에서 최고다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그것을 얻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 즉 하나님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사람은 하나님을 위해서 살아갑니다.
그렇다면 우리 자신이 여호와를 경외하는지 그렇지 않은 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인생의 갈림길에 서 있을 때 내가 무엇을 기준으로 길을 선택하는지 살펴보면 알 수 있습니다. 길을 택할 때, ‘어느 쪽 길이 나에게 금전적 이익을 줄까? 어느 길이 나에게 안위와 만족을 더해 줄 것인가?’하는 기준으로 길을 고르는 사람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길을 고를 때 ‘어느 쪽 길을 선택하면 하나님 아버지께서 기뻐하실까?’하는 고민을 하며 그 어떤 대가를 지불해야 할 지라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길을 선택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두 산파가 바로 그와 같이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애굽 왕 바로에게 죽는 한이 있더라도, 하나님께서 보실 때 옳은 길, 하나님께 인정받을 수 있는 길을 택하였습니다. 쉽지 않은 길입니다. 그러나 옳은 길을 택했습니다. 만약 우리가 두 산파였다면 과연 이와 같은 결정을 내릴 수 있었을까요? 자기 자신을 한 번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진정으로 두 산파와 같이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투명한 용액이 산성인지 알카리성인지 눈으로 봐서는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투명한 액체를 리트머스 종이 위에 떨어뜨려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용액이 산성이면 리트머스 종이는 붉은색으로 변화하고, 용액이 알카리성이면 푸른색으로 변화합니다. 겉으로 보면 다 똑 같은 투명 액체인데, 리트머스 종이 위에 뿌리는 순간 그 용액의 성질이 바로 드러납니다. 마찬가지로 그 사람이 인생의 중요한 선택을 내릴 때 어떤 가치관을 기준으로 두고 길을 선택하느냐를 보면 그 사람이 무엇을 두려워하는지 금방 나타납니다. “당신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을 말해주십시오. 그러면 나는 당신이 누구인지 말해주겠습니다.”라는 말처럼 우리가 가장 두려워하는 그것이 우리의 삶을 지배할 것입니다. 만일 두 산파가 애굽 왕을 두려워했다면, 그들은 지체없이 히브리 사내 아기들을 죽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두 사람은 하나님을 두려워했습니다. 그래서 아이들을 살려주었습니다. 우리가 두려워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세상을 두려워하면 세상의 노예가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우리 각 사람이 가진 그 다양한 두려움 속에서 자유케 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다스리시는 왕이 되신다는 진리가 우리를 세상으로부터 자유케 합니다.
두 산파가 왕의 명령을 어기고 이스라엘의 사내아이들을 살려주었다는 소식이 왕에게까지 전달되었습니다. 애굽 왕이 자신의 말을 무시한 두 산파에 대해서 얼마나 분노했을까요? 또 다시 바로 앞에 호출된 두 여인은 비록 하나님을 경외했으면서도, ‘어쩌면 이제는 바로의 손에 죽을지도 모르겠구나’하는 생각으로 두려움에 벌벌 떨고 있지 않았을까요? 왕이 두 산파를 꾸짖으며 질문했습니다. “어찌하여 일을 이렇게 하였느냐? 어찌하여 남자 아이들을 살려 두었느냐?” 산파들은 대답했습니다. “왕이시여, 히브리 여인들은 이집트 여인들과 같지 않습니다. 그들은 기운이 좋아서, 산파가 그들에게 이르기도 전에 아기를 낳아 버립니다.” 어쩌면 이 변명에 더 화가 난 바로 왕은 그 자리에서 두 여인을 사형에 처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두 여인을 지켜 주시고 보호해 주셨습니다. 사람이 죽고 사는 것은 애굽 왕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있기 때문입니다.
나일강에서 시작된 이집트 문명은 그 시대에 가장 화려한 전성기를 자랑하고 있었습니다. 그 이집트 문명의 최고 정점에 서 있는 애굽 왕은 이 당시 전 세계 최고의 권력자입니다. 그런 그가 이스라엘 백성을 멸살하기 위해 세운 계획이 힘 없고 연약한 두 산파에 의해 좌절되었습니다. 아기를 죽이라고 명령한 바로가 얼마나 잔인합니까? 지금도 사탄은 하나님의 백성을 끊어내려고 갖은 방법을 동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대에도 두 산파와 같이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목숨을 걸고, 믿음을 지키며 살아가는 사람들을 찾고 계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십브라와 부아 같이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자가 되기를 축복합니다.
성경책에 이름이 실려 있는 인물의 숫자는 성경 학자들마다 견해가 다릅니다만, 대략 1900명 정도 됩니다. 또 많은 사람들의 이름이 족보나, 배경 설명을 위해서 들어간 이름이라는 사실을 생각해 본다면 성경에서 어떤 인물의 이름이 기록되고 그 사람에 대한 이야기가 실린다는 것 자체가 큰 영광 아니겠습니까? 성경은 약 1600년에 걸쳐 기록되었습니다. 그 긴 세월 동안 하나님께서는 약 1900명의 이름만 기록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안에 두 산파 십브라와 부아의 이름이 포함되었습니다. 이 사실 하나만 봐도 우리는 하나님께서 이 두 여인을 어떻게 평가하고 계신 지 짐작해 볼 수 있지 않겠습니까? 세계 그 어느 나라의 역사 책도 산파라는 직업을 가진 사람의 이름을 기록해 둔 역사책은 보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산파라는 직업이 그렇게 각광받거나 사회적으로 존경받는 일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 두 산파의 이름을 성경책에 기록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이 두 사람은 하나님을 경외하며 하나님을 최고의 가치로 소중하게 여기며 살아갔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히브리 사내아이들을 죽이지 않고 살려준 산파들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이 두 산파가 하나님의 백성을 번성하게 하자, 하나님께서는 두 여인의 가정을 번성하는 축복을 주셨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은 주님을 위해 살아가고, 주의 백성들을 위해 살아가는 자들을 기억하십니다. 그리고 그들의 삶에 놀라운 복을 베풀어 주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용하는데 있어서 우리들이 어떤 직업을 가지고 있는지, 어느 정도의 교육 수준인지, 얼마나 많은 재산을 가지고 있는지 이러한 것은 결코 장애물이나 걸림돌이 되지 않습니다. 산파란 직업이 사회적으로 존경받고 인정받는 직업도 아니요, 학식이 높은 직업도 아니요, 부유한 직업도 아닙니다. 그러나 두 산파는 하나님을 두려워함으로써 하나님께서 이 두 여인의 가정을 번성케 하시는 풍성한 복을 받았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십브라와 부아의 삶을 통해 애굽 왕의 계략은 처참하게 무너졌고, 하나님의 백성들은 더욱 강해지고 번성해갔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위해 살아갈 때 사탄의 나라는 무너지고, 하나님의 나라가 더욱 세워질 것이며, 우리의 삶과 우리들의 가정은 하나님 주시는 풍성한 복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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